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33
00532 새로운 여왕. =========================================================================
꼭두새벽.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으스스한 공기가 방안을 맴돌고 있었다. 그런 한기를 느꼈는지 제갈 해솔은 으응, 신음을 흘리며 살며시 눈을 떴다.
졸음 가득한 눈은 잠시. 별안간 제갈 해솔이 잠이 싹 달아난 듯한 얼굴을 하더니 한쪽을 흘끗 흘겼다. 도저히 무어라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감각이 온몸을 엄습했기 때문이다.
“으음~. 좋은 아침이에요. 확실히 사용자 아카데미와는 비교할 수 없네요. 침대도 푹신푹신하고.”
한 차례 가벼이 기지개를 피며 말했으나, 회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제갈 해솔은 휙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볍게 손을 튕기자, 저절로 창문이 열리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이내 기다란 머리칼이 바람결에 펄럭 나부낄 즈음.
제갈 해솔이 쭉 뻗은 팔을 도로 내리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살그머니 시선을 떨어트리자, 어느덧 하얀 김을 피우는 찻잔이 왼쪽 목 부근에 닿아있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갈 해솔은 함부로 손을 내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뜨끈뜨끈한 왼쪽과는 달리, 오른쪽 목 부근에서는 서늘한 한기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 칼? 아니면 그냥 공기?
고개를 갸웃한 제갈 해솔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너무해요. 이 클랜은 원래 이렇게 배타적인가요?”
“초창기에는 그런 면도 없잖아 있었지.”
비로소 들려온 목소리는 무척 성숙한 여인의 음색이었다. 그 순간, 제갈 해솔은 한껏 마력을 끌어올려 수송 능력을 사용했다.
퉁, 짙푸른 마력의 기류가 퍼지고 침대에 있던 제갈 해솔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1초 후, 창문 앞 공간이 약간 일그러짐과 동시에 제갈 해솔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순간이었다.
“재밌는 능력이네.”
처음으로, 제갈 해솔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분명 수송 능력을 사용해 자리를 이동했음에도,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 따끈한 김과 서늘한 한기는 여전히 목 부근을 맴돌고 있다.
어떻게?
그 생각을 읽은 듯, 나른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속살거리듯 들려온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법이지.”
그림자. 그 말을 들은 순간 제갈 해솔은 곧바로 뒤에 서 있는 누군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윽고 차갑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제갈 해솔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찻잔이 올라와 입술에 닿는다.
“마시렴. 어제 차 맛이 좋았다며?”
돌연 척추를 타고 흐르는 오싹한 기운에 몸서리치며, 제갈 해솔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마치 아기라도 된 것처럼 기울여주는 대로 차를 받아 마셨다.
“몹시 흥미로워. 확실히 그이가 관심을 가질 만도 해. 이제 갓 나온 교육생이 내 기척을 느끼고, 이동 능력을 사용해?”
그이?
뜨겁고 맛 좋은 차를 한 모금 꿀꺽 넘기며 제갈 해솔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애가 나온 거야? 너는 누구지?”
“…….”
그림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름은…. 제갈 해솔. 나이는…. 29. 성별은…. 여성. 그리고 키는 168 정도에, 몸무게는 48 정도로 추정. 또한 특징은….”
“다리가 길고 예쁘다.”
“흠? 뭐, 확실히 예쁘기는 하네.”
“역시. 그리고 가슴도 65 C컵이에요. 그것도 자연산. 어때요? 부럽죠?”
그림자는 힘없이 입을 터뜨리며 피식 웃었다.
“별로? 나는 70 F컵이라서.”
“…네?”
“생리할 때는 G컵까지도 되는 것 같더라. 아. 물론 나도 참이란다.”
“뻐, 뻥 치지 말아요.”
제갈 해솔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훌쩍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바로 뒤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쌍의 시선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내 잿빛 눈동자가 한 번 번뜩인 순간, 제갈 해솔은 거의 본능에 따라 두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사용자 고연주의 고유 능력, ‘유혹의 눈동자’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사용자 제갈 해솔의 고유 능력,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이 대응합니다.』
『대응 결과, 상성 상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이 ‘유혹의 눈동자’보다 4랭크 상승 판정을 받습니다.』
『사용자 고연주의 ‘유혹의 눈동자’를 간파합니다!』
“아?”
간파된 순간, 고연주는 반사적으로 눈을 가리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제갈 해솔은 담담히 응시했다. 물론 고연주의 풍만하다 못해 폭발적인 가슴을.
이윽고 제갈 해솔이 분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을 때, 삽시간에 안정을 찾은 고연주가 눈을 슬슬 문지르며 허탈이 웃어 보였다.
“나 참. 이제는 간파까지? 어쩜 그이랑 이런 것까지 모두 똑같니?”
“그이가 누구….”
“누구긴 누구야. 앞으로 함께 모실 클랜 로드 님이지.”
“흐응.”
그제야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제갈 해솔은 미약한 비음을 흘렸다. 이스터 에그에서의 첫만남을 떠올린 것이다. 지금은 자신이 간파했다고 하지만, 그때는 되레 간파 당했으니까. 사실 그때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는 했지만,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윽고 고개를 주억인 제갈 해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 클랜, 신고식 한 번 참 독특해요?”
“어머. 설마 고자질할 생각은 아니지?”
“어머머. 오늘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일러바칠 건데요? 등쌀 때문에 못살겠다고.”
“얘는.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나는 그냥 아침에 깨워주러 왔을 뿐이야. 그래서 직접 탄 차도 들고 왔는걸?”
그러고 보니 제갈 해솔의 손에 어느덧 찻잔이 쥐어져 있었다. 이건 또 언제 받게 된 걸까. 혹시 귀신에 홀린 건가 싶어 스스로를 의심할 무렵.
“아무튼 다 좋은데, 우리 그이 너무 속 썩이지는 말아주렴.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사람이야.”
고연주는 마치 이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듯, 돌연 빙글 몸을 돌리더니.
“아. 머셔너리에 온 걸 환영해. 앞으로 잘 지내보자?”
느릿하게 손을 흔들며 방문 밖으로 스르르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멍하니 서 있던 제갈 해솔은 천천히 손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차분히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이내 고연주가 나간 방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럽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끝낸 후 나는 곧바로 4층으로 직행했다. 어제 사전에 공지한대로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중요한 안건을 다룬다는 것 보다는 간단한 정리나 보고가 주를 이룰 테지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하는 만큼 꼭 밟아야 할 과정이었다.
물론 새로 들어온 클랜원들도 정식으로 소개를 해야 하고. 아차. 이번에 복귀한 클랜원도 공식적으로 발표해야지. 그러고 보니 해야 할게 한두 개가 아니로군.
이윽고 상석에 앉아 클랜원들이 하나하나 들어오는 걸 바라보고 있자, 어느 순간 제갈 해솔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디로 앉아야 할지 모르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만 있자 한나가 상냥히 웃으며 자리를 안내해준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자리에 앉은 제갈 해솔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눈을 마주쳤다. 이제 또 활짝 웃어 보이겠지.
그러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제갈 해솔은 웃기는커녕 흥,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홱 돌려버린 것이다.
– 호. 재밌는 애가 보이네?
쟤는 또 왜 저러나 생각할 무렵, 내면에서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재밌다니?’
– 아아. 방금 너보고 고개 돌린 애. 쟤 누구야?
‘얼마 전에 들어온 사용자야. 어제 제 발로 걸어 들어왔지.’
– 얼마 전에 들어온 사용자라…. 확실히 이 세상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그런데 어떻게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이 보이는 거지?
문득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화정이 나 말고 이렇게 다른 사용자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있던가?
하지만 나는 곧 수긍할 수 있었다. 상대는 그 제갈 해솔이니까. 뭔가 특이한 게 있을 수도 있겠지.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 그건 뭐지?’
– 원래는 인간이 익힐 수 없는, 용들만이 고유한 능력이지. 마법의 원리를 파악하고 근원에 다다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라고나 할까.
원리와 근원?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어려운데.’
– 뭐,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용들의 고유한 능력이지만, 간혹 천 년에 한 번 재능을 타고난 인간들이 나오기는 하거든.
‘그럼 제갈 해솔이 그 천 년에 한 번 나오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말이야?’
– 제갈 해솔? 아아. 쟤. …그렇게도 볼 수 있는데, 그게 또 이상해. 너희 사용자라는 존재는 원래 절대로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을 가질 수가 없거든. 차라리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이라면 모를까.
‘왜 사용자는 가질 수가 없는 건데?’
– 사용자니까. 너희는 마력 회로라는 설정이 부여돼있는 상태라, 속성으로 마법을 배우는 입장이잖아. 하지만 여기 거주민들은 달라. 지금이야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득한 고대 시절에는 정말로 혹독한 연습과 수련을 거치고 나서야 마법사가 될 수 있었거든. 혹시 예전에 변태 마법사가 했던 말 기억나?
변태 마법사?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기억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피나는 노력을 거쳐서 마력을 쌓아나가고, 머리가 터져라 책을 읽고, 손가락이 부서지도록 주문을 맺으며 연습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별 꼴같잖은, 수련 같지도 않은 수련을 하고 능력을 사용하는 주제에….’
– 그래. 사실 그 말이 맞아. 걔 입장에서 보면 너희 마법사라는 사용자들이 아주 우습게 보일 거야. 속성으로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근원은커녕 가동 원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저 애는 다르지. 마력 회로라는 설정이 부여돼있으면서 하늘을 굽어보는 지혜의 눈이라는 희대의 재능까지 갖추고 있다고.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순간 나는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그렇다면 제갈 해솔은 속성으로 성장할 수 있으면서, 마법의 원리 파악과 근원에 다다를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클랜 로드. 회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나직이 들려오는 조승우의 말에 나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60명이 넘는 클랜원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고 있다.
그런 그들을 한 명씩 둘러본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죠.”
*
화륵.
오직 어둠만이 내려앉은 방에서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발간 불빛이 점으로 나타났다. 나타난 크기로 보아 연초에 불을 붙인 게 분명하다.
“…미치겠군. 너무 안일했던 건가?”
언뜻 보기에 평범하게 보이는 사내. 아니 악마가 한 번 힘껏 빨아들이자, 연초는 삽시간에 필터 끝까지 재가 되어버렸다. 이내 우수수 떨어지는 재를 연기를 내뿜어 흩날리게 한 후, 악마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흐음. 이건 좀 위험한데.”
그리고 양손을 엇갈려 맞추더니 어둠이 들어찬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 번 더 말을 잇는다.
“아니. 좀이 아니라 매우 위험해. 안 그런가?”
마치 방안에 누가 있기라도 한 듯 말을 거는 악마. 하지만 회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을 뿐.
그러나 익숙한 건지, 아니면 아예 아랑곳하지를 않는 건지. 악마는 손을 잔뜩 구기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던 듯 와자작, 종이를 구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벨리알. 아무래도 한 번 더 7대 악마를 소집해야겠다. 네가 책임지고 소식을 전해라. 그리고 아스타로트와 바알은 무조건 참석시키도록. 지금 바로.”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아스타로트 님은 더더욱.”
그때, 처음으로 천장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굵직하면서도 불쾌한 쇳소리와 비슷한 게, 딱히 듣기 좋은 음성은 아니었다.
막 방을 나가려던 악마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차분히 천장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전해. 대계의 연락이라고.”
반응은, 반 박자 늦게 들려왔다.
“대계…? 설마.”
“그래. 예언이 떨어졌다. 지금 난리가 났다고 하는군.”
“그, 급한 상황입니까?”
“매우.”
처음에는 담담하기 그지없던 목소리가 이제는 말을 더듬는다. 대계. 예언. 도대체 무슨 말들이, 아니 무슨 뜻이 있는 걸까?
“그래. 이제 곧 새로운 대체 여왕이 출현하고, 그러면 네 명의 여왕이 왕의 곁에 자리잡는다. 전쟁 이후, 처음으로 다변화 패배의 일차 조건이 만족되었다고 하더군.”
“그럴 리가!”
“하지만 사실이야. 이제는 철수냐 속행이냐. 이번 회의에서 이 두 길을 놓고 선택을 해야 하니, 모이지 않을 수가 없겠지. 시간이 없다.”
“……!”
그러자 잠시 후.
허공에서 시커먼 인영이 풀썩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악마를 향해 거의 웅크리듯 몸을 굽히며, 예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은, 사탄의 뜻대로.”
============================ 작품 후기 ============================
오늘은 자정 세이프!
역시 적고 싶은 내용을 적으니 어제와 같은 기분은 없네요. 하하하.
예전에 서로 능력 간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신 분들이 계시는데, 오늘 회로 의문이 해소됐으면 좋겠어요. 물론 능력의 수준을 나타내는 랭크도 영향을 미치지만, 능력 자체의 랭크. 즉 격이라고 표현할까요. 그게 최우선으로 영향을 미치거든요. 그렇게 따지면 제 3의 눈이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인지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요새 반전이 재미있어요. 사실 딱히 반전이랄 것은 없으나, 그런 거 있잖아요. 독자 분들이 ‘이렇구나.’ 생각하게 만들고, 저렇게(?) 나가는 거요. 🙂 후후후.(?)
PS. 저번에 김유현의 말에 공감해주신 분들에 대해서 정말 감사. 근래 들어 가장 기분 좋은 코멘트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