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80
00579 해와 달을 바라는 괴물. =========================================================================
생각하건대, 그 괴물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아마 행운이 가장 커다란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 같이 싸운 동료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정신이 없을 정도의 무수한 촉수 공격과 조금도 방심할 수 없던 가루 공격. 그리고 우리의 공격은커녕 접근도 허용치 않았던 그 능력은 정말이지….
– 신 대륙 아틀란타(Atlanta) 고대 도서관. ‘강철 산맥 공략 회고록.’ 中 발췌.
*
간신히, 간발의 차이로 한소영을 구할 수 있었다.
무검으로 베어 넘기자 우수수 떨어지는 촉수 너머로 살짝 비틀거리는 한소영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다가가 한소영을 부축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반응했다.
한소영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눈만큼 아니었다. 예전과는 다르다. 뭔가 묘한 눈초리로 나를 직시하는 두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색정(色情)의 빛이 어려있다.
“하아….”
살짝 열린 입술에서 뜨거우면서도 달콤한 내음을 풍기는 숨결이 토해졌다.
“이스탄텔…!”
그러나 그 순간, 한소영이 와락 나에게로 안겨 들었다. 두 팔이 빠르게 타고 올라와 내 목을 감싸 안는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매달린 모양새로 한없이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한소영이 보였다.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의 목소리가 귓전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마치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끈덕진 음색과 온몸을 짓누를 정도의 육감적인 감촉들.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나는 겨우, 그리고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언제 혀를 깨물었는지 입안에서 비릿한 피 내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나는 곧바로 후방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한소영의 명치 부근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며 화정의 힘을 일으켰다.
“으음…!”
역시나 화정의 힘에는 별도리가 없는지 한소영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정상적인 빛을 되찾았다.
잠시 후, 한소영이 한결 차분한 태도로 떨어졌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이제는 괜찮아요. 아무런,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한소영은 빠르게 고개를 젓더니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치 더 이상 이에 관한 질문은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차분히 머리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파더 등장 때 걸렸던 압박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는지 사용자들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러나 파더를 향해 경배를 하던 괴물들 또한 하나하나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결국 변한 건 없는 건가. 저기 새로 등장한 파더만 제외한다면.
“아흑, 아흐흐흑!”
문득 열띤 교성들이 들려온다. 아까 파더에게 잡혀 가루를 뒤집어쓴 여인들이 내는 신음이었다.
“아앙~. 아아앙~.”
개중에는 이미 상하의를 탈의한 채 정신 없이 국부를 쑤시는 여인도 있었다.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가루가 여인이 스스로 처녀성을 깨뜨리게 할 정도라면, 단순히 발정 효과만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미 하나의 독 가루나 다름없다. …좋지 않다.
생각을 모두 정리한 건 아니었으나 일단의 결정은 내릴 수 있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우선은 물러나시죠?”
“퇴각하라는 말씀인가요?”
한소영이 눈을 살짝 치켜 뜨며 반문했다. 나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후방으로 물러나서 남은 괴물들의 상대를 지휘해주세요. 보이는 수가 제법 되는 만큼, 우선적으로 떨거지들의 청소가 시급합니다.”
“그럼 그동안 저 괴물은 누가…. 머셔너리 로드!”
그제야 깨달았는지 한소영의 말끝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 가, 감히 어딜 넘보는 거야! 이 미친 자식아!
그 순간이었다. 파더가 괴성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정이 벌컥 화를 냈다. 어느새 괴물들도 모두 일어나 우리를 보며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더 이상 설득할 시간은 없다.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처리할 수 있으면 처리하고, 안되면 시간이라도 끌고 있겠습니다. 지금 저 괴물을 이대로 놔두는 건 최악의 수나 다름없습니다.”
말인즉, 최대한 빠르게 남은 괴물들을 처리하고 지원을 와달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지체 않고 파더를 향해 달렸다.
“그, 그게 아니라!”
등 뒤로 한소영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소영을 믿고 있으니까. 정말로 철혈 여왕으로서의 각성을 시작한 한소영이라면, 절대로 멍청한 선택은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상황은 나한테 달렸다.
지나치는 괴물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파더에게 다다르기 전 조금이나마 수를 줄여주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달려가면 좌우로 정중히(?) 피해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길을 터준다고 해야 하나? 마치 파더와의 만남을 권하는 모습처럼 말이다.
이윽고 파더와의 거리를 어느 정도 남겨두고서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전신을 엄습했기 때문이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위화감이라고 해야 할까?
– 조심해. 지금 저놈은 너를 최우선으로 노리고 있으니까.
그때, 아까 소리를 질렀던 화정이 말을 걸어왔다.
‘나를 최우선으로 노리고 있다고?’
– 그래. 저놈은 지금 너를…. 아, 아무튼! 너만 보고 있는 중이야. 네게로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 절대로 지면 안 돼!
그렇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오히려 잘됐다. 사실 어떻게 하면 파더의 어그로를 끌어올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저놈 스스로가 나를 보고 있다면 거리낄 것은 없다.
– 조심!
휘리리릭! 휘리리릭!
휘리리릭! 휘리리릭!
그러나 화정의 경고가 이어진 순간, 나는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차 한 순간에 수백의 촉수들이 짓쳐 들어와 나를 파도처럼 덮쳐든 것이다. 깜짝 놀란 나는 무검으로 대응하려다가 촉수의 수를 보고 피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꽝!
지면에 촉수가 처박히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돌덩어리가 떨어진 것 같은 폭음이 울렸다. 어찌나 위력이 강렬한지 지면이 떠르르 울릴 정도였다.
꽝! 꽝! 꽝! 꽝!
공격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파더는 내가 피한 자리에마다 쉴 새 없이 쫓아와 촉수를 후려쳤다. 나 또한 민첩에는 자신이 있는 터라 요리조리 피할 수는 있었지만, 파더의 촉수는 정말 마구잡이로, 아니 집요하게도 나를 쫓아왔다. 정말로, 기필코 꼭 잡고 말겠다는 듯이.
어느덧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의 부근은 흡사 해일에 덮쳐진 것처럼 휩쓸린 상태였다. 나는 침을 삼키며 파더를 응시했다. 다른 방해 없이 일 대 일을 하게 된 건 좋으나 방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잠시 후, 이번에는 촉수들이 세 갈래로 나뉘어져 슬금슬금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나는 잡을 수 있을까 하는 것처럼.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갈래들을 보며 추가로 빅토리아의 영광을 들었다. 촉수 세 줄기가 아니라, 세 갈래였다. 차라리 마법 공격이라면 모를까. 한 갈래당 못해도 2, 3백 개의 촉수들이 함께 움직일 텐데, 그러면 그쪽에서 행사되는 물리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휘리리릭!
다시, 온다.
이번에는 마구잡이 공격과는 다르다. 하나는 정수리부터 찍어 내려오고, 다른 하나는 옆구리를 노리며, 마지막 하나는 지면으로 낮게 쓸어온다.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지면으로 들어와 발을 노리는 촉수들이었다. 곧바로 땅을 박차 피하고 난 후에, 나는 상체를 한껏 기울인 채 한 번 더 허공을 걷어차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손과 발이 땅에 닿은 그 순간, 남은 촉수들이 들어오는 방향을 계산하며 있는 힘껏 두 다리를 치켜들어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자 시야가 상하 반전을 함과 동시에, 등과 목덜미를 쏜살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매서운 감촉이 느껴졌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빠르게 가까워지는 파더의 몸통을 향해 두 개의 검을 교차시켰다. 그때였다.
파앙! 파앙! 파앙! 파앙!
“큭?!”
막 검을 그어 내리기 직전, 그러니까 파더의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즈음.
갑작스럽게 파더의 인근에 대기하던 촉수들이 한껏 부풀더니 바람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몸에 강한 압력이 밀려들었다. 흡사 거센 폭풍을 압축한 공격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내 압력에 밀려나 아슬아슬하게 지면에 착지한 찰나, 나는 돌연 몸이 비틀거리는걸 느꼈다.
– 김수현!
하지만 화정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바로 몸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몸을 휘도는 뜨거운 기운에 무언가가 녹아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뜻밖의 공격을 받으면서 나도 모르게 중독된 것 같은데, 때마침 화정이 나서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압력 공격이 여파는 남아있어, 이마에 미약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 야, 이 멍청이야! 그렇게 무턱대고 들어가면 어떻게 해! 죽을뻔했잖아!
‘죽을뻔했다고?’
– 방금 공격을, 아니 아까 가루 공격을 보고도 몰라? 촉수로 공기를 빨아들여 단단히 압축시켜놨다가, 네가 들어오는 때에 맞춰서 가루랑 함께 터뜨린 거잖아!
‘그럼…. 거기서 발생한 압력으로 자신을 보호함과 동시에, 나한테 공격을 했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기록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화정과 마력을 일으킴과 동시에 오른발로 힘껏 땅을 굴렀다.
화륵, 화르륵!
삽시간에 주변으로 수십 개의 열화검들이 떠오른다. 저번 전쟁 이후 꽤나 오랜만에 사용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래저래 생각할 필요 없이, 나는 일단 떠오른 열화검들을 모조리 파더를 향해 발사했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을 떠돌던 촉수들이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화검의 위험을 인지한 걸까? 촉수들은 삽시간에 파더의 몸체 앞으로 둥글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줄기를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열화검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추어 파앙! 소리를 내며 공기를 발출했다.
그 결과, 기세 좋게 날아간 열화검들이 하나같이 궤도가 빗나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멍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검술 전문가의 권능 결.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화정.
그러할진대.
귓전이 멍멍히 울릴 정도의 굉음이나 도복이 펄럭이는 것은 둘째치고서 라도, 내 권능이나 화정의 힘이 통하지 않았다는 건….
– 통했어! 이 바보야!
‘뭐라고?’
– 통했다고! 네 권능이나 내 힘은 확실히 통했어!
‘그럼 어째서….’
– 젠장, 너 오늘따라 왜이래?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칼 한 자루, 불 한 점으로 폭풍을 꺼트릴 수 있어? 없잖아!
‘…….’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화정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촉수 하나하나만 따지면 별것 없으나, 일천 개가 넘는 촉수가 한꺼번에 뿜어내는 압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권능이나 화정의 영향을 벗어난 압력은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거기다 압축해서 터뜨린 공기는 물리력으로 인정되니, 내가 자랑하는 항마력의 도움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
상황은 인지했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아다.
나는 파더를 경계하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영역선포?
아니. 영역선포도 불가능하다. 파더는 화의 속성을 지닌 괴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촉수를 오는 족족 베어내서 수를 줄인다?
그것도 불가능하다. 인위적으로 도시와 동화돼 몸 전체에 하나의 매커니즘을 갖춘 마볼로라면 모를까. 눈앞의 파더는 고작 촉수를 건드는 것으로 그 매커니즘을 건드릴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말인즉, 촉수는 계속 베어내도 끊임없이 재생할 것이다.
“…….”
잠시 후, 다시 촉수들이 꿈틀거리는 뱀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문득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파더의 능력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막연하게 권능과 화정이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친 것이다.
물론, 계속 이대로라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파더의 수가 자신을 건들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내가 가진 여러 수도 파더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이대로 버티는 게 아닌, 바로 이기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수현 형님! 지원할게요!”
한결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원한다고? 그럼 벌써 괴물들의 처리가 끝난 건가? 아니면 따로 나를 지원하는 건가?
“디펜시브 매트릭스!”
그러나 미처 생각이 끝나기도 전, 주변으로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했다.
디펜시브 매트릭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시퍼런 바람이었다. 갑자기 바람의 속도가 빨라지며 나를 서서히 감싸는 형식으로 둥글게 올라오고 있었다. 말마따나 하나의 방어 공간을 보는 듯했다.
“되비침!”
그리고 한결의 목소리가 이어진 순간, 비로소 푸른 바람이 새하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크기가 천천히 작아지는가 싶더니 내 주변으로 직경 2미터 정도의 공간을 형성했다. 크기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방어막을 이루는 바람 소리가 더욱 강렬해졌다.
디펜시브 매트릭스, 그리고 되비침.
“……!”
두 말을 무심코 되뇐 순간, 나는 번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한 생각이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파더의 저 능력을 파훼할 수 있는 한 생각이 말이다.
방어 공간이 생성돼서 그런지, 슬금슬금 다가오던 촉수들은 어느새 이리저리 주변만 어정거리며 기회만 엿보는 중이었다.
–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겠는데, 기회는 딱 한 번뿐이야. 저 정도의 지성체한테 두 번의 기회는 없어. 명심해.
내 생각을 알아차린 걸까? 화정이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회답 대신, 무검과 빅토리아의 영광을 으스러져라 쥐며 침착히 무릎을 굽혔다.
============================ 작품 후기 ============================
와, 잠깐 안 본 사이에 뜰에 새로운 팬 아트가 엄청나게 올라와있었네요.
이유정, 정하연, 차소림(창창이), 남다은(검순이), 김한별(보석이), 선유운(활활이), 우정민, 정말로 예쁜, 여성 같은 백한결, 안현, 수영복 차림의 고연주, 그리고 화난 김수현까지! 정말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
정말 모든 팬 아트들이 감사하지만….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제가 워낙 거칠고 야성미가 넘치는 사내라서요. 아무래도 수영복 차림의 고연주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하하.
팬 아트 그려주신 고장난선풍기 님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그림들은 모두 제 뜰에 올려져 있으니, 여러분들도 한 번 구경 오시는걸 추천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