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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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부러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선을 반쯤 돌린 순간, 조금이지만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나를 붙잡은 제갈 해솔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끈덕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되,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린 상태였다.
“이런.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 왜요?”
“이렇게 대단한 미인이 손을 잡아주는데, 놀라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을까요. 아무튼 손은 이만 좀 놓아주시죠.”
“호호. 기분 좋아라. 하기야 제가 좀 예쁘기는 해요. …그런데 지금 이 미인의 손길을 거부하시는 건가요?”
나는 거칠지 않게, 살그머니 손목을 비틀었다. 그리고 “주변에 워낙 미인이 많은 터라.”라 말하며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제갈 해솔 역시 차분히 손을 떨어트렸다. 문득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윽고 손을 잔뜩 그러모은 제갈 해솔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할게요. 혹시 이 세상에 모습이 변하는 마법이라도 있나요?”
“있습니다. 다만 일반 마법에서는 배울 수 없는, 매우 고 등급의 마법입니다.”
“아하. 그럼 그 마법을 알고 계시나요?”
“후후. 글쎄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지체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가자 안솔이 조심스럽게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제갈 해솔은 이번에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이내 저 여인은 누구냐,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칭얼거리는 안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제갈 해솔이 던진 질문에 대한 생각이었다.
언뜻 들으면 뜬금없는 질문이라 생각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그 제갈 해솔이 괜히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 아마 지금쯤 고개가 갸웃 기울어지겠지.
“오라버니. 저 사람 정말 누구에요. 네? 자꾸 머리만 쓰다듬지 말고 말 좀 해주세요.”
안솔은 여전히 칭얼칭얼 조르는 중이었다. 쓰다듬지 말라 해 머리칼을 꽉 잡으며 이리저리 흔들다가, 안솔이 앙앙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솔도 방금 봤겠지?
나는 머리를 도리도리 돌리는 안솔의 고개를 바로 한 후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안솔. 방금 저 교육생은 확실히 봤지?”
“흑. 봐, 봤으니까 물어본 거잖아요! 어엉…. 아파아….”
“그럼 어때? 저 교육생은 어떤 것 같니?”
“아야…. 응? 아까 그 언니요?”
안솔은 바로 울음을 그치더니 바로 고개를 돌렸다. 한두 번 하는 일도 아니라 금방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러나 “어. 어디 갔지?”라는 말이 들려와 시선을 돌리자, 그 말대로 휑한 복도가 눈에 보인다. 제갈 해솔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새 모습을 감춘 건가?
잠시 강의실 앞을 바라보다가, 우리는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으응. 아까 보기는 했지만 참 이상한 언니에요.”
이내 안솔이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정수리에 또다시 물음표가 떠오른다. 마침 좋은 기회라 생각해 물음표를 잡으려 손을 내저었으나, 누가 보면 병신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바로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안솔이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분명 뭔가 이상한 느낌은 드는데…. 드는데….”
“…드는데?”
“드는데에에에…. 아우. 모르겠어요. 뭔가 머릿속에서 느낌은 있는데, 말로 하려니까 이상하게 힘들어요.”
“흠.”
그 기분 알지. 아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형용키 어려운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딱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나는 어깨를 들먹인 후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또 때릴 거라고 생각했는지 안솔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감히 어딜 도망가냐고 생각하며 나는 힘차게 안솔을 쫓았다.
아니. 쫓으려는 순간이었다.
“어?”
갑작스럽게 놀란 듯 안솔이 미약한 소리를 지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멍해 보이는 얼굴로 앞쪽을 응시했다. 안솔의 시선은 복도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오, 오라버니.”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안솔이 곧 돌아보며 어딘가를 가리킨다.
“이, 이거요. 이거에요.”
“…이거?”
“그, 그래요. 이 느낌이었어요.”
“이 느낌? 아.”
그 순간 아까 말하기 어렵다던 느낌을 말하는 것 같아, 나는 바로 안솔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복도의 끝에서, 다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지는 두 개의 복도를.
그것은 갈림길이었다.
*
9주차의 교육 일정이 끝나고 개인 정비 시간인 주말이 다가왔다.
이제 이번 주말만 끝나면 10주차로 돌입하게 되며, 교관들 또한 본격적으로 홍보에 들어가게 된다.
금번 사용자 아카데미의 모토가 ‘교육 주차에는 확실한 교육을, 홍보 주차에는 확실한 홍보를.’ 인만큼, 과연 어떤 식으로 홍보를 허용해줄지 자못 궁금한 마음이 일었다.
…아마 지금 9주차 주말에 벌어지고 있는 이벤트도, 이번에 색다른 홍보를 예고하는 하나의 일환이라 생각되지 않을까 싶다.
“───. ───. ───. Shock Wave, Skid. Combination.”
문득 들려오는 주문 영창 하는 소리.
쿵!
“으허허허허허허헉?!”
이어서 바닥이 크게 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흡사 호들갑이 담긴 비명이 데굴데굴 구른다. 비명이 구른다는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으면 나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눈앞에는 마치 바퀴라도 된 것처럼, 데구루루 구르는 진수현이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구르고 구르던 진수현은 결국 경기장을 넘어서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구르는걸 멈추었다.
잠시 후, 음성 증폭 마법을 사용한 목소리가 대 강당을 쩌렁쩌렁 울린다.
– 이스탄텔 로우. 클랜 로드 한소영 승!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와아아아!
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주변을 가득히 메우는 박수와 환호 소리.
승자인 한소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패자인 진수현은 분연히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으나, 얼굴이 붉어진걸 보니 패배한 게 꽤나 분한 모양이다.
지금 둘이 저러고 있는 이유는, 오늘이 바로 교관들끼리 서로 전투를 벌이는 이벤트 매치전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처음 갑작스럽게 이 계획이 발표됐을 때는 예상대로 커다란 반향이 일었다. 예상대로 상대적으로 사용자 정보가 떨어지는 교관들이 커다란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 지원자만 받는다는 점과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 말은, 그런 불만들은 간단히 묵살시켰다. 나야 이미 신재룡에게 들은 게 있는 터라 큰 감흥은 없었고.
결국 중앙 관리 기구에서는 이벤트 매치가 14주차까지 쭉 이어질 것이라 공표했고, 주말이 오기 3일 전부터 참가자를 받기 시작했다.
나 또한 참가할까 생각은 해봤지만 우선 9주차는 넘기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한 번 지켜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9주차 참가 신청이 끝나고 나서, 오늘 벌어지는 이벤트 매치의 개막전은, 바로 한소영과 진수현으로 잡혔다.
사실 한소영이 참가할거라 생각은 못해 조금 놀랐는데, 상대가 진수현이라는 점에서 약간 걱정이 일었다. 진수현이 마법사를 상대로 특화된 사용자라면, 한소영은 대인 전이 아닌 대군 전에 특화된 사용자였기 때문이다.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이벤트 매치가 시작되자마자 진수현은 매섭게 몰아붙였고, 한소영은 간신히 막아내며 연신 밀리는 상황을 그려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한소영에게 승리가 돌아갔다.
진수현의 패인은 두 가지.
한소영의 노련미가 빛을 발했고, 진수현이 초반의 우세를 너무 과신하고 말았다. 초반의 우세함을 바탕으로 돌려 깎는 식으로 차분히 접근했다면 이겼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한 방에 끝내려 무리하게 들어가다가 제대로 카운터를 얻어맞은 것이다.
그런 진수현을 보면 확실히 전투 능력은 엄청나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진수현 교관. 부적절한 언어의 사용으로 퇴장 명령을 내립니다.
아직도 중앙에서 고함을 치는 진수현에게 여러 명의 사용자가 달려들었다. 한소영에게 다시 한 번 싸우자고 조르고 난리를 치다가 결국에는 퇴장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윽고 자기가 알아서 나가겠다며 크게 난동을 피운 진수현은 씩씩 콧김을 내뿜으며 쿵쿵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 또한 안현과 함께 입구에서 나란히 구경하고 있던 터라 당연히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나를 바라본 진수현은 순간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혀, 형?!”
“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아, 아니. 이게 아니지. 처음부터 보고 계셨던 거예요?”
“당연하지.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려고?”
그러자 눈이 화등잔만해진 진수현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후다닥 달려오더니 나를 득달같이 붙잡는다.
“으, 응? 왜, 왜 이래?”
“혀, 형! 그, 그게 아니라요! 아 이건 진짜 이길 수 있었는데, 저 여자가 엄청 치사하게 나왔다고요! 보셨죠? 제가 처음에 엄청 우세했잖아요! 그런데…!”
“그래 그래. 나름 아까웠어. 그래도 결과에는 승복을 해야지.”
“아 분해서 그렇죠, 분해서! 진짜 치사 빤스 개 빤스…!”
진수현은 한소영을 삿대질한 채 침까지 튀겨가며 떠벌렸다. 그러자 갑자기 저 삿대질하는 손을 콱 부러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 진수현 교관. 10초 내로 퇴장하지 않을 시 강제 집행에 들어가겠습니다.
신재룡의 음성이 다시금 대 강당을 울렸다. 정말 어지간히도 분했는지 한바탕 대거리를 하려던 진수현은, 머리를 번쩍 들며 벌컥 화를 냈다.
“아 나가면 되잖아요! 나가면! 앙?! 진짜 치사하고 더럽네!”
과연 누가 더 치사하고 더러운 걸까.
이어서 “아무튼 형! 이번 경기는 제가 이긴 거예요!”라는 희대의 개소리를 지껄인 진수현은, 곧바로 문을 박차며 나가버렸다.
그렇게 잠깐 조용해진 사이, 가만히 구경만하고 있던 안현이 혀를 쯧쯧 차며 머리를 돌린다.
“와. 진짜 어리네. 쯧쯧.”
…뭐?
“형님. 쟤가 바로 진수현이에요? 그…. 형님이 영입하려는?”
“…어.”
“아이고 형님. 제가 정말 진심으로 조언 드리는데, 이번만큼은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나름 실력은 괜찮아 보이지만 정신이 완전히 어리잖아요.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저게 뭐예요.”
“…….”
순간 어이가 없는 기분이 들어 나는 코웃음과 함께 안현을 응시했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뭐라는 거야?
“그래. 꼭 누구를 보는 것 같지?”
“…왜 그렇게 게슴츠레 저를 보십니까. 어험.”
안현은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흥얼흥얼 딴청을 피우기 시작. 그래. 찔리는 게 있겠지.
“그나저나 형님.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정말 대단하네요. 볼 때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봐봐요. 저것 좀 보세요.”
안현이 과도하게 호들갑을 떨며 중앙을 가리킨다. 화제를 돌리려는 게 다분히 보였지만, 그래도 한소영이 더 중요했기에 나는 기꺼이 시선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는 한소영을 볼…. 응? 방금 여기를 보고 있었던 건가? 아닌가?
아무튼.
진수현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가만히 교육생들이 환호를 받는 한소영은 정말로 아름답다. 볼 때마다 색다른 매력이 넘치는 게,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이 세상 사용자…. 아니. 사람 같지가 않다.
그렇게 가만히 한소영을 바라보고 있자 문득 내 옆구리를 쿡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흘끗 시선을 돌리니 안현이 장난 가득한 얼굴로 낄낄거리는 게 보였다.
“형. 뚫어져라 쳐다보시네요. 그러고 보니 내일 주말에 이스탄텔 로우 로드와 만나신다 매요? 좋으시겠어요.”
“좋기는. 이제 곧 홍보 주차에 들어가니까 여러 가지 상의할게 있어서 만나는 거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한순간 가슴이 뜨끔하기는 했지만, 나는 재빠르게 둘러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놈은 이 소리를 또 어디서 들은 거지.
“에~이. 좋으시면서.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좋으시죠? 에헤헤.”
“거참. 아니라니까 그러네. 왜. 너도 관심 있냐?”
그러자 삽시간에 정색한 안현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는 저런 여자 싫어요. 매력이 넘치는 건 인정하는데, 제 스타일은 아닙니다.”
이건 좀 의외인데.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괜찮은데, 감히 한소영 님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해?
화를 내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자, 돌연 안현이 한소영이 있는 쪽을 바라본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따라가자 또다시 홱 고개를 돌리는 한소영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저 님은 왜 자꾸 고개를 돌리는 거야. 신경 쓰이게.
안현이 말을 이었다.
“딱 보면 견적 나오죠. 저런 여자는요 매력 빼고는 볼게 없어요. 사실 연애하면 표현이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무표정하고 차가운 철벽으로 무장한 여자는, 솔직히 말해서 아니올시다 거든요. 엄청 피곤합니다. 겪어봐서 알아요.”
“그럼 네 이상형은 표현을 잘하는 여인인가 보군.”
안현은 그렇다는 듯 끄덕끄덕 하다가, 문득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빠르게 머리를 젓는다.
“아, 아니요. 그래도 너무 심한 표현은 부담되더라고요…. 뭐든 적당한 게 좋지요. 적당한 게.”
적당히 라.
“으음. 뭔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한데.”
순간 절로 남다은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정확히는 나와 관계를 가질 때의 남다은이.
‘아아! 좋아요! 수현 님! 수현 님의 XX가 제 XX에 들어오고 있어요!’
‘나, 남다은. 부탁하는데 제발 관계 중에 그런 표현은….’
‘아아아아! 시, 싫어! 싫어어어어어! 이렇게 좋은걸 어떻게 참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 더…!’
‘아. 제, 제발 그만 좀….’
…그 순간 적당한 표현이라는 말이 심히 공감돼 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침대에서의 남다은은…. 아. 정말 생각하기도 창피하다. 한 번 하고 나면 다음 날 아침 서로 얼굴을 보기도 민망할 정도랄까.
“후.”
“에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안현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꿀꿀한 분위기를 전환하려는지, 안현이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렇죠? 뭐, 사실 이건 말하기 좀 애매한 부분이니까 넘어갈게요. 개인 취향의 차이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말해보면, 저는 포니테일이 어울리는 여자가 좋더라고요. 형은 포니테일 어때요?”
“포니테일? 말총 머리?”
“예. 그런 여자 있잖아요. 이마 시원~하게 드러내고, 편한 옷에, 긴 머리를 예쁘게 묶어서 늘어뜨린 여자요. 제가 예전에 도서관에서 그렇게 공부하는 여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가슴이 떨릴 수가 없더라고요.”
“호.”
평소라면 이런 시답잖은 얘기는 금방 끊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안현의 이야기가 맛깔 나게 들려온다. 한소영을 봐서 그런가?
나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한소영과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상상을.
안현의 말마따나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에, 편한 옷에, 긴 머리를 말끔하게 묶은 한소영. 그런 한소영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절로 머리가 끄덕여진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거 괜찮네. 아니. 아주 좋을지도. 포니테일.”
“헤헤. 그렇죠? 역시 형이랑은 뭔가 통하는 게 있다니까요.”
그러자 안현 또한 헤프게 웃으며 나를 따라 머리를 끄덕였다.
*
9주차 주말 첫날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벤트 매치가 끝난 후.
“수고하셨어요. 클랜 로드.”
한소영이 숙소로 돌아오자 같은 숙소를 사용하는 여인이 공손하게 맞이해주었다.
한소영은 예의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자리에 얌전히 몸을 앉혔다. 그리고 앞에 수정 거울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피기까지. 그런 한소영을 보던 여인은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클랜 로드. 오늘 이벤트 매치 승리하신 거 축하 드려요.”
“응. 고마워.”
“헤헤. 저도 봤는데 정말 아슬아슬하더라고요. 그런데 클랜 로드는 어떠셨어요? 그 진수현이라는 교관, 보기보다는 실력이 있는 것 같던데.”
“글쎄. 별로?”
“에이. 솔직히 초반에 조금 밀리셨잖아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밀렸지.”
“…네?”
“일부러 밀린 거니까.”
툭툭 끊어서 말하는 말투. 거기다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는 태도에 여인은 쓰게 웃었다. 한소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저히 감히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반듯하게 깎인 얼음 덩어리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처음에 어찌어찌 운 좋게(?) 수행인원으로 선발되었을 때는 마냥 설렜다. 존경해마지 않는 한소영과 같은 방을 쓰는 영광을 누리게 됐으니까. 하지만 막상 같은 방을 사용하니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 그런가요? 호호. 아. 피곤하신 거 같은데. 음료라도…?”
“됐어. 필요하면 내가 꺼내다 마실게. 그런 것 까지는 신경 쓰지마.”
이렇게.
사실 한소영이 딱히 뭐라고 한 것도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이 10주차 동안 쭉 이어지니 스트레스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여인은 우물쭈물하며 걸음을 물렸다.
그때였다.
“잠깐만. 소민아.”
돌연히 한소영이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나갔다가 밤이 되면 돌아오자 생각하던 소민은 깜짝 놀라 걸음을 정지했다.
“네, 네?”
이내 떨떠름히 앞을 주시하자 이리저리 머리를 매만지는 한소영을 볼 수 있었다.
한소영은 한 손으로는 이마를 가리던 앞머리를 걷어내고는, 길게 늘어뜨린 뒷머리를 남은 한 손으로 그러모았다. 그 상태로 거울을 이모저모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돌리며 소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요히 입을 열었다.
“어울리니?”
“…녜?”
일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소민은 황급히 입을 가렸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 않고, 한소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이상하지는 않아?”
“네, 네네네네. 아, 아니 아니. 어, 어울려요. 매우, 엄청, 굉장히 잘 어울려요.”
한순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소민은 재빠르게 동의할 수 있었다. 사실 정말 자세히 보고 말한 거라기보다는, 반사적으로 말한 것에 불과했지만.
좌우간 대답이 어찌됐든, 한소영은 “다행이네.” 라고 중얼거리며 긴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럼 있잖니….”
이번에는 도대체 무슨 말이 나올까. 소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괜히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다시 한 번 거울을 유심히 살핀 한소영은 재차 시선을 흘끗 돌리며 말했다.
“머리 묶는 거 있으면 빌릴 수 있을까? 내일 하루만.”
그런 한소영의 얼굴은 어느새 엷은 발그스름한 색조를 띠고 있었다.
소민은 입을 쩍 벌렸다.
============================ 작품 후기 ============================
하하하. 너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원래 예정돼있던 부분에서 몇 가지 삭제를 한다는 뿐이지, 내용상 꼭 필요하거나 많은 독자 분들이 원하신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그럴 생각은 없어요. 예를 들면 이번 회 같은 경우는 진수현과 한소영의 전투 내용을 생략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또한 제 전개 속도가 무척 느린 편이라, 한 회마다 용량을 추가로 담는 것도 고려하는 중입니다. 완급은 제가 충분히 고민하며 조절해볼게요. _(__)_
음.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독자 분들은 메모라이즈 초반 부분에서 꼭 일러스트로 나왔으면 하는 부분이 계신가요? 정확히는 초반 소환의 방 때부터 뮬을 떠날 때 부분까지요. 예를 들면 김수현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비비앙이라던지, 등등 말이에요.
혹시 인상 깊었던 부분이 계시면 코멘트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