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88
00587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
퍽!
“아악!”
묵직한 타격음. 주먹을 맞은 사내의 얼굴이 움푹 함몰되며 붉은 핏물을 뿜어낸다.
쓰러진 사내가 한두 번 꿈틀대는가 싶더니 몸을 축 늘어트렸다. 이로써 또 한 명의 사용자가 사망했다.
백형식은 담담히 주먹을 매만졌다. 죽은걸 확인하려는지 사내를 두어 번 발로 차더니 무심한 눈으로 남은 사용자들을 응시한다.
이제 남은 사용자는 신재룡, 안현, 고오환, 궁수 여인으로 고작 4명에 불과했다. 처음 7명으로 들어왔던 인원이 어느새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이윽고 백형식의 멍멍한 눈초리가 한 사내에게로 고정됐다. 흐릿한 눈동자가 마치 ‘다음은 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신재룡이 입을 질끈 깨물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 들었다. 저 괴물의 육체적인 강함은 둘째치고서 라도, 전투 내내 아무런 감정을 표하지 않는 무심함이 더욱 무섭게 다가온다.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자를 살해하고 있다.
하기야 괴물한테서 인간의 감정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물론 인간 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뇌에 존재하나, 그 기억을 떠올려도 백형식은 어떠한 감각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백형식은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아이나 다름없으니까.
파더의 체내에 흡수되고 모체를 통해 돌연변이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백형식의 인격은 소실됐다. 그리고 그 자리로 파더가 부여한 괴물로서의 인격이 들어앉았다.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백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인즉 인간으로서 그 시절의 기억을 대하는 게 아닌, 괴물로서 새로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백형식은 사용자들을 살해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직 괴물로서의 경험 및 성장을 겪지 못한 이상, 파더가 사용자들을 생각하는 입장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인간 시절의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백형식은 사용자들을 먹이 혹은 모체로밖에 보지 않는다.
잠시 후, 백형식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찌나 재빠른 속도인지 몸이 잔상을 일으키며 그대로 신재룡을 향해 돌격한다.
그러나 고오환과 안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제껏 몰살당하지 않고 어찌어찌 전투를 이끌어온 데는 신재룡의 필사적인 조율이 있었다. 사제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고오환이 마력을 크게 일으켜 대검에 주입한 채 정면으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달려들어오는 백형식을 향해 푸른 마력이 생성된 대검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기세 자체는 정말로 폭발적이었지만 고오환의 공격은 백형식을 맞추지 못했다. 백형식이 갑작스레 몸을 빙글 돌려 회피하는 동시에 가까이 접근해 주먹을 날린 것이다.
쾅!
우직, 우지직!
그저 주먹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폭탄을 터뜨린 듯한 굉음이 울렸다. 다행히 고오환은 무사했다. 일격에 박살 직전까지 몰리기는 했지만, 신재룡이 걸어준 보호막이 충격을 흡수해준 것이다.
어쨌든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전투는 아까부터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전투가 시작된 이후 쉬지 않고 신성 주문을 걸어주곤 있었지만, 신재룡도 이제 슬슬 마력이 떨어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방금 보호 주문도 회로를 박박 긁어 모은 마력으로 일으킨 주문이었다.
크게 놀란 고오환이 허겁지겁 물러난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백형식이 쫓아가려는 그 순간, 이번에는 안현이 후방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고오환이 공격하는 순간부터 안현은 몰래 옆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백형식의 등 뒤를 점거해 강력한 공격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이윽고 기회를 포착한 순간, 안현은 백형식의 머리를 향해 전력으로 창을 겨누었다.
슈슈슈슝!
창 끝에서 발출된 4자루 창격이 백형식의 머리를 과녁 삼아 짓쳐 들었다. 안현이 자랑해 마지않는 창술사격이었다.
그와 동시에 안현은 생각했다.
저놈은 절대로 만만한 놈이 아니다.
지금까지 전투로 미루어보아 이 공격은 분명히 실패할 것이다.
고오환이 어그로를 끌고 있는 동안, 추가 타격을 줄 수 있는 연타 공격이 필요하다.
이윽고 창을 꼬나 쥔 안현의 신형이 앞서 들어가는 창격에 이어 미끄러지듯이 들어간다.
그러나 백형식은 자신의 뒤통수를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감지했다.
한순간, 흐린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뿜었다.
퍼퍼퍼펑!
4개의 창격이 고스란히 뒤통수를 직격했다. 백형식의 몸이 자연스레 앞으로 쏠린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일권을 날려, 물러나는 고오환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콰직, 챙그랑!
주먹은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던 보호막을 가차없이 깨트렸다. 고오환은 직감적으로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마력을 모아 검으로 막으려고 했으나, 주먹은 그것마저도 튕겨내며 그대로 가슴을 후려쳤다.
“커헉!”
핏물을 왈칵 토해낸 고오환이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주르륵 밀려났다. 동시에 빙글 몸을 돌린 백형식은 창을 한껏 치켜든 안현을 보며 오른 다리를 쭉 올렸다.
그 외에는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맞아주겠다는 소리였다.
기회를 노린 이상 선공 권은 안현에게 있다. 아주 미세한 차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안현의 공격이 먼저 들어간다.
그러나 이 일격으로 백형식을 절명시키지 못한다면, 저 번쩍 들어올린 다리가 곧바로 반격을 가할 것이다. 아무리 호신강기가 있다고는 해도, 지금껏 백형식이 보여준 파괴력을 생각하면 안심할 수 없다.
아니, 운 나쁘게 정수리라도 찍힌다면 오히려 즉사하는 건 안현일 것이다.
하지만 안현은 신재룡을 믿었고, 그대로 들어가는걸 선택했다.
힘껏 내려쳐진 창이 공기를 찢는 거센 파공음을 내었다.
기다리고 있던 발이 안현을 향해 사선으로 내리 꽂힌다.
그리고 신재룡이 안현을 향해 지팡이를 겨눈, 그 찰나의 순간.
타앙!
갑자기 외마디 총성이 신재룡의 귓전을 울렸다.
1초.
1초 동안, 총성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신재룡은 직감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무수한 생각이 스쳤다.
“───. ───. ───. 보호!”
그러나 결정을 내릴 필요도 없이 신재룡은 이미 외치고 있었다.
안현을 향해서.
후드득!
그리고 나서 재빠르게 몸을 비틀었지만, 무언가 알갱이 같은 것들이 옆구리에 박히는 감촉을 느껴야만 했다. 반사적으로 이를 꽉 깨문 신재룡은 흔들리려는 몸을 다잡았다.
탕, 타앙!
그러나 채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두 번의 총성이 추가로 울렸다.
*
회심의 공격이라고 생각했던 일격이 실패했다. 안현은 망연한 기분으로 눈앞에 쩍쩍 갈라진 보호막을 응시했다.
“쿨럭, 쿨럭! 무, 물러나라! 현아…!”
신재룡이 거센 기침을 토하면서도 물러나기를 종용했다.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린 안현이 재빠르게 창을 회수하며 물러났다.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탁, 탁, 탁, 탁….
그러나 미처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힘없이 끊어 치는 박수가 들려온다. 안현은 주춤주춤 물러나며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머리를 돌렸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온몸이 걸레로 변한 괴인이 비틀거리면서도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다. 주현호였다.
“대단해…. 아주 존경스러워….”
특유의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주현호가 백형식의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만 핀 손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이거 보라는 듯이 까닥까닥 흔들었다. 검지의 끝에는 얼음 빛으로 둘러싸인 냉랭한 구체가 섬뜩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동료의 목숨을 구한다…. 사제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인가?”
그 순간 안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한다? 사제라서?
“그놈 말에 흔들리지 마라! 나를 돌아보지도 말고, 무조건 앞에 집중해라!”
안현은 곧바로 몸을 돌아보려고 했으나 이어진 신재룡의 외침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면서도 전신에 뜻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주현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 백형식에게 척 어깨동무를 하더니 살그머니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래. 형식이를 상대해보니까 어때? 참 쓸만한 녀석이지?”
“…….”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이놈은 정말 쓸만하거든. 뭐, 그래서 이렇게 만든 것도 있지만.”
“…….”
“그나저나 기분들은 어떠셔? 이제 완벽하게 상황 반전인데.”
“…….”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한다. 한쪽 발을 건들건들하면서 말하는 게 명백히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아무런 말도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냐하면 주현호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어느덧 고오환마저 바닥에 쓰러져 일어날 생각을 않고 있다. 처음 7명으로 시작했던 인원이 이제 3명으로 줄어들었다.
“아차, 너희 그거 알아? 그 궁수 계집애, 아~까 전에 도망친 거?”
그 말을 들은 순간, 안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화살 지원이 끊긴 것 같기도 했다.
기함한 안현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현호의 말대로 그 어디서도 궁수 여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같이 싸우는 동료를 버리고, 도망쳤다.
안현과 신재룡.
이제는 둘만 남았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안현이 느끼던 불안감은 삽시간에 거대한 절망감으로 변해 해일처럼 덮쳐 들어왔다. 결국 밀려들어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한 안현은,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항상, 언제나 김수현을 보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앞으로 나서야 한다.
책임지고 적들을 물리치고 신재룡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안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한 명도 상대하기 힘든데, 두 명으로 늘어버렸다. 비록 한 명이 너덜너덜해 보인다고는 하나, 새로 등장한 놈만 해도 상대하기 버겁다.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
아니, 이대로라면 진짜로 죽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감.
그러면서도 혹시 형이 와주지 않을까 바라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
무슨 놈의 기공창술사인가.
도대체 뭘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자신은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전신에 차오른다.
결국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안현은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너…. 설마 우냐? 울어? 히히히히! 이 찌질 한 새끼! 그러길래 아까 진즉 이야기했으면 좋았잖아…. 히히히히히히히히!”
주현호가 큰 목소리로 웃는다. 신재룡 또한 딱히 뾰족한 수는 없는지 침중한 기색을 비췄다.
그렇게 한 차례 낄낄 웃은 주현호는 백형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그럼 이만 끝내자고. 혹시 도망친 계집이 지원군을 끌고 오면 골치 아파질…?”
그때였다.
화아아악!
한순간, 느닷없이 백형식의 전신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깜짝 놀란 주현호가 얼른 몸을 떼었다.
“이게 무슨…?!”
어떠한 전조도 없이 일어난 현상. 입을 꾹 깨물고 있던 안현은 서서히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찬연히 흘러나오는 빛무리를 볼 수 있었다.
빛은, 한 곳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또 다른 곳에서 흘러나오는 빛무리가 왕의 굴을 밝히고 있다.
“어이, 어이! 형식아! 갑자기 왜 그래!”
이윽고 주현호가 빛에 휩싸인 백형식을 부여잡은 찰나.
“크륵!”
가래 끓는 소리와 동시에, 흐릿하던 눈동자에 밝은 기운이 감돌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 순간, 고통에 찬 비명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
무언가, 위험하다.
주현호는 흠칫 물러나면서도 시선을 돌려 헬레나를 찾았다. 그러나 헬레나는 이미 바닥에 누운 채 편안히 눈을 감은 상태였다.
그러면, 지금 백형식한테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