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75
00574 철혈(鐵血) 여왕의 분노, 김수현의 환희. =========================================================================
…모든 길에서 어마어마한 적들이 출현해, 우리는 9개의 길에서 상당한 전력을 잃어야만 했다.
그렇게 간신히 두 번째 공동에서 모인 이후, 당시 총 사령관이었던 사용자 한소영은 모든 인원을 통합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어떤 말도 않고 두 번째로 나타난 5개의 길, 아니 함정의 길을 향한 진군을 시작했다.
문득 생각나건대, 그때의 클랜 로드(이하 한소영.)는 조금 이상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뭔가 화를 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그 당시 한소영의 쾌속한 진군을 매우 걱정하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탁월한 방법이었다. 그때부터 뭔가 서로의 손발이 맞아가기 시작한 것 같으니까.
그래. 그때부터 원정대 내의 무언가가 변화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감히 평하건대, 그 변화는 우리가 강철 산맥 공략을 성공할 수 있었던 하나의 원동력, 혹은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 신 대륙 아틀란타(Atlanta) 고대 도서관. ‘강철 산맥 공략 회고록.’ 中 발췌.
*
잠시 후, 어두운 통로 너머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면면이 살펴볼 것도 없이 구덩이 공략에 참가한 사용자들이었다. 하지만 우리와는 다르게, 보이는 모습이 과히 좋지 못하다. 입구를 드리운 탁한 불빛이 비추는 사용자들의 모습은 온 장비에 피를 덕지덕지 바른 상태였다.
“…괜찮으세요?”
안솔의 목소리였다. 가장 앞에서 걸어오던 사내는 무사 로드 고오환이었다.
“젠장, 보면 모르쇼? 습격 한 번 거하게 당했수다.”
고오환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입구 안으로 들어오고는 “끙.” 힘을 주어 가슴께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었다. 약간의 피가 튀는가 싶더니 화살을 뽑아낸 자리가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안솔이 금세 치료 주문을 외우려고 했지만, 또 한 번 머리를 저은 고오환은 뒤에 들어오는 사용자들을 가리켰다. 다른 사용자들 또한 고오환과 거의 비슷하거나 아니면 더욱 심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9번째로 사용자를 마지막으로 더는 들어오는 이가 보이지 않는다.
“두 명 당했소. 골짜기에서 족쳤던 놈들이랑 똑같이 봤다가 아주 제대로 당했지.”
“수가 많았습니까?”
“우리보다는 많았지요. 그래도 충분히, 피해 없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라질! 칼, 활, 마법, 심지어 치료까지! 도대체 어떻게 놈들이 사용자 설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우선 치료부터 받으시죠.”
일단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한창 분노를 터뜨리던 고오환이 돌연 우뚝 말을 멈췄고, 이내 나와 클랜원들을 쓱 훑어보았다.
“…헌데, 그쪽은 습격을 받지 않은 거요? 상태가 꽤나 괜찮아 뵈는데.”
“우리는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중앙 바닥을 가리켰다. 고오환의 두 눈이 멍하니 따라가는가 싶더니 “억.” 소리와 함께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어떻게 된 일이냐는 혼비백산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더 이상 회답해줄 여유는 없었다. 어느새 우리가 들어온 입구 바로 왼쪽의 굴에서 새로운 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입구라면 한소영이 들어간 굴이었다. 나는 밀려오는 불안을 억누르면서 침착히 어둠 너머를 응시했다.
이윽고 정확히 11명의 인원이 두 번째 공동에 도착했다. 다행스럽게도 따로 습격을 받지는 않았는지 한소영 일행은 모두 정상적인 상태였다.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은 처음에는 차분히 걸어 들어왔으나, 심하게 다친 사용자나 허수아비 시체들을 보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역시나 침착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무사 로드가 오다가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무사 로드 조의 습격 소식은 오면서 들었어요. 그런데, 이 시체들은요?”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세워진 상태였습니다. 아마 습격을 완료한 후 우리보다 먼저 이 공동에 도착해 모종의 작업을 한 것 같습니다.”
“모종의 작업?”
“…이걸 보시죠.”
약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핏물로 바닥에 적힌 글씨를 가리켰다. 고개를 내린 한소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나는 조금 더 한소영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입구 쪽으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여러 굴에서 무수한 기척이 동시다발적으로 잡혔다.
무사 로드의 조만 습격 받은 게 아니었다. 남은 6개의 조에서도 습격을 받은 조가 하나 있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른 5개 조가 무사히 들어왔다는 것과, 습격 받은 조의 피해가 상당히 미미하다는 것.
“그냥 골짜기 전투 때와 똑같았습니다. 놈들의 수도 적었고, 제대로 부딪치기도 전에 도망치더군요. 이 정도면 딱히 보고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통신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사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한 조는 아예 몰살을 당했고, 한 조는 2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치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한 조는 살짝 건드리기만 했다. 나머지 조는 모두 무사하다.
이것만 봐도 적의 의도는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적의 수뇌부는 지금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용해 심리전을 가미한 유격전을 벌이는 중이다.
말인즉, 자신들의 보금자리까지 최대한 야금야금 전력을 갉아먹으면서 동시에 원하는 판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다친 사용자들의 치료는 거의 완료된 상태였다. 생각을 마친 나는 다시 한소영을 바라보았다.
한소영은 여전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길게 늘어진 머리가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한소영을 보고 있자니 조금이지만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결과는 명백한 한소영의 실수였다. 물론 인원을 나눌 때는 한소영 나름대로 여러 방면을 고려하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적은 한소영의 의도를 꿰뚫고 역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적이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것에 반해, 우리는 적은 물론 이 땅속 도시도 자세히 모른다. 정보의 부재가 가져온 패배였다.
물론 나는 한소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입장이기는 했다. 아마 이번에도 선두에 나를 세웠으면 총 전력의 10%에 해당하는 13명을 잃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터.
그러나 구덩이 내에서는 한소영이 지휘권을 잡았다. 그런 만큼 나는 조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 조언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면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는 입장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유야 어찌됐건 한소영은 구덩이 내 첫 전투에서 패배했다. 좋게 말하면 어쩔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냉정히 말하면 적의 손에 놀아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한소영이 주먹을 질끈 말아 쥐었다.
“모두.”
담담하기 그지없는,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목소리.
그러나.
비로소 한소영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나는 그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도대체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두 눈은 아니었다. 흑 수정 같은 눈동자 속에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북풍한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폭풍이 건너편 5개의 입구, 정확히는 정 중앙을 응시한다.
그래.
한소영은 지금 분노하고, 화를 내고 있었다.
“정렬하세요.”
한소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용자 한소영의 고유 능력 카리스마(Rank : A Plus)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전장의 지휘(Field Maestro)의 권능, 파괴 • 돌격을 발동합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속도 및 파괴력, 돌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시원한 기운이 몸에 내려앉았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한소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용자들이 제자리를 찾아 하나의 진형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의 한소영은 마치 차갑게 불타는 얼음을 보는 듯했다. 한소영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부터 인원은 더 이상 나누지 않아요. 중앙의 굴을 통해 무조건, 최대한 빠르게 구덩이를 공략하겠습니다. 나머지에 대한 역할은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어요.”
“…….”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소영은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나갔다. 권능의 영향일까? 그 누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한소영의 몸이 입구 안으로 사라졌다.
가장 먼저 한소영을 따라 달려간 건,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원들 이었다. 나는 그 다음으로, 곧바로 땅을 박찼다. 그제야 등 뒤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랴부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입구로 들어가자 또다시 공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문득 몸이 한없이 가볍고 힘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꼈다. 오죽하면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무언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한소영은 거침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내 주변의 어둠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여태껏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군해오던 것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진도가 쭉쭉 나가기 시작한다.
“초, 총 사령관님! 잠시, 잠시만요!”
그때였다.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와 간신히 한소영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한소영은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걸음에 박차를 가한다.
“왜, 왜 이렇게 급하십니까? 일단 차분히 사정부터 알아본 후….”
“필요 없어요.”
한소영은 간단히 회답했다.
“습격에 대한 정보는 이미 들었어요.”
“그, 그래도….”
“그 이상의 정보를 알아본답시고 있어봤자 추측밖에 되지 않아요. 적에게 시간만 주는 꼴이에요.”
“하, 하지만! 그러면 최소한 선두에서는 물러나주십시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고, 또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사내가 악을 쓰듯이 말했다.
“그러면 그러세요.”
그러나 한소영은 또다시 말을 끊었다.
“예, 예?”
“함정이 보이면 해체하고, 위험을 감지하면 알려주세요. 나머지 역할은, 알아서 맡긴다고 하지 않았나요?”
사내는 달리는 와중에도 멍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 하지만 그걸 제 멋대로….”
“왜 그게 제 멋대로인 일이죠? 그대가 궁수라면 당연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어, 음. 그, 그렇죠.”
“제 결론이 필요 없거나, 제가 결론을 낼 수 없는 보고는 필요 없어요.”
그제야 사내의 눈동자에 아차 한 빛이 스쳤다.
“할까요, 말까요. 그걸 묻기 전에, 먼저 하고 나서 보고하세요.”
그 말이 들린 순간이었다.
“함정을 발견했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클랜 로드.”
이제껏 쭉 내 옆에서 달리던 선유운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그리고 갑자기 속력을 내어 앞으로 쭉쭉 달려가더니 한소영마저 지나쳐 더욱, 더더욱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한참이나 앞쪽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무릎을 굽혀 지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선유운의 두 손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일 뿐.
이윽고 우리와의 거리가 30미터 가량 남은 찰나, 돌연 선유운이 무언가를 쭉 잡아당기며 물러났다. 그 순간, 선유운의 서 있던 흙 바닥이 쩍 벌어지며 커다란 구렁텅이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한소영은, 느닷없이 생성된 구렁텅이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 구렁텅이가 무엇인지 보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저 뛰어넘고 계속해서 달릴 뿐.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무릎을 털고 일어난 선유운이 몸을 돌려 전방의 천장을 향해 팔을 들어올렸다.
핑, 화살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화살이 무언가를 건드린 걸까? 천장이 점점이 둥글게 벌어진다. 이내 그곳에서 성인의 다리만한 수십 개의 쇠창살들이 일제히 떨어져 내리 꽂히더니, 끝부분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바닥에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한소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바닥에 박힌 쇠창살을 지지대 삼아 그곳마저도 가볍게 뛰어넘었다. 한소영의 몸이 한 마리 새처럼 허공을 가르고, 칠흑 같은 머리칼은 바람결에 강렬하게 찰랑인다.
엄청난 진군 속도였다. 이건 강행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한 번도 내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쾌속의 행군이었다. 지금 이 속도만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놈들의 근거지에는 금방 다다를 수 있다.
나는 약간 멍하니 시선을 들어, 가장 앞에서 달려나가는 한소영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가히 신속(迅速)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한소영의 모습이, 무언가 굉장히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속도만 높이면 금방 따라잡고 또 가볍게 지나칠 수도 있을 터인데, 왜 이렇게 자꾸만 쫓아간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일부러 이러는 걸까?
지금의 한소영은, 마치 1회 차에서 수천, 수만의 사용자들을 호령하고 이끌던, 최 전성기의 철혈의 여왕을 보는 듯한….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눈동자에 힘을 주며 전방을 응시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며 기어이 한소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 작품 후기 ============================
개인적으로 오늘 적었을 때 들었던 BGM을 들려드리고 싶은데, 어디서도 찾지 못하겠네요. 공식적인 곡은 아니고 누가 자작해서 만든 곡 같은데(신나는 뉴 에이지 같은 BGM이에요.), 저장할 때 분류하기 편하게 이름을 변경해놔서요. 이걸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원….
대충 들리는 느낌으로는 이래요.
빰빰.(뚜뚜딱. 뚜뚜딱. 뚜뚜딱. 뚜뚜딱.)(으아아아아앙~. 우주 소리?)
빰빰.(뚜뚜딱. 뚜뚜딱. 뚜뚜딱. 뚜뚜딱.)(으아아아아앙~. 우주 소리?)
빰빰.(뚜뚜딱. 뚜뚜딱. 뚜뚜딱. 뚜뚜딱.)(으아아아아앙~. 우주 소리?)
빰빰.(뚜뚜딱. 뚜뚜딱. 뚜뚜딱. 뚜뚜딱.)(으아아아아앙~. 우주 소리?)
빰빰 빰빰빰빰 빰빰빰빰빰빰, 빰빰 빰빰빰빰 빰빰빰빰빰빰.
치지직.
빠빠빠라라빠빠빠, 빠빠빠라라빠빠빠, 빠빠빠라라빠빠빠….
대충 이렇게 들리는데 혹시 느낌 오시는 분 계신가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