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77
00576 Predator. =========================================================================
…그렇게 모든 퇴로를 차단당한 우리는, 꼼짝없이 포위된 채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구덩이 공략은 정말로, 진심으로 끔찍한 기억이다. 많은 것을 얻었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으니까.
구덩이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확실히 강한 괴물들이 나왔다. 일전에 그냥 괴물의 모습을 한 놈들은 그저 과자에 불과했다. 진짜는 구덩이 안,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놈들이었다. 바로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들.
모든 공략이 끝난 후, 사용자들이 예상하기로 그때 그 괴물들의 전투력은 아마 사용자들을 섭취한 수에 상관 관계가 있지 않을까…. 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필자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우선, 한 명의 사용자를 제물로 진화를 한다. 그리고 다음에 섭취하는 사용자들부터는 그 사용자가 생전에 지닌 경험이나 기억 등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심지어 사용자 정보마저도.
아무리 가설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등이 섬찟할 정도로 소름 돋는 일이다. 그러면 개중에 10명, 20명을 넘게 섭취한 놈들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런 놈이 있었다. 다른 인간화된 괴물들보다 수 배, 아니 수십 배나 강한 전투력을 보이는, 말 그대로 괴물 같은 놈이.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본래 괴물로서의 힘. 그리고 인간을 섭취함으로써 받아들인 힘.
그놈은 그것 말고도 분명히 무언가 다른 게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 신 대륙 아틀란타(Atlanta) 고대 도서관. ‘강철 산맥 공략 회고록.’ 中 발췌.
*
주현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어둠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코끝을 스친 바람은 더욱 강렬하게 불어 닥치고 있었고, 지축을 울리는 소리 또한 점차 선명히 들려오는 중이었다. 이리 생각해보고 저리 생각해봐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씨발!”
정말 말도 안 되는 쾌속의 진군이었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아니 목숨이 걸려있는 입장에서는 절로 욕설이 나올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저 공략 조가 왜 이렇게 죽자 사자 직선으로 짓쳐 들어오는지를.
벌써부터 따끔따끔한 살기를 느꼈는지, 주현호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젠장, 안 돼. 당황하면 안 돼! 아직…!”
스스로 당황하면 안 된다 말을 하면서도, 이미 주현호의 얼굴에는 당혹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주현호가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내 한쪽 방향으로 급하게 달려간 주현호의 몸이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주현호가 서 있던 자리의 건너편으로 90여명의 사용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현호가 상황을 인지하고 모종의 행동을 하는 동안, 구덩이 공략 조가 막다른 곳에 도착한 것이다.
앞쪽에 막혀있는 벽면을 봤는지 계속해서 질주하던 한소영이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끊임 없이 움직이던 사용자들의 다리도 자동적으로 정지했다. 상당한 거리를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은 호흡만 살짝 거칠어졌을 뿐 딱히 힘들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낌새를 눈치 챈 것일까? 막다른 벽면에서 좌우를 둘러보던 고연주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네요. 보아하니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어느새 흙 바닥으로 내려간 눈초리가 주르륵 오른쪽으로 미끄러졌다.
“아무래도…. 오른쪽으로 달려간 것 같은데.”
고연주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매듭지었다. 그저 그런 사용자가 아닌, 암부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그림자 여왕의 말이었다. 이내 한소영의 고개가 살며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잠시 멈췄던 공략 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다른 곳이라고 해서 다른 통로가 없는 건 아니다. 어느새 공략 조를 스치는 풍경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비해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애당초 이 땅속 도시는 개미굴과 무척 흡사한 구조를 지닌 도시다. 예를 들면 알 방이나 노예 방 혹은 여왕 개미 방과 같이, 애벌레 괴물의 방이나 사용자들을 감금하는 방 혹은 왕의 방 등이 존재한다. 다만 보통의 개미굴과 이 구덩이 간의 명확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굴과 도시의 차이라는 것이다.
“……!”
하염없이 달리는 와중 안현은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발바닥에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아닌 딱딱한 쇠의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로 흘긋 시선을 떨어트린 순간 안현은 약간이지만 기함하고 말았다.
“이건…. 철도잖아?”
그랬다. 지면에는 쭉 이어지는 고정된 침목에 설치된 기다란 철의 궤도가 있었다. 통로를 타고 사방팔방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철도. 흡사 어디 광산에서나 볼 법한 광산 철도였다.
“흠. 정말 철도구나.”
안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다가온 신재룡이 조용히 회답했다.
“설치 자체도 엉성하고 녹이 많이 슬었지만, 확실히 철도야.”
“이,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리고 한 번 더 힘주어 말하자 안현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신재룡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가능할지도. 아까도 이와 같은 것들이 종종 보였거든. 혹시 통로를 지나칠 때 기억하니?”
“통로를 지나칠 때라면…. 함정이요?”
“그렇지. 그런 함정도 있는데 철도가 없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이 구덩이가 괴물들의 서식지임을 고려해보면, 철도는 아마 인간화된 괴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구나.”
“인간화된…. 괴물들의 편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안현이 머리를 갸웃했다.
“그래.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 철도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만들었을 거다.”
“사람들이 왜 이런걸 만들어요?”
“여러 경우의 수가 있지. 노예로 잡혀와서 어쩔 수 없이 만들었거나. 아니면 이러한 지혜를 기반으로 생존을 구걸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
신재룡은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싶었으나 곧 입을 열었다.
“괴물들이 사람들을 잡아먹은 후, 우리의 지식을 흡수해 만든 것일 수도 있고.”
안현의 얼굴이 딱딱히 경직됐다. 그리고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고는 뜻 모를 한숨을 흘렸다.
“…여기는 도대체.”
“클랜 로드의 말씀 그대로야. 아마 단순한 구덩이가 아니라, 일종의 도시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괴물의 지배하는 땅속 도시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신재룡은 안현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그 뜻을 모를 안현이 아니었다. 궁금한 점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는 있었지만 가까스로 접어두었다. 일단은 공략이 우선이었으니까. 궁금한 것들은 그 후에 해결할 수 있다.
실제로 철도를 발견한 사용자들 또한 하나같이 의아한 빛을 띠고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모두가 입도 벙긋 않으며 앞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한 번쯤 빛나는 시절이 온단다.’
안현은 출발 전 신재룡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애용하는 흑색 창을 꼭 쥐고서는 한껏 긴장한 눈초리로 전방을 노려보았다.
*
공략 조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후,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통로는 상당히 길고 중간중간 갈라지는 길도 많았지만, 사용자들은 주현호가 남긴 흔적을 따라 무조건 직진했다.
그렇게 통로를 달리기를 한참, 비로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 끝나고 새로운 입구가 공략 조 앞에 출현했다.
입구 안으로 보이는 공간은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넓어 보였다. 천장까지의 높이도 10미터는 넘어 보이고, 지름도 처음 공동보다 넓으면 넓었지 절대 좁지 않다. 무엇보다 바닥이나 벽이 흙으로 된 게 아니라 돌을 반듯하게 깎아 덧댄, 그런 공간이었다.
마침 끝없이 이어지던 철도도 입구 앞에서 끝나는걸 보면, 아마 주요한 방이 모두 연결되거나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광장(廣場) 같은 공간이 아닐까 싶다.
사용자들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여러 공동을 지나쳐왔지만 이처럼 커다란 공간은 또 처음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감이 좋은 사용자들은 알아차리고 있었다. 공간 안에서 흘러나오는 무시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을.
오직 강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기운. 아까 200마리 괴물에 대승을 거둔 이후로 한동안 나오지 않다가, 새로운 괴물이 출현한 것이다. 그것도 지금껏 겪어온 괴물과는 차원이 다른 괴물이.
이윽고 공략 조가 달려오는걸 봤는지, 광장 내 제단 비슷한 것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시커먼 문신이 그려져 있고 두 눈을 야수처럼 번뜩이는 괴이한 사내는, 다름 아닌 주현호였다.
잠시 후, 한소영을 선두로 한 사용자들이 우르르 광장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어서들 오시게.”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눈앞의 사내를 신경 쓰면서도, 재빠르게 공간 내부를 훑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공간을 둥글게 둘러싸는 육중한 철문. 철문은 꼭 닫혀있는 상태였다. 어림짐작으로도 6개는 되어 보인다.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특이한 게 없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아무튼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들 하셨소. 사용자 나리들?”
있는 거라고는 오직 한 사내, 아니 사내의 모습을 한 괴인. 목소리도 그렇고 제단에서 내려와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게 정말로 여유만만한 모습이다. 그러나 한소영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빙글빙글 웃으면서도 살짝살짝 흔들리는 눈동자와, 꼴깍 움직이는 목울대. 그리고 무엇보다 초감각이 현재 괴인의 심리를 전해주고 있다.
초조. 불안.
시간을 끌려고 한다.
생각을 정리한 한소영이 지체 않고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핑!
한 발의 화살이 괴인을 향해 쏘아졌다. 그 화살은 여지없이 괴인의 목을….
탁!
“이런.”
아니. 화살은 주현호의 목을 꿰뚫지 못했다. 분명히 주현호의 목에 정확히 닿았으나 살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져 나간 것이다. 얼굴을 크게 찌푸린 선유운을 보며 빙긋 웃은 주현호는 차분히 몸을 굽혀 화살을 주웠다.
“아이고. 뭐가 그렇게들 급하십니까. 자자. 일단 진정들 하시고, 우리 평화롭게 이야기부터 나눠봅시다. 거 참, 같은 사람끼리 박정하기는.”
“같은 사람?”
한소영이 반문했다.
“너는 누구지? 이 구덩이의 주인인가?”
“주인? 글쎄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히히히!”
한소영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주현호의 입가가 비틀리듯이 올라간다. 그리고 주운 화살을 까닥까닥 흔들며 입을 열었다.
살랑, 돌연히 어디선가 미약한 바람이 불었다.
“우선 그 무서운 살기부터 거두시죠. 어차피 이런 공격들을 해봤자, 저한테는 생채기도 낼 수 없으니까…. 크아아악!”
그때였다.
푸확!
얄밉게도 말하던 와중, 문득 주현호의 오른쪽 팔이 기다란 자상이 생겼다. 베어진 부분에서 피가 왈칵 터져 나왔다. 일반적인 붉은 색깔이 아닌, 먹물을 보는 듯한 시꺼먼 색깔이었다.
생각보다 깊게 베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뜻밖의 일격이라서 그런 걸까. 한순간 끔찍한 비명과 동시에 주현호의 몸이 크게 젖혀졌으나 가까스로 추스를 수 있었다. 이내 간신히 몸을 가다듬은 주현호가 성난 얼굴로 사용자들을 응시했다.
한소영의 옆, 유독 한 청년이 눈에 밟혔다. 칼자루를 잡고 돌리는, 그러나 정작 칼날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칼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청년. 그 청년이 주현호와 마찬가지로 씩 웃으며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청년과 주현호의 눈이 마주쳤다.
“낼 수 있는데?”
“이…?!”
청년이 이죽거렸다. 반사적으로 발끈하려는 찰나, 주현호는 별안간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확히는 사내의 두 눈을 마주보았을 때부터.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매서운 눈초리가 주현호의 전신을 훑는다.
포식자(捕食者).
그 살기 어린 눈초리와 마주한 순간, 주현호는 가슴 한 켠이 싸늘해짐을 느껴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문제.』
6월 6일, 메모라이즈의 576회 촬영이 끝났습니다.
주현호는 드디어 자신이 제대로 등장한다는 말에, 한껏 좋은 기분으로 대본을 받아 들었습니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6월 7일, 그러니까 577회의 대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주현호는 포장마차에서 우울한 얼굴로 술을 마시며 주정을 부렸습니다.
여기서 주현호의 기분이 왜 우울해졌는지 20자 내외로 이유를 말하시오.(자유 해답 형.)
Hint.
1. 주현호가 술을 마시던 테이블에는 577회 대본과, 김수현(화정) 너프회 가입 신청서가 쥐어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