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63
00562 하나의 폭풍이 되어. =========================================================================
커다란 언덕의 정상에 오른 순간, 눈앞을 빽빽이 메울 정도로 울룩불룩 솟아있던 언덕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500미터쯤 떨어진 건너편으로 또 하나의 언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사실 저것 또한 언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 이 언덕을 오를 때도 산이 아닐까 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는데, 건너편의 언덕도 그에 준하는 크기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언덕은 하나가 아니었다. 정면의 언덕을 기준으로, 비슷한 크기의 언덕들이 좌우 방향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가로로 가지런히 나열된 풍경을 보고 있자니, 흡사 언덕으로 이루어진 장벽을 보는 것 같다.
그래. 여기다. 언덕의 그림자 지대를 통과하고, 비로소 놈들의 주 활동 지역에 다다른 것이다. 저 언덕의 장벽만 넘으면 곧바로 놈들의 근거지가 나온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언덕. 그리고 건너편의 언덕 사이로 움푹 패어 들어가 있는, 하나의 거대한 지형. 거기에는…. 차마 셀 수도 없다.
골짜기에는 가히 수백? 어쩌면 1천을 넘을지도 모르는 괴물들이 떼로 모여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또한 놈들은 단 한 놈도 예외 없이 언덕을 정확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형님…. 저건….”
진수현이 넋을 잃은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뽑은 무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손을 풀기 시작했다. 빅토리아의 영광까지 뽑을까 고민이 들었지만, 우선은 한 손으로 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양손 검을 다루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한 손 검이 더욱 익숙하니까.
“싸, 싸우실 거예요?”
화들짝 놀라는 목소리가 물었다. 나는 “그럼?”이라고 회답해준 후, 천천히 몸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망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 저번 습격 때보다 거진 서너 배는 돼 보이는 인원을 보니 넋이 나간 모양이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우리 선봉 부대가 골짜기를 정면으로 돌파하겠습니다. 모두 단단히 준비를 갖추도록.”
“혀, 형님! 정말로요?”
“왜. 무서우냐?”
“아니요. 무서운 게 아니라…. 정말로 정면으로 돌파하시려는 거예요?”
“의외네. 이런 게 오히려 네가 원하는 거 아니었어?”
“…….”
진수현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멍하니 나를 바라볼 무렵, 돌연 몇 명의 사용자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선봉 부대에 포함된 클랜 로드들이었다.
따로 부르지도 않았는데 온걸 보니, 어떻게 괴물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양. 급하게 아래를 내려다본 클랜 로드들은 마찬가지로 침음을 흘렸고, 이내 주변을 둘러보더니 뜨악한 얼굴을 보였다.
어느새 클랜원들은 내 지시를 따라 봉시진(鋒矢陣)을 꾸린 상태였다.
“머셔너리 로드. 설마 지금 이 골짜기를 정면으로 돌파하실 생각입니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용자는 말쑥한 사내였다. 라이트 로드라고 했었나.
“예. 그럴 생각입니다.”
“머, 머셔너리 로드. 그다지 좋은 방법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언덕에 서 있고, 놈들은 골짜기 안에 모여있습니다. 차라리 지리적 이점을 살려, 이 자리에서 화살이나 마법을 퍼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놈들이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리는 없겠지요.”
“그, 그렇지만!”
가만히 머리를 가로젓자 무언가를 말하려던 라이트 로드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의아한 기색은 지우지 못하는 게, 여전히 정면 돌파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라이트 로드의 의견은 당연히 정론이다. 지리적 이점을 살려 원거리 공격을 퍼붓는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싫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나와 머셔너리와 남부 원정대. 그러니까 딱 한 번 정도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북 대륙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이유인즉, 비단 강철 산맥뿐이 아니라 차후에 여러 괴물들이 출현할 텐데, 그런 놈들과 비교하면 지금 눈앞의 괴물들은 그리 강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놈들이 어떤 꼼수를 부렸다고 해도,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지녔는지 알고 싶었고, 보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어수룩하기 그지없는 호기로만 저지른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1회 차 때와 똑같다. 1회 차 때도 나는 이 자리에 똑같이 섰었고, 지금과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 그때와 똑같이 나올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가능성은 높다. 거의 1천 마리에 달하는 정도로 우글거리고는 있지만 보이는 건 괴물들뿐이니.
지금껏 꽤나 잡아갔을 터인데 진화한 인간의 모습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럼 돌파 계획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삽시간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나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머셔너리 클랜만이 돌진하겠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아래 괴물들의 진형을 최대한 흐트러뜨리고, 혼란을 주는데 있습니다.”
“뭐, 뭐요? 정말 미치기라도…!”
“그리고, 남은 부대의 지휘는 무사 로드가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어…. 으, 으흠?”
그러자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고오환이 한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좋겠지. 그토록 원하던 지휘권인데.
“무사 로드는 여기서 계속 틈을 보다가, 어느 정도 혼란됐다 싶으면 곧바로 치고 내려와주시면 됩니다. 계획은 그게 답니다. 어때요. 참 쉽죠?”
“머셔너리 로드! 재고해주십시오. 아무리 강력한 마수 군단이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 불리합니다.”
“더 이상의 이견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중앙 부대와 같이…!”
그거야말로 절대로 안될 말이다. 만일 내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언덕을 성으로 삼아 수성을 하는 게 낫지.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하여 그대로 돌격을 명하기 직전, 나는 언뜻 스친 생각에 네 명의 클랜원을 따로 호출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보험은 필요할 것 같았기에. 곧 호출한 김한별, 박다솜, 비비앙, 선유운이 차례차례 다가와, 나는 생각한 바를 빠르게 설명해주었다.
이내 모든 계획은 들은 선유운은 이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럼….”
“예. 이스탄텔 로우 로드에게는 그렇게 전해주시고, 나머지는….”
선유운은 잠시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가 싶더니 빠르게 몸을 돌려 사용자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다음으로 걱정스런 얼굴로 서 있는 세 여인을 쳐다본 순간, 비비앙이 하늘 높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런 비비앙의 손에는 환한 빛을 흘리는 질서의 오르도가 쥐어져 있었다.
“오라! 마누밤브! 제 5군단을 지배하는 자폭의 폭마들이여!”
그러자 한순간 어두운 운무가 주변에 퍼지는가 싶더니, 곧 사방으로 걷히며 새로운 마수 군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킥, 키킥!
– 켈켈켈, 켈켈켈켈!
언뜻 보기에는 푸른 산맥의 스켈레톤 부대처럼 보였지만, 거의 전신을 가리는 헐거운 로브와 등에 삐죽하니 돋아난 커다란 뿔이 특이하다. 또한 로브 안으로 붉게 빛나는 동그란 두 불빛은, 역시나 마수 특유의 흉흉한 기운을 흘려내고 있었다.
“미안해. 원래 4군단을 주고 싶었는데, 네 말대로라면 아껴놓는 게 낫겠지. 혼란이 목적이라면 5군단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비비앙답지 않은 미안해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상관없다는 양 어깨를 으쓱인 후 가장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클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갑시다.”
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있을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놈들은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최대 이점을 포기하고 몸을 드러냈다. 물론 교활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니만큼 모종의 수작은 부려놨겠지만, 그것 또한 받아 칠 자신이 있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리고, 보여줍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래로 쭉 뻗은 언덕을 보며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등 뒤로 클랜원들과 마수들이 우르르 밀고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괴물들은, 조용했다.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꿈틀꿈틀하던 것도, 우리가 내려오기 시작하자 동시에 움직임을 정지했다. 마치 가만히 덫에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최대한의 속도로 달린 만큼 언덕은 금방 내려갈 수 있었다.
괴물들과의 거리도 거의 가까워졌다. 놈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거리가 적당히 줄여졌을 무렵.
“흡.”
나는 있는 힘껏 땅을 박차,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씨잉, 바람결이 머리에 스친다.
– 키에에에에에에엑!
동시에 귓전을 울리는 기괴한 괴성. 놈들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수십 수백의 촉수들이 허공에 떠오른 나를 노리고 일제히 쇄도해 들어온다.
그래. 이걸 노리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이형환위를 사용했다. 놈들이 밀집해있는 중앙 지점으로.
이윽고 지면이 보이는 순간, 마력을 한껏 끌어올리며 지체 않고 무검을 지면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검을 하나의 매개체로 삼아 끌어올린 마력을 아낌없이 밀어 넣었다. 지면을 대상으로 한 마력 폭발이었다.
1초.
1초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그 1초가 지난 순간, 비로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드득! 콰드드드드드드득!
휘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흡사 가뭄 속의 밭처럼 대지가 쩍쩍 갈라져 나간다. 종래에는 주변으로 30미터 정도의 지면이 한 번 크게 들썩였다.
– 키에에에?
아직 부족하다. 허공의 신형이 사그라졌는지 놈들이 시선이 하나하나 모이는걸 느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더욱 강하게 마력을 흘려 넣었다. 회로를 가득히 메우던 마력이 한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만큼, 지면으로 흐르는 양 또한 가히 어마어마했다.
꿍!
그때, 갑작스럽게 지면이 꿀렁 웨이브를 쳤다. 그와 동시에, 갈라진 틈으로 눈부신 푸른빛 마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고, 내쉬는 것과 함께 마지막 마력을 쏟아 부었다.
꾸웅!
더욱 커다란 웨이브.
쿠쿠쿠쿠쿠쿠쿠쿠!
그리고 마침내, 더욱 강렬해진 빛무리가 황량한 대지를 가득히 밝히며 폭발적으로 솟구쳐 올랐다.
*
김수현이 허공에 떠오르고, 무수한 촉수들이 허공으로 쇄도했다. 언덕에 서 있던 사용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어어어어어어어어?!”
그러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형환위를 사용한 김수현은 털끝도 다치지 않고 촉수를 투과해 지면에 착지했으니까. 물론 그걸 알아본 사용자들은 없겠지만.
쿵!
잠시 후, 지면 내부에서 울리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골짜기 인근이 크게 들썩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사용자들의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그 순간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어느새 쩍쩍 갈라진 지면이 환하게 밝아오더니, 푸르스름한 빛깔을 내는 빛무리가 크게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김수현이 서 있는 장소를 기점으로 둥글게 퍼져나가며 주변의 괴물을 덮쳐 들어갔다.
그것은, 하나의 파도와 다름없었다.
하나, 둘, 셋, 다섯, 여덟, 열셋….
땅에서 솟구친 푸른빛의 마력은, 하나의 성난 파도처럼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삼키며 좌충우돌 범위를 넓혀간다. 괴물들은 빛의 파도에 닿는 족족 체액을 뿜으며 수수깡처럼 쓰러져가는 중이었다. 그에 따라 밀집해있던 괴물들이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며 이리저리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눈 몇 번 깜빡 하기도 전에 전위가 붕괴한 것이다.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비슷한 위력을 가진 마법은 몇 번 본 적 있지만, 저렇게 거대한 마력을 이용해 땅을 터뜨리는 마법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전에. 저 사용자, 검사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가, 간다! 들어간다! 궁수, 마법사! 모두 지원 사격 준비!”
누군가가 외쳤다. 무엇이 들어간다는 소리일까?
김수현이 굳이 홀로 선두에서 달려간 이유는, 뒤따라오는 클랜원들이 용이하게 돌파할 근간을 마련해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마수 군단이 더욱 신나게 날뛸 여지를 만들어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결과는 곧 볼 수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괴물들을 향해 고스란히 덮쳐간 두 번째 파도가.
– 키킥! 키키키킥!
아니 제 5군단이, 그런 김수현의 기대에 100% 부응한 것이다.
가장 먼저, 괴물들의 사이를 파고든 마누밤브가 신명 나게 웃어 젖혔다. 촉수들이 몸을 휘감든 날카로운 이빨이 깨물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두 팔을 힘차게 드는가 싶더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로브 안 붉은 안광이 화르륵 타올랐다.
그러자 각각 사방으로 비집고 들어간 군단의 마수들도, 마누밤브를 따라 두 팔을 힘차게 올렸다.
– 켈켈켈켈켈켈켈켈!
흡사 마지막을 알리는 것 같은, 마수의 광소(狂笑).
그리고 잠시 후.
번쩍!
곳곳에서 터져 나온 화려한 폭음이, 골짜기를 붉은빛으로 가득히 물들였다.
============================ 작품 후기 ============================
생각해보니 후기가 너무 창피해서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