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89
00588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
해답은 바로 헬레나가 외운 주문에 있었다.
‘Convertimini, Et Fulgentibus Saeculum.’
이 주문의 정체는 최고 수준의 정신계 마법으로, 정확히는 인간의 뇌에 관여하는 마법이다.
물론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설정을 벗어난 정신적 고통은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헬레나는 다르다. 설정을 사용하지 않으며, 마법의 근원에 다다를 수 있는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을 지닌 존재다. 사용자들에게 불가능이라 생각되는 일이라도, 헬레나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무수한 뉴런과 시냅스 연결로 이루어진 뇌.
인체는 신비롭다. 그중에서도 뇌는, 아직도 대다수가 밝혀지지 않은 최고로 복잡한 신비를 품은 부분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흔히들 말하고는 한다.
‘사람은 망각의 축복을 받은 동물이다.’
그러면 뇌는 어떻게 기억을 저장하고, 망각하는가.
기본적으로 외부의 정보를 인식하면 저장, 유지, 회상이라는 재구성 과정을 거쳐 기억으로 남는다.
어떤 기억은 금방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또 어떤 기억은 깊숙이 각인돼 일생 동안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건, 뇌 속에서 기억을 처음 저장하는 곳과, 기억을 회상하고 재저장하는 곳이 같다는 것.
물론 기억만해서는 의미가 없다. 사람이 모종의 기억을 떠올렸을 때. 그 기억에 어떤 감각이 있는지 같이 떠올려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법이다.
헬레나의 마법이 건드린 게 바로 이 두 부분이었다.
감각은 뉴런이 신호를 표현하게 하며, 뇌의 같은 부분으로 이동한다. 그 부분이 바로 기억이 저장된 곳이다.
말인즉, 기억과 감각의 연관 작용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백형식이 지금 이렇게나 괴로워하는 것이다.
직접 대상의 정신 세계에 침투해 파더가 훼손한 신경계를 되살리고 재 연결시킨다. 통상의 기억과 망각하고 있던 기억까지 모조리 끄집어내며 감각을 대응시킨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실된 인격을 되살리고, 상실된 이지를 부활시킨다.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과, 인간이었을 때의 감각.
아마 백형식은 지금 미치기 일보직전일 것이다. 되살아나는 원래의 인격과 새로 부여된 인격의 충돌은 물론, 망각하고 있던 기억까지 모조리 떠올리고 있으니, 뜬금없이 자신이 살아온 일생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순식간에.
“크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아악!”
“형식아! 어이, 백형식! 정신 차려!”
갑자기 백형식이 주현호를 뿌리쳤다. 건드리지 말라는 듯, 온몸을 꼬아 비틀어대며 머리칼을 쥐어뜯는다.
그 순간.
“형식아…?”
문득 들려오는 잔뜩 쉰, 그러나 고요한 목소리.
“우, 우?”
그러자 갑작스럽게 백형식의 괴성이 우뚝 멎었다.
조금 전까지 난잡하기 짝이 없던 공간에, 돌연 거짓말처럼 차분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서히, 백형식의 머리가 돌아갔다.
주현호의 머리도 따라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간다.
“허억?!”
이윽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주현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백형식과 주현호가 보는 곳에는, 다름 아닌 한 여인이 주저앉은 채 상반신만 일으키고 있었다.
치렁치렁 흘러내린 기다란 은색 머리칼과 너무나 상냥해 보이는 인상, 살짝 늘어져 포근하게 보이는 눈매.
그리고 그 안으로 잔잔히 가라앉은 또렷한 은빛 눈동자.
그랬다.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고은솔이었다. 헬레나는 백형식뿐만이 아닌 고은솔도 주문을 걸은 것이다.
“우…. 어…?”
고은솔을 보는 백형식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거대한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과, 입에서는 괴로운 듯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고은솔은,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덜덜 떨리는 팔을 든다.
한 번, 두 번, 세 번. 팔은 계속해서 도중에 떨어졌지만, 기어코 팔을 들어올리는데 성공한 고은솔이 백형식을 향해 손짓한다. 한없이 자애로운 손놀림이었다.
백형식은, 처음에는 머리를 저었다. 혼란스럽다는, 아니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주춤거리면서 물러나기까지 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러나 고은솔이 괜찮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백형식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네 잘못 아닌 거 알아. 그러니까, 이리 오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고은솔의 말.
“우…. 윽…!”
그러자 계속해서 물러나던 발걸음이, 처음으로 전진했다.
“혀, 형식아!”
번뜩 정신을 차린 주현호가 급하게 외쳤다.
“주, 죽여버려! 가서 죽여버려! 그년을 제일 먼저 죽이란 말이야!”
어찌 보면 처절한 절규라고 봐도 좋을 외침이었다.
그러나 백형식에게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느릿하게나마 고은솔을 향해 걸어간다.
“백형식! 뭐 하는 거야, 지금!”
결국 참다 못한 주현호가 발을 끌면서 달려가 백형식의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우어어어!”
퍽!
마치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백형식이 팔을 거세게 휘둘렀다. 거기가 팔꿈치로 주현호의 안면을 가격하기까지.
졸지에 거하게 얻어맞은 주현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백형식을 응시했다.
백형식은, 여전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주현호가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렸다.
“이익…!”
푹!
그때였다. 꾸준히 고은솔과의 거리를 줄여나가던 백형식이 갑작스럽게 정지했다. 몸이 앞뒤로 거세게 흔들린다. 백형식을 기다리던 고은솔이 살며시 아미를 좁히며 정면을 노려본다.
어느새 백형식의 왼쪽 가슴에는, 누군가의 손이 불쑥 뚫고 나와있었다.
범인은 주현호였다.
물론 주현호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해까지 입히자, 등 뒤에서 공격을 가한 것이다.
애당초 정말 친구라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살려준 것이니만큼, 주현호의 행동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자신이 공격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쾅! 쾅!
이어서 두어 번의 폭발음이 추가로 울리고, 백형식의 몸이 크게 떨렸다.
이내 주현호가 천천히 손을 빼내자 백형식의 몸이 하릴없이 허물어진다. 그래도 아직 살아있는지 등이 들썩들썩 움직였으나 입에서는 피 거품이 흘러나온다.
“…멍청한 자식!”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욕설을 내뱉는 주현호.
그러나 곧, 주현호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숨을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백형식이 낑낑거리며 팔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꼭 고은솔에게 닿겠다는 듯이 온몸을 질질 끌면서 기어간다.
주현호는 그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백형식이 고은솔에 닿았다.
백형식이 꺽꺽 거리는 울먹임을 흘리면서 고은솔을 올려다보았다.
고은솔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부르르 떨기만 하는 백형식을 안아 들었다.
“많이 괴로웠지?”
“우욱…. 죄, 죄송…. 정말….”
“그래 그래. 정말 힘들었구나. 괜찮아…. 괜찮아….”
“고…. 흑…. 흑…. 끅….”
흐느끼는 신음을 흘리는 백형식과, 그런 백형식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이며 연신 괜찮다고 속삭이는 고은솔. 비록 백형식의 말투가 어눌하기 그지없으나 모두 다 이해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안현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벌어진 입에서 흡사 피리 부는 듯한 쉰 소리가 빠져 나온다.
안현은 전신이 텅 비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울고 싶었다.
물론 안현은 아무런 사정도 모른다. 그저 다 죽어가는 여인과, 마찬가지로 죽기 일보직전의 괴인이 재회에 불과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사내와, 괜찮다고, 잘못 없다고 말해주는 여인.
둘 사이에서 전해지는 진실된 감정이 안현의 가슴을 까닭 없이 흔들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사르르 사그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씨발, 지랄하고 자빠졌네. 곧 있으면 죽을 연놈들이.”
별안간 주현호가 이를 바드득 갈며 외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박아주면 좋다고 꿀꿀거리던….”
“주현호.”
그리고 계속해서 폭언을 퍼부으려는 찰나, 고은솔의 낮은 목소리가 딱 잘라 끊어버렸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엄숙한 목소리였다.
이윽고 눈을 슬쩍 치켜 뜬 고은솔이 백형식을 보듬으며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줄 알렴. 이 구제불능아.”
“뭐, 뭐? 뭐라는 거야 이 미친….”
“너, 후회할 거야. 분명히.”
“……!”
흡사 사형 선고처럼 이어진 고은솔의 말에, 주현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한 고은솔은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차분히 고개를 돌렸다.
고은솔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을 되찾고 이지를 되찾은 데에는 외부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을.
비록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는 있었지만,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모두 떠올려버렸지만. 상실된 이지가 돌아온 이상, 예전 강인했던 정신력도 부활했다.
고은솔은 멍하니 서 있는 안현과 신재룡을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기품이 넘치는 인사였다.
“곧 죽을 몸이기는 하지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마지막 장식이 별로 나쁘지는 않겠네요.”
“…….”
“그리고,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하지만 두 분은 꼭 이기실 거라고 믿어요.”
“…….”
안현과 신재룡은 회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반응했을 뿐.
이내 빙긋이 웃은 고은솔이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처연하게도 흘러내리는 머리칼이 얼굴을 가렸다. 죽기 전에 백형식을 보려는 걸까?
그때였다.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칼을 느꼈는지 백형식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얼굴로 힘겹게나마 사용자들을 돌아본다.
“죄…. 죄송….”
그리고 이번에는 주현호를 가리켰다.
“조…. 심…. 폭발…. 장치….”
거기까지 말한 순간, 간신히 들어올린 팔이 툭 떨어졌다. 고은솔은 아까 고개를 숙였을 때부터 미동도 않는 상태였다.
흘긋 위를 올려다본 것을 마지막으로, 허벅지를 베고 누운 백형식의 눈이 편안하게 감긴다. 그리고 두 남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상황을 파악한 신재룡은 옆구리를 막으면서 안현에게로 다가갔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괴인이 이탈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상처 입은 괴인 뿐이니, 자신이 최대한 막는 동안 안현을 도망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꿋꿋해 보이는 안현의 등을 보는 순간 신재룡은 입을 열지 못했다.
“후우.”
안현이 숨을 크게 들이키고, 내뱉었다.
뜻 모를 여운이 조금씩 가시며 온몸이 공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 공허함은 이내 무언가로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이기실 거라고 믿어요.’
고은솔의 건넨 한 마디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빠져나가고, 갑작스레 질박한 용기가 솟아오른다.
안현은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모든 걸 내려놓은 홀가분한 기분을 느낀 그 순간, 느닷없이 깨달음이 찾아왔다.
안현은 차분히 눈을 감았다.
문득 김수현의 말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아무리 두려워도 물러나지 마라.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두 다리는 땅에 똑바로 박아.’
‘전투를 계속해서 분석해라. 본능에만 이끌리지 말고 계산을 하는 거야.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한 번의 찬스는 온다. 전투를 뒤집을 역전의 찬스가.’
“예, 형.”
마치 옆에 김수현이 있는 것처럼 안현이 회답했다. 두 다리가 자연스럽게 꼿꼿해진다.
‘왜 자꾸 나를 따라 하려고 하는 거냐. 너는 검사가 아니야. 창병이잖아. 그것도 기공창술사.’
‘거리를 활용해! 기공술을 왜 그렇게 써? …안현아. 기본적으로 창과 검이 붙으면, 창이 더 유리하단다. 그런 만큼 창병은 창병만의 전투 법이 있는 거야.’
오래 전에 들었던 말이었다.
그것은 이미 해답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형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니, 아니다.
형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것도 아니다.
애당초 전제가 잘못되었다. 그러니 답이 나올 수가 없다.
김수현이 아닌, 안현이라면.
기공창술사인 안현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게 바로 안현이 찾아 헤맨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제대로 된 전제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이, 거기 구제불능의 찌질 이.”
안현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뭐?”
멍하니 서 있던 주현호가 한껏 낮은 목소리로 회답하며 안현을 돌아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한 살기가 억눌러져 있었다. 절대로 좋지 못한 신호.
그러나 안현은, 도리어 씩 웃어 보였다.
“미쳤군. 웃어? 아까 죽겠다고 울먹거리던 새끼가, 고작 한 놈 없어졌다고 기세 등등하냐?”
맞는 말이었다. 백형식이 사망함으로써 상황이 호전됐다고는 하지만, 앞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남은 인원은 둘이며 신재룡은 부상을 입은 상태. 괴인이 극심한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안현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 나도 찌질 하지.”
“…….”
“너처럼 구제불능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
주현호가 어이없다는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곧장 한 손을 들어올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내 들어올린 손이 무시무시한 기운이 휩싸이기 시작한다.
계속 눈을 감은 채, 안현이 천천히 창을 겨누었다.
예전처럼 바스러지도록 쥐지는 않았다. 살짝 건드려도 흘러내릴 듯한 헐겁게 잡은 창이, 침착히 주현호를 겨냥한다.
“그러니까….”
그와 동시에, 안현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어디 한 번, 싸워보자.”
돌연히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러나, 안현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서로 같은 놈들끼리 말이야. 이 찌질 한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