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48
00547 수상한 기운. =========================================================================
모니카에서 출정식을 가진 후, 남부 원정대는 21일만에 강철 산맥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정확히는 강철 산맥 바로 앞의 전초 기지에. 원래 4주 정도 걸리는 거리를 3주로 줄였으니 상당히 빠르게 도착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새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밤이 깊은 상태였다.
그렇게 8주 만에 다시 돌아온 요새에 대한 첫 감상은, 사실 조금 실망했다고나 할까.
자고로 요새란 무엇인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튼튼하게 만들어놓은 방어 시설이 아닌가?
하지만 눈에 보이는 전초 기지의 모습은, 요새라기보다는 그냥 캠프에 가까웠다. 수천 명을 수용해야 하니 부지를 드넓게 잡은 건 좋으나, 방어 시설이라고 해봤자 어설픈 초소나 망루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둥글게 둘러친 울타리와 무수한 천막 정도?
하기야 건축을 시작한지 이제 8주가 지났으니 무엇을 바라겠냐 만은, 그래도 지금 당장 괴물들이 튀어나오면 깡그리 쓸릴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튼.
남부 원정대가 요새로 입성한 후, 한소영은 내일 아침 일찍 강철 산맥으로 들어갈 예정이니 천막에서 여독을 풀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예외였다. 각 부대를 맡고 있는 장들은 따로 모여 회의를 해야 했다. 듣기로는 2주 전에 들어간 동부가 현재 진군을 멈춘 상태라, 진군 경로나 특이 사항 등의 정보를 넘겨받으며 차후 공략 계획을 다듬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정보 전달의 역할을 맡은 사용자는 따로 있었다.
“어서 와요. 소영씨. 머셔너리 로드도 어서 오고. 그리고…. 코란 로드? 라고 불러야 하나?”
중앙의 큼지막한 천막에 들어서자 이효을이 손을 흔들며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하하. 아니요. 그냥 환희라고 불러주세요. 코란 로드라니, 뭔가 쑥스럽네요.”
박환희가 웃으며 회답했다. 이효을은 “그럼 환희.”라고 말한 후,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천막 내부는 별것 없었다. 아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휑한 상태였다. 정 중앙에 놓여진 큼직한 탁자와 그 위에 올려진 커다란 지도 하나. 그리고 천막 내부를 약간이나마 밝혀주는 라이트 스톤 서너 개. 마지막으로 구석에 박힌 침대 하나가 천막 내부의 전부였다. 심지어 의자도 보이지 않는다.
“요새가 조금 그렇지요? 하지만 이해해줘요. 워낙 도시와 떨어진 지역이라 재료 공수하기도 어렵고, 또 아무리 금화를 준다고 해도 꺼려하는 인부들이 상당히 많아요. 할건 많은데 주변 여건이 이러니, 정말 진퇴양난이랍니다.”
이윽고 우리가 탁자 주변에 모이자 이효을이 정말 미안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한 모습이 마치 얌전한 숙녀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실소를 흘리며 이효을을 응시했다. 지금 한소영이랑 박환희 앞이라서 이러는 건가? 나랑 말할 때도 저런 태도로 말했으면 좋겠는데.
한소영은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해요. 저도 인부를 동원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니까요. 어쩌면 450명을 모은 게 기적이라 할 수 있죠.”
“어머. 450명이나요? 2주 전 지나간 동부도 채 300명을 못 채웠는데. 소영씨의 수완은 정말 대단하네요.”
“별말씀을.”
“호호. 정말이에요. 자~. 그러면. 아무튼 다들 오시느라 수고하셨고.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죠. 우선 동부의 진군 경로부터 말씀 드려보면….”
그때였다. 이효을이 막 지도를 짚으며 설명에 들어가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말을 멈추었다. 마주보는 방향에 있는 한소영이 천천히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손은, 곧 나를 가리켰다.
“진군 경로는 머셔너리 로드와 말씀을 나누시는 게 좋을 거예요. 우리 남부 원정대의 길잡이 역할을 맡고 있으니까요.”
“네? 하지만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남부 원정대의 총 사령관이잖아요.”
“물론 그렇고, 저 또한 옆에서 들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선봉 부대를 머셔너리 로드에 맡김으로써 모든 권한 또한 위임했죠. 그런 만큼 이 부분에서는 제가 부가 되지, 주가 될 수 없어요.”
“…그래요?”
이효을은 한두 번 눈을 깜빡이고는 새삼스런 시선을 보냈다. 나는 겉으로는 무덤덤하려고 애썼지만 속으로는 살며시 웃었다.
이게 바로 한소영의 무수한 장점 중, 가장 돋보이는 장점이다.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괜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적재적소에 부하를 사용할 줄 안다. 내가 길을 찾는 능력이 더 높으니, 이 부분에 대한 권한을 완전히 맡긴다.
한소영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나를 믿고 신뢰한다는 소리였다. 기분은 가히 나쁘지 않다.
스르륵.
“흐흠. 그럼 머셔너리 로드. 이 부분을 먼저 자세히 봐주겠어?”
이효을은 미약한 헛기침을 하고 나서 내가 보기 편하게 지도를 이동시켰다. 그 탓에 한소영이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상체를 기울여, 나는 꿀꺽 침을 삼켜야만 했다. 성숙한 어른의 향기…. 아 젠장. 집중하자.
나는 마인트 트레이닝까지 동원하며 이효을이 짚어준 부분을 응시했다.
이효을의 검지는 강철 산맥의 초입, 정확히는 전초 기지가 있는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단 동부 원정대의 첫 진군은 굉장히 성공적이야. 어제 연락 온 바에 따르면 현재 지점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습격을 받지 않았어.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중간중간 괴물로 추정되는 생물이 도망친 흔적을 발견한 것으로 보아, 아마 화계 공략 계획이 상상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고 추측할 수 있지.”
“그럼 괴물들이 대규모 화계에 놀라서 도망쳤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아무튼 머셔너리 로드. 처음부터 자세히 말해보면, 동부는 2주 전 전초 기지에 도착했고, 다음 날 바로 강철 산맥 안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이효을은 주르륵 검지를 이동시켰다. 미끄러지듯이 이동한 손끝은 처음에는 일직선을 그렸다. 하지만 갑자기 왼쪽으로 살짝 곡선을 그리더니 어느 한 부분을 지나쳐 우뚝 이동을 정지했다.
나는 그 부분을 자세히 주시했다. 멈춘 부분이 아닌, 우회한 부분을.
“바로 어제. 여기서 진군을 정지했지.”
“더 나아가지는 않고?”
“응. 아마 이 지점에서 요새를 건설할 생각인 것 같아. 지금 화계 계획을 실행하면서 자리 잡기에 들어가고 있다고 하던데?”
“자리 잡기라. 글쎄. 내 생각에는 조금 더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그렇기는 한데, 나도 일단 동의하기는 했어. 괜히 더 들어가다가 피 보는 것 보다는 안전 지대 확보가 우선이니까.”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군 거리가 너무 적어. 이 정도면…. 일주일? 아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일 정도 밖에 진군하지 않았어. 중간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건가?”
그랬다. 이효을의 검지가 멈춘 지점은 이리재고 저리 재봐도 도저히 2주일을 진군했다고 생각되지 않는 거리였다.
하지만 이효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문제는 아니고. 뭐, 너도 알다시피 동부가 초반 진입에 덕을 본 건 사실이야. 사흘 동안 내리 불을 질렀으니, 화계의 여파가 미친 지역은 어느 정도 빠르게 돌파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진군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어. 동부 원정대의 총 사령관인 조성호는 조금 느리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방법을 선택했거든.”
그렇다면야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하지만 여전히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나는 다음으로 이효을이 우회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럼 하나 더. 왜 쭉 직선으로 나아가다가 여기서 방향을 틀었지?”
그때였다.
그 말을 꺼낸 순간, 이효을의 두 눈에 고민의 빛이 스쳤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 그거? 으음.”
“사용자 이효을. 각 원정대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약간 위협하듯이 말하자 이효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지금? 그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는 않거니와, 아리송한 것도 없잖아 있어서 말을 꺼내지 않은 거야. 잘못된 정보를 전해줄 수는 없잖아?”
“아리송하다고?”
“엉. 동부 원정대가 거기서 괴물 부락을 발견했나 봐. 물론 괴물이 출현한 건 아니고, 아까 말했듯이 도망친 흔적뿐이야.”
“그럼 더 이상한데. 그것뿐이라면 우회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
“실은 나도 그래. 그래서 아리송하다고 한 거고. 하지만 지휘권은 조성호한테 있으니 내가 간섭할 건더기는 없지. 걔도 딱히 중요하게 언급하지도 않았고. 여하튼, 그 부분이 정 궁금하면 가서 따로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
이효을은 항변하듯이 말을 매듭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억울해서 말한다는 것보다는, 마치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회답을 미리 준비한듯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이효을을 응시하다가 차분히 속을 추슬렀다. 이런 협동 공략에서는 서로의 불신과 다툼을 가장 경계해야 하니까.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는 건 절대로 지양해야 한다.
좌우간 이번 회의를 통해 적어도 한 가지 가능성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부 원정대가 진군을 멈춘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
도대체 조성호는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또 무슨 일에 직면한 걸까?
나는 지도로 시선을 돌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
“마음에 안 들어.”
천막에 들어선 유정이 가방을 거칠게 내팽개치며 씨근거렸다. 구석에서 열심히 침낭을 정리하던 사샤는 살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무에 그리 마음에 안 드는가. 암컷 고양이여.”
“그냥 다! 이 허술한 요새도 마음에 안 들고! 사사건건 들이대는 그 꼬추 새끼도 마음에 안 들고! 총 사령관이라는 작자도 마음에 안 들어! 젠장. 지가 뭔데 우리 오빠한테 이래라저래라 야? 그것도 반말 찍찍 내뱉으면서.”
유정이 거친 불만을 쏟아내자 사샤는 잠시 손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꼬추 새끼라는 말이 고오환이라는 작자를 지칭한 것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마지막 말에 더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었다.
“다른 것 보다는, 아무래도 총 사령관에게 불만이 많나 보군. 그 이스탄텔 로우 로드랬나?”
“어. 나 참. 행군 도중인데 뻑 하면 음성 증폭 마법으로 이것저것 지시를 하지 않나. 아니. 우리 오빠가 무슨 지 종이야? 하여간 졸라게 부려먹어요.”
“글쎄. 그 인간 여인이 별로 지시를 내린 기억은 없는 것 같다만. 그리고 지시라고 해봤자 거의가 훈련 명목이 아니었나? 어쨌든 나는 딱히 불만스럽게 여길 기억은 찾지 못했다. 너는 아닌가?”
“아 그렇잖아. 원래는 총 사령관도 우리 오빠가 맡아야 정상이었는데, 어디서…. 아무튼 기분 더러워. 내가 왜 그 사용자 말을 따라야 해? 나한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오빠 한 명뿐이야.”
유정은 연신 불만을 쏟아내며 신경질적인 걸음을 보였다. 그리고 사샤가 정성껏 깐 침낭에 벌렁 드러누웠다.
사샤는 끔뻑끔뻑 눈을 깜빡이다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흐음. 네가 무슨 기분을 느끼는지 대충 알 것 같다. 그래도 겉으로 티는 내지 말도록. 한 인간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은 때로는 독이 되는 법이니까. 새겨 들어라. 암컷 고양이여.”
“나는 그런 거 몰라요~. 그리고 한 번만 더 암컷 고양이라고 해봐. 이 수컷 흡혈귀야.”
“뱀파이어다. 긍지 높은 혈통이지. 그건 그렇고, 이 침낭은 내가 사용할 예정이었다만.”
“긍지 높은 혈통이라며. 레이디 퍼스트도 모르냐?”
사샤는 “도둑 고양이인가?”라고 중얼거렸다. 유정은 빙긋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유정을 도로 눕힌 사샤는 도망치듯이 천막을 빠져 나왔다.
“정말 제멋대로인 아가씨로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깊은 한숨을 내쉰 사샤는 이내 차분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른 천막을 찾는 게 아닌, 요새의 외곽 방향이었다. 강철 산맥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최남단으로.
강철 산맥은 조용했다. 그리고 어두웠다. 비록 화계 공략 계획으로 일부가 뻥 뚫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묘한 기운을 품은 바람이 불어왔지만, 주변을 에워싼 정적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 뿐.
밤하늘의 달빛조차 먹혀버린 숲의 내부는 오로지 어둠만이 들어차 음침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전초 기지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굳은 얼굴을 한 사샤가 뻥 뚫린 입구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을 무렵.
“아까는 가장 먼저 천막으로 들어가던데. 여기에는 갑자기 무슨 일이지? 개 코.”
아름다운 미성이 사샤의 귓전을 울렸다. 둥글게 쳐진 울타리를 따라 느릿하게 걸어오는 여인은, 다름 아닌 헬레나였다.
“안 그래도 바람결에 누린내가 나는가 했더니. 도마뱀 한 마리가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군.”
“호호. 숲이 어둠에 먹혀버릴 뻔한 주제에. 말이 많구나.”
태연히 웃으며 다가온 헬레나는, 이내 몸을 돌려 사샤와 똑같이 숲의 내부를 응시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한동안 물끄러미 숲을 바라보던 사샤가 헬레나를 흘끗 흘기며,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도마뱀. 어떤가.”
“어떻느냐니?”
“숲 말이다. 숲. 이상하리만치 조용하지 않나. 네가 느끼기에는 어떻지?”
“숲의 밤은 언제나 조용한 법이지.”
헬레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러나 사샤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걸 묻는 게 아님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럼? 왜. 네 개 코가 또 이상한 냄새라도 맡은 건가?”
“이상하다기 보다는….”
“보다는?”
“그래. 네 말대로 숲의 밤은 항상 조용한 법이지. 헌데….”
“……?”
휘이잉. 휘이이잉.
그때 마침 또 한 번 바람이 불어와, 사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어서 코를 벌름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힘껏 들이켰다.
“절규…. 비명…. 절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리는 사샤 펠릭스. 헬레나가 물었으나 사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껏 집중하는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실 뿐.
그리고 잠시 후.
“분명 이렇게나 조용한 숲인데….”
바람이 끊기며 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비로소 눈을 뜬 사샤는, 살그머니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두 눈을 벌겋게 빛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거지?”
============================ 작품 후기 ============================
아우. 요즘 들어 미치겠습니다. 혹시 전자 담배 피워보신 분 계신가요? 최근 기침이 좀 심해진 감이 있는데, 아무래도 원인이 담배 같아서요. 줄여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마음대로 안되네요. 이제는 거의 습관적으로 찾는 지경이라…. 어떻게 끊거나 줄여야 할 텐데, 이렇게나 금연이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