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73
00572 철혈(鐵血) 여왕의 분노, 김수현의 환희. =========================================================================
…결국 간신히 격퇴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패배한 전투나 다름없었다. 겨우 반격을 가하고 승기를 잡으려는 찰나, 살아남은 놈들이 삽시간에 도망쳐 언덕의 장벽을 넘었으니까.
그렇게 그림자 언덕의 기습과 골짜기 전투에서 무수한 피해를 입었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대로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원정대는 언덕 아래 구덩이를 발견한 순간, 곧바로 가용 가능한 인원 전부를 투입해 공략을 시도했다.
…지금 돌이켜보건대, 인원을 그렇게 많이 투입한 건 그다지, 매우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인원이 깔려 죽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무튼, 우리는 무사히 구덩이로 안착할 수 있었다.
이윽고 20분쯤 통로를 걸은 후, 비로소 땅속 도시 첫 번째 광장인, ‘구 사로(死路), 아니 구 사로(邪路)’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 신 대륙 아틀란타(Atlanta) 고대 도서관. ‘강철 산맥 공략 회고록.’ 中 발췌.
*
“꺅!”
새된 비명과 아울러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에 있던 ‘죽음의 기사’ 유지태가 빠르게 비명이 들린 곳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아. 미안해요.”
다행스럽게도 여인은 곧바로 회답했다. 유지태는 짧은 한숨을 흘리더니 차분히 손을 내밀었다.
“조심하셨어야죠. 아무튼 얼른 일어나세요.”
“네, 네. 주변을 경계하느라 발 밑을…. 잠시만요.”
여인은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며 유지태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넘어진 자세 그대로 흙 바닥을 더듬거리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이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여인은 아미를 찌푸리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언가 하얗고 길쭉한 것이 쥐어져 있다.
“…뼈?”
누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말대로 여인의 손에 들린 것은 뼈였다. 동물의 뼈가 아닌 벌건 살점이 덕지덕지 묻은 사람의 뼈. 마침 누군가 라이트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 나는 여인이 서 있는 부근으로 시선을 내렸다. 잠시 후, 새하얀 빛이 근처를 환하게 밝혔다.
“…….”
정적. 아래를 내려다본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바닥에는 해골과 뼈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시뻘건 핏물이 적어져 있었다.
그래. 뿌려진 게 아니라, 적어져 있다. 이리저리 심하게 삐뚤어지기는 했지만, 핏물은 확실히 하나의 메시지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안녕?』
『어서 와.』
상당히 도발적인 문구였지만, 한편으로는 놈들이 우리가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집주인이 참 예의가 바르군요. 이렇게 환영도 해주고 말이죠.”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환영하는 방식이 저질이에요.”
여인이 투덜거리며 뼈를 내던지자 유지태가 가볍게 웃어 젖혔다. 그 웃음에 긴장이 풀린 걸까? 사용자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렸는지 각자 할 일을 시작했다. 일부는 둥글게 모여 사방을 경계하고, 일부는 통신용 수정구를 꺼내 무사히 안착했다고 보고한다.
나 또한 한쪽 방향을 맡은 채 어둠이 들어찬 통로를 조용히 응시했다. 어느덧 통신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다시금 쥐 죽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약 5분이 지났을 즈음. 보고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허공에서 수많은 사용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안전을 확보한 이상 헬레나도 거리낄 것이 없는 모양이다.
두 번째로 내려온 인원은 처음 내려온 인원의 2배인 40명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한소영을 포함, 남은 42명 전원이 내려왔다.
그렇게 총원 102명은 15분만에 구덩이 안으로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라는 건, 불행스럽게도 내 착각에 불과했다.
세 번째로 내려온 42명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들이 내려온 이후, 허공에서 두 명이 추가로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싶어 자세히 보니 빙글빙글 웃고 있는 사샤와 헬레나를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사샤와 헬레나가 사뿐히 지면에 안착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두 거주민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헬레나는 그렇다 치고. 사샤. 너는 왜 왔지?”
“음. 그거야….”
문득 사샤가 도중에 말을 멈추더니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왜 나는 그렇다 쳐주지 않는 거지? 헬레나는 그냥 넘어갔으면서?”
“헬레나는 올라갈 때 필요할 테니까.”
“…어, 어쨌든 차별이다. 어차피 총 사령관의 허락도 받았겠다. 헬레나가 가만히 있는다면, 나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겠다.”
“…….”
총 사령관의 허락을 받았다? 의아한 기분에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마침 한소영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머셔너리 로드. 제가 허락해주었어요. 왜냐하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사샤라는…. 네?”
“이왕 참가하게 됐으니 사샤와 헬레나도 머셔너리 쪽으로 참가시키겠습니다.”
한소영의 말끝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사샤와 헬레나도 충분히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거니와, 이렇게 구덩이에 들어온 이상 더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한소영의 지휘권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저번에 회의에서 발끈한 건 아직도 후회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냥 공략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한소영도 내 뜻을 느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총원은 102명에서 104명으로 늘었다. 한소영은 인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추스른 후, 곧바로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어차피 통로도 하나밖에 없는 터라, 사용자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동쪽 방향으로 향했다.
역시나 땅속이라 그런지 빛은 한 점 찾아볼 수도 없다. 가는 도중 일부 사용자들은 흙으로 칠해진 벽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천장을 힐끔힐끔 올려다보았다.
통로는 상당히 넓었다. 좌우로 약 12미터 정도는 돼 보이는 너비였고, 천장은 8미터쯤 돼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서너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통로의 벽면이 반듯하게 닦여있다는 것과 사람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있다는 것. 그리고 천장에는 크게 부푼 핏줄 같은 것들이 울룩불룩하게 돋아나와 있다는 것이다.
벽면이야 짐작 가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천장의 것들은 나도 잘 모른다. 1회 차에는 공략에 참가하지 못해 오직 기록으로만 읽은 게 전부였다. 보고 기록에서조차도 그저 그런 게 있다고만 적혀있었을 뿐이지, 정확한 정체는 밝혀내지 못했다.
잠시 후, 서서히 통로가 좁아지는 게 느껴졌다. 길이 평행선이 아닌 사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가면 갈수록 통로가 작아지는 형태였다. 그에 따라 사용자들은 줄을 합치는 것으로 진형을 변경했으나, 이내 변경된 진형으로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또다시 통로가 좁아졌다.
“형. 이러다 나중에는 한 줄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곁으로 다가온 안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안현의 걱정은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가장 선두에서 걷던 한소영이 걸음을 멈추고 정지 신호를 보낸 것이다.
바로 앞으로 나가보자, 기억하는 대로 2미터 정도의 커다란 입구와 안쪽으로 거대한 공동이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입구와 비슷한 크기의 굴 9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가자 직경 80미터는 돼 보이는 공동이 우리를 맞이했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소영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9개의 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지그시 바라보는 게, 아마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사용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굴을 바라보는 안솔을 발견한 순간, 살금살금 옆으로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삐아!”
안솔이 옆구리를 잔뜩 비틀며 교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사용자들 사이로 의아한 시선이 잔뜩 모여들었다. 나는 재빠르게 반대로 시선을 돌려 모르는 척을 했다. 시선이 가까스로 가라앉을 즈음 살며시 머리를 돌리자, 입을 삐쭉 내민 채 ‘오라버니 나빠요.’라는, 원망 섞인 눈초리를 보내는 안솔이 보였다.
“안솔. 궁금한 게 있는데.”
“흥.”
“안솔?”
“흥!”
“…머리 쓰다듬어줄까?”
“정말이요? 헤헤…. 아, 아니지. 흐, 흐응!”
넘어오지 않는군. 이제는 사탕을 살랑살랑 흔들어도 쫄랑쫄랑 따라오지 않는 정도로는 성장했어. 이 오라버니는 정말로 기쁘구나.
결국 흥흥거리는 안솔을 까꿍 우쭈쭈 등으로 어르고 달래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어때. 혹시 저 굴 중에서 느껴지는 것이라도 있니? 예를 들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라거나.”
“으응. 잠시만요. 실은 저도 아까부터 노력하고는 있었는데….”
안솔은 실눈을 뜬 채 한참이나 굴을 바라보다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 나는 바로 사샤를 찾아보려다가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안솔이 모른다고 했는데, 사샤가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좌우간, 행운 능력치가 102포인트나 되는 안솔이 잘 모르겠다고 회답했다.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 아니, 세 가지.
하나는 능력이 발동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는….
“인원을 나누겠어요.”
그때였다. 어느새 생각을 정리했는지 한소영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입구는 총 9개가 있지만,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러니 우선….”
한소영의 말이 고요하게 이어졌다. 그 말인즉, 굴이 9개가 있으니 인원도 9등분해서 동시에 들어가겠다는 소리였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내가 아는 거라고는, 어차피 지금 나온 입구가 추후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
하지만 통신용 수정구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고려하면,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다. 물론 전력 또한 9분의 1로 약화된다는 문제는 있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 사용자들 모두가 어지간한 이들이 아닌가. 더구나 좁은 통로에서 싸울 것을 생각하면, 우르르 혼잡하게 몰리는 것보다는 인원을 줄여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해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이 많은지 딱히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한소영은 사용자들의 반응을 확인한 후 바로 인원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냥 적당히 나누는 게 아니라 최대한 클래스를 맞추면서, 최대한의 효율성(서로간의 호응 정도 등.)을 고려한다.
머셔너리는 딱히 인원을 나누거나 합칠 필요가 없었다.
근접 계열로는 검술 전문가인 나, 검후 남다은, 기공창술사 안현, 침묵의 집행자 허준영.
지원 전투 계열로는 그림자 여왕 고연주, 피의 군주 사샤.
원거리 계열로는 일반 궁수 선유운, 키메라 소환술사 비비앙, 일반 마법사 헬레나.
사제 계열로는 일반 사제 신재룡, 광휘의 사제 안솔.
거기가 특수 계열인 신의 방패 백한결까지.
이미 참가한 12명의 인원만으로도 클래스 비율이나 인원을 딱 맞출 수 있었다. 비록 머셔너리 최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다른 어떤 조보다 호화로운 구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우리에게는 9개의 입구 중 가장 중앙의 입구가 배정되었다. 거의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유독 중앙의 입구가 조금 더 크고, 음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20분에 걸친 재편성이 끝나고, 적게는 11명, 크게는 14명으로 이루어진 9개의 조가 각각의 입구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소영의 조는 우리가 맡은 중앙 입구의 바로 오른쪽에 있는 입구였다.
“절대 무리하지는 마세요. 우선은 길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혹시라도 어렵다 싶으면 곧바로 연락 및 물러나도록 하세요.”
한소영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분명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 같은데, 왜 계속 나만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걸까?
돌연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나는 볼을 긁적이며 입구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출발하세요. 각 조의 건투를 빌어요.”
“머셔너리 클랜. 들어갑니다.”
한소영의 건투를 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차분히 한 걸음 안으로 내디뎠다.
============================ 작품 후기 ============================
이제 강철 산맥 2지역 파트도 서서히 마무리로 접어드네요. 개인적으로 이번 파트를 적으면서 꼭 적고 싶은 내용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저번에 신상용의 파트인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라는 파트처럼요.
그 중 두 가지가 이번 파트인 ‘ 철혈(鐵血) 여왕의 분노, 김수현의 환희.’,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파트인 ‘다시 한 번, 빛나는 그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 웃으며 안녕.’입니다.
굳이 따져보면 이번 파트보다는 마지막에 나오는 파트가 더 적고 싶기는 해요. 하하. 아무튼 적고 싶은 파트들이 다가오니 갑자기 소재가 넘쳐나기 시작했어요. 글 적는 게 너무 즐겁답니다. 😀 ㅎㅎㅎㅎ.
여러분도…. 즐거우세요? ☞☜
PS. 다음 회는 찾을 수 있는 여건이 되면 BGM 하나 소개시켜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