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32
00531 큰 결정. =========================================================================
응접실 안.
한 여인이 길쭉한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하얀 김이 조금씩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이내 청초한 분홍빛 입술이 맞물리자 찻잔이 천천히 기울어진다.
홀짝.
“응?”
첫 번째 들이킴에 여인의 두 눈이 살짝 떠지고.
후룩.
“으음!”
두 번째 들이킴에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여인은 고개를 사뿐 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차 맛이 퍽이나 만족스러운지 생글생글한 눈으로 정답게 웃어 보인다.
“와~. 차 맛이 정말 장난이 아닌데요? 저도 현대에서 전통 찻집 하나 운영했는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맛이에요!”
“…….”
“재료도 궁금하고 누가 만들었는지도 궁금하네요?”
“…….”
“…그래요. 평소 사내의 시선을 즐기는 편이기는 해요.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좀. 자꾸 그렇게 보니까 나 되게 민망하다.”
“…….”
여인은 겸연쩍은 듯 어깨를 살짝 들먹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차를 후루룩. 나는 그런 여인, 아니 제갈 해솔을 보며 어이가 가출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상황 자체는 간단하다.
살문의 통신과 조승우의 보고를 받은 후, 나는 손님을 안내했다는 응접실로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응접실에는 제갈 해솔이 태연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오직 그것뿐이기는 하지만.
“너…. 도대체 뭐냐.”
아마 지금 한 말이 내 심정을 완벽하게 대변해주지 않을까.
그때. 제갈 해솔은 분명히 작별 인사와 비슷한 말을 건넸다. 나는 영입이 실패했다고 판단, 살문을 시켜 살해를 의뢰했고.
그것으로 모두 끝났다 여겼는데 별안간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결국 제 발로 머셔너리에 들어왔다는 소린데, 솔직히 내 예측을 벗어난 행동이었다. 오죽하면 낚시를 당한 물고기가 된 기분이랄까.
잠시 후. 제갈 해솔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어머. 반말?”
그 순간, 나는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탕!
“작작 놀려라. 사용자 제갈 해솔.”
탁자가 이리저리 흔들림과 함께 제갈 해솔이 흠칫 몸을 떨었다. 곧 눈을 동그랗게 뜬 제갈 해솔은 아미를 살그머니 찡그리며, 자못 서운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깜짝아. 화났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놀린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아니었어요.”
“그럼 왜 내 눈에는 지금 나랑 장난 한 번 해보자는 걸로 보일까? 사용자 제갈 해솔?”
“알아요. 이제 더는 교육생이 아니라는 거. …그리고 그때 그 말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장난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럼.”
무슨 뜻이냐고 말하려는 찰나,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제갈 해솔은 어느새 예의 심원한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천천히 관찰이라도 하듯이.
갑작스럽게 살문의 보고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조심하십시오. 그 계집, 여간내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방심하지 않고 접근했는데 하마터면 들킬 뻔했습니다.’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선 후,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 느꼈죠.”
탁,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제갈 해솔이 천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 이 세상 참 무서운 세상이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해지는걸 느꼈다. 그냥 듣고 넘기기에는 제갈 해솔의 말투가 무척이나 의미심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질러놓은 일도 있었고. 살문 이놈들. 정말 들키지 않은 것 맞나?
아무튼. 너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한 것 같아, 나는 침착히 숨을 골랐다. 그래. 마음을 가라앉히자. 내 예측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우선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 모르는 척부터.
“…우선 방금 말을 함부로 한 건 사과하죠. 나를 놀린다고 생각한 터라. 아무튼, 확실히 갓 나온 병아리들을 노리는 놈들이 있기는 합니다. 좋아요. 그건 이해합니다.”
“흐응.”
“하지만 그럼 왜 우리 클랜으로 온 겁니까?”
“네? 그게 무슨.”
“사용자 제갈 해솔이 그렇게 느꼈다면, 이스탄텔 로우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보호를 요청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영입하려는 클랜이 그곳밖에 없었는데.”
“흠?”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제갈 해솔이 되레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아신 건지…. 아무튼 그래서요?”
“……?”
“확실히 혼자서는 위험할 수도 있겠다 느끼기는 했어요. 그래서 어딘가 몸을 의탁할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그 장소로 머셔너리를 선택했을 뿐이죠. 그게 그렇게나 이상한 일인가요?”
“아니. 그러니까 왜.”
“이제 홀 플레인 갓 나온 제갈 해솔이라는 사용자 입장에서. 이스탄텔 로우보다 머셔너리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으니까요.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
나는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딱히 흠을 잡을 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뭐, 수료식 때 들었던 연설에 혹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요. 아니. 실은 그게 가장 커요. 여기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갑작스럽게 시선을 확 빼앗겼다니까요?”
제갈 해솔은 혀를 살짝 내밀더니 빙긋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나는 조용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 머셔너리 클랜에 가입하겠다. 이 말입니까.”
“네. 필요하다면 가입 테스트도 치를 생각이에요.”
목울대를 꼴깍 움직인 제갈 해솔은, 명료한 목소리로 회답했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
(그렇구나. 그럼 아직은 손님으로 대우하는 거야?)
늦은 오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붉은빛 석양은 집무실 책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조막만 한 수정구가 밝은 빛을 내뿜고 있다. 나는 수정구가 비치는 인물에 얼굴을 더욱 가까이하며 말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덜컥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찜찜하니까. 도저히 속을 읽을 수가 없다니까.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흠. 찜찜하다고….)
“왜?”
(그냥. 조금 이상해서.)
“역시 형도 그렇지?”
(아니 아니. 내 말은 그 제갈 해솔이라는 사용자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멍하니 수정구를 응시했다.
형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들더니 곧 싱겁게 웃어보였다.
(수현아. 이건 그냥 사실대로 말하마. 네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이거나 그거나. 아직 망설이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괜히 너 생각하기 좋은 방향으로 자기 합리화는 하지 마려무나. 그건 정말 나쁜 버릇이니까.)
“…….”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인데. 그럼 좋아. 하나 물어볼게. 1회 차에 너와 적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그 제갈 해솔이라는 사용자가 이상한 사용자였니? 네가 그렇게나 꺼림칙하게 생각할 만큼? 예를 들면 클랜 로드를 배신했다거나.)
“…아니.”
나는 사실대로 회답했다. 배신은커녕 오히려 수많은 영입 제의를 뿌리치고 유현아의 옆을 지킨 게 제갈 해솔이었다.
(그럼 뭐 악명이 높았어?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을 밥 먹듯이 했다거나 등등.)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럼 결국 어떤 하자도 없는 사용자라는 소리네?)
“그렇기는 한데.”
(그렇기는 한데가 아니지. 결국에는 그거잖아. 너는 그 제갈 해솔이라는 사용자를 두려워하는 거야.)
“…두려워한다고? 내가?”
(그래. 1회 차에 최고의 잠재성을 보였던 제갈 해솔. 그리고 지금 네가 가진 수많은 성과. 그 두 개의 요소가 합쳐져 탄생할 제갈 해솔을, 너는 괴물이라 지레짐작해버린 거지. 즉 너는 네가 통제할 수 없는 사용자를, 네 손으로 키워낼 것을 두려워했다는 소리야. 아니야?)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형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형은 갑갑하구나.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이해가 안 가. 한 번 이렇게 생각해봐. 지금 네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졌어. 그리고 너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싶어 하는 사용자가 있어. 그럼 그냥 가면 돼. 그래. 그러면 되는 일인데, 너는 한 걸음 걷고, 주변을 살피고, 바닥을 두드리고, 같이 가는 사용자의 몸을 수색하고. 그리고 또 한 걸음 걷고 아까 과정을 또다시 반복하고.)
“…….”
(그러면 같이 가는 사용자가 너를 어떻게 생각할까? 응? 한 번쯤은 서로 손잡고 기분 좋게 걸어갈 수도 있는 거잖아.)
“형.”
분명히 구구절절 옳은 말이기는 한데, 별안간 섭섭한 마음이 차오르는 건 왜일까. 그래서 간신히 입을 열은 찰나, 형은 빠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조금 더 내 얘기를 들으라는 듯이.
(수현아. 네 마음은 알고 있다. 1회 차에서 2회 차로 다시 돌아오는 걸 선택했을 때. 그때 네가 어떤 마음으로 돌아왔을지 생각해보면, 네가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아는 거랑 옳은 거랑은 명백히 다르다.)
엄하기 그지없는 형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 문득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형의 얼굴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지금은 2회 차지, 1회 차가 아니잖아. …내 더는 다른 말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를 믿고 있는 만큼, 그리고 내가 너를 믿고 있는 만큼. 적어도, 단 한 번만이라도 네가 다른 사람을 믿어봤으면 좋겠구나.)
믿음. 이라.
*
형과의 통신을 마친 후, 나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 이 세상 참 무서운 세상이구나.’
‘한 번쯤은 서로 손잡고 기분 좋게 걸어갈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서 머셔너리를 선택했을 뿐이죠. 그게 그렇게나 이상한 일인가요?’
‘네가 나를 믿고 있는 만큼, 내가 너를 믿고 있는 만큼.’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책상을 물들이던 붉은빛에 서서히 땅거미가 섞여 들어올 즈음.
나는 번쩍 눈을 뜨며 힘차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바로 서랍을 열어 가지런히 정리된 호출석들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지금부터 할 일들은. 2회 차 이후, 여태껏 내가 걸어온 길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혹은 내 생각이 틀린 것이라면.
형의 말대로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것이 내 홀 플레인 인생 최대의 도박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생각한 나는 더는 주저하지 않고 호출석을 눌렀고, 곧바로 들어온 선유운에게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제갈 해솔을 데려오라 지시했다.
그리고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제갈 해솔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부르셨어요?”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기록 세 장을 집어 던졌다. 기록은 일직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고, 제갈 해솔은 솜씨 좋게 기록들을 잡아챘다.
“이건….”
“하나는 머셔너리 클랜 가입 신청서고, 다른 하나는 자유 용병 신분 변경 신청서입니다. 내일 아침에 회의가 있을 테니, 그때 제출하도록 하세요.”
“오? 그럼 다른 하나는요?”
“용병 아카데미 교육생 등록 신청서입니다. 이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작성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순간, 두 눈을 살며시 치켜뜬 제갈 해솔이 고요히 나를 응시한다.
사실 하고픈 말은 많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담아 누르며, 나는 차분히 손을 내밀었다.
제갈 해솔이 입을 열었다.
“그럼.”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지금 바로 숙소를 배정해두라 지시할 테니, 부디 편히 지내시길.”
“네, 네?”
“머셔너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때 아주 잠시였지만, 나를 보는 제갈 해솔이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아주 잠시였다.
곧 제갈 해솔의 새하얀 손이 내 손목을 덥석 잡는다. 이어서 내 손을 따라, 자신의 손을 강하게 쓸어내린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마찰감.
이건 무슨 의미일까. 새롭게 악수하는 방법?
의아히 시선을 들자, 어느새 방문 밖으로 모습을 감추는….
아니. 방문을 나서던 제갈 해솔의 걸음이 별안간 우뚝 멈추었다. 그러더니 고개만 빠끔히 내밀며 한쪽 눈을 찡긋. 그와 동시에, 아까 쓸어내린 손바닥을 들어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다.
“땡큐! 고마워요~.”
그리고 나를 향해 “후~.” 불어내기까지. 어디서 본 건 있는 모양이다.
이내 제갈 해솔의 기척이 빠르게 멀어지는 걸 느끼며,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째 온몸에 힘이 없다.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것도 아닌데 힘이 빠진 기분이랄까. 그냥 이대로 푹 잠들고 싶어진다.
그때였다.
– 야.
갑작스럽게 내면에서 들려온 목소리.
막 눈을 감으려던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목소리는….
“부인?”
– 후후. 그동안 나…. 이 자식이 진짜!
그리고 그 순간.
펑!
눈앞으로, 번쩍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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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_(__)_
실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글이 턱턱 막혀서요. 중간중간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나름 팍팍 나가는 부분도 있는데,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꽉 막히더라고요. 진짜 꾸역꾸역 쥐어짠 기분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요. OTL.
아무튼 내일부터는 더 힘내서 집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밤이 늦었네요. 기다려주신 독자 분들께 깊은 양해를 구하며, 부디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