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64
00563 하나의 폭풍이 되어. =========================================================================
“어, 어떻게 된 거지?”
붉은빛이 서서히 사그라져갈 즈음, 눈을 꼭 가렸던 박다솜이 살그머니 손을 내리며 말했다. 다소 얼떨떨해 보이는 얼굴. 김한별은 아무 말도 않은 채 지그시 골짜기를 가리켰다.
박다솜이 도로 아래를 내려다볼 무렵.
번쩍!
붉은 불빛이 재차 시야를 물들였다. 박다솜은 아앙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물러났다. 그리고 원망 어린 눈초리로 김한별을 쳐다보자, 처음부터 눈을 떼지 않던 비비앙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
“네, 네?”
“첫 번째는 두 팔을 제물로, 두 번째는 두 다리를 제물로, 세 번째는 자신의 몸과 머리를 제물로. 그렇게 총 세 번의 연쇄 폭발을 일으키지.”
“그게 가능한가요?”
박다솜은 얌전히 입을 벌렸고, 김한별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곁눈으로 흘긋 흘겨본 비비앙의 입가에 돌연 잔인한 미소가 자리잡았다.
“저번 전투에서 저놈들은 소환하지 않은 건, 시체를 최대한 보존하라는 김수현의 지시 때문이었어. 5군단은 마수들의 특성상 지속적인 전투가 불가능하거든…. 하지만.”
“…….”
“그런 만큼, 지금 이 순간 5군단의 폭발력은 타 군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지. 얕보지마. 한 자릿수 군단이라고.”
“…그런가요.”
번쩍!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세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이제 마지막을 알리는 듯, 앞선 폭발보다 화려하게 일어난 빛무리는 멀리멀리 퍼져나가 언덕에 서 있는 사용자들까지 비췄다. 온몸에 붉은 불빛이 스며든 비비앙을 바라보며 김한별은 조용히 생각했다.
그래. 이 사람도 한때는 괴물이었지.
오오오오오오오오!
문득 엄청난 함성이 언덕을 떠르르 울렸다. 마지막 폭발이 끝난 후, 사용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경악하는 얼굴로 아래를 가리키고, 보고 있었다.
골짜기에는 커다란 불길이 솟아오르고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수들의 자신의 몸을 제물로 일으킨 연쇄 폭발은 빽빽이 모여있던 괴물들을 고스란히 덮쳐 들었다.
그 결과, 지면에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발기발기 찢겨나간 시체들과, 사방으로 비산한 핏물이 합쳐져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나는 그럼.”
비비앙은 볼 일이 있다는 양 홱 몸을 돌리더니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몸을 감추었다.
김한별은 잠시 비비앙이 달려간 방향을 응시하다가, 다시금 골짜기 전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김수현이 안배한 파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그라져 소멸한 마수 군단을 잇는 세 번째 파도, 머셔너리의 사용자들이 지체 않고 들이닥친 것이다.
어느새 괴물들은 처음처럼 정연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폭발의 여파가 너무도 거대해 아직까지 남아 괴롭히고 있다. 그 덕에 전열은 완전히 무너져내려, 머셔너리 사용자들은 국지전임에도 불구하고 기습적으로 공격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처음으로 들어간 사용자는, 은빛으로 빛나는 창을 휘두르는 여인, 차소림이었다.
“발할라의 가호여!”
차소림의 온몸이 찬란한 빛무리로 뒤덮였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 괴물들의 앞에 다다르더니, 창을 전방으로 찔러 들어가며 삽시간에 중앙을 돌파했다. 걸리는 족족 꿰뚫고 휘두르자, 괴물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 놈 한 놈 목이 달아났다.
돌파력도 엄청났지만, 더욱 놀라운 건 목표를 정확히 찌르는 정교함이었다. 달리는 와중에도 균형이 흔들리지 않고 정교하기 그지없는 창술을 펼쳐낸다.
그러한 차소림의 몸놀림은 보는 이들의 정신이 아찔하리만치 경이롭고, 또 아름답다. 흡사 한 줄기 빛살과도 같은 그 모습이, 가히 섬광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그것을 기점으로, 아직 남은 수백의 괴물들과 서른 남짓한 머셔너리 사용자들이 뒤엉켰다.
괴물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곧바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해, 머셔너리 사용자들은 한순간 수백의 괴물들에 둘러싸였다. 폭발의 여파가 비교적 적게 닿은, 조금 멀리 떨어진 괴물들도 촉수를 꿈틀꿈틀 드러냈다.
잠시 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촉수가 하늘을 뒤덮었다.
물론 머셔너리 사용자들 또한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후방에서 앞쪽을 주시하던 안솔이 지팡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 어느 빛보다도 찬란한 이여, 모든 빛을 관장하는 안젤루스여! 고대의 영광을 떨쳐 울리는 그 이름을 빌어, 그대의 사제 안솔이 바랍니다! 우리를 지키소서! 보호하소서! 수호하소서!”
그리고 지팡이가 새하얗게 작열하는 그 순간, 안솔의 주변에 환한 빛을 뿌리는 빛들이 사르르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아직 남아있는 수림이 번쩍 빛을 토해내더니 쑥쑥 자라나며 머셔너리 사용자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즈믄 가락!”
언제 주문을 마쳤는지 백한결도 지지 않고 능력을 발동했다. 이내 한쪽으로 내뻗은 두 손에서, 반투명한 색의 거대한 손이 하나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삽시간에 두 개, 네 개, 여덟 개, 열여섯 개, 서른두 개, 육십사 개, 백이십팔 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더니, 종래에는 일천 개를 넘는 손들로 갈라져 날아오는 촉수들을 맞상대했다.
괴물들이 수림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에 부딪쳤다. 촉수들은 일천 개의 손에 막히거나 붙잡혀 하릴없이 되돌아갔다.
보이는 그대로, 안솔과 백한결의 합작으로 이루어낸 완벽한 방어였다. 김수현의 지론인 ‘잘 키운 사용자 하나, 열 사용자 안 부럽다.’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언덕에서 구경하는 사용자들도 모두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들어갈 때만 해도 무모하다고 여겼다. 겹겹이 둘러싸일 때는 헉 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고작 서른 남짓한 사용자들이다.
그러할진대, 오히려 열 배는 넘는 괴물들의 진형이 붕괴하고 있다. 마법사들이 한 번 주문을 외울 때마다, 땅이 우르르 흔들리고 보도 못한 마법들이 괴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한다.
그러한 광경은 서른 명이 아닌 삼백 명, 아니 그 이상의 사용자들이 보여주는 파괴력과 맞먹을 수준이었다.
쾅!
갑작스럽게, 거대한 울림이 사용자들의 정신을 강타했다. 절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김수현이었다.
적어도 언덕에 서 있는 사용자들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김수현을 바라보았다. 머셔너리 사용자들의 활약도 대단하지만, 단연코 최고로 빛나는 이가 김수현이었기 때문이다.
쾅, 콰앙!
사용자들의 공통적인 생각.
도대체 무슨 묘수를 부린 걸까.
김수현의 전투는 마치 하나의 폭풍과도 같았다. 검을 놀릴 때마다 휘두른 방향으로 무지막지한 검풍이 일어났고, 바람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괴물들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겼다. 한 번의 칼질에 서넛의 괴물이 피를 뿜으며 쓰러진다.
비단 검뿐만이 아니었다. 김수현의 온몸이 무기였다. 뻗어오는 촉수를 솜씨 좋게 되잡고는, 허공으로 번쩍 끌어올렸다가 힘차게 지면으로 내리꽂는다.
꽈아앙!
_ 크헤에에에에에엑!
그렇게 터져 죽는 괴물들의 수도 부지기수였다.
마치 보병들을 짓밟는 하나의 탱크처럼, 김수현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종횡무진 골짜기를 휘젓고 있었다.
결국 하다 하다 안되겠는지, 열 마리는 넘는 괴물들이 일제히 펄쩍 뛰어올라 김수현을 향해 하강했다. 하는 공격마다 족족 되받아 치니 무게로 압살하겠다는 의도였다.
그걸 보던 어느 사내가 “어.”라고 외친 순간, 김수현의 손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낙하한 괴물들은 들어올 때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그것도 각각 한 부위가 크게 찢겨나간 채. 그 찰나의 순간, 두 주먹을 이용해 모조리 퉁겨낸 것이다.
“…….”
“…….”
언덕에,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문득, 골짜기를 보는 사용자들의 가슴에서 무언가 뜨거운 감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감정의 정체는 그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머셔너리 사용자들을, 그리고 김수현을 볼수록 전신에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시작할게요.”
그때,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박다솜이 말했다. 김한별 고개를 끄덕이며 또한 품에서 보석을 꺼내 들었다. 새빨간 빛깔의 예쁜 보석이었다.
이윽고 박다솜이 몰래 지팡이를 꺼내 들어, 사용자들을 겨냥했다.
“───. ───. ───. 광화.”
“대상 지정 광화. 사용 보석 라이트시암(Light Siam).”
발간 빛이 터져 나왔다. 보석은 사르륵 가루로 변해 지팡이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녹아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빛이 힘차게 약동하며 사용자들 사이로 멀리, 멀리 퍼져나갔다.
결과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볼 수 있었다.
“하악….”
“크흐으….”
갑작스럽게 사용자들의 기세가 일변했다. 돌연 거칠게 숨을 몰아 쉬고, 가래 끓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목이 바짝바짝 타올라 자꾸만 침을 삼키게 된다.
어느새 모두의 눈동자에 벌건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눈을 희번덕거리는 그 모습은, 명백한 살기 그 자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뜨겁게 끓어오르던 감정이, 광화와 섞이며 한순간 살기로 폭발했다.
그것은 지금껏 사용자들이 괴물들에 가지고 있던 두려움과 불안함에 기인한다. 동료를 잃은 사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래저래 당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느꼈던 무기력감.
그런데, 골짜기의 전투를 보며 그간의 생각이 확실하게 변했다.
저 빌어먹을 놈들.
생각보다 별거 아니잖아?
원정대에 참가한 사용자들은 각 클랜에서 한가락하는 이들이다. 당연히 웬만한 괴물로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그러할진대.
이러한 상황에서, 그때의 기억을 되살림과 동시에, 그동안 억눌렀던 울분이 광화를 토대로 터져 나온 것이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선유운은 스리슬쩍 고오환에게로 다가섰다. 혹시나, 만에 하나 머셔너리가 당할 때까지 가만히 구경만할까 봐 걱정이 든 탓이다.
“무사 로드. 이제 슬슬…. 음?”
그러나 고오환을 쳐다본 순간, 선유운은 자신의 걱정이 기우임을 깨달았다. 고오환은 어느새 자신의 무기를 꺼내든 채, 입에서 침까지 질질 흘리는 중이었다.
“크아아아아악!”
고오환이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더니 사용자들의 앞에서 걸음을 멈춰, 커다란 도를 높이 들어올리며 외쳤다.
“뭐하냐, 이놈들아!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하지만 사용자들은 누구도 회답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무기를 으스러지듯이 쥐며, 입을 질끈 깨물며, 몸을 들썩들썩 움직일 뿐. 그러한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가자! 씨발, 모두 조져!”
쩌렁쩌렁한 울림.
그와 동시에.
와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 아니 거의 포효라고 봐도 될 정도의 소리가 언덕을 진동했다.
“죽여라!”
“모두 죽여버려!”
죽이라는 성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토해졌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그리고, 어마어마한 발소리들이 언덕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의 머릿속에는 무조건 죽이겠다는, 기필코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육에 대한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한 본능에 따라, 벌건 안광을 흘리는 사용자들이 한창 격전을 벌이는 골짜기로 덮쳐 들었다.
*
“선봉 부대가 모두 들어갔습니다!”
언덕의 모든 사용자들이 내려간 순간, 돌입 보고가 한소영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한소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앞에서는 엄청난 살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저. 총 사령관님. 우리도 도와야 하는 게 아닐지….”
누군가 머뭇머뭇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한소영은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도와주는 건 크게 어렵지는 않다. 굳이 내려갈 필요는 없고, 마법이나 화살 정도 지원하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조금 전 머셔너리 로드가 보내온 전령은 그런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었다.
‘지원은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하시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때였다.
휘리릭!
“으, 으아아악!”
“습격이다!”
중앙에서 들려온 외침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후미 부대에서 들려온 비명. 그것을 인지한 순간, 한소영의 두 눈이 살짝 떠졌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괴물들의 기습을 예상하셨습니다. 진화한 개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자리를 떠나면, 그놈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기습할 가능성이 높다고요.’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선봉 부대를 저렇게 자기 입맛대로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적의 수를 읽기까지 했단 말인가?
그러나 한소영에게는 더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후미 부대라면 아직 언덕에 오르지 못한 배열이 있을 테니까.
예상했던 만큼, 당황하지 않았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한소영이 침착히 손을 들어올렸다. 이내 꾹 맞붙어있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
============================ 작품 후기 ============================
오늘은 오랜만에 자정에 업데이트했네요.
라운드 하우스. 익숙한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되는데요. 하하.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군대 용어입니다. 군대 하니 얼마 전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글을 본 게 떠오르네요. 군대에 다녀오신 분들은 모두 한두 번은 진지 공사 해보셨죠?
그 진지 공사가 어느 정도인지, 여성분들께 쉽게 이해시키는 방법입니다.
(본문.)
1년 중 봄과 가을에 1주일 동안 김장을 해야 하는데, 배추 5000포기씩 날라서 김장해야 돼.
(본문에 달린 코멘트.)
1. 그것도 시어머니 20명과.
2. 시누이 20명도 있지.
3. 다른 재료는 없이 배추만 있어.
4. 남편은 뒤에서 술상 봐~. 하면서 술만 먹고 있지.
5. 간혹 시가 쪽 친척들이 김장 잘하고 있나~. 하고 오지.
6. 그리고 집안 최고 어르신이 나타나 딱 한두마디 하셔. 그럼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지.
7. 막내 며느리는 말도 안 들어.
8. 김장을 다했는데 젤 높은 할머니가 와서 하시는 말씀. 좀 짜네? 그럼 다시 김장을 담그지~.
9. 근데 이거 안 하면 감옥 감.
10. 열 받아서 이혼하고 싶은데 합의를 안 해줘. 그렇다고 짐 싸서 나가면 지옥까지 쫓아가서 잡아와.
11. 그래도 수고했다고 용돈은 준다. 1시간에 300원. ^^
아. 동의하시는 분들도,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정말 이거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예비군이라서 재미있다며 웃는 거지. 아마 현역이었다면 못 웃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