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54
00553 폭풍의 시작. =========================================================================
– 도도와와주주세세요요.
구조를 원하는 목소리가 거듭 허공을 울렸다. 조금의 고저도 보이지 않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오직 전방에서 들려온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누구도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선봉 부대에 포함된 사용자들은 확실히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용자는 선유운이었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 혹혹시시 구구조조하하러러 오오신신 분분이이신신가가요요?
“우리는 구조대가 아니다. 그리고, 신분을 밝히라고 했다.”
– 괴괴물물한한테테 당당했했어어요요. 다다쳐쳐서서 움움직직일일 수수가가 없없어어.
“괴물? 지금 괴물이라고 했나? 그게 무슨 소리지?”
– 도도와와주주세세요요. 너너무무 아아파파. 흑흑흑흑….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선유운은 소름이 주뼛 돋는걸 느꼈다. 예민한 궁수의 청각이 쉴 새 없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들려오는 건 흐느낌이 분명한데, 몹시 서러운 기색은커녕 높낮이가 일정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선유운이 고오환을 겨냥하던 석궁을 전방으로 돌렸을 때였다.
“잠시만요. 왜 석궁을 겨누시는 거예요?”
상앗빛 사제 로브를 입은 여인이 다급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돌아가.”
그러나 선유운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까닥이며 지그시 전방을 노려볼 뿐. 그런 선유운의 행동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가장 선두에 있는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한 명 한 명 무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여인의 얼굴에 갑갑한 기색이 어렸다.
“이봐요. 지금 무슨 짓들이에요? 지금 사람이 죽어가는데 당장 달려가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야. 도와주지 않을 거면 닥치고 꺼져. 신경 거슬리니까.”
그러나 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 날 선 목소리가 딱 잘라 끊어버렸다. 여인은 기막히다는 듯 얼굴을 돌렸으나 돌연 흠칫하고 말았다. 어느새 유정이 단검 두 개를 뽑아 든 채 서늘한 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 분명 사람의 목소리가….”
“멍청한 년.”
“뭐, 뭐라고요?”
“마력 감지는 폼으로 있어? 지금 앞쪽에서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거 몰라?”
여인이 아미를 찌푸렸다. 방금 유정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들려오는 목소리로 봐서는 감지에 무언가 잡혀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사람이든 괴물이든 누구나 기척은 존재하는 법인데, 기척이 잡히지 않는다?
모순. 그렇다면 해답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거리가 닿지 않는다는 것. 아니면 웬만한 감지로는 잡을 수 없는 새로운 괴물의 출현했다는 것.
– 안안 돼돼. 그그놈놈들들이이 또또 오오고고 있있어어.
그 순간, 또다시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여전히 높낮이는 일정했지만 아까와는 달리 말하는 속도가 빠르다. 마치 급한 상황을 연출하려는 듯이.
– 빨빨리리 도도망망쳐쳐. 괴괴물물들들이이 이이곳곳을을 찾찾아아냈냈어어. 어어서서.
이제는 도와달라고 하는 게 아닌, 오히려 도망치라고 한다.
속여서 끌어들이려는 게 아니었나?
선봉 부대의 사용자들의 얼굴에 혹시나 하는 빛이 스쳤다. 오죽하면 선유운조차도 미간을 찡그렸을 정도였다.
“이 겁쟁이들!”
그때 방금 들려온 말에서 모종의 확신을 얻었는지, 여인이 표독스럽게 내뱉으며 앞으로 달렸다. 누군가 급히 어깨를 붙잡았지만, 오히려 여인은 강하게 뿌리치며 외쳤다.
“놔! 설령 괴물이라면 저렇게 말을 하겠어? 저건 사람의 목소리잖아!”
그리고 지팡이를 꺼내 들어, 결국에는 선봉 부대를 벗어나고 말았다.
“정확히 어디에요? 지금 갈게요!”
– 여여기기 이이쪽쪽. 더더 앞앞으으로로.
여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목소리는 곧바로 회답했다. 이내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 안에 있을 거라 추측한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달리기에 가속을 붙였다.
아마도 여인이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걸음을 정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여인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휘리릭!
탁!
허공을 가르는 흉흉한 소리. 이내 힘껏 달리던 여인의 몸이 돌연 우뚝 정지했다.
관성으로 몸이 절로 비틀거리는 가운데, 여인의 시선이 절로 발목을 향했다. 더러운 채찍이 두 발목을 단단히 감고 있었다.
아니. 채찍이 아니었다. 끈적끈적한 액체와 표면에 오돌토돌한 돌기가 돋아있는 그것은, 마치 촉수를 보는듯했다.
잠시 후, 여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상태였다.
“아?”
한순간, 여인이 보는 세상이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이윽고 몸이 완전히 기울어 땅에 닿은 순간, 여인은 때늦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수풀 안쪽으로 끌려들어갔다. 그것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여인의 동료들이 애타게 외쳤으나, 이미 다리는 물론 상반신까지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사, 살려어어어어!”
두 팔이 의미 없이 허공을 휘젓는다. 곧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던 여인의 몸이 별안간 우뚝 멈추었다.
하지만 이미 거의 다 들어간 상태와 진배없다. 우거진 수풀 밖으로 보이는 거라곤 오직 가녀린 두 개의 팔뿐이었으니까. 두 팔은 여전히 구조를 원하는 듯 허공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와드득!
“아아아아아아아악!”
갑작스럽게 와짝 깨무는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새된 비명이 주변을 떠르르 울렸다.
그것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와드득! 와드득!
“까아아악! 아파아아!”
소리가 이어질수록, 여인은 두 팔이 이리저리 비틀며 바닥을 미친 듯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어찌나 절박한지,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면의 수풀이 찢겨져 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콰드드드드드드득!
무언가 크게 부서지는 소리. 동시에 지면을 치던 여인의 팔이 뻣뻣하게 변했고, 부르르 떨리며 그대로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내 후루룩, 액체를 들이마시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비로소 여인의 두 팔마저 수풀 안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얼굴로 왼쪽 수풀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눈 몇 번 깜빡 할 사이에 지나갔다. 여인이 발목을 잡힌 시점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은, 채 10초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 아아아…. 아아아….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 생각한 여인이 수풀에서 솟아올라 느릿하게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 여인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목에는 촉수가 칭칭 감겨있었고, 하체는 흡사 믹서기에 넣어 갈아버린 것처럼 무참히 짓이겨진 상태였다. 피는 뚝뚝 떨어지다 못해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 도도도와와와…. 제제제발발발 도도도와와와…. 아아아….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목을 죄는 촉수를 붙잡은 채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구조 요청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다. 표정은 정말 구조를 바라는 듯 애절하기 그지없었으나, 목소리는 아까 들었던 기괴한 목소리였다.
선유운은 입을 질끈 깨물었다. 아니. 모든 사용자가 비슷한 생각이었다.
정체 모를 괴물. 그러나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거기다 또 지금 저 여인을 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등등.
이 모든 것을 처음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사고에 혼란이 온 것이다.
그때였다.
팍!
– 살살살려려려…. 켁켁켁!
느닷없이 백색 빛을 뿌리는 검이 쏘아져, 허공에 떠오른 여인의 목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 탓에 꺽꺽 거리며 말을 잇던 여인의 몸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모두 전투 준비!”
그와 동시에, 약간 화난듯한 목소리가 선봉 부대를 쩌렁쩌렁 강타했다.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이내 시선을 돌린 사용자들은 마찬가지로 왼쪽 수풀에서 우수수 달려오는 네댓 명의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선두에서 달려오는 사용자를 확인한 선유운의 얼굴에 밝은 화색이 감돌았다.
“클랜 로드!”
김수현이었다. 진로 결계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바로 상황을 파악해, 일말의 주저 없이 검을 날린 것이다.
곧장 선봉 부대로 복귀한 김수현은 여전히 목에 꼽힌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검이 절로 움직여 여인의 목을 베어 나와 김수현의 손으로 안착했다. 잘린 단면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온다.
“잠시만! 머셔너리 로드! 저 여인은 내 여동생이요!”
누군가 크게 소리질렀지만 김수현은 조금도 아랑곳 않았다. 오히려 마력이 충만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외쳤다.
“장소는 왼쪽 수풀 안. 거리는 2미터부터 25미터. 무사, 적심은 왼쪽 전진 이동으로 측면 보호. 마법사들은 지계 마법으로, 사제들은 방어막을. 궁수는 지금…!”
“머셔너리 로드!”
결국 참지 못한 사내가 달려들었다. 아까 잠시나마 여인의 어깨를 붙잡았던 사내였다. 그러나 보지도 않은 채 사내의 턱을 잡더니 강제로 틀어 한쪽을 보게 만들었다. 이내 허공을 바라본 순간 사내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죽었을 거라 생각한 여인이, 어느새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여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아니. 입가에 피를 주룩 흘리면서도 도리어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동물처럼.
“발사!”
첫 타로 수십 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나아갔다.
여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더니 허공으로 더욱 높이 떠올라 노리고 들어온 화살을 모조리 피해버렸다. 더구나 그 상태서 멀찍이 물러나기까지.
김수현은 한 번 더 투척하려는 듯 검을 들었다가, 천천히 도로 내리고 말았다.
곧 여인을 감은 촉수가 더욱 멀리 물러나더니 이내 수풀 안으로 쏙 숨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수풀들이 좌우로 사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흔들림은 곧 무척이나 신속한 속도를 보이며, 남부 원정대와는 반대 방향으로 멀리멀리 사라졌다.
*
결국 남부 원정대는 그날 목표했던 산을 넘지 못했다. 오히려 걸어온 길을 되짚어 물러나 조금 이르지만 야영을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비로소 처음 조우한 괴물의 출현에, 수뇌부가 긴급히 회의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소영은 원정대에 한 가지 특명을 내렸다.
특명이란, 다름 아닌 오늘부터 경계를 대폭 강화하겠다는 것. 들리는 소문으로는 건의자가 머셔너리 로드라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 괴물이 출현한 이상 경계 강화는 당연한 일이기는 했으나, 그 정도가 조금 심하다는 게 문제였다. 더구나 잠이 체력 회복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특성상 사용자들도 불만을 가질 법한 일이었다.
깊은 밤.
숲에는 침침한 어둠이 가득히 들어찬 상태였으나, 야영지 부근은 타오르는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진 상태였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한 사내가 나무 그루터기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한쪽 방향을 경계하던 두 남녀 중 한 여인이 흘긋 고개를 돌렸다.
“야. 너 언제 왔어? 어디 갔다 온 거야?”
“볼 일 좀 보고 왔다. 왜.”
“미친. 너는 화장실을 1시간이나 넘게 다녀오니? 하마터면 보고할 뻔 했잖아!”
“예~. 예~. 미안합니다~. 큰 거였습니다~.”
여인이 핀잔조로 말하자 사내는 귀찮다는 얼굴로 느물거렸다. 여인이 살며시 얼굴을 찌푸렸다.
“쟤 또 왜 저래. 너는 왜 매사에 불만이니?”
“아 그렇잖아. 우리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잠도 못 자고.”
“잠을 못 자서 그래?”
“잠을 못 자서가 아니라,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같아서 그런다. 경계 타임 한 번에 병력의 4분이 1이나 운용하는 게 말이 돼?”
사내는 쉬지 않고 불만을 쏟아내었다. 여인은 더는 상대하기 싫은지 어깨를 으쓱한 후, 옆에 서 있는 다른 사내의 팔에 살그머니 팔짱을 끼었다.
“어쩔 수 없지. 상황이 이런데.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까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잖아. 수뇌부들이 뭔가 좋은 수단을 강구해오지 않을까. 그지? 자기야?”
여인이 동의를 구하는 듯 물었으나, 사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자기야? 자기야! 왜 그래?”
여인이 연신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잔뜩 굳어있던 사내가 간신히 입을 열어 속닥거렸다.
“…소연아.”
“왜? 너도 급해서 그래?”
“그게 아니라…. 마력 감지.”
“마력 감지?”
사내가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여인은 순간 바짝 긴장이 들었다. 사내의 클래스는 궁수. 위험 감지에 최적화된 클래스이다. 혹시 괴물이 야습해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여인은 곧바로 마력 감지를 일으켰다.
하지만 예상외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느껴지는 거라고는 오직 두 개의 기척뿐. 자신의 기척과 옆에 서 있는 사내의 기척. 그 외에는 어떤 기척도 잡히지 않는다.
“왜? 주변에는 너랑 나밖에…?”
그리고 그 순간.
여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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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괴물의 출현입니다. 일반 사용자들의 입장에서는 나름 까다로운 부분이 있는 괴물이죠. 설정에 꽤 공을 들였습니다.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괴물이 말하는 음절의 수라고 할 수 있겠네요. 뭐 그렇게 대단한 힌트는 아닙니다만. 하하. 아무튼 시체는 아닙니다. 물론 도플갱어도 아니고요. 이후 내용을 진행하며 차차 드러낼 예정이니, 아마 곧 아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
PS. 어제 코멘트는 감사히 봤습니다. 한 번 숙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