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59
00558 김수현, 한소영. 그리고 빗. =========================================================================
다음날 아침.
남부 원정대의 야영지는 그 여느 때보다 시끄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다. 괴물이 출현한 이후 남부 원정대는 여태껏 줄곧 당하기만 한 입장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괴물의 정체를 파악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오죽하면 이번 괴물이 실체가 없는 유령이 아닐까 하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새벽 습격 이후, 상황이 일변했다.
비비앙은 내가 지시한 지점에서 괴물들과 맞닥뜨렸고, 마수 군단을 소환해 전투에 임했다. 그 결과 유령이라고 불리던 괴물의 시체를 다수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 또한 놈들의 도주로를 예상해 숲 속에서 기다림으로써, 비록 한 마리에 불과하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변태한 개체를 잡을 수 있었다. 지금껏 주구장창 당하기만 하던 남부 원정대에, 비로소 첫 승전보가 울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리는 단순히 기조의 반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괴물의 샘플을 무려 두 종류나 얻었다는 것.
말인즉, 괴물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에서 나아가 시체를 분석할 여지가 생겼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소란스럽다.
이미 괴물에 대한 분석은 끝난 상태였다. 새벽의 모든 전투가 끝난 이후, 나는 진화한 시체 한 구와 상태가 양호한 시체를 모조리 수거해 이스탄텔 로우에 양도했다.
한소영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사용자들을 끌어 모아 밤을 새며 분석했고, 아침이 되자마자 분석한 사실을 부대장과 클랜 로드들에 전파했다.
물론 그 내용은 나도 받을 수 있었다. 대충 훑어보니 맞는 것도, 조금 다른 것도, 틀린 것도 있었으나, 약 70% 일치하는 정도였다. 진화에 관한 부분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거야 내가 아닌 이상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고.
그 외의 부분은 거의 맞았다. 예를 들면 시각을 제외한 다른 부분이 매우 예민하다는 것과 온몸에 돋은 돌기의 용도. 그리고 그에 대한 예상 대응 방법 등등.
한소영은 밝혀낸 모든 부분을 확실하게 숙지해두라는 엄명을 내렸다.
또한 차후 부대장들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즉 돌발 행동을 하는 사용자가 나온다면, 즉결 처분까지 염두에 두겠다고 덧붙여 내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 말이 얼마 전 화계를 실행한 사용자들 지칭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좌우간 아침의 소란과 괴물에 관한 확인 사항 등으로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 남부 원정대는 야영지를 정리하고 새로이 진군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가장 선두에서 행군을 하면서 확실히 기조가 변한 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언가 억지로 이끄는듯한 기분을 받았는데, 오늘은 다르다. 오르막길도 쭉쭉 올라가는 게 꽤나 탄력적인 느낌이다. 오죽하면 행군 와중 “오늘은 이놈들 안 나오나?”라는 말이 들려올 정도였다.
그렇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며 기억 상으로 마지막 산봉우리를 통과한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풍경을 맞이할 수 있었다.
산을 오를 때까지의 길이 울퉁불퉁하고 수림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성했다면, 내려온 후의 풍경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건…. 꼭 능이 빽빽이 모여있는 것 같은데요.”
마침 내려온 고연주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눈에 보이는 건 우거진 나무나 수풀이 아닌, 지면이 구불구불하게 비탈진 여러 언덕의 모임을 보는 듯했다. 각각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외에는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게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기까지 했다.
“와. 그래도 좋네요. 시야도 탁 트이고, 산봉우리도 보이지 않고. 그동안 엄청 갑갑했는데.”
“맞아요. 맞아요. 근접 계열 분들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제나 마법사들은 산을 오르는 것도 힘들다고요.”
남다은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자 안솔이 금방 동의했다. 나는 눈앞의 지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여기도 그리 안심할 수 있는 지역은 아닙니다. 확실히 시야는 트였지만, 언덕들 사이사이로 숨을 수 있는 지형이 많으니까요. 그러니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클랜원들은 새로 출현한 지대에 좋아하다가, 내 경고에 냉큼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언덕을 둘러보고 나서 선유운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선유운.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중앙 부대가 내려오면 방금 말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주세요. 그리고 오늘부터 행군 속도를 조금 높이겠다고도 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선유운은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행군을 재개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동부 요새를 나온 이후 총 4개의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방금 돌입한 지역은 1회 차에서 언덕의 그림자라 불리는 지대로, 지금 우리를 습격하는 놈들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었다. 즉 이 지역만 무사히 넘길 수만 있다면 놈들의 근거지가 나온다는 소리였다.
사실 지금 괴물들이 출현하고 서너 번 전투를 벌였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전초전이라 보기도 어렵다.
탁 까놓고 말해서, 그냥 살짝 맛을 본 수준에 불과했다. 진정한 전투는, 근거지를 넘어 놈들의 수장 격인 파더가 잠들어있는 안쪽 장소까지 공략하러 들어갔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파더를 공략하게 되면, 그제야 강철 산맥 공략의 절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흠?”
그때였다.
한창 차후 공략에 고심을 거듭하던 와중, 돌연 마력 감지에 매우 미약한 기척이 걸리는 게 느껴졌다.
어느덧 우리는 한 언덕의 정상에 올라 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속도를 한껏 낮추며 기척이 잡힌 곳을 흘끗 응시했다.
60미터 앞. 딱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다. 그저 높이 솟은 언덕과 햇빛을 가려 생긴 그림자만이 여전히 보일 뿐.
하지만 나는 마력 감지를 자신했다. 놈들의 촉수는 지면에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미끌미끌하지만, 어쨌든 움직임 자체의 진동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결국 놈들의 기척을 느끼려면 마력 감지의 밀도를 얼마나 높이느냐가 관건이다. 또한 언뜻 느끼기에는 주변 자연의 흐름과 다른 게 없으므로, 아주 잠시 생기는 미세한 비틀림을 알아내야 한다.
예를 들면 지금 저기 보이는 그림자가 잠깐 꿈틀거리는걸 알아챌 정도로.
“수현. 무슨 일이에요?”
가장 처음 이상함을 감지한 건 고연주였다. 내 옆으로 바짝 붙으며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행군 속도를 높이겠다고 해놓고 오히려 느려지는데 의아함을 느낀 모양.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섯…. 아니 여섯 마리 정도.”
고연주의 두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어디인가요?”
“50미터 앞 언덕 두 개. 좌측에 둘…. 아니 넷. 우측에 둘.”
“Ok. 어디인지는 알겠어요. 마침 좋은 방법이 생각났으니 저한테 맡겨주세요.”
“좋은 방법이요?”
고연주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고연주가 드리운 그림자가 삽시간에 여러 갈래로 갈라져 쇄도했다. 그걸 확인한 순간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인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어, 나는 지체 않고 무검과 일월신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날카로운 쇳소리와 동시에 클랜원들이 흠칫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검을 뽑았다는 건 일종의 개전 신호와 다름없다.
그렇게 약 10미터를 추가로 전진했을 무렵.
“지금!”
고연주가 날카롭게 외치며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마치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가 낚여 올려지듯이, 두 언덕에서 6마리 괴물이 우수수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런 괴물의 촉수에는 시커먼 그림자들이 꽁꽁 묶인 상태였다. 언덕을 등진 채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고연주의 그림자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가만히 있던 것도 잠시.
– 키에에에에엑!
– 키에에에에엑!
놈들은 곧 허공에 매달린 채 괴성을 질렀고,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듯 미친 듯이 난동을 부렸다. 나는 들고 있던 검 두 개를 곧장 허공으로 날렸다. 궁수들 또한 허공에 떠오른 표적들을 향해 곧바로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날아간 검과 화살은 각각 좌우 괴물들의 몸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러자 2차로 솟아오른 수십 줄기의 그림자가 그 사이로 재빠르게 파고들더니, 이내 울컥 터지며 괴물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거센 비명이 주변을 왕왕 울렸다.
“아?”
하지만 모두를 처치하지는 못했다. 온몸이 걸레가 된 괴물은 네 마리에 불과했다. 나머지 두 마리는 화살이 꽂히기 직전, 스스로 그림자에 잡힌 촉수를 떼어내 도로 떨어졌다.
떨어진 두 마리는 곧바로 언덕 사이로 몸을 숨겼고, 이내 종적을 감추었다. 나는 재빠르게 마력 감지를 돌렸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감지를 벗어나는 기척 두 개가 잡혔다.
“놓치면 안 돼! 전방으로 40, 45, 아니 50미터!”
그러자.
“Terraemotus.”
콰르르르르르르릉!
헬레나의 목소리와 동시에, 전방의 일대가 무섭도록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강도가 심했는지 언덕이 무너질 정도였다.
이윽고 감지에 더욱 확실히 잡히기 시작한 두 마리의 기척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늘 한소영이 발표한 대응 중 하나가 바로 놈들과 맞닥뜨리면 무조건 지계 마법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괴물들은 이동 시 촉수와 돌기를 이용해 기척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지면 자체를 흔들어버리면 결국에는 이리저리 부딪칠 수밖에 없으니, 그에 따라 기척이 강제적으로 확실해지는 것이다.
이 정도로 기척이 확실해졌다면 다른 사용자들도 감지가 가능하다.
“───. ───. ───. 디그 인 더 그라운드!”
“───. ───. ───. 디그 인 더 그라운드!”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영창을 마친 마법사들이 일말의 주저 없이 주문을 외웠다.
디그 인 더 그라운드. 지면을 강제로 파내 구덩이를 만드는 기초 중의 기초 마법.
하지만 아무리 기초라고 하더라도, 수십 명의 동시에 시동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앞을 보면 알 수 있다. 무너진 언덕 너머로 평평하던 지면이 푹푹, 사정없이 파이기 시작한다.
언뜻 보면 중구난방으로 파이는 것 같지만, 계속해서 파이다 보면 결국에는 하나의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진다. 아마 지금쯤 괴물들은 죽을 맛일 것이다.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조금이라도 이동할라치면 구덩이가 사정없이 파여버리니.
물론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었다.
피피피피피피피핑!
구덩이를 표적으로 재차 날아가는 수십 발의 화살.
“천벌을 내리소서!”
이어서 안솔의 앙증맞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번쩍!
하늘에서 내려온 서너 줄기의 새하얀 벼락이, 구덩이 안쪽을 거세게 내려쳤다. 좋은….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번쩍! 번쩍! 번쩍! 번쩍!
…한 번으로는 모자랐는지 안솔은 연달아 네 번이나 천벌을 발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두 개의 기척이, 천벌을 기점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숨을 씩씩 몰아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잘했어.”
칭찬해주자, 안솔이 벌건 얼굴을 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잘했어요?”
“응. 좋은 연계였다.”
“와. 칭찬받았다. 그럼 한 번 더!”
“……?”
“천벌을 내리소서!”
“…….”
“천벌을…!”
“아니. 이제 그만해도 돼.”
이미 죽었는데 왜 자꾸 마력을 낭비하는 걸까.
어쨌든, 안솔은 그제야 천벌을 멈췄다. 잠시 후, 누군가 조용히 주문을 외우자 크고 깊게 파인 구덩이 안에서 흙으로 만들어진 뾰족한 기둥이 솟아나왔고, 그에 괴물들의 시체도 슬금슬금 밀려나왔다.
비로소 드러난 괴물의 시체는, 화살이 우수수 꽂힌 것도 모자라 온몸에서 허연 김을 피우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일단 적던 내용 중간에 잘라서 올립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아마 오늘 1회 더 올라갈 듯싶습니다. 아침쯤이면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최대한 빠르게 적어 올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