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62
00561 꿈속의 여인. =========================================================================
조용하다.
홀로 환한 불빛을 뿜어내는 야영지 중앙의 천막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그리 넓은 천막은 아니다. 원정대 부대장이 사용하는 만큼 나름 신경 쓴 티는 역력하나, 애당초 빠른 설치 및 철거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천막이라 누가 봐도 좋다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공간이 작은 만큼, 너덧 개의 라이트 스톤으로도 새벽의 어둠을 몰아내는데 충분하다는 게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랄까.
고요한 정적은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천막에는 한 사내와 두 여인이 탁자를 둘러싼 채 앉아있었다. 그 중 유독 어려 보이는 소녀는 한껏 겁에 질린 얼굴로 옆에 앉은 여인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여인은 그런 소녀의 머리를 부드러이 보듬으며 시선을 들었다.
건너편에는, 사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수현. 혹시 짐작 가는 거라도 있나요?”
혹여 방해할까 봐 그런지 고연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록을 보고 있던 김수현은 흘긋 시선을 올려 고연주를 응시했다.
안솔이 오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이후, 이유정은 고연주의 지시로 곧장 김수현에게 보고했다.
상황 파악을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수현은 곧바로 안솔의 입을 틀어막은 채 자신의 천막으로 데려왔다. 다른 사용자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이상한 소문이 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참 유난 떤다고 할 것이다. 고작 꿈 하나에 이 새벽 밤중에 난리를 친다고.
그러나 김수현과 고연주는 다르다. 안솔의 신기에 가까운 능력을 몇 번이나 보고 덕을 본 입장이라,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내 도로 시선을 내린 김수현은 기록을 이모저모 살피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워낙 그림이 개떡….”
“어엉….”
“흠. 약간 알아보기 힘들어서요. 그래도 짚이는 게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그래요?”
무척 서러워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김수현은 곧바로 말을 정정했다. 그러자 고연주의 눈이 반짝였다. 짚이는 게 있다는 말이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수현은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확신하는 건 아니에요.”
말하기 싫다는 뜻. 고연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혹시 그거 아닌가요?”
“그거?”
“오늘 행군 중에요. 수현이 그랬잖아요. 뭔가 중요한걸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아아.”
김수현은 잠시 눈을 끔뻑였으나 곧 싱겁게 웃어 보였다. 마치 별걸 다 기억한다는 듯한 미소였다. 문득, 고연주는 한없이 칭얼거리던 안솔이 갑작스럽게 잠잠해진 것을 느꼈다.
김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건 아닙니다. 제가 무얼 놓치고 있는지는 이미 기억해낸 상태거든요.”
“그래요?”
“예. 이거랑은 상관없는 부분인 듯싶습니다.”
“…그렇군요. 어쨌든 미묘하네요. 불행 중 다행인지. 아니면 다행 중 불행인지.”
기억했다는 건 다행이지만, 해결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골칫거리가 될 소지가 다분한, 또 하나의 문제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도 명확한 게 아닌 암시하는 수준으로. 고연주가 말한 건 바로 그런 뜻이었다.
하지만 김수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설상가상. 원래 공략이 그런 거죠.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건 제가 따로 염두에 두도록 하지요.”
그리고 주섬주섬 기록을 챙겨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다. 그런 김수현을 보자 고연주는 가슴을 맴돌던 불안감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언제는 한 번 쉬운 적이 있었나. 항상 여러 문제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 문제를 모조리 깨부수며 온 게 바로 저 사내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한 고연주의 입가에 비로소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이윽고 아직도 멍하니 김수현을 쳐다보는 안솔에게 고연주가 소곤거리듯 속삭였다.
“우리 솔이~.”
“응?”
“오늘 밤 오라버니랑 언니랑 같이 잘까?”
“오라버니랑, 언니랑?”
안솔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득돌같이 김수현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앓는지 흐느끼는지 구분이 가지 않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어필하려 애썼다.
고연주는 킥 실소를, 김수현은 어이없다는 기색을 비쳤다. 그러나 곧 길게 한숨을 흘리며 어깨를 들먹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안솔은 쪼르르 달려가 침대에 다이빙하듯이 뛰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트 스톤의 불빛이 꺼짐과 동시에 천막으로 아늑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비록 3명이 눕기에는 한참이나 비좁은 침대였으나, 그래도 안솔은 좋았다. 킁카킁카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에서는 김수현의 넓고 단단한 가슴이, 뒤에서는 고연주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젖가슴이 빈틈없이 밀착시켜와, 온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거기다 자장가까지.
사실 고연주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섹시한 터라 자장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색이다. 하지만 김수현이 서너 번 등을 토닥토닥해주자, 안솔은 곧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안솔은 꿈을 꾸었다.
이번에도 같은 공간이었다.
오직 시꺼먼 어둠만이 들어차 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공간. 겨우 안 좋은 기분을 털고 신나게 잠이 든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또 같은 공간에 서 있다.
안솔은 멍하니 고개를 돌리다가 우뚝 시선을 멈추었다. 근처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안솔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 기운은 아까 자신을 잡기 직전까지 갔던 정체 모를 무언가였다. 이번에는 시작부터 나온 것이다. 마치 네가 다시 올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윽고 그 무언가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안솔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두 눈이 그렁그렁해진다. 그때였다.
돌연히, 안솔은 누군가 자신의 정수리에 툭 손을 얹는걸 느꼈다. 깜짝 놀라기도 전에, 한 사내가 안솔을 휙 지나쳐 사악한 것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어두운 공간에 섬뜩한 빛 줄기가 사선으로 그어졌다.
사악한 것이 비명을 지르며 사그라진다. 사내가 단숨에 처리한 것이다.
익숙하게 들어오는 사내의 뒷모습에 안솔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해졌다.
“오라버니!”
그랬다. 안솔의 꿈에 나타난 사내는, 다름 아닌 김수현이었다.
안솔이 반갑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김수현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어딘가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안솔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마찬가지로 김수현을 뒤쫓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쫓은 것 같은데, 안솔은 김수현과의 거리를 도저히 좁힐 수 없었다. 도중에 몇 번이고 이름을 불렀으나 김수현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었다.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더는 쫓지 못해 힘들어할 때쯤이면 김수현도 걸음을 멈추며 기다려주고는 했으니까.
차오르는 의문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안솔은 중간중간 목이 터져라 김수현을 불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안솔의 눈이 갑자기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눈을 뗀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김수현은 또 무언가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없이 파괴적이면서도, 동시에 경건하며 거룩한…. 마치 신을 상대하는듯한 느낌이랄까. 사악한 기운을 흘리던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엄청난 기운이었다.
이번에는 제법 거세게 저항하는 듯 격렬한 감각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승자는 김수현이었다. 곧 거센 비명이 귓전을 가득히 울리더니 어둠이 떠나갈 정도의 빛무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그라졌을 무렵, 간신히 눈을 뜬 안솔은 곧바로 김수현을 찾았다. 김수현은 여전히 어딘가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느새 거리가 상당히 벌어진 상태라, 안솔은 바쁘게 걸음을 놀렸다.
“어?”
그때였다. 앞으로 쭉쭉 나아가던 김수현의 모습이 한순간 홀연히 사라졌다. 흡사 느닷없이 땅이 푹 꺼지기라도 한 듯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춘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나 자꾸만 급한 마음이 들어, 안솔은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김수현이 사라진 장소에 다다른 순간, 안솔은 볼 수 있었다.
지면에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크기의 구렁텅이를.
그것은 마치 블랙홀을 보는 듯했다.
*
추가로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한 번 정도는 습격을 해올 거라 예상했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언덕의 그림자 지대를 건너는 와중 놈들은 단 한 번도 습격해오지 않았다. 아니. 습격은커녕 기척도 드러내지 않았다. 언덕의 그림자 지대는 정말로 텅 비어있었고, 또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이 속도로만 간다면 아마 오늘 점심 즈음에는 100%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좋아 좋아. 아주 좋아.”
“너는 또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는. 야. 그런데 오늘이 6일째인가? 아니면 7일째인가?”
“한 일주일 됐나? 그건 왜?”
“아. 빨리 진군 좀 멈추고 싶어서.”
“푸. 왜. 무서우냐?”
안현과 이유정의 목소리. 어떻게 보면 행군 중에 금지해야 할 잡담이었으나 나는 굳이 막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도 없이 계속 걸었다. 적어도 이제부터는, 기조가 다시 침체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말이다. 기조를 날카롭게 버무리려는 계획은 실행하지 못했으니, 근거지에 다다르기 전 상승세를 최대한 보존할 필요는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지치지 않는 수다를 반주 삼아 계속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언덕의 그림자 지대도 막바지에 다다른걸 느꼈다.
왜냐하면 눈앞으로, 내가 하나의 지점으로 기억하는 커다란 언덕이 보였으니까.
“엥. 이게 언덕이야? 산이 아니라?”
그 말대로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언덕은 거의 남산만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여타의 언덕과는 차별화되는 크기를 보였다. 언덕의 그림자 지대의 끝을 알리는 하나의 지점. 아마 이 언덕을 내려가면 이 지대는 거진 통과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천천히 언덕을 오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현재 강철 산맥을 공략하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은 세 가지.
첫 번째는 내가 놓치고 있던 것으로, 1지역을 지나며 느꼈던 의문이었다.
남부 원정대는 지금 2지역을 돌파하는 중이다. 그럼 1지역에 있던 괴물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1지역에서 도망친 흔적만 보았을 뿐, 이후로는 아예 흔적조차 보지 못했다.
그리고 두 번째. 2지역의 괴물들은 왜 사흘전의 습격 이후 더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세 번째. 안솔의 꿈.
나는 품속에서 안솔이 그려낸 기록을 꺼내 들었다.
기록에 그려진 그림은 정말로 엉망진창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림 자체가 굉장히 간단하다는 것.
우선 가장 아래쪽으로 울퉁불퉁한, 바람 빠진 타이어 같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바로 위에는 비교적 반듯한 동그라미 하나가 얹어져 있다. 크기는 아래보다 확연히 작다.(크게 보면 8자, 혹은 눈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얹어진 동그라미의 윗면으로, 무수한 직선들이 다닥다닥 붙은 그림이었다.
이 형체를 하나로, 거의 십수 개에 이르는 그림들이 기록에 그려진 상태였다.
처음 기록을 봤을 때 해석은 그 정도였다. 아무리 꿈이 흐릿한 기억이라고는 하지만, 처음에는 나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틈이 날 때마다 그림을 들여다본 결과, 나는 한 가지 특이점을 추가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기묘한 형체들이 한쪽에 이상할 정도로 몰려있다는 것이다. 또 어느 형체는 굉장히 크지만, 또 어느 형체는 상당히 작다는 것. 나는 여기서 하나의 힌트를 얻었다.
원근감.
그것을 떠올린 순간, 비로소 안솔이 그린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왜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럴 만도 했다. 처음부터 보는 방법이 옳지 않았으니까. 말인즉, 거꾸로 뒤집어보면 해답이 나온다. 그렇게 보자마자 나는 기억 속 묻어둔, 2회 차 초반 때의 광경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기억이라 절로 쓴맛이 감돌 무렵, 문득 발이 상당히 편해짐을 느꼈다.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언덕의 정상에 오른 것이다.
제법 커다란 언덕에 오르자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훤히 들어왔다. 나는 전방을 응시했다. 그리고 지체 않고 걸음을 멈췄다.
“형님! 왜 갑자기 멈추셨어요?”
진수현이 물었지만 나는 굳이 회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용히 무검을 뽑았다.
그러자 끈임 없이 이어지던 수다가 뚝 끊기며, 허겁지겁 올라오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이윽고 어느 정도 올라왔다고 생각될 즈음, 나는 침착히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어….”
누군가 넋을 잃은듯한 탄성을 터뜨렸다.
============================ 작품 후기 ============================
생각해보니 후기가 너무 창피해서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