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60
00559 김수현, 한소영. 그리고 빗. =========================================================================
좋다.
절로 흡족한 기분이 들어, 나는 가볍게 머리를 주억였다. 비록 6마리밖에 출현하지 않았지만, 쭉 이어진 흐름을 보면 나름 괜찮은 전투였다. 한소영이 요구한 대응 방법을 그대로 실행해주었다.
그 방법이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증명한 것이다. 또, 예전처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인가.
나는 우선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전투가 끝난 후, 나는 자리에서 10분 가량 대기할 것을 명령했다. 흐트러진 배열을 가다듬고 시체를 회수하려는 일환이었다. 이내 앞쪽에서 무참히 찢어진 시체를 들어올리며 머리를 설레설레 젓는 선유운을 보고 있자, 문득 고연주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이상하네요. 수현. 이번에는 왜 6마리만 습격한 걸까요? 예전처럼 대규모가 아니라.”
그거야 간단하다.
“습격이 아닙니다. 정찰하러 나온 놈들이지요.”
“네? 정찰이요?”
“예. 놈들은 지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교활하죠. 무작정 달려드는 짐승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만큼, 어젯밤 패배 이후로 우리가 무엇이 달라졌는지 확인하러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한 명 정도 납치를 시도했을 수도 있고요.”
“아.”
그제야 이해가 됐는지 고연주가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아까 놓치지 말라고 한 거군요.”
“이제부터는 절대로 정보를 주지 말아야 하니까요. 이번에 그림자를 이용한 방법도 아주 좋았습니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오는 사용자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회답했다.
이윽고 시체가 너무 훼손이 심해 도저히 가져올 수가 없었다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나는 행군의 재개를 알렸다.
*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6마리 괴물들을 간단히 처리한 이후, 자신감을 얻은 남부 원정대는 계속해서 언덕을 넘으며 진군했다.
그러나 괴물들은 더는 습격해오지 않았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해 질 녘 노을이 깔릴 때까지 행군하는 동안 단 한 놈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밤을 새고 행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 남부 원정대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야영지를 설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모두가 저녁 식사를 마친 이후, 사용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경계를 서야 했고, 일부는 잠을 자러 천막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일부는 중앙의 커다란 천막으로 모였다. 이제는 연례 행사처럼 굳어진 지휘관 회의였다.
하지만 오늘 회의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고, 오늘 밤은 푹 쉬도록 하세요.”
한소영이 회의가 파함을 선언하자, 가벼운 박수가 뒤따랐다. 그리고 하나같이 웃는 얼굴로 몸을 일으킨다.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광경이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서로 씨근거리며 얼굴을 붉히기가 일쑤였는데, 이제는 서로 악수를 나누거나 수고했다고 덕담을 나누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랬다. 원정대의 분위기는 확실히 변화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더는 정체 모를 괴물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한소영이 발표한 대응 방법도 오늘 아침 교전에서 확실한 효과를 보았다. 첫 괴물 출현 이후 삐걱거리던 남부 원정대가, 공략에 한 발 진전을 보임으로써 다시 원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용자들이 천막을 나선 후, 한소영은 텅 빈 천막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바로 오른쪽 자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머셔너리 로드가 앉았던 자리였다. 그러나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갔는지 김수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소영은 한동안 김수현이 앉았던 자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휑하네.”
“언니. 회의 끝났죠? 그럼 치울게요.”
두 명의 높은 목소리가 동시에 흘러들었다. 한소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있는 힘껏 기지개를 피는 늘씬한 여인과 찢어지듯이 하품하며 입을 두드리는 한 꼬맹이를 볼 수 있었다. 연혜림과 박다연이었다.
“나는 기록 정리할게. 너는 의자 집어넣어.”
한소영의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었는지, 연혜림은 탁자에 흐트러진 기록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다. 이내 하품을 마친 박다연도 의자 쪽으로 자박자박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한소영도 도와줄 생각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막 의자를 집어넣으려던 박다연이 얼핏 고개를 돌렸다.
“아차. 소영이 언니. 고맙다는 말은 했어요?”
“응?”
한소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다연은 배에 잔뜩 힘을 주며 의자를 드르륵 밀어 넣었다.
“머셔너리 로드한테요. 들어오면서 마주쳤어요. 오늘 경계 순번이라고 하시던데.”
“…그래?”
“네. 그런데 그 사람 확실히 대단하기는 해요. 고작 하루 만에 원정대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꿨잖아요. 아무튼 언니. 이대로 입 싹 닫기는 좀 그러니까, 찾아가서 고맙다고 말이라도 좀 해봐요.”
“왜? 뭐가 고맙고, 대단한 건데?”
회답은, 한소영이 아닌 연혜림에게서 나왔다. 박다연은 다시 종종 걸음을 옮기며 의자를 잡았다.
“어제 새벽 습격이요. 시체 우리한테 건네줬잖아요.”
“그런데?”
“네? 그런데 라니요?”
“나는 열 받던데. 그거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밤새 조사에 매달렸잖아.”
그러자 박다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연혜림을 응시했다. 그리고 한숨을 푹 흘리더니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후유. 됐어요. 말을 말죠.”
“너 또 그런다. 빈정대지 말고. 그럼 설명을 해주던가.”
“아니. 정말 몰라서 물어요? 어제 습격에서 괴물들이랑 부딪치고, 시체 수습한 사용자들이 누구에요?”
“머셔너리 클랜이지.”
“그렇죠. 그럼 그 시체를 하나의 성과로 볼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성과를 모조리 우리한테 넘기고, 조사 및 발표를 우리가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발표한 내용이 오늘 실제로 효과를 봤고요. 물론 그것도 머셔너리 클랜이 증명해주었고요. 즉 이 모든 게 다 머셔너리 로드가 우리한테 양보한 거고, 이루어준 거라고요. 네? 이제 이해했어요? 언더스탠드?”
“아니.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박다연의 말인즉, 재주는 머셔너리가 부리고 돈은 이스탄텔 로우가 챙겼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연혜림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박다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래. 머리에 전투만 들어찬 사람한테 기대한 내가 바보지.”라고 중얼거리고는, 설명을 포기한 듯 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박다연의 두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어?”
한소영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지 텅 빈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한편. 같은 시각.
둘이 다투는 사이 천막을 나선 한소영은, 어딘가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박다연의 말에 따르면 오늘 김수현은 경계를 서야 한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김수현은 남부 원정대에서 클랜 로드를 넘어 부대장의 신분이지만, 경계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심지어 한소영도 순번이 되면 경계를 서야 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혜택은 있다. 다른 사용자들과 똑같이 외곽을 경계하는 건 아니고, 야영지 중앙에 가만히 앉아있는 정도랄까. 그런 만큼 혹시 모를 일이 터지게 되면, 경계를 서는 사용자들은 중앙의 지휘관의 명령을 받게 된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그 중앙에는, 모닥불 하나가 탁탁 불똥을 튀기며 타오른다. 그리고 모닥불 주변으로는, 한 사내가 통나무에 걸터앉은 채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수현이었다.
한소영은 가만히 그런 김수현을 관찰했다. 무척이나 집중하는 얼굴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회의가 끝났음에도 공략을 점검하고 있구나.
불빛이 스며든 발간 눈동자로 지도를 보는 모습은, 뭇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로 진지했다.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여인은 무언가에 집중하는 사내에 반한다고.
“응?”
그때였다. 모종의 시선을 느꼈는지, 한창 지도를 짚던 김수현이 언뜻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 한소영을 바라본 순간 놀란 토끼 눈으로 입을 열었다.
“어.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내 담담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모닥불로 다가가 남몰래 호흡을 추슬렀다. 김수현의 시선이 따라 올라왔다.
“놀랐습니다. 여기는 어쩐 일로….”
“머셔너리 로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하고 싶은 말이요?”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앉아도 될까요?”
실례가 될 리가 있나. 김수현은 곧장 머리를 끄덕이며 한 쪽으로 비켜 앉았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하늘의 영광을 벗어 통나무에 덮어주기까지.
한소영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추스르며, 김수현이 마련해준 자리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
“…….”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타닥타닥!
아니. 잠시가 아니었다.
한소영이 앉은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다.
분명히 할 말이 있다고 한 것 같은데. 김수현은 안절부절못하며 옆을 힐끔거렸으나, 한소영은 양 무릎을 꼭 모은 채 지그시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음….”
결국 참지 못한 김수현이 먼저 입을 열 무렵, 문득 꾹 닫혀있던 한소영의 입술이 살그머니 떼어진다. 김수현은 반사적으로 입을 닫았다. 그리고 뚫어질 듯이 한소영을 응시했다. 그런 김수현의 눈에 뇌쇄적인 미를 뿌리는 새하얀 목울대가, 꼴깍 움직이는 게 밟혔다.
“머셔너리 로드.”
오랫동안 주저하기는 했지만, 마침내 한소영의 말문이 조용히 열렸다. 김수현은 덩달아 긴장했다.
“저….”
“예, 예. 말씀하세….”
“되게 한심하지 않나요?”
“…예?”
김수현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한소영은 도리어 무덤덤했다. 오히려 서글픈 기색을 내비치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수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번에 강철 산맥을 공략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만일 머셔너리 로드가 남부 원정대에 없었다면 어땠을까….”
“…….”
“사실, 어제까지 남부 원정대의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았잖아요. 제가 어떻게든 해결했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야 했는데, 총 사령관이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하고 구경만 했죠.”
“…….”
“그렇게 하루하루를 소득 없이 고민만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머셔너리 로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해주셨어요.”
“…….”
“요즘 제 능력이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어쩌면 총 사령관의 자리는, 제가 아닌 머셔너리 로드에 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 순간, 지금껏 묵묵히 듣고만 있던 김수현이 한소영의 말을 딱 짤라 끊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윽고 김수현은 전보다 더욱 높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쓸데없는 걱정이죠.”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랄한 비판.
김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강철 산맥은 혼자서는 절대로 공략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분명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리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에요. 저는 그 책임을….”
“예. 그렇죠. 그리고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그 책임을 나누었죠. 저를 신뢰해 선봉 부대에 임명했고 또 그만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건, 이번 공략에서 저에게 기대하는 게 있어서 그러신 게 아니셨는지요.”
“…네.”
이제는 약간 화난듯한 김수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한소영은, 간신히 수긍했다.
강철 산맥은 혼자서 공략할 수 없다.
김수현도, 한소영도 알고 있다.
그 한 마디에는, 사실상 김수현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언과 위로를 포함한 상태였다.
그제야 김수현이 굳은 얼굴을 풀고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이해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머셔너리 로드.”
“아니요. 똑같은 말이라면 더는 듣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도 못 들은 걸로 하지요. 설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말씀하신 건 아닐 테니까요.”
“…….”
이번에는 한소영이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처음에는 박다연의 말마따나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왔는데, 김수현을 보고 앞에 서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약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왜 그런지는 한소영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하려고 하는 건지도.
평소에는 무시무시한 철벽을 쌓아두지만, 결국에는 한소영도 여인이다. 힘들 때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위로 받고 싶어하는 한 명의 평범한 여인. 철혈의 여왕은 홀 플레인에 들어와 갖게 된 이명에 불과하지, 한소영의 본질을 이루지는 못한다.
서로 침묵한 채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한소영은 다시 모닥불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한소영의 입가가 곧 천천히, 그리고 미미하게 움직였다.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여전히 한소영을 쳐다보는 김수현의 얼굴에 돌연 멍한 기색이 떠올랐다.
한소영이 입을 열었다.
“혹시 아시나요?”
“예, 예?”
“저는 머셔너리 로드를 볼 때마다 항상 감사하고, 또 미안해요.”
“어…. 음….”
“잘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부터 항상 받기만 한 것 같거든요. 머셔너리 로드는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시고. 저는 받고, 받고, 또 받고.”
“아. 저는…. 그냥….”
“알아요. 머셔너리 로드가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주시고 아껴주시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욱 미안해하는 건지도 몰라요. 계속 받기만 하는 입장에서는요.”
“그, 그러신가요.”
“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니, 확실히 생각을 해요.”
“……?”
문득 말을 멈춘 한소영은 이내 후우, 숨을 길게 흘렸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김수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나도, 머셔너리 로드에게 무언가 해드리고 싶은데…. 라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폭탄 발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한소영으로서는 최대한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철벽을 쌓았고, 차후 철혈의 여왕이라 불리는 여인이 그런 발언을 했다? 다른 사내들이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일.
여기서 김수현이 조금만 더 눈치가 좋았다면. 아니, 한소영에 품은 감정이 아주 약간만 달랐다면.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김수현이었다.
타닥타닥!
활활 타오르는 불빛에 한소영의 양 볼이 발갛게 익은 가운데. 한동안 망연히 있던 김수현의 얼굴에, 갑작스럽게 앗 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무언가를 기대하는듯한 한소영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이스탄텔 로우 로드. 조금 뜬금없지만, 혹시 저번에 제가 드린 빗, 가지고 계십니까?”
“…빗이요? 네. 있어요. 항상 가지고 다녀요.”
정말 뜬금없는 말이기는 했지만, 한소영은 곧장 회답했다.
달라졌다. 예전이라면 놔두고 왔다거나,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갖고 있다고 말을 했을 텐데. 이제는 항상 가지고 다닌다는 하나의 진실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면 김수현이 기뻐해줄 것 같았으니까.
이윽고 한소영이 정말로 빗까지 꺼내 보이자 김수현의 두 눈동자에 밝은 이채가 스쳤다.
“저 그러면 말입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간절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간절한 부탁?
한소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초감각이 변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수현에게서 하나의 확고한 자신감이 느껴졌는데, 갑작스럽게 굉장히 조심스럽게 변했기 때문이다.
한소영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수현은 입에 침을 적시더니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머리…. 음….”
“응?”
“그러니까, 머리…. 머리 한 번만 빗어드리면 안되겠습니까?”
“…네?”
한소영은 의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처음으로 예쁜 아미가 좁혀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용기 내어 진심을 말했는데,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기껏 돌아온 말이 머리 좀 빗어주면 안되겠냐고 한다.
화를 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웃어야 하나.
당최 감을 잡지 못할 무렵, 또 한 번 초감각이 전해주는 정보가 변화했다.
그것은 하나의 욕망이었다.
그래. 욕망.
하지만 성욕이나 육욕 같은 추악한 욕망은 아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욕망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저 꼭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한순간 무수한 고민이 들었지만, 한소영은 곧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어차피 해둔 말도 있겠다. 또 딱 잘라 거절하기에는 그 열망이 너무나 간절하고 애절하게 전해져, 결국 한소영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해주었다.
이윽고 빗을 건네 받은 김수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소영의 뒤에 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등 뒤로 덜덜 떨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자 한소영의 내면으로 뜻 모를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가득 차오른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 요즘에는 머리 제대로 다듬지도 못했는데. 등등. 아직 당혹감이 가시질 않았는지, 한소영의 머릿속으로 실없는 상상이 자꾸만 차오른다.
“그럼.”
그때, 김수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듯이, 빗을 정수리 위에 올려놓았다.
살짝, 닿았다. 이내 빗을 살그머니 구부린 김수현은 정수리부터 아래까지 단번에, 그러나 부드러이 빗어 내렸다.
빗에 걸린 윤기 흐르는 머리칼이 사르르, 곱게 정리된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아…?”
두 눈이 절로 크게 떠지는 것과 동시에, 한소영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재빠르게 입을 막았다.
그러나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한소영은 자신의 머리칼을 살며시 그러모으는 기척을 느꼈다. 그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는, 처음으로 닿는 외간 사내의 손길.
이윽고, 빗은 다시 한 번 머리칼을 시원스럽게 쓸어 내렸다.
“하아…. 읍!”
또다시 절로 흘러나온 신음. 한소영은 흐트러지려는 얼굴을 참으며 최대한 무표정 하려 애썼다. 그러나 김수현의 빗은 계속해서 빗어졌다.
빗는다.
“윽…!”
빗는다.
“흡…!”
빗는다.
“흑…!”
한소영은 필사적으로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김수현은 그저 단순히 머리를 빗어줄 뿐이었다.
그럼 한소영은 도대체 왜 이렇게 반응하는 걸까?
그것은 한소영의 초감각. 그리고 김수현의 한소영의 머리를 빗어주는 행위에 품은 감정에 기인한다.
초감각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조건 감각화된 정보를 받아들인다. 상대가 추악한 욕망을 크게 품을수록 한소영은 더욱 크게 고통 받는다.
그런 만큼, 그 반대의 상황도 가능하다.
‘조금 더 세게.’
‘머리 상해요.’
1회 차 시절.
이스탄텔 로우에 들어간 이후, 김수현은 한소영의 머리를 부단히 빗어주었다. 그럴 때마다 한소영은 항상 기분 좋은 얼굴로 김수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잘 빗고 못 빗고를 떠나서, 그러한 일들은 김수현에게는 더없이 그립고 그리운 기억이었다. 오직 둘만이 간직하는 소중한 추억.
한소영을 잃은 이후, 김수현은 항상 그런 추억들을 회고했다. 그런 기억 하나하나가 김수현이 미치지 않고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되살리면 몇 번이고 다시 빗어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찌어찌 되살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바람은 미묘한 방향으로 엇나가버렸으니까.
그러할진대.
그러한 바람이,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던 오늘 비로소 이루게 되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갑작스럽게. 그 결과 1회 차 때부터 수 년 동안 더듬으며 매달려온 감정들이, 바로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크게 폭발한 것이다.
동경. 갈망. 사모. 슬픔. 애처로움. 애통함. 우울. 구슬픔. 서러움. 애석함. 애틋함. 괴로움. 절망. 실망. 좌절. 낙담. 비관. 체념. 희망. 기쁨. 환희. 희열.
이 모든 감정들이 넘쳐흐른다. 그러다 종래에는, 하나의 ‘위하는 마음’으로 귀결돼 한소영에게 고스란히 흘러들고 있었다. 한소영의 온몸에 따뜻한 쾌감과 끝없는 감미로움이 넘치고, 흐른다. 마치….
아니. 그 어떤 말이 필요할까.
지금 이 한순간. 한소영을 잃은 이후, 김수현이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품었던 모든 감정들이 하나하나 전해지고 있는데.
이 사내는…. 도대체….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소영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면을 꽁꽁 옭아매던 무언가가, 스르륵 힘없이 풀려나가는 것을.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항상 무표정하던 얼굴이 마침내 서서히 무너진다.
한소영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로 김수현을 돌아보았다.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그제야 김수현도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 끈임 없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괜찮으십니까?”
한소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들어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김수현은 당황했다.
“미, 미안합니다. 그렇게 싫어하실 줄은…. 정말로 미안합니다.”
당황한 김수현이 곧장 손을 떼려는 찰나, 문득 한소영이 김수현의 손을 굳게 붙잡았다. 찰나의 순간, 김수현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고 한소영의 눈에 고민이 서렸다.
사실은, 아직도 부끄럽다. 그러나 이제는 부끄러움보다는, 다른 감정이 한소영을 더욱 강하게 이끌고 있었다.
“아…. 으…. …세요.”
마치 미묘한 수치심이 섞인듯한, 속살거리는듯한 목소리. 김수현의 의아함이 더욱 짙어졌다.
“예?”
“…주세요.”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미안합니다. 잘 안 들려서 그러는데, 다시 한 번 말씀을….”
“빗…. …주세요.”
“…빗을 달라고요?”
“계속…. 계속, 빗어주세요!”
결국, 한소영은 차오르는 수치심을 참으며 큰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기분 좋아요…. 그러니까 계속, 계속 빗어주세요….”
이왕 내친 거, 한 번 더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치 달콤한 키스를 하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상냥하게 빗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
다시금 흘러들어오는 감각적인 감미로움에, 한소영의 허리가 살며시 비틀렸다.
한소영은 더 이상 입을 막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밤새 적었습니다. 이렇게 집중하기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하얗게 불태운 것 같은데, 이상하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아요.
아무튼, 아. 드디어 이 내용을 적었네요. 200회에 뿌려둔 떡밥인데, 회수하는데 참 오래도 걸렸습니다. 그래도 개운해요. 정말로.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