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46
00545 강철 산맥으로! =========================================================================
머셔너리 클랜의 일원인 표혜미는, 홀 플레인으로 들어온 지 이제 2년이 조금 넘는 사용자였다. 나이는 22. 클래스는 일반 마법사. 그 외 특징이라면 약간 밝히게(?) 생긴 얼굴과 발랄한 성격을 지닌 여인이라는 것 정도?
표혜미는 어찌 보면 머셔너리 표 제 1호 사용자라고 할 수 있다.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올린 준수한 성적은 당시 교육 교관으로 있던 정하연의 눈에 띄었고, 괜찮은 마법 센스와 잠재성을 인정받아 머셔너리 클랜의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머셔너리 클랜에 가입한 표혜미는, 이후 반 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쳐 현재는 정식 클랜원으로서 나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표혜미 또한 일상에 매우 만족하며 지내는 중이다.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라는 것은 착실하게 따른다. 사내를 밝히는 게 약간 흠이기는 해도, 어차피 성적으로 개방된 홀 플레인에서는 큰 문젯거리도 아니니까.
그러던 어느 날.
머셔너리의 톱니바퀴로써 열심히 활동하던 표혜미의 일상에 자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아니. 어떻게 보면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3년 전 북 대륙 원정대의 몰살 사건만 봐도,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한다는 게 일상이라고 볼 수는 없을 테니.
첫 인선 발표를 들었을 때 표혜미는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이번에 선발된 31명의 인선 중 29명이 3년 차 이상이었으니까. 0년 차, 1년 차는 애초 제외 대상이고 2년 차는 표혜미 포함 2명밖에 뽑히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1명이 ‘신의 방패’ 백한결임을 감안하면 표혜미의 선발은 누가 봐도 의아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같은 2년 차라고는 하지만, 여러모로 견주어봤을 때 표혜미는 백한결에 비해 엄연히 손색이 있는 사용자였다.
물론 처음에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강철 산맥에 참가했다는 것은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표혜미는 곧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준비 과정의 일환으로 강철 산맥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는데, 이건 뭐 어디 유적 탐험이나 단순한 의뢰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괴물이 출현하는지, 어느 지역이 그나마 안전한지는 거의 기록돼있지도 않고, 오직 실종과 사망에 대한 기록만 우수수 쏟아져 찾을 수 있었다. 그걸 보니 오히려 왜 자신을 선발했는지 의구심이 일 정도였다.
결국 표혜미는 참가를 놓고 거대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럴 법도 했다. 웬만한 고년 차 사용자도 얼씬도 안 하는 곳이 강철 산맥인데, 이제 2년 차 사용자인 표혜미가 느끼는 부담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선발됐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낄 수는 있어도, 자부심이 목숨을 챙겨주는 건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표혜미는 큰 욕심 없이 일상에 만족하는 사용자였다. 그러니 ‘무조건 참가한다!’보다는 ‘글쎄…. 이걸 굳이….’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출발 날짜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동부에서는 강철 산맥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표혜미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무렵.
문득, 표혜미는 김수현의 호출을 받았다. 그리고 찾아간 집무실에서 놀라운 제의를 들을 수 있었다.
나른한 오후.
“후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간 표혜미는 4층의 집무실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차분히 호흡을 고르며 꾹 닫힌 문을 응시했다.
오늘 표혜미는 김수현의 호출을 받았다.
사실상 클랜원이라면 누구나 클랜 로드를 자유로이 만날 수 있지만, 공식 석상을 제외하면 표혜미는 김수현을 거의 본 적 없다. 이렇게 1:1로 대면하는 것도 저번의 호출 이후 2번째였다. 표혜미가 들어온 후 김수현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도 있지만, 딱히 만날 이유도 없었다. 표혜미는 애초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자는 주의였으니까.
아무튼, 표혜미는 한동안 애꿎은 문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키며 문을 벌컥 열며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아차 한 기분을 느꼈다. 원래는 노크를 하고 회답을 기다리는 게 정상이지만, 과도하게 긴장한 탓에 자신도 모르게 실수한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호, 호출해서 왔는데요?”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결국 표혜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 눈을 꾹 감으며 허리를 60도로 굽혔다.
“예. 왔군요…. 응? 사용자 표혜미? 그런 인사는 됐으니 자리에 편히 앉으세요.”
그러나 들려오는 김수현의 목소리는 무척 평안했다. 마치 표혜미가 들어올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표혜미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김수현의 얼굴을 살핀 후, 자리에 얌전히 엉덩이를 붙였다.
그렇게 자리에 앉자마자 김수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사용자 표혜미를 호출한 이유는….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거라 생각합니다만.”
“마, 맞아요. 그러니까 클랜 로드께서 저번에 저에게 하나의 제의를 하셨고요, 당황한 저는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요, 그리고 또….”
바로 본론에 들어가자 표혜미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았다. 김수현이 가볍게 웃었다.
“하하. 그렇게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그냥 편하게, 그동안 생각한 바를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죄, 죄송….”
표혜미는 속으로 바보를 외쳤다. 오죽하면 스스로 머리를 콩콩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편히 이야기하라는 말은 들었지만, 또 마냥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북 대륙에서 가장 명성 높은 사용자와 모종의 일로 만난다는 것 자체가 긴장되는 일이었으니까.
잠시 후, 간신히 속을 가다듬은 표혜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동안 쭉 생각해봤는데요. 그럼 이름만 빌려드리면 되는 건가요?”
“정확히는 모습이죠. 사용자 표혜미의 겉모습이요. 공식적으로 사용자 표혜미는 강철 산맥에 참가한 게 됩니다. 그리고 공략이 끝날 때까지 타인의 모습으로 생활하는 겁니다. 즉 사용자 제갈 해솔의 모습으로 말이지요.”
“네, 네. 맞아요.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공략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타인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사실 조금 걱정 되요. 그러다 갑자기 마법이 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나는 거잖아요.”
“사용자 표혜미의 걱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헬레나의 말에 따르면 못해도 6개월 동안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저 또한 꽤나 신빙성 있는 말이라 판단했고요.”
그랬다. 김수현이 생각한 제갈 해솔이 대리로 참가하는 방법이란, 바로 폴리모프였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사용자 표혜미를 선발한 것이다. 그나마 가장 참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타깃으로 잡은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은 김수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완벽한 폴리모프가 아닌 제한된 폴리모프였으니까.
하지만 헬레나는 다르다. 한때 마법의 근원이라 불리는 용들 중에서도 정점에 군림한 종말의 용이라면, 완벽한 폴리모프를 구사할 수 있을 것이라 김수현은 생각했다.
그런 김수현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헬레나에게 계획의 협조를 구한 결과, 적어도 반년 동안은 문제없다는 긍정적이 회답을 들을 수 있었다.
“으음. 그렇다면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요. 문제가 될 소지는 거의 없습니다. 남은 건 사용자 표혜미의 결정뿐이죠. 물론 이건 강요가 아닌 부탁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협조해주신다면,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일체의 장비와 마력을 1포인트 높여주는 영약을 지급할 생각입니다.”
표혜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일체의 장비와 영약.
표혜미도 클랜원인 이상 어지간한 장비는 대급 받을 수 있지만, 그것도 한도라는 게 있다. 정말로 좋은 장비들은 철저한 보안 속에 보관해두었다가, 공을 세운 사람이 나올 경우 김수현이 직접 언급하며 대급한다.
김수현의 말인즉슨, 그런 A급 장비들을 한 세트로 대급해주겠다는 것이다. 영약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안 그래도 강철 산맥의 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굳이 참가해야 하나 싶었는데, 거기에 김수현이 덜컥 미끼를 던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쁜 제안은 아니다. 어찌됐든 공식적으로는 참가한 게 되니 추후에 특권을 누릴 수도 있고, 눈이 번쩍 뜨일만한 보상도 굴러들어온다.
지금 이 제안을 수락하면, 그리고 몇 달간만 조용히 지낸다면? 앞으로의 일상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이어나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표혜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의 시간은 길었지만 결국 결정을 내린 것이다.
“네. 그렇게 할게요. 오히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좋네요. 사용자 표혜미를 믿는 만큼 따로 계약서는 작성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시죠?”
“물론이에요. 이 일에는 저도 연관돼있으니 절대로 비밀을 지키겠어요.”
“마음에 듭니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하죠. 아까 말한 장비는 인사 쪽에 얘기해놨으니, 가는 길에 들러보시길.”
표혜미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인사 쪽에 얘기를 해놨다고? 그럼 내가 허락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야?
하지만 곧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일피일 미루는 것보다는 이렇게 확실하고 빠른 게 더 좋으니까.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표혜미는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 나왔다. 그제야 약간이나마 긴장이 해소되는 것과 동시에, 홀가분한 기분이 찾아 들었다. 이제 더는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표혜미를 안정케 한 것이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린 표혜미는 혀를 살짝 내밀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보상을 받으려 걸음을 돌린 순간, 표혜미의 눈에 미약한 이채가 스쳤다.
타박타박.
계단에서 누군가가 막 올라와, 표혜미가 서 있는 복도를 바라보았다.
*
인선 발표가 끝났다. 제갈 해솔의 대리 참가 문제도 방금 해결했다.
이걸로 모든 준비는 마쳤다.
“그러면….”
이제는, 정말로 떠날 일만 남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나 기지개를 피려는 찰나, 돌연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게 아닌가 싶어 급히 돌아보자, 표혜미가 아닌 의외의 사용자를 볼 수 있었다.
“너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나를 보는 여인은, 다름 아닌 맹아라였다. 현 북 대륙의 수호자.
꽤나 느닷없는 방문이었지만, 어차피 강철 산맥 전 한 번쯤은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노크도 않고.”
“…빼주세요.”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것도 부족해, 다짜고짜 빼달라고 말한다. 물론 나름 짚이는 바는 있다. 나는 잠시 맹아라를 응시하다가 가만히 소파를 가리켰다. 아까 표혜미가 앉았던 자리였다.
“그건 또 무슨 말인지. 아무튼 일단 앉아.”
“싫어요.”
“나 참. 그럼 서 있던가.”
“좋아요.”
곧바로 외친 맹아라는 한순간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그래. 스스로 말하고도 이상하다는 걸 느꼈겠지.
어이없는 기분에 실소를 흘리고 있자, 맹아라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씨잉.” 입을 툭 내밀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 아무튼! 우리 수현이 오빠, 이번 인선에서 빼주세요!”
“안 돼.”
“왜요!”
“내가 어떻게 빠지냐? 클랜 로드인데.”
“이익! 진, 수, 현, 오빠요! 김, 수, 현, 이 아니라!”
“아아. 미안. 착각했어.”
맹아라는 한 글자씩 끊으며 강조했다. 나는 속으로 킥킥 웃었다.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장난 삼아 던져본 말이었다. 하지만 입을 꾹 깨물며 그렁그렁한걸 보니 더 하면 정말로 울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그럼 제대로 얘기해보지. 그러니까, 네 말은 진수현을 이번 인선에서 빼달라. 이 말인가?”
“네.”
“왜?”
“으응….”
“내가 알기로는 진수현은 이번 공략에 엄청 참가하고 싶어하던데. 애당초 그래서 우리 클랜에 들어오기도 했고.”
“으으응….”
맹아라는 여전히 입을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에 비장한 빛이 감도는 게, 어떻게든 진수현을 빼내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진수현의 마음이 변한 건가? 네 앞에서는 참가하기 싫다고 했어?”
도리도리.
“그것도 아니고. 그럼 말을 해. 도대체 왜 빼달라고 하는 거야? 뭔가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나도 검토를 할 수 있잖아.”
“…당신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이윽고, 비로소 입을 연 맹아라의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뭔가 대비할 틈도 없이 직구가 들어온 기분이랄까?
문득, 속이 착 가라앉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는 알고 있으니까요.”
“무엇을 알고 있는데?”
“3년 전. 뮬에서 당신의 도움을 구하러 온 사용자들을 오히려 살해한 사건이요.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으시겠죠?”
아아. 무슨 말은 하는가 했더니.
이제는 거의 사생결단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맹아라를 주시하며, 나는 천천히 이마를 매만졌다. 그리고 연초 한대를 느릿하게 꺼내 물었다.
당신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뮬에서의 사건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들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찾아봤다는 말인데.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네 담당 천사가 누구니?”
그 순간, 맹아라가 눈을 크게 뜨며 화들짝 놀랐다.
“어, 어떻게…?”
뻔하지. 예전 사건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나를 탐탁잖아 하는 천사도 있다는 소리니까. 세라프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는데, 아무래도 예상이 맞은 모양이다.
맹아라가 말했다.
“그,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아무튼! 저는 그 외에도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 천사들을 적대한다는 것과….”
“아. 됐어. 별 같잖은 거 말하면서 대단한 거라도 말하는 양 생색내지 말고.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뭐, 뭐라고요?”
“그러니까 어떡하자고. 내가 천사들을 적대한다. 그래. 그건 인정할게. 그런데 그게 그리도 잘못된 일인가?”
당당하게 말하자 맹아라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보였다.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야말로 이해 불가였기 때문이다.
“왜. 그럼 왜 천사들을 적대하는 건데요? 천사들은 도우미잖아요. 사용자를 도와주는….”
“얼씨구. 그럼 너는 천사들이 좋아? 천사라면 무조건 네네 따라야 돼?”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적대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왜? 지구에서 잘 살고 있던 우리를 이 거지같은 세상에 던져놓은 년들을 내가 왜 좋아해야 해?”
그러자 맹아라는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떨떠름해하는 얼굴을 보이기까지.
그걸 보자 서서히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천사를 적대한다는 말까지 나온 이상 배후는 확실해졌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간을 보겠다는 것 같은데….
나는 살그머니 입에 침을 적셨다.
“나는 말이다. 3년 전에 군대를 전역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잠들었지. 일어나보니 뜬금없이 이 세상에 보이더라. 그런데, 나를 이 세상에 데려다 놓은 장본인인 천사를 좋아하라?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다.”
“구, 군대를 전역하고 돌아오는 길이요?”
맹아라는 한껏 당혹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나는 크게 머리를 끄덕이려다가 맹아라를 보고 살짝 흠칫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오빠도 지금 군대에 있을 텐데….”
“…그렇구나. 아니. 그렇다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는 말아줘. 꼭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는 눈이잖아. 기분 나쁘다고.”
맹아라는 “핫?” 소리를 지르더니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마치 정신을 바짝 잡으려는 것처럼.
“으, 으음. 좋아요. 그러면 아까 말한 뮬에서의 살해 사건은….”
“그거야 이미 마무리된 사건이잖아. 그리고 그놈들이 기껏 얻어낸 성과를 노리고 억지로 접근한 것도 모자라서, 우리 애들을 죽일뻔했는데. 너라면 가만히 있겠냐?”
“네? 주, 죽이려고 했다고요?”
“너…. 사건 기록 읽어보기는 한 거야?”
되레 쏘아붙이듯 말하자, 맹아라는 망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이다. 보아하니 아마 한쪽 말만 들었을 가능성이 다분한데.
그제야 연초에 불을 붙이며 나는 기다란 한숨을 흘렸다.
“후유. 사용자 맹아라. 아니 북 대륙의 수호자. 나는 도대체 네가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진수현을 빼달라고 말하러 온 거야? 아니면 천사의 지시로 내 속을 떠보려고 온 거야?”
“그게 아니라!”
“조용히 해. 물론 저번 사건으로 나를 곱게 보지 않는 것도 알고 있어. 그런데, 그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잖아. 너도 그 정도는 알 거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너는 나를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내가 진수현에게 딱히 잘못한 거라도 있나? 우리 클랜에 들어온 이후로 말이야.”
“윽. 그건….”
진수현? 문제없다. 오히려 너무 적응을 잘해서 문제였다. 머셔너리 클랜에 들어온 이후 진수현은 그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빠르게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으니까. 그건 맹아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할 말을 잃은듯한 맹아라를 보며 나는 약간 더 몰아붙이기로 했다.
“너도 참 그렇다. 강철 산맥 참가도 본인이 원해서 참가시켜준 건데. 왜 나한테 불만을 쏟아내는 거야?”
그러자 맹아라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쯤 하면 됐겠다는 생각에 나는 의자를 반쯤 돌려 창가를 응시했다. 창문에서도 맹아라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이제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론 네가 진수현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고 있어. 하지만 공략에 참가한 모든 사용자들이 공통적으로 짊어지는 부담이야. 그건 최고 선봉 중에서도, 가장 앞에 서야 하는 나도 똑같다고. 오히려 더 심하면 심했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
“어쨌든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이상 진수현을 뺄 수는 없어. 너는 참가 자격이 안되니까, 그냥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 아니면 감시는 적당히 하고, 이만 수호자의 의무를 다 하던가.”
“…알고 계셨어요?”
그럼. 북 대륙의 수호자가 그리 한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더는 할 말 없으니 돌아가라는 말을 삼킨 후, 나는 애꿎이 타 들어가는 연초를 마저 태웠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이내 타박타박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책상에 한 장의 기록을 놓는 맹아라가 보였다. 뭔가 하고 보니 다름 아닌 클랜 탈퇴서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는, 어느새 짙은 슬픔이 어려있다. 진수현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모르겠어요.”
맹아라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누구 말이 맞는 건지. 어떤 게 진실인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네가 억지를 부리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고?”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요. 저는, 아직도 당신이 너무 불안해요. 아니. 당신의 옆에 있는 수현이 오빠가 불안해요.”
“이 정도로 말했는데도 그렇게 느낀다면 어쩔 수 없지.”
“네. 겉으로는 이유가 있고, 언뜻 들어보면 말도 타당성이 있어요. 하지만…. 무어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겉으로는 수현이 오빠가 원해서 참가시켜준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조차도 제 눈에는 뭔가 목적이 있어 보여요.”
“목적? 설마 내가 나쁜 마음이라도 품었을까 봐?”
그러자 맹아라가 돌연 입을 다물어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마치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 같은…. 꼭 악마 같이 느껴진다고요.”
그렇게 말한 맹아라는,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이윽고 맹아라가 나간 자리를 보며, 나는 거의 타 들어간 연초를 비벼 껐다. 그리고 차분히 사용자 정보를 열었다.
1. 이름(Name) : 김수현(3년 차)
2. 진명 • 국적 : 마성(魔性 : 사람을 속이거나 현혹하는 악마와 같은 성질.) • 검의 주인 • 대한민국
맹아라의 말을 떠올리자, 문득 미약한 웃음이 나왔다.
악마라….
어쩌면 그리 나쁘지는 않을지도.
꼭 선이 악을 잡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많이 늦었죠? 가기 전에 제갈 해솔의 참가와 맹아라는 제대로 마무리 짓고 가려고 했는데, 이 파트가 생각보다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덕분에 간만에 등장시키려 한 비비앙이 저 멀리 사라졌네요.(비비앙 미안해.) 다음 회에 이어서 넣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오늘은 한 8시간 정도 걸렸네요. 아. 이북도 수정해야 하고 비주얼 노벨도 각색해야 하는데, 두 작업이 약간 정체된 느낌입니다. 작년 첫 중간 고사 시험 기간 때는 정말 어떻게 연재한 건지 모르겠어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