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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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아침이었다. 밤중에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렇게 많이 내리지는 않은 것 같다. 이따금 창틀에서 한두 방울 뚝뚝 떨어지는 정도?
이 정도면 가히 나쁘지는 않은 날씨라 생각하며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 어느 날보다 세심한 세안과 어젯밤 고심해서 골라놓은 옷을 걸친 후.
“형! 오늘 파이팅 입니다!”
“시끄럽다. 인마.”
주먹을 번쩍 올리는 안현을 뒤로 한 채 나는 숙소를 나섰다. 마침 바람도 알맞게 불어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오늘은 교육 주차의 마지막 주말이며 동시에 한소영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다.
아마 만남 자체는 몇 주 전에 약속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동안 각각의 사정으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마침 홍보 주차를 앞두고 좋은 구실 거리가 생겨 다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어렵사리 말을 꺼낸 것에 비해 ‘좋아요.’ 라고 흔쾌히 허락해준 한소영을 떠올리며,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반들반들 하면서도 길쭉한 것 하나가 잡힌다.
원래는 저번 용이 잠든 산맥에서 얻은 성과 중 하나인 코델리아를 선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소영의 성격상 갑작스럽게 이런 선물을 주면 절대로 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우선 이런 자그마한 선물로 부담을 없앤 다음, 나중에 익숙해졌을 때 건네는 게 받을 확률이 더 높으리라.
애당초 따로 챙겨놓은 만큼 이제야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복도를 돌았다. 약속 시각보다 조금, 아니 상당히 일찍 나오기는 했지만 기다림 또한 하나의 재미 아니겠는가.
그러나 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다림의 재미는커녕, 오히려 한소영이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소영의 모습을 보았을 때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앞머리를 넘겨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와 깔끔하면서도 야무지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 머리끝은 잘 정돈된 꼬리처럼 얌전하게 늘어트렸다.
거기다 다리에 착 달라붙어 다리맵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상앗빛 바지와 살그머니 드러낸 발그스름한 복사뼈. 그리고 햇살을 받아 새하얀 빛을 반사하는 헐렁해 보이는 셔츠는, 산뜻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오죽하면 내가 아는 한소영이 맞나 헷갈릴 정도로 색다른 자태였지만, 그 모습조차도 본래의 카리스마와 조화롭게 섞여 들어가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흡사 유현아와 한소영을 절반씩 섞어놓은 듯한 모습이랄까.
“머셔너리 로드?”
기척을 느꼈는지 한소영이 나를 부르며 차분히 몸을 돌린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호흡을 추슬렀다.
…문득 혹시 시간을 착각한 게 아닐까 걱정이 일었다.
그러나 확인해본 결과, 약속 시간은 아직 30분도 넘게 남은 상태였다.
*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나와 한소영은 곧바로 입구를 나섰다. 그리고 환한 햇살이 비추는 사용자 아카데미 내 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물론 서로 아무 말도 않고 걸은 게 아니라 적당한 이야기는 나누면서.
사실 이렇게 한소영과 만난다고 해봤자 갈 수 있는 거리나 이야기 주제는 한정돼있다. 애당초 서로 정답게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사이도 아닐 뿐 더러,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가봤자 어디를 가겠는가. 그저 각자의 입장이 있는 만큼 꼭 필요한 이야기만을 나눌 뿐.
하지만 그래도 좋다.
“그때 한 교육생이 그러더군요. 갑자기 손을 들더니 저보고 이스탄텔 로우 로드와 어떤 사이냐고 묻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군요. 실은 저도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 적당히 무시해왔는데, 그게 능사는 아니었나 봐요.”
한소영은 조용히 내 말을 경청해주었고, 간간이 자신의 의견이나 이스탄텔 로우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해봤자 용이 잠든 산맥의 공략이나, 용병 아카데미 설립이나, 마력 재능 계열 교육생들과 있었던 사건들뿐이라고 해도.
이것뿐이라도, 지금의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행복이다. 이렇게 나란히 서서 거리를 걷는 것은….
1회 차에서 한소영이 죽은 이후,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여러 일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걷고 있자, 어느 순간 서로 입을 여는 횟수도 상당히 줄어든 게 느껴졌다.
이건 하나의 신호였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진 게 아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무언의 신호. 말인즉슨, 홍보 주차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자는 소리였다.
이내 꼭 맞대어진 한소영의 입술을 보며 나는 먼저 말문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사용자 아카데미도 내일부터 10주차로 돌입하죠?”
“네.”
“그럼…. 흠. 그냥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금번 교육생들 중 누구를 염두에 두고 계신지요.”
“음.”
한소영은 미약한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듯한 얼굴. 그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자, 돌연 하늘을 향하던 눈동자가 흘긋 나를 주시한다. 나도 모르게 재빠르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잠시 후, 어딘가 모르게 끈끈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척 달라붙는다.
“한 두세 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전부 마력 재능 계열 교육생들이죠.”
“오. 우리와 거의 같으신데요. 머셔너리 또한 마력 재능 계열로 두 명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아니군요.”
“아직 단정하기는 이르다고 생각됩니다만. 혹시 어느 교육생들을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스탄텔 로우와의 영입 전쟁은 최대한 피하고 싶어서.”
한소영은 도로 고개를 내렸다. 끝을 알 수 없는, 한없이 깊어 보이는 두 눈이 나를 응시한다.
“이번 시크릿 클래스로 들어온 교육생과 김희철 교육생. 그리고 제갈 해솔이라는 교육생이에요.”
시크릿 클래스와 김희철. 그리고…. 제갈 해솔?
“제갈 해솔이요?”
깜짝 놀라 큰 목소리로 되묻자, 한소영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그 교육생이 겹치나요?”
“…으음.”
“괜찮아요. 아무튼 겹친다는 게 불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으로 느껴지네요.”
“예?”
“머셔너리 로드가 찍었다는 건, 적어도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말이니까요.”
“하, 하하.”
한소영의 말은, 여태껏 내가 영입한 사용자들이 차후 모두 좋은 성장과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는 소리였다.
한순간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떠오른다. 제갈 해솔의 공식적인 성적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러할진대 설마 한소영이 영입을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갑작스럽게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어째서 제갈 해솔의 영입을 생각하신 겁니까? 그 교육생의 성적이 썩 좋지는 않을 터인데.”
“글쎄요. 그냥 감이라고 할까요?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감이라.
사정을 모르는 사용자가 들으면 일부러 두리뭉실하게 말한다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 3의 눈이 있는 만큼, 한소영이 말한 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소영의 사용자 정보를 보면 초감각이라는 능력이 있다. 초감각은 물리적 감각 기관의 도움 없이 주변 환경의 세세한 변화를 인지해, 마음을 통해서 얻는 정보의 획득을 일컫는다. 생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굉장히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능력이라 어떻게 보면 제 3의 눈보다 부러운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EX 랭크였었지?
아마 한소영이 제갈 해솔을 영입하려는 건 초감각이 연관돼있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것 또한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껏 나는 제갈 해솔을 영입하지 못하면 살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영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반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소영이 제갈 해솔을 영입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수 있다. 머셔너리와 이스탄텔 로우는 현재 공방 동맹을 맺은 명백한 우방 클랜이다.
그렇다면.
제갈 해솔이 이스탄텔 로우로 가면 오히려 도움이 되면 되었지 최소한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문득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정리할 수 있어, 나는 한소영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
“우리 두 클랜에 한해서, 제갈 해솔의 영입은 우선 이스탄텔 로우에 넘기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스탄텔 로우에서 실패한다면, 그 다음에 머셔너리에서 시도해보는 것으로요. 어떠신지요.”
“그 말씀은. 양보하신다는 말씀인가요?”
한소영의 목소리가 쿡 찌르는 것처럼 파고 들어온다. 나는 천천히 어깨를 들먹였다.
“어떻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이스탄텔 로우와 괜한 걸로 다투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괜찮아요. 이것 또한 선의의 경쟁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홍보에서는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기회를 먼저 드리는 건 맞지만, 선택권은 어디까지나 교육생한테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그렇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죠.”
그러자 빼는 것도 없이 바로 받아들이는 한소영. 애당초 그런 성격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만큼 제갈 해솔을 영입하고 싶다는 뜻이리라.
그때였다.
약간 민감할 수도 있는 문제를 서로 기분 좋게 매듭지었다고 생각한 찰나.
“머, 흠. 머셔너리 로드.”
“예?”
“호, 호의는 감사….”
“……?”
별안간, 무표정 일변도를 달리던 한소영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여전히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입술이 실룩, 움직이더니 곧 부르르 떨기까지. 마치 움직이지 않는 안면의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느닷없이 왜 이러는 걸까.
그렇게 뜻 모를 기분에 눈만 깜빡이고 있을 무렵.
실룩실룩 움직이던 입꼬리가 별안간 실그러지게 움직이며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망치에 얻어맞은 기분으로 한소영을 응시했다.
어설프면서 엉성하기 그지없었지만, 그것은 확실히 미소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말인즉슨, 한소영이 나를 보며 웃어준 것이다.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의 미소는 1, 2회 차를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도저히 믿지 못할 기분에 되물은 순간, 한소영의 미소는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이어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오, 오래 걸었더니 다리가 아프네요. 잠시 어디 앉고 싶어요.”
그리고 홱 고개를 돌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한소영을 시선만 돌려 쫓다가, 아차 싶어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그리고 길쭉한 것을 꽉 부여잡은 채 황급히 한소영을 쫓았다.
*
뚝.
하늘에서 빗방울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새벽 중 약한 비가 내리다 그쳤는데, 또다시 내릴 조짐인 모양이다.
이윽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무수한 빗방울들이 후드득후드득 땅을 때리고, 건조한 지면에 살금살금 얼룩이 지기 시작한다.
이내 빗방울이 예쁘게 묶은 머리칼을 적시고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한소영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급할 것 없다는 양 천천히 거리를 걷는다.
‘머리카락이 기신만큼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약간의 마법 처리도 해놓았으니 편리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한소영의 손에는 새하얗고 길쭉한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그것은 빗이었다.
방금 헤어진 김수현이 선물한 것으로, 저번 용이 잠든 산맥의 성과 중 용의 뼈로 만든 나름 특별한 빗이었다. 거기다 솜씨 좋다고 소문난 머셔너리 클랜의 대장장이가 세심하게 세공을 한 터라, 여인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탐낼만한 아주 예쁜 빗이다.
오늘 한소영은 김수현과 만남을 가졌다. 물론 그것은 남녀간의 데이트가 아닌, 클랜 로드간의 공식적인 만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재미있을 수도, 달콤할 수도 없는 만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미 없느냐고, 지루했냐고 물어본다면 한소영은 자신 있게 아니라 말할 수 있었다. 오히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나 할까. 비록 딱딱한 업무 이야기만 오고 간 건 사실이지만, 한소영으로서는 김수현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한소영의 능력 중 하나인 초감각에 기인한 것이다.
불현듯 한소영의 맞은편에서 한 무리 교육생들이 나타났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를 피해 빠르게 달려오다가,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한소영을 보고 걸음을 줄인다.
“어! 한소영 교관님이다! 안녕하세요!”
“오~. 한소영 교관님? 한소영 교관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한소영은 고개만 까닥였다. 그리고 온몸을 타고 흐르는 소름을 참으며, 눈길도 주지 않고 교육생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초감각이라는 능력은 한소영에 축복과 불행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이모저모 사용할 데가 많다는 점은 분명히 축복이었지만, 원하지 않는 정보까지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 교육생들만 봐도 그렇다. 비에 젖은 새하얀 셔츠는 한소영의 살에 착 달라붙었고 굴곡진 몸매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교육생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곳에 꽂혔고, 한소영은 그 시선에 담긴 정보를 받아들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성욕, 욕정, 음욕, 색욕 등 온갖 추악한 욕망이 담긴 어두운 정보들을.
점차 거세어지는 빗방울을 받으며 한소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김수현이라는 사내를 떠올렸다.
기실 한소영이 김수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초감각에 기인한 것이었다.
처음 황금 사자 소집령을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같은 여인은 차치하고서라도, 한소영은 사내를 만날 때마다 십이면 십 아까와 같은 정보를 느꼈다.
그게 처음 깨어졌던 게 바로 황금 사자의 소집령에서 김수현을 만났을 때였다.
‘남부 소도시 모니카의 대표 클랜, 이스탄텔 로우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그때 보았던, 아니 초감각으로 느꼈던 정보는 한소영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한두 가지의 정보가 아니었다.
걱정, 심려, 고뇌, 미안함, 송구함, 존경심, 동경심, 애통함, 애처로움 등등.
김수현의 시선에서는, 방금 교육생들에게서 느꼈던 추악한 욕망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끝없이 걱정하고 보호해주려는, 오롯하면서도 애틋한 감정만을 느꼈을 뿐.
실제로도 그랬다. 초반에야 이스탄텔 로우가 머셔너리를 많이 챙겨주었지만, 나중 가서는 오히려 머셔너리가 이스탄텔 로우를 챙겨주었다. 그것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실 한소영은 아직도 김수현이 왜 자신을 그렇게 보는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해하고 하지 못하고를 떠나서, 그런 감정을 받는다는데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렇잖은가.
비록 표현을 잘못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스탄텔 로우의 정점에 서서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 챙겨주고 위해주는 사내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분 좋은 사실이었다. 초감각으로 스스로 마음을 닫고 철혈의 마음을 지니게 되었으나, 한소영 또한 한 명의 여인이라는 본성은 변하지 않으니까.
이윽고 한소영이 숙소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어느새 비도 그친 상태였다. 이번에도 잠깐 내리다 만 모양이다. 한소영은 곧장 숙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숙소는 텅 비어있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한소영은 문을 꼭 닫고 나서 수정 거울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공들여 묶어 올린 머리를 풀어 내렸다. 이어서 손에 쥔 빗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수정 거울로 시선을 옮기며 천천히 머리를 빗어보았다.
빗은, 물기를 쭉 빨아들이며 머리칼을 부드러이 쓸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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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영 : 나도 표현 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