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87
00586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
허공에 두 개의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나는 정신이 망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무검은 내가 2회 차를 시작했을 때부터 쭉 함께해온 검이다. 그런 만큼 몇 번이고 되풀이해 설명을 읽어보았으며, 실체를 이끌어내려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런데도 도통 변화를 보이지 않던 무검이었는데, 뜬금없이 절멸자의 검이라고? 이 무슨 갑작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무검의 상세 정보가 변화합니다.』
『절멸(絶滅)자의 검.』
(설명 : 정령 계는 총 9개 속성의 지배하에 있으며, 또한 각각의 속성마다 그에 걸맞은 역할이 부여돼있습니다. 9개 속성이란 염(炎), 수(水), 풍(風), 무(無), 토(土), 뇌(雷), 광(光), 암(暗), 그리고 혼돈(渾沌)이며, 그 중 혼돈에 부여된 역할은 바로 정령 계를 위협하는 적의 ‘절멸’입니다.
‘절멸자’는 혼돈의 정령 왕을 일컫는 말이며, 끊을 절(絶), 멸할 멸(滅). 즉 ‘아주 없애다.’ 혹은 ‘멸망’의 의미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1. 이 검에 잠재된 가장 큰 위력은 상대방의 목숨 개수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설령 무한의 목숨을 지닌 존재라고 해도, 절멸자의 검은 무조건 ‘하나’로 계산합니다.
2. 이 검에 의하여 목숨이 거두어진 존재는 혼돈의 정령 왕이 관장하는 모종의 홀(Hole)에 가두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발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말인즉, 더 이상 환생, 부활의 축복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 절멸자의 검은 굉장히 무서운 검입니다. 본래는 중간 계에 소환은커녕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검이나, 아득한 상위의 격(格)을 지닌 존재에 이끌려 강제 소환된 상태입니다.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는 것을 추천하며, 설령 다룰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디 두 번, 세 번 고심하고 신중하게 사용하기를 하기를 바랍니다.)
기나긴 설명 메시지가 출력되는 것과 동시에.
– 멍하니 있지 마! 이 멍청이야!
화정의 외침이 머릿속을 왕왕 울렸다.
나는 곧장 정신을 차리고서는 인근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침착함을 유지하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여기는.”
모든 게, 변했다.
말 그대로 모든 게 변했다. 촉수도 보이지 않고 파더도 사라졌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은 더 이상 광장이 아니었다. 그저 칠흑으로 일색 된 어두컴컴한 공간일 뿐.
그러나.
“…….”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어두운 공간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까운 곳에서 매우 거대하면서도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딱히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는 기운이다. 무언가 마구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기운이라고나 할까? 굳이 말해보라면 혼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지도….
“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비로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무검의 변화와 심상치 않아 보이는 설명. 그리고 이 정도의 정보를 지닌 검이라면….
그래. 메시지의 경고를 떠올리면 된다. 말인즉 이 검은 누구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닌 만큼, 주인 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뜻이었다.
쿵.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어디선가 거대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에는 여전히 어둠뿐이다. 그러나 하나의 형체는 보인다. 어둠과 동화된 것 같은 그 형체는 차마 내 시야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 영원히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태고의 불꽃이여. 이 미천한 혼돈의 종이 모든 불의 어머니께 삼가 인사를 올립니다.
– 이렇게 뵙게 된 것을 진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무언가 굉장히 거칠면서도 쇳소리 비슷한 목소리가 귓전을 조용히 울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대자만이 보일 수 있는 중후한 위엄이 깃든 음색이기도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저 형체가 혼돈의 정령 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바깥에 관한 걱정은 이미 접어둔 지 오래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거니와, 검을 꽂은 이상 내가 할 일은 끝난 것과 다름없다. 이것이 화정이 계산한 일이라면, 분명 바깥 상황도 염두에 두었을 터.
– 화정 님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그때, 혼돈이 재차 말을 걸었다. 웅혼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말투였다. 아무튼 화정을 대상으로 한 것 같지는 않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없는데.”
– 그런가. 그렇군. 그렇다면, 여기서부터는 너와 나 둘이 해결하라는 뜻일 것이다.
돌연 어두운 형체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한껏 머리를 올리다가, 어느 순간 더는 젖혀지지 않자 포기하고 말았다.
당최 어떤 식으로 주인 의식을 치를지 감이 잡히지 않기에, 나는 어리둥절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잠시 후, 허공으로부터 무언가 길쭉한 검 하나가 사선으로 느릿하게 내려오는 게 보였다. 나는 지그시 검을 응시했다.
처음 검을 보고 든 생각은, 정말로 아름다운 검이라는 생각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각진 모양으로 반듯하게 정제된 검은 살상용 무기가 아닌, 흡사 정교한 세공품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빛은커녕 어둠마저 빨아들일 듯한 칠흑 빛 검신은, 어둠 속에 동화돼 꿈틀꿈틀 움직이며 살아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너무나 아름답다.
꼭 한 번 사용해보고 싶다.
나는 뭔가 홀린 듯한 기분으로, 검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막 칼자루를 잡으려는 찰나, 혼돈의 목소리가 다시금 고막을 흔들었다.
–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서 흘긋 시선을 올렸다. 여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 내 비록 그분의 명으로 이곳에 왔다고는 하나, 네게 절멸의 권능을 허락하고 안 하고는 별개의 문제.
“…….”
– 망연해 보이는 얼굴이군. 그럼 확실하게 말하도록 하지. 너는, 아직 이 몸을 다룰 자격이 없다.
“…어째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곧장 반문하고 말았다.
사실 약간 당혹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껏 검에 관해서는, 나는 단 한 번도 거부 받아본 적이 없다. 물론 왜인지는 모른다. 아마 진명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막연히 추측만할 뿐. 아무튼, 그런데 저놈은 왜 나를 거부하는 거지?
“내 능력이 부족해서인가?”
– 능력? 사용자 정보를 말하는 거라면 별로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겠군. 아니, 오히려 충분하다고 볼 수 있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주인 의식은 능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 텐데? 그럼 능력은 충분한데, 자격이 없다는 소린가?”
– 그래. 능력이 가장 중요하기는 하지.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오직 능력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능력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럼 다른 기준이 있다는 말인데.
– …정말 모르고 있는 건가.
혼돈의 정령 왕이 한숨을 쉬었다고 느꼈다면, 과연 내 착각일까?
– 이봐. 너는 검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응? 검을 무엇으로 생각하냐니? 그게 무슨….”
그 순간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 그래.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겠지. 그냥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로서만 사용해왔겠지. 그럼 결국, 네가 생각하는 게 딱 그 정도라는 말일 테고.
“잠깐.”
–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하게 되니 약간 화가 나려고 하는군. 하나의 자아를 가진 검은 자신을 사용하는 주인을 생의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헌데, 너는 어째서 그 모양이지?
“그러니까….”
– 그러니까 모든 검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도, 왜 사랑을 줄 생각은 하지 않느냐, 바로 이 말이다. 검의 주인이여.
“…….”
혼돈의 정령 왕이 내 진명을 정확히 언급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동안 검을 도구로만 취급한 건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게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둘째치고서 라도.
– …쯧. 해줄 말은 여기까지다.
그렇게 끔뻑끔뻑 눈만 움직이고 있자, 문득 허공에 떠 있던 검이 누군가에 떠밀리듯이 억지로 내 손안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혼돈의 정령 왕이 등을 돌리는 기척이 전해졌다.
– 아무튼, 이번에는 힘을 빌려주도록 하지. 하지만 착각하지는 마라. 그 누구도 아닌 그분의 명이 있으니 빌려주는 것이지, 나는 여전히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콰직! 콰지직!
그리고 그 순간, 온 세상을 물들이던 어둠이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인 의식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호였다.
조각난 어둠들이 부스스 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강하게 투덜거렸다. 이왕 빌려줄 거면 좀 기분 좋게 빌려주던가, 주인 의식 한 번 치르러 왔다가 별말을 다 들었다. 어딘가 좀스럽다는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 아차.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콰지지직! 콰지지직!
그때, 느닷없이 혼돈이 갑작스레 말을 걺과 동시에, 균열이 더욱 심해졌다. 당장에라도 부서지기 일보직전처럼.
– 나보다 빅토리아라는 계집을 더 자주 사용해서 이러는 건 절대로 아니니, 부디 서운하게 생각은 말도록.
…뭐?
와장창, 와장창창!
– 그럼.
그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온 세상이 부서져 내렸다. 마치 기껏 맞춘 퍼즐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것처럼, 어둠의 조각이 사방으로 떨어지며 그 너머의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여전히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화아아악!
강렬한 빛살이 시야를 물들였다. 돌연 엄청난 바람이 주변을 휘몰아쳐와, 머리칼은 물론 도복마저 세차게 펄럭인다.
그동안 어두운 공간에 있어서 그런 걸까.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면서도 안력을 높여 정면을 응시했다.
웅웅웅웅웅웅웅웅!
그렇게 비로소 되돌아온 광장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엄청난 검음이 주변을 미친 듯이 몰아치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바람결에 날리는 머리칼을 왼손으로 정리하며 조용히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을 확인한 순간.
– 왔어?
나는, 비로소 절멸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
헬레나가 쓰러졌다.
“헬레나아아아아아!”
온몸을 압박하던 제약이 풀린 순간, 안현이 커다란 고함을 지르며 매섭게 돌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괴인, 정확히는 괴인이 된 백형식은 무덤덤했다. 그저 사용자들이 들어오는 방향을 흘긋 보고는 몸을 돌려 전투 자세를 잡는다. 그러더니 오히려 힘껏 땅을 박차 안현을 마주보며 돌격.
“비켜라!”
그 찰나의 순간, 안현은 들리는 대로 옆으로 비켰다. 이어서 한 사내가 안현이 비킨 공간으로 쏜살같이 달려들어갔다. 사내가 정면으로 들어올린 큼지막한 방패를 확인한 순간, 안현은 곧바로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내가 들어올린 방패와 백형식이 날린 주먹이 맞닥뜨렸다.
쾅!
고막이 얼얼해질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이어진 결과는, 놀랍게도 사내의 패배였다.
굵은 철 방패는 정면이 움푹 들어가다 못해 아예 절반이 날아가 버렸고, 충격의 여파가 그대로 전해졌는지 사내는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내리고, 사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비틀거린다.
그에 반해, 백형식은 아직도 쌩쌩하다. 태연하기 그지없다.
이내 주춤주춤 물러나는 사내의 머리를 백형식의 두 손이 와락 부여잡았다. 그러나 사내의 방패 돌격이 헛되지는 않은 걸까? 사내가 백형식에 잡힌 그 순간은, 이미 고오환과 안현이 각기 왼쪽과 오른쪽으로 짓쳐 들어가는 중이었다.
“으랴!”
고오환이 정수리를 쪼갤 듯이 대검을 후려갈기고.
쐐액!
안현의 창 끝이 유성처럼 백형식의 심장을 찔러 들어간다.
그 두 공격은, 모조리 백형식에게 적중했다.
“…큭?”
…정확히는, 적중만했다.
고오환의 대검은 정수리를 쪼개지 못해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고, 안현의 창은 아주 살짝 들어가는 선에서 그친 것이다.
도리어 백형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모기가 물은 양 세차게 머리를 털고는, 머리를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와득, 와드득!
사내의 목이 기어코 180도 돌아가더니 반으로 꺾이며 목뼈가 드러났다.
툭!
뜯긴 머리가 무참히 바닥을 뒹굴었다. 백형식이 무심히 좌우로 시선을 돌렸다. 고오환과 안현을 한 번씩 번갈아 보는 게, 마치 어느 놈을 먼저 죽일까 고민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백형식의 시선이 한쪽에 고정된 순간, 고오환이 흠칫 놀라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때였다.
핑!
한 줄기 바람 소리가 스치듯 지나가, 백형식의 눈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거기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커다란 화염구가 곧바로 가슴을 직격하기까지.
잠깐 놀랐던 안현은 속으로 환호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아무리 강한 괴물이라도 시야가 제한되면 약점을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크륵, 크르르륵!”
그러나 안현이 느꼈던 안도감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경악으로 바뀌었다.
백형식의 가슴에 들러붙던 불길은 별 피해를 주지 못한 채 사그라졌다.
뽑은 화살에서는 눈알이 딸려 나왔지만, 곧바로 새로운 눈동자가 재생되었다.
물리 공격력, 물리 방어력, 마법 방어력.
이 모든 게 상상 이상이다.
수준 높은 사용자를 기반으로 새로 태어난 돌연변이는, 안현의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다.
문득 안현은 흑 창을 잡은 손이 미미하게 떨리는걸 느꼈다.
도대체 이런 놈을 어떻게 죽이라는 걸까?
형은 어떻게 이런 놈을 그렇게 갖고 놀듯이 죽였을까?
주춤, 물러나는 안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그늘지었다.
한편, 같은 시각.
“끄으으으….”
바짝 마른 입 틈으로 깊숙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눈동자는 흐릿하게 풀려있고, 초점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주현호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한동안 죽은 듯 벽에 기대어있던 주현호가 힘겹게 머리를 일으켰다. 그리고 간신히 자세를 추스르는가 싶더니 천천히, 벽을 지지대 삼아 매우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흐어, 흐어어어….”
이윽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주현호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힘없이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헬레나를 확인한 순간,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흐, 흐…. 씨발…. 년….”
주현호의 등이 벽에서 떼어졌다.
퍽.
걷어차인 헬레나의 몸이 빙글 돌아 얼굴을 드러냈다. 주현호는 한참을 낄낄 웃다가,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발을 들어 헬레나의 얼굴을 짓밟았다.
“기분이 어때? 응?”
거기다 좌우로 진득하게 비비며 이죽거리기까지.
그러나 헬레나는 마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차분히 눈을 감고 있다. 주현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너는…. 씨발아, 응? 너는 정말로 기대해도 좋아…. 있잖아…. 아후, 씨발 숨차. …나, 너 같은 년을 정말로 좋아하거든? 강한, 아주 강한 암컷을 말이야! 히히히히!”
“…….”
“후욱…. 후욱…. 마침 고은솔도 곧 죽을 예정이었는데, 이거 아주 훌륭한 대체품이 생겼어.”
“…….”
“그러니까 제발 죽지 말고 이대로만 있어달라고. 응? 나중에 모든 일이 정리되면, 내가 아주 귀여워해줄 테니까…! 이, 퉤!”
“……!”
피 섞인 침이 헬레나의 얼굴에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한 차례 추가로 낄낄 웃은 주현호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며 헬레나를 지나쳤다.
그리고 잠시 후.
“…참으로 망할 놈이로다.”
주현호가 떠나자마자 지긋이 감겨있던 헬레나의 눈이 살그머니 떠졌다.
헬레나의 두 눈은, 여전히 흉흉한 빛을 띤 용의 눈동자였다.
“흐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헬레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주현호가 떠난 이상 헬레나는 이제 혼자나 다름없다는 것.
그런데 과연 누구하고 말을 하는 걸까?
“후후. 과연 누가 알았겠느냐. 삼라만상의 죽음에 이어, 영혼 봉인 주문까지 버텨냈을 줄은. 정신력 하나만큼은 찬사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야.”
“아아. 그건 동의한다. 이미 침식 진행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야. 다른 놈은 몰라도, 저놈은 절대로 구제가 불가능한 놈이다.”
“뭐라? 이제 그만 너한테 맡기라고? 헬레나, 지금 네 상태를 모르고 있는 것이냐?”
“허…. 내가 실패했으니, 이제 네가 말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 라…. 결국 시키는 대로 하라는 소리구나.”
헬레나의 혼잣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헬레나가 몸을 빙글 돌려 옆 편을 바라보았다.
“…빛나는 시절이라.”
“정말로, 확신하느냐? 잘못되면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을 수 있는데도?”
마침 마법사 사내를 추가로 살해하는 백형식과, 시종일관 밀리는 사용자들. 터벅터벅 걸어가는 주현호. 그리고 그 옆으로, 차갑게 식어가는 은빛 머리칼의 여인까지.
그 모든 것들이 헬레나의 한 눈에 들어온다.
“인간들의 유대….”
시간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헬레나가 돌연 피식 미소 지었다.
“뭐, 나쁘지는 않겠지. …나를 한 번 패배시켰던 너의 말이라면.”
“좋다. 그러면 어디 한 번 구경해보마.”
별안간 헬레나의 두 손이 천천히 어딘가를 향한다.
왼손은 백형식을 향해.
오른손은 고은솔을 향해.
“Convertimini, Et Fulgentibus Saeculum….”
그리고 헬레나가, 조용히 주문을 읊조린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음….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오늘 어떻게 후기를 시작해야 할까 참으로 많은 고민이 들었는데요….
우선은 깊이 고개 숙이며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꾸벅. _(__)_
어제는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코멘트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정신이 붕괴되는 현상을 겪었습니다.
BL을 적고 사랑스러운 독자 분들께 선전포고를 한 것은, 아마 그러한 붕괴 현상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후기는 삭제했습니다. 오늘 감로 차를 천천히 마시면서 생각해보니까,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서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속된 말로, 제가 정말 못 볼꼴을 보여드린 것 같네요.
정말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런 만큼 자숙하겠다는 의미로, 이번 주 금요일까지 ‘후기’에 한해서 묵언 연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독자 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
로유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