MEMORIZE RAW novel - Chapter 521
00520 떠난 101, 숨어있는 101. =========================================================================
아는 사이인가?
둘의 반응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선율은 짙은 눈동자로 차분히 진수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에 보이는 감정이 반가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냥 한때의 동료를 본 것처럼 담담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런 선율의 고저 없는 태도에 반해, 진수현의 태도는 확연히 엇갈린다.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히 굳어있었다. 오직 입만이 파르르 떨리는 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꾹 참고 있는 듯 보인다. 아니면 말이 나오지 않거나.
“왜 가만히 서 있니? 이리 와서 앉으렴.”
“…누나.”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이네? 근데 좀 서운하다 얘. 지금껏 같은 아카데미에 있었는데, 어떻게 한 번도 안….”
“큭!”
그때였다. 진수현은 갑작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머리를 푹 숙이며 앞쪽으로 빠르게 달려나가 버린다. 그리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의자를 톡톡 두드리던 선율은 곧 멀뚱한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차례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양 맛있게 밥을 먹기 시작한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겁니까? 혹시 아는 사이에요?”
“글쎄요~?”
선율은 숟갈을 입에 꼭 문 채, 오히려 고개를 갸웃갸웃 까닥이며 까불었다. 그리고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숟가락을 강하게 빨아들인다.
“왜요? 알고 싶어요?”
“예. 궁금합니다. 요즘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라서요.”
그러나 선율은 여전히 숟갈을 쪽쪽 빨며 깐족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되레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아항. 그렇구나. 그런데 어째요? 저는 얘기해줄 생각이 없는데. 그냥 아까처럼 저 무시하시고, 두 분 이야기나 나누세요. 쪽쪽쪽.”
“마법의 탑 로드.”
…이년이 밥 처먹기 전 소주를 한 숟갈씩 떠 처마시고 왔나.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래서 선율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싫다. 사용자 자체는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나도 모르게 주제가 삼천포로 빠져버렸음을 깨닫는다. 한 마디로 종잡을 수 없다고나 할까.
그런 기색을 느꼈는지,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던 고개가 비로소 멈춘다.
이윽고 선율은, 숟갈을 기울여 음식에 묻은 소스를 한 가득 퍼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는 척하다가, 돌연 진한 웃음을 흘리며 숟갈을 반대로 뒤집었다. 이내 주르륵 흘러내린 소스가 선율의 훤히 드러난 가슴골을 가로지르며 기다란 호선을 그린다.
“딸꾹.”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 김덕필. 선율은 그런 김덕필을 향해 농염한 미소를 흘리고는, 이내 살살 눈웃음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 실수로 소스가 묻어버렸네.”
“닦으시면 됩니다.”
“그렇기는 하죠. 그런데 젠틀맨이 두 분이나 있는데, 굳이 레이디가 손을 움직여야 할까요?”
“두 손 멀쩡히 가지고서 그런 말 하지 마시죠. 헛소리는 그만하고 얼른….”
진수현에 대한 정보나 뱉으라고 말하려는 찰나, 선율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 몰라 몰라. 마음대로 해요. 혹시 알아요? 건너편의 멋진 누군가가 상냥하게 닦아주면, 제 얼어붙은 마음이 사르르 녹을지도 모르잖아요.”
말인즉슨, 가슴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면 입을 열겠다는 소리였다.
나는 한동안 선율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빙글빙글한 저 면상을 후려갈기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천 조각에 손을 뻗은 찰나였다.
“아. 그건 반칙. 무조건 손만 인정하겠어요.”
나는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정말 이럴 겁니까?”
“네. 정말 이럴 거예요.”
그때였다.
혈압이 머리 끝까지 치솟으려는 찰나, 문득 옆에 앉아있는 김덕필이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한없이 갑갑해하는 얼굴. 그 와중에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지 수시로 입 모양을 바꾸는 중이다.
먹, 어.
…먹어? 뭘?
그 순간,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부디 후회하지 마시길.”
“푸.”
선율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곤 오히려 상체를 바싹 기울였다.
흘끗 시선을 떨어트리자, 훤히 드러난 아담한 어깨와 그 아래 자리잡은 움푹 들어간 쇄골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 더 아래를 보면…. 안 그래도 풍만한 젖가슴을, 원피스를 꽉 조임으로써 이제는 터질듯한 탄력감을 강조한 두 언덕이 잡힌다.
그렇게 가슴골이 서로 딱 붙은 탓에, 소스는 안으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고 고여 상당히 야릇한 기운을 흘리고 있다.
잠시 후.
나는 침착히 손을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최대한 빠르게 손을 놀려 탁자에 놓인 김덕필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한순간 나를 부럽게 쳐다보던 김덕필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반응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내 잡은 손목을 그대로 들어 올려, 지체 않고 선율의 가슴골 사이를 파고들었다.
내 손이 아닌, 김덕필의 손으로.
“아야?”
갑작스럽게 기습하자 아픔을 느꼈는지, 선율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동시에 옆에서는 괴상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으히히히힉?!”
나는 입꼬리를 한껏 비틀어 올리며 선율을 응시했다.
그러나 곧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엿이나 먹으라는 심정으로 김덕필의 손을 빌린 건데, 선율은 어떠한 반응도 않은 채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 제기랄. 이 방법은 미처 생각 못했네요.”
목소리도 태연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무덤덤해 보이는 손놀림으로 손을 잡아 빼내고는, 나를 보며 가느다란 한숨을 흘린다.
“오늘은 정말 작정하고 덤빈 건데…. 또 졌네. 저기 머셔너리 로드. 저번에도 한 번 여쭤본 것 같은데, 혹시 고자에요? 아니면 동성애자?”
나는 지그시 이마를 눌렀다.
“둘 다 아닙니다.”
“거짓말.”
“아니니까 헛소리는 이쯤 하시죠.”
“그게 아니라, 사내라면 눈 딱 감고 만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지금 이 사람처럼.”
선율은 어여쁜 검지를 들어 옆을 가리켰다. 뭔가 정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헤벌쭉 한 얼굴로 손을 부들부들 떠는 김덕필이 보인다. 그러다 나와 언뜻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넙죽 엎드리는 한 털보.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사용자 김덕필은, 금일 부로 머셔너리 로드의 연초 셔틀이 되겠나이다. 부디 허락해주소서.”
그건 참 좋다고 생각하며, 나는 설레설레 머리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그쪽 가슴은 별로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사실 그렇게 눈에 차는 가슴도 아니거든요. 주변에 마법의 탑 로드보다 몇 배는 훌륭한 여인들이 많은 터라.”
사실이었다. 고연주, 임한나 등등….
그러나 선율은 짐짓 화난 얼굴을 지어 보이며 팔짱을 꼈다.
“그 말은 그냥 듣고 넘어갈 수 없네요. 방금 발언은, 여인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하지만 사실인걸요.”
“…그게 누군데요?”
“알아서 어쩌시렵니까.”
“죽을 때까지 괴롭히겠어요.”
“아하. 그럼 그러시죠. 그림자 여왕에게는 제가 직접 전해드리겠습니다.”
“아 젠장. 항복이요.”
차마 고연주를 상대할 엄두는 나지 않는지, 선율은 기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치사해.”나 “제가 그림자 여왕님을 어떻게 상대해요?” 등등, 구시렁구시렁 중얼거리며 숟갈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먹어주었다.
나는 이마를 재차 꾹꾹 짓눌렀다. 가만히 잘 생각해보자, 결국에는 또 말려들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또 삼천포로 빠져있지 않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까 바로 따라 나갈걸 그랬다.
나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무슨 사이인가요.”
“예전의 동료요.”
“그게 전부입니까?”
“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
선율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냥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이는 것 같아서, 초반에 약간 도와준 것뿐이에요. 가능성이 보이면 마법의 탑으로 영입할 생각이었죠. 그러다 결국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헤어진 것뿐이고요.”
마법의 탑 로드가 일개 동료라.
절로 눈이 가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세라프는 진수현의 주변 상황을 모두 조작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인즉슨 주변 동료조차도 조작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
저 말이 사실이라면, 선율은 천사들의 명을 받아 진수현의 동료로 들어간 사용자들 중 한 명이라는 소리였다.
순간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덕필이 선율의 옆구리를 툭 건드린다.
“그런 것치고는 반응이 너무 이상하잖아. 헤어질 때 안 좋게 헤어진 거 아니야?”
“음…. 저는 나름 깔끔하게 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쟤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죠. 사실….”
그때, 선율이 일견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내리깔며 도로 음식을 퍼먹는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어요. 개인 사정상 자세히 말하기는 곤란해요.”
“에이. 괜찮으니까 사실대로 말해봐. 떡 정이라도 든 거 아니야? 그러다 헤어져서 저러는 거고.”
“설마요. 떡 질이라고 해봤자 쟤랑은 서너 번밖에 치지 않았는데. 고작 그거 가지고 정이 들겠어요?”
“…지, 진짜였어?”
잠시 후. 선율이 “농담이죠.”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진수현의 성향 중 무기력을 떠올렸다. 동시에 더는 선율에게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물론 아직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그러나 직감상, 뭔가 중요한 단서가 나온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게임에서 중요한 선택지가 나온듯한 기분이랄까. 아직 보일 듯 말듯 하지만….
하여간, 더는 볼일이 없으니 우선은 나가야 한다.
“따라 가시게요?”
“예.”
“걔한테는 신경 끄시는 게 좋을 텐데. 이건,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예요.”
“그거야 제 마음입니다.”
그건 그렇다는 듯이 선율은 음식을 가득 퍼 넣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우물우물 씹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황이 재미있네요. 죽은 수현이, 산 수현을 쫓다니.”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해 얼굴을 찡그리자, 선율은 흘끗 시선을 내렸다. 그런 선율의 눈동자는 정확히 내 성기가 있는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
진수현은 생각보다 금방 찾을 수 있다. 걸어나간 흔적을 찾아 쫓아보자 입구밖에 비치된 탁자에 앉은 채 홀로 밥을 먹고 있는 진수현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진수현은 굉장히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밥 한 술 떴다가 한숨을 흘리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와. 존나 궁상이다. 진짜.”
김덕필이 어이가 없다는듯한 말투로 말했다. 사실 그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바였지만, 이번에 노리는 게 있는 터라 나는 김덕필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기는 하네요. 그런데 왜 따라 나온 겁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서. 혹시 방해냐?”
“예. 방해니까 식당에서 마법의 탑 로드와 꿍 짝이나 맞추시죠.”
“그러려고 했는데, 나한테는 볼일이 없나 봐. 네가 가니까 바로 일어나서 가버리던데?”
뭔가 슬픈 이야기인 것 같은데 꽤나 담담하게 말하는군.
“아무튼 저도 볼일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방해는 그만하고 좀 가세요.”
“암. 누구 명이라고. 그럼 나는 아까의 감촉을 음미하고 있을 테니까, 얘기 끝나면 불러달라고. 으흐흐.”
김덕필은 활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까 엄한 짓을(?) 한 손을 들어 보이고는, 혀로 게걸스레 핥으며 깡총깡총 뛰어간다. …솔직히 엄청 꼴불견으로 보였다.
아무튼.
진수현은 여전히 지지리도 궁상을 떠는 중이었다. 척 봐도 나 힘들어요 하는 모습.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런 모습을 보며 연민이라는 감정이 일었다. 진수현이 왜 저런 모습을 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관리를 허투루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물샐틈없이 관리했을 것이고, 그런 만큼 동료나 사건을 비롯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철저하게 조작하고 일으켰을 것이다. 흡사 하나의 게임에서 일어나는 이벤트처럼.
그런 천사들의 목적은 단 하나. 바로 말 잘 듣는 제 2의 김수현을 만드는 것.
그래서 지금 저런 세상 물정 모르는 진수현이 탄생한 것이다. 비록 사용자 정보는 준수한 수준일지 몰라도, 그 외의 면은 아직 어린 아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영입에 앞서 내가 파고들어야 할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러자 천천히 얼굴을 돌린 진수현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아…. 형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진수현 영입 절차….
xxx(스포일러) 등장….
한소영과 꽁냥꽁냥….
안현과 차희영….
그리고 마무리….
사용자 아카데미 파트도 이제 거의 팔부능선에 접어들었네요.
실은 사용자 아카데미 파트가 끝나갈수록 묘한 기분이 듭니다. 그냥 그래요. 뭔가 서서히 잡혀가는 기분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