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72
00571 싱크 홀(Sink Hole)로의 돌입. =========================================================================
화살은 바람을 시원하게 가르며 날아가 여지없이 목표물에 명중했다.
화살촉이 목을 부드러이 파고들어간 그 순간, 안 그래도 조용하던 언덕 아래는 더욱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한순간의 침묵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주변의 모두가 행동을 정지했다.
그러나, 정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누구냐!”
“이게 무슨 짓이야!”
화살을 맞은 여인이 목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거친 비명과 고성이 오고 갔다. 좌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올라와 언덕에 서 있는 우리를 응시한다. 대다수가 의아해 보이는 얼굴이나 일부는 벌써부터 흉흉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하기야 저 여인이 동료라면, 아니 동료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럴 만도 하겠지.
“머셔너리 로드! 이게 무슨 짓이요!”
한 사내가 우악스럽게 검을 뽑으며 성난 기세로 일갈했다. 근처에 있던 사용자들도 하나 둘 무기를 들어 우리를 겨냥한다.
일촉즉발의 상황. 일단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 후다닥 앞으로 달려가 아래로 검을 겨누었다. 갑자기 누군가 하고 보니, 진수현이었다.
“뭐 임마! 지금 한 번 해보자는 거냐!”
…야 인마.
“뭐, 뭐요? 정녕 미치기라도 하신 게요?!”
진수현은 똑같이 검을 겨눈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내는 기막혀하며 고함쳤다. 억울함이 듬뿍 배인 목소리였다.
고연주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오히려 살려준 것도 모르는 이 배은망덕한…. 꽥!”
그리고 한 번 더 기세 좋게 소리치려는 진수현의 머리를 거세게 가격한 후, 질질 끌어 눈앞에서 사라졌다. 속으로 안도하면서도, 나는 바닥에 쓰러진 여인의 동태를 살폈다.
여인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유운. 한 발 더. 이번에는 목이 아니라 머리로.”
“알겠습니다.”
끼릭, 핑!
곧바로 장전하는 소리에 이어 한 발의 화살이 망설임 없이 날아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신을 치료해주던 사제를 끌어당겨 방패막이로 삼은 후, 곧바로 몸을 일으켜 사지를 구부렸다.
화살은 사제의 귓불을 스쳐 바닥에 꽂혔다. 여인은 구덩이로 도망갈 생각인지 그대로 땅을 박차 올랐다.
핑!
그러나 그 순간, 또 한 발의 화살이 쏘아져 정확히 여인을 맞췄다. 머리가 직격당한 여인의 몸이 속절없이 흔들리며 무너져 내린다. …아니. 그러는가 싶더니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희선아?”
“저, 저거 괜찮은 건가?”
사용자들의 경악 어린 얼굴에 불신의 빛이 스쳤다. 그럴 만도 하다. 나나 공찬호 수준의 근접 계열이라면 모를까. 사제로 보이는 사용자가 머리와 목에 마력이 가득 들어간 화살을 맞았는데, 저렇게 움직인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거니까.
“크르르르! 키에에에!”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여인이 기괴한 괴성을 토하며 마구잡이로 몸부림치자 사용자들이 주춤주춤 물러난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중간에 공백이 생겨 구덩이로의 길이 트였다. 여인 또한 그걸 놓칠 생각은 없는지, 커다랗게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클랜 로드.”
끼릭, 석궁이 장전되는 소리와 함께 선유운이 약간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어느새 여인은 구덩이 지척까지 다다른 상황이었다.
나는 침착히 거리를 재며 무검을 잡았다. 그리고 여인이 구덩이 안으로 그대로 달음박질치려는 찰나, 나는 지체 않고 무검을 뽑아 들었다.
그때였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여인의 허리가 갑작스럽게 반으로 접히며 도리어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구덩이 안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투척하려던 것을 멈췄다.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저건 또 누군지 싶어 유심히 보고 있자, 문득 고연주가 “쯧.”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고연주가 혀를 찬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구덩이에서 올라와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처형의 공주 연혜림이었다.
연혜림은 여인을 어깨에 걸친 채로 주변을 쓱 돌아보았다. 얼음과도 같은 냉랭한 시선이 나와 마주친다. 이내 가볍게 발을 구른 연혜림이 마치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며 삽시간에 정상에 안착했다. 그리고 연한 푸른빛 머리칼을 찰랑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왜 이렇게 분위기가 흉흉해? 얘는 또 왜 자살하려고 하는 거고?”
“너….”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김수현?”
“…….”
연혜림이 새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야말로 구덩이 아래서 뭘 하고 있었는지 되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나는 우선 연혜림이 어깨에 걸친 여인을 가리켰다.
아니. 이제 여인이라고 하기도 그런가? 괴물이 어느새 연혜림의 머리를 향해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있었으니.
“……?”
살기를 느낀 걸까. 연혜림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엥. 괴물이네.”
그리고 쩍 벌려진 주둥이를 보는 순간, 일말의 주저 없이 왼손을 들어 괴물의 머리를 훑었다.
잠시 후, 괴물의 얼굴에 5개의 섬뜩한 사선이 그어지며 그대로 조각조각 나뉘어 떨어졌다. 연혜림은 얼굴 없는 시체를 아래로 던지며 손을 툭툭 털었다. 손가락에 묻은 핏방울이 허공에 점점이 뿌려진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왠 괴물?”
“하여간. 무식하게 싸우는 건 여전하네?”
회답은 내가 아닌 고연주에게 들려왔다. 계속해서 손을 털던 연혜림이 흘긋 시선을 돌렸다. 고연주를 봤는지, 차갑던 눈동자에 명백한 살의가 스쳤다.
역시나. 한동안 잘 참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또 터진 것이다.
연혜림은 손을 터는걸 멈추고 피식 웃었다.
“무식?”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마~.”
“요즘 한동안 안보이더니 거기가 간질간질한가 봐?”
“어머. 말하는 것 좀 봐. 천박하기는.”
“그럼 우아하게 처형인의 대검이라도 소환해줄까? 말만해. 얼마든지 쑤셔줄 테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심연의 그림자에 둘러싸여 헐떡이던 때가 그립지 않니? 너, 그런 거 즐기잖아?”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한 손을 살며시 입에 대며 “푸.” 비웃었다.
걸쭉한 농담, 아니 살의 어린 말들이 오고 간다.
하지만 지금 둘의 감정 싸움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조용히 고연주를 가리켰다. 더는 입을 놀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입술이 삐쭉 나오기는 했지만, 고연주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연혜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싸울 때가 아니야. 괴물이 들어왔다.”
“먼저 시비건 게…. 알았어. 아무튼,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얘가 왜 여기 있냐고.”
“일종의 간첩이지.”
“간첩?”
연혜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머리를 갸웃했다. 얘가 이렇게 멍청했던가?
“괴물의 진화. 그리고 얼마 전 실종 사건을 떠올려봐.”
“아하.”
그제야 탄성을 지른 연혜림이 문득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잠깐만. 그럼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음.”
그것도 그렇다. 정확히는,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사샤를 돌아보았다.
사샤는 잠시 멀뚱한 얼굴을 해 보이더니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더 없다는 걸까, 아니면 모르겠다는 걸까.
*
괴물이 숨어들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야영지 전체로 퍼졌다. 그것은 얼마 전 사건이 탈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줌과 동시에, 남부 원정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괴물이 들어와 동료인 척하며 호시탐탐 끌어들일 기회를 노리고 있다?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사태까지 일어날 정도였으니까.
소식을 접한 한소영은, 결국 구덩이 진입을 하루 더 늦추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아무리 진군 시일이 걸린다고 해도 남부 원정대 자체보다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 한소영은 곧바로 나를 찾아와 간첩을 발견한 방법을 물었고, 나는 사샤를 빌려주는 것으로 회답을 대신했다.
결국 사샤는 그날 하루 종일 코를 킁킁거려야만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녹초가 되어 돌아온 사샤는 다시는 냄새를 맡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도대체 무슨 냄새를 맡았길래 그렇게 밤새 흐느낀 걸까?
아무튼.
더 이상 숨어든 괴물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다음날 정예 편성 조는 곧바로 구덩이 돌입을 시작했다.
사실 처음 구덩이를 내려가는 방법은 꽤나 조악하다.
우선은 1차적으로 구덩이를 내려갈 20명을 선발한다. 선발된 20명은 지면에 착지해 안전을 확보한 후, 지상으로 연락 및 신호를 보낸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내려가는 방법 그 자체였다.
각 사용자에게 목재 두 개를 지급하고 그걸 몸에 고정한다. 그리고 목재와 몸에 천을 감아 하나의 낙하산을 만들어 내려간다…. 라고는 하는데.
그냥 말이 좋아 낙하산이지, 추후 지급된 목재와 천을 보니 그냥 봉 두 개 달린 파라솔과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구가 약한 사용자가 내려가면 죽기 딱 좋은 장치였다.
결국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나는, 예전 용이 잠든 산맥에서 안현을 구출한 과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그러니까 안현이 섞여있던(?) 공터를 발견했을 때, 우리와 동행했던 여인의 영혼은 공중 부양 마법을 사용해 우리를 아래로 안전하게 착지하게 해주었다.
나는 곧바로 헬레나를 찾아가 비슷한 마법을 사용해줄 수 있는지 물었고, 헬레나는 자존심 상한다는 기색을 보여 나를 흡족하게 해주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남부 원정대는 제대로 된 구덩이 공략을 시도할 수 있었다.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언덕 아래에는 이번에 들어갈 102명, 그리고 한소영과 헬레나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언덕 정상에 서서 우리가 내려가는걸 구경하고 있었다.
이미 들어갈 준비는 거의 마친 상태였다. 나를 제외한, 1차적으로 들어갈 19명 모두가 아래만 쳐다보고 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저 구덩이 앞에서 조용히 한소영의 지시를 기다릴 뿐.
하기야 아무리 정예 사용자 중에서 골라낸 이들이라고 하지만, 긴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공간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니.
“시작하세요.”
이윽고 한소영의 지시가 떨어졌다. 헬레나는 곧장 나를 바라보았다. 살짝 머리를 끄덕여주자 조용히 주문을 웅얼거린 헬레나는, 우리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Levitation.”
헬레나의 손이 은은한 빛으로 감싸였다. 그 순간 지면이 웅혼하게 울리며 새하얀 빛을 토해내었고, 동시에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고연주, 남다은, 백한결, 비비앙, 선유운 등등. 나를 포함한 20명 전원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곧 구덩이 안으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2지역의 진정한 마지막 공략이 시작된 것이다.
이내 햇살이 비치는 세상이, 구덩이 안의 어둠에 서서히 위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시야가 완연한 어둠에 물들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나를 쳐다보다가 살그머니 시선을 회피하는 한소영이었다.
그렇게 뜻 모를 기분과 함께 하강이 시작되었다.
내려가는 속도는 적당했다. 굳이 따지자면 엘리베이터보다 약간 빠른 정도? 초당 2, 3미터를 내려가는 정도였다.
1회 차의 기록에 따르면 이 구덩이의 높이는 500미터에서 600미터 사이. 그렇다면 어느 정도 계산이 된다.
이후 2분 30초 정도가 지났을 즈음, 나는 안력을 돋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일색인 세상에서 서서히 흙 바닥처럼 보이는 지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외의 이상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려 한결을 찾았다. 마침 한결도 서서히 능력을 발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결아.”
“네. 형님.”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한결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분히 양손을 겹치더니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지스 시스템.”
그러자 일전에 본 정육각형의 보호막이 생성돼 우리를 희뿌옇게 감싸 안았다.
3분. 지면이 더욱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무검을 꺼내며 외쳤다.
“모두 전….”
하지만 곧 외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미 전원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든 채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정확히 3분 15초가 경과했을 때, 나는 마침내 발에 무언가 닿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Off The Record.』
(세 남자가 여전히 머리에 하얀 띠를 질끈 동여맨 채, 우렁차게 외치고 있다.)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화정을 너프하라! 너프하라!
시몬 : 아니다! 김수현을 너프하라! 너프하라!
네르갈 : 그냥 다 너프하라! 너프하라!
(그때 한 거대한 그림자가 세 남자에게로 다가선다.)
거대한 그림자 : 우우우우우우우우….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잠시 시위를 멈추며.)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응? 어헉! 이 괴물은 무엇인고?!
거대한 그림자: (구슬픈 목소리로 울어 젖힌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처음에는 놀랐지만, 우는 소리를 들으니 세 남자 모두 짚이는 바가 있다.)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혹시….
(거대한 그림자, 촉수를 들어 앞부분을 쓱쓱 닦는다. 서글프게 우는 모습으로.)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 …그렇구먼. 울지 말게. 내 다른 것은 묻지 않겠네. 자네. 혹시 뭔가 굉장히 있어 보이는 등장을 했는데, 김수현에게 처참하게 발리지 않았는가?
(네르갈이 촉새처럼 끼어든다.)
네르갈 : 아니면 찍소리도 못하고 터져 죽었거나?
(시몬도 끼어든다.)
시몬 : 그것도 아니면 사지가 찢기면서 비참하게 죽었거나?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거대한 그림자, 처음으로 말을 꺼낸다.)
거대한 그림자 :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