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61
00560 꿈속의 여인. =========================================================================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머셔너리 로드의 의견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네. 그럼…. 머셔너리 로드.”
“…….”
“머셔너리 로드?”
“…아. 예, 예.”
두어 번 나를 부르는 목소리.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들자, 수십 명의 사용자들이 모조리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중 상석에 앉은 한소영은 예의 무감정한 눈초리를 지그시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털었다. 아무래도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방금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알고 계시나요?”
“예. 괴물의 샘플을 확보하는 건 성공했으니, 이제 차후 선도 계획을….”
“…그래도 듣고는 계셨군요. 하지만, 회의에 조금 더 집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죄송합니다.”
딴생각에 빠져있던 게 사실인 터라, 나는 깔끔하게 사과했다.
한소영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면에 걸린 지도를 가리켰다. 나가서 설명하라는 뜻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도 나는 의아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아니. 실은 살짝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고나 할까.
어젯밤, 한소영은 확실히 이상했다. 어떻게 이상한지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냥 내가 알고 있던 한소영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랄까?
심란한 마음에 나는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회의에 참가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언제나와 똑같다. 흡사 어젯밤 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더욱 기분이 미묘했다. 언제나와 같은 한소영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차오른다.
…젠장.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럼 앞으로의 선도 계획에 관해서 간략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면, 한소영의 말대로 모든 걸 잊고 공략에 집중하는 게 나을 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몸을 돌려 커다란 지도를 돌아보았다. 이 지도는 길을 찾기 위한 지도가 아닌, 공략을 하면서 만들어가는 미완성 지도이다. 그런 만큼 지금껏 북 대륙이 걸어온 길을 제외하면 그 어떤 정보도 적혀있지 않다.
나는 현재 남부 원정대가 멈춘 지점을 짚고 나서, 일직선으로 쭉 그어 올렸다.
“우선 가는 길은 간단합니다. 지금까지와 다를 것 없이, 무조건 일직선으로 나아갈 생각입니다.”
“일직선이면…. 정면 방향이군요. 그럼 왜 그 방향을 선택하셨는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한소영이 곧바로 물어와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일전에 회의에서 말씀드렸듯이, 괴물들을 상대하는데 우리는 총 3단계 계획을 설정했습니다. 1단계. 샘플 확보. 2단계. 조사 및 대응 방법 연구. 3단계. 근거지 습격 및 섬멸.”
“네. 그렇죠.”
“이 중 우리는 현재 2단계까지 이루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3단계.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괴물들의 근거지를 찾는 게 선결 과제가 되겠죠. 그리고 저는,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에 괴물들의 근거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확신합니다.”
“…….”
한소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여전히 궁금해하는 얼굴이다. 물론 다른 사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한 사내가 차분히 손을 들며 발언권을 요청 의사를 표시했다. 허락한다는 의미로 손짓하자 침착히 몸을 일으킨다. 오며 가며 몇 번 얼굴은 본 것 같은데, 자세한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머셔너리 로드. 괴물들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습격하고 있는 건 확실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어째서 차후 가는 방향에 근거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과 연관 지을 수 있는지. 저는 그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론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저는 근거지가 어디 있는지 알거든요. 라고 말하고 싶은걸 꾹 눌러 참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잠시 이렇게 생각해보시죠.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예를…. 말입니까?”
“예. 가령 우리가 북 대륙에 있고, 강철 산맥에서 괴물들이 대규모로 공격해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거야…. 아.”
막 무언가를 말하려던 사내의 얼굴에 한순간 이채가 스쳤다. 머리가 아주 멍청하지는 않은 듯싶다.
말인즉, 괴물과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자는 소리였다.
“물론 우리를 먹이로 생각하고 습격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됩니다. 틀리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괴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놈들은 어제, 도대체 왜 우리를 정찰하려고 했던 걸까요?”
“우리의 정보를 파악하려고…. 그런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면, 그건 놈들이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으로도 해설될 수 있지요. 엄밀히 말해서, 괴물들의 입장에서는 우리는 보금자리에 쳐들어온 침략자에 불과합니다. 저는 바로 그 부분에서 선도할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으음.”
나는 여기서 대충 말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일부러 자세하게 말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뭉뚱그려 말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말하는 것들은 거의가 핑계에 불과했으니까.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구구절절 말해봤자 나만 피곤해진다. 여기서 나는 강철 산맥을 전혀 모르는 입장이 돼야만 한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쪽으로 진군해야 한다…. 는 당위성을 심어주는 정도로만 말해도 충분할 것이다.
사내는 머리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고 말을 하며 일어날 때처럼 차분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사내가 앉자마자, 누군가 곧바로 이어서 손을 들었다.
무사 로드, 고오환이었다.
왠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 나는 지체 않고 입을 열었다.
“설령 근거지를 찾지 못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머셔너리 로드.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요. 그러다 만에 하나 근거지를 찾지 못….”
냉큼 입을 열은 고오환은 도중에 말을 멈추고서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우리의 목적은 길을 트는 것에 불과하지, 강철 산맥 모든 지역의 안정화가 아니니까요. 근거지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대로 좋지 않겠습니까? 남부 원정대는 지정된 일시까지 최대한으로 진군한 후, 다음 차례인 북부 원정대와 교체하면 그만입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꺼낼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큰 상관은 없다. 모르긴 몰라도, 현재 동부 원정대에 불만을 가진 사용자들이 한두 명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는 공략 과정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화계 공략 계획의 덕을 가장 크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진군하다 멈추었으니까.
“저도 머셔너리 로드의 의견에 동의해요.”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에, 한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강철 산맥에 들어온 이상, 어차피 가야 할 길이고 또 공략해야 하는 지역이에요. 그러니 이제 와서 괴물을 피할 이유는 없지만, 마찬가지로 일부러 찾아 다닐 필요도 없겠지요.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됩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윽고 한소영은 곧게 몸을 일으켜 나를 응시했다.
“그럼 머셔너리 로드의 선도를 수용하는 걸로 하고, 아침 회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모두, 바로 출발 준비를.”
그렇게 아침 회의가 끝이 났다.
*
시간이 흘렀다.
야영지를 정리한 후, 나는 회의에서 말한 대로 언덕의 그림자 지대를 일직선으로 횡단했다.
그러나 아침에 출발한 원정대는 늦은 오후까지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괴물은 습격은커녕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그 탓에 빠른 속도로 행군해 상당한 거리를 진군할 수는 있었으나,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1회 차 때 여기서 엄청나게 힘들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쉽게 지나치지는 못했다.
사실 약간 아쉬운 상황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기조라는 건 하나의 흐름이라고 생각하니까. 내려갈 때는 한없이 곤두박질치지만, 반대로 올라갈 때는 끝을 모르고 올라간다.
어제 부로 남부 원정대의 기조가 상승하기 시작한 이후, 나는 괴물들이 어느 정도는 출현해주기를 원했다. 이제 대응 방법도 밝혔겠다. 차근차근히 전투를 풀어나가다 보면 경험은 물론 괴물을 상대하는데 자신감이 생기게 되고, 그에 따라 상승세인 기조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갈고 닦으며 진군하다가 근거지를 공략할 때 즈음 최대한 날카롭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이래서는 도로 무뎌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쨌든 상당히 아쉽기는 하지만 이건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
좌우간, 언덕의 그림자 지대만 넘으면 근거지는 코앞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려는 일환으로 행군 속도를 올렸으나, 후방에서 제발 휴식 시간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근접 계열들은 딱히 힘들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 마법사나 사제들이 체력이 부치는 모양이다.
결국 20분 휴식 명령을 내린 후, 나는 언덕을 등지고서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찜찜한 기분을 지우고자 머릿속 의문을 하나씩 차분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득, 무척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고 있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
주변은 어두웠다. 말 그대로 어두운 공간이었다. 모든 공간에 검은 장막을 씌웠는지 칠흑같은 어둠이 가득히 들어차 있다.
흡사 땅속이라도 되는 듯 단 한 줄기 빛조차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
그리고, 그런 공간을 헤매는 한 여인이 있었다.
“오라버니!”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안솔이었다.
다급하기 짝이 없는 안솔의 얼굴은 내면의 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벌써 이 공간을 돌아다니는 것도 30분째. 사실 안솔도 왜 자신이 이 공간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기억하기로는, 오늘도 무사히 행군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한 다음, 경계를 마치고 천막 안으로 들어와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공간에 서 있었다.
“오라버니!”
다시 한 번 외쳐보지만, 회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하기야 이미 몇 번이고 불러봤으나 모두가 의미 없는 외침에 불과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안솔은 어쩌면 꿈이 아닐까라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꿈이라면 깨야 하는데, 볼을 꼬집고 바닥을 미친 듯이 뒹굴어봐도, 눈에 보이는 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라버니이이이이!”
하지만 그래도 안솔은 김수현을 불렀다.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안솔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으니까.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기도하며 하염없이 기다릴 뿐.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이제 돌아다니는 것도 서서히 지쳐갈 즈음.
– 도와…. 주세요….
어느 순간, 어디선가 자그마한 목소리가 조용하게 흘러들었다.
조금씩 느려지던 안솔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불안하기 그지없는 눈동자로 살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 방금 누구에요? 누구 있어요?”
– 도와주세요…. 제발….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다. 누군가 도와달라고 말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안솔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틀었다.
“사, 사람이에요?”
– …그쪽이야말로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조금은 낮아진 목소리가 안솔의 물음에 회답했다. 무언가 모진 고초를 겪은 듯 목소리는 쉬다 못해 갈라터져 상당히 거슬렸다. 그래도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운 느낌이 남아있는 게, 원래는 꽤나 아름다운 목소리였을 듯했다.
“모, 모르겠어요. 저도 왜 여기에 있는지. 도, 도대체 여기가 어디죠?”
–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럼 먼저 진정하시고, 지금부터는 절대로 목소리를 낮추도록 해요. 절대로, 절대로 크게 소리내지 말아요.
안솔은 자신도 모르게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 네, 네.”
– 좋아요. 그럼 우선 제가 있는 곳으로 와주시겠어요? 뛰지 말고, 천천히.
그러자 허공의 목소리는,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조곤조곤 말하며 안솔을 이끌기 시작했다.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 안솔의 마음에 비로소 한 줄기 위안이 찾아 들었다. 단순히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인지는 모르나, 목소리에서 나쁜 기분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
– 거기서 왼쪽으로 두 걸음…. 그래요. 잘했어요. 그럼 이제, 정면으로 팔을 내뻗어보세요.
안솔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걸음을 옮긴 후, 차분히 팔을 내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지금껏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공간이 한순간 변화가 생겼다.
물론 어두운 공간 자체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안솔은 내뻗은 손끝에서 뭔가 가슬가슬한 감촉을 느꼈다. 동시에 차가운 기운도 전해지는 게, 마치 잔뜩 녹이 슨 철문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 그대로 문을 밀어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정말 조금씩 밀어도 좋으니까 절대로 소리를 내면 안 되요.
안솔이 지금껏 하라는 대로 해오며 계속해서 들은 말은, 절대로 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
절로 긴장된 마음에 안솔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들은 대로 손에 조금씩, 조금씩 힘을 주며, 보이지 않는 문을 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끼릭, 끼리릭!
너무 오래된 문이라서 그런 걸까.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결국에는 소음이 나고 말았다. 소음 자체는 미미했지만, 워낙 조용한 공간이라 그런지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 아…. 아…. 안 돼….
그 순간, 잔뜩 실망한 목소리가 안솔의 귓전을 울렸다.
안솔은 뭔가 직감적으로 일이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이, 이제 어떻게 해요?”
– 저는 괜찮으니, 빨리 도망쳐요. 어떻게든.
“네, 네?”
– 어쩔 수 없어요. 그쪽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소리로 파더의 의식이 깨어났어요. 파더는, 지금 그쪽이 있는 걸 확실하게 느끼고 있어요.
“네? 그게 무슨…?”
– 벌써 지척까지 왔어요. 설명할 틈이 없으니, 어서!
지금껏 최대한 낮은 음색을 유지하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안솔은 당황했다. 도망을 치라고는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즈음.
– …….
문득, 주변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안솔은 온몸에 엄청난,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불길함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멍하니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안솔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사악한 기운을 흘리는 정체 모를 무언가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대로 있으면, 확실히 죽는다.
아니.
– 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누….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 무언가는 이미 안솔의 앞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 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
순간적으로, 안솔의 정수리가 어둠에 붙잡혀 한껏 틀어 올려졌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상황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안솔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오라…. 버니….”
그때였다.
– 가만히 있지 마!
안솔이 열은 문에서, 느닷없이 새하얀 팔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안솔의 팔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우악스럽게 안쪽으로 잡아 끌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배꼽 부근이 훅 쏠리는 느낌과 함께, 안솔의 몸이 문안으로 삽시간에 끌려들어갔다. 뾰족한 비명이 어두운 공간을 왕왕 울렸다.
– 도망쳐! 도망쳐!
그러는 와중에도 도망치라는 소리가 연달아 귓가를 때렸다.
안솔은 손길에 끌려가면서도, 아까부터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어온 방향을 향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러니까 문 안쪽에서 말을 걸어온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 도망치라고 했잖니…. 히히히히히히히히!
안솔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
“아아아아아아아악!”
거센 비명이 천막을 떠르르 울렸다.
고연주는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으학, 으하후학, 으헤히하하학!”
기괴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연주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이어지는 행동 또한 신속했다. 그림자를 이용해 라이트 스톤을 키는 것과 동시에 베개 밑에 넣어둔 단검을 꺼내며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고연주의 눈에 들어온 건, 적의 침입이 아니었다. 오직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안솔만이 보일 뿐.
이윽고 같은 천막에서 자던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한 명 한 명 일어나기 시작했다.
“꿈…. 꿈….”
안솔의 입에서 쥐어짠듯한, 그러나 공포에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연주는 곧바로 다가가 안솔을 감싸 안았다.
“솔아. 왜 그러니. 응? 왜 그래?”
“도와달라고…. 도와달라고…. 그런데…”
연신 헛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안솔의 두 손은 끈임 없이 의미 없이 허공을 젓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응? 이제 괜찮으니까 진정하렴.”
“아니…. 아니 아니…. 도망치라고…. 그리고 알려달라고….”
하지만 말하는 사용자가 안솔인 이상, 무조건 헛소리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제는 침낭을 미친 듯이 그러모으는 안솔. 고연주는 그런 안솔의 행동을 가만히 보다가, 아직 멀뚱멀뚱 눈만 끔뻑이는 클랜원들로 고개를 돌렸다.
“유정아. 지금 빨리 클랜 로드님 모셔와.”
“으, 응? 아니. 네?”
“어서!”
“네, 네!”
엄하게 소리치자 이유정이 후다닥 밖으로 달려나갔다.
다음으로, 고연주는 임한나를 응시했다.
“한나. 너는 빨리 기록 하나랑 깃펜 하나 가져오고. 기록은 되도록이면 큰 걸로.”
임한나는 되묻지 않았다. 그저 졸린 듯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재빠르게 기록 하나와 깃펜 하나를 가져오자, 고연주는 두말 않고 안솔의 앞에 기록을 놓았고, 손에는 깃펜을 쥐어주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안솔이 손이 깃펜을 꾹 잡았다. 마치 이걸 원했다는 것처럼.
고연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안솔을 품에 꼭 안아 괜찮다고 속삭이며 보듬어줄 뿐.
잠시 후.
“일곱…. 열하나…. 아니. 열넷…?”
안솔은 미미하게 떨면서도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깃펜을 으스러져라 잡으며 기록에 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이었다.
안솔은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애당초 솜씨도 서툴거니와 손마저 떨리는 터라 엉망진창이었지만, 확실한 건 그림이 분명 하나의 형체를 보이고 있다는 것.
“하나….”
이내 하나의 형체를 그린 안솔은, 옆 공간에 또 하나의 형체를 그려내었고.
“두, 둘….”
빈 공간을 찾아 또 하나를 추가로 그려내었다.
조금씩 틀리기는 하지만, 형체는 거의가 엇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고연주는 가장 명확하게 그려진 형체를 유심히 주시했다. 그리고 형체에서 연상된 이미지를 떠올린 순간, 아미를 살짝 찡그리고 말았다.
“이건…?”
============================ 작품 후기 ============================
늦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_(__)_
저를 매우 치세요.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