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90
00589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
때는 며칠 전 밤.
구덩이 공략이 결정 난 후, 김수현이 인선 발표를 끝냈을 즈음.
“후우….”
천막에서 걸어 나온 안현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평소의 활기찬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눈은 힘없이 내리깔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는, 명백히 우울한 얼굴이다.
잠시 후, 천천히 머리를 젖힌 안현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뿌려진 밤하늘은 무척이나 아름다우면서도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다.
한동안 밤하늘을 응시하던 안현의 얼굴에 문득 처연한 빛이 스쳤다. 무언가 회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안현으로 하겠습니다.’
‘예. 현이로 호명하겠습니다.’
인선 발표에서 신재룡은 안현을 선택했다. 그 말은 안현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설마 자신을 호명해주는 클랜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안현은 기뻤다. 김수현이 말한 ‘뒷받침할 수 있는’의 의미는, 여러 의미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를 꼽으라는 소리였으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클랜원들의 반응은, 안현의 기분을 삽시간에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모두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어쩌면 의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 오히려 클랜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안현도 미약하게나마 알아챌 수 있었다.
용이 잠든 산맥 사건 이후 자신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들을.
무언가 겉돌고 있다는 기분을.
그리고 언제부턴가 자신의 내부에 자리잡은 뜻 모를 불안감을.
확실하게는 아니더라도, 막연히 느끼고는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더 호명할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수현이 말을 뱉은 순간. 그동안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모든 것들이, 갑작스럽게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모종의 불안감이 시시각각 크기를 키워갔다.
김수현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딱히 해석하지 않아도 명명백백했다.
그러나 안현을 더욱 미치게 하는 건,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현실이 그랬으니까.
항상 김수현을 따라다녔지만, 정작 이루어낸 일은 없다.
언제나 그늘 속에 가려져 있기만 했다.
나름 노력도 해보았다. 무언가 스스로 해보려고 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하는 일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안현이었다.
‘머셔너리 로드의 총애를 받는 사용자.’
‘레어 클래스, 기공창술사.’
그 누구도 ‘사용자 안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비로소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 안현은 뼈가 저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한없이 허무했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외톨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냥, 울고 싶었다.
그때였다.
“현아.”
자상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안현은 흠칫하는 동시에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과는 정반대 쪽으로.
“예. 예, 형. 언제부터 계셨어요?”
아닌척하면서도 빠르게 눈을 훔친다. 그걸 보는 신재룡의 얼굴에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서렸다. 언제부터 있었냐면, 신재룡은 안현이 하늘을 보고 있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신재룡은 안현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 클랜 로드님이 하신 말씀 때문에 그런 거니?”
안현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입을 닫은 채 가만히 있었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그냥 걱정돼서 하신 말씀일수도 있고, 또 어쨌든 허락하셨잖아?”
끄덕끄덕.
안현이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하는 반응이었다. 여전히 신재룡을 보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머쓱한 기분에 신재룡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거라. 사실 네가 그동안 어지간히 속을 썩이기도 했잖니. 용이 잠든 산맥도 그렇고, 또 예전에 그 사건도 그렇고…. 하하하.”
신재룡은 일부러 화제를 돌리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안현의 얼굴이 더더욱 시무룩한 빛을 띠었다. 예전의 안현이라면 ‘헤헤. 그렇죠?’하고 멋쩍게 웃어넘길 텐데, 오늘은 아무래도 역효과인 듯싶다.
신재룡은 효과적인 위로의 말을 생각해내려고 애썼으나, 모두 거기서 거기였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신재룡이 돌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안현의 어깨에 살그머니 손을 올렸다.
“내가 아는 말 중에, 이런 말이 하나가 있지.”
“…….”
“사람이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온다고.”
“……?”
비로소 안현이 반응을 보였다. 느릿하게 머리를 돌려 신재룡을 마주한다.
“빛나는…. 시절이요…?”
우울함에 젖은 목소리가 반문했다.
“그래. 빛나는 시절.”
그러나 신재룡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함박 웃음을 지으며 그렇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뜻인데요?”
“흠. 무슨 뜻이라…. 글쎄, 아마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대단한 말은 아니야. 왜냐하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치는 시절이니까. 즉 개인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지.”
“…….”
“예를 들어보면, 누구는 걱정 없이 뛰놀던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있을 테지. 아니면 학생 시절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을 회상할 수도 있을 테고. 또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던 시간을 생각할지도 몰라.”
신재룡이 팔짱을 꼈다. 그리고 안현에게 말해보라는 듯 까닥, 턱짓으로 가리킨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저요?”
안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돌연 쓰게 웃어 보였다.
“글쎄요. 지금 딱히 생각나는 건….”
“그래? 정말로?”
“예. 어렸을 때는…. 오히려 암울한 시절을 보냈죠. 사실 좋은 가정은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저도 좋은 오빠는 아니었지만 말이죠. 아무튼 딱히 기억나는 건 없네요.”
“…그럼 홀 플레인에서는?”
안현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와 동시에 입가에 머금어진 쓴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신재룡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정말로 없어?”
“그냥….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과연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또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으음. 그래?”
“언제부턴가, 계속 겉도는 것 같아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이랄까요?”
비로소 속내가 약간 드러났다. 그렇게 말한 안현은 시답잖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직 저한테는 오지 않았나 봐요. 그 빛나는 시절이라는 게요.”
“…확실히 그럴 수도 있지.”
신재룡은 살짝 눈을 치켜 떴다가 곰곰이 상념에 잠겼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였다. 한참 동안 코를 매만지며 생각하던 신재룡이 별안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그럼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이번에는 안현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와 닿지 않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사실 아까부터 신재룡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다시 안현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린다.
“저, 형. 죄송한데요. 실은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그러니까….”
그때, 갑작스레 신재룡이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퍽!
“어헉…. 콜록, 콜록!”
안현이 거센 기침을 토했다. 등에서 얼얼한 감촉이 느껴졌다. 잠깐 방심한 사이, 신재룡의 솥뚜껑 같은 손이 안현의 등을 강타한 것이다.
안현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신재룡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힘내라는 말이다! 이 녀석아.”
“예, 예?”
안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클랜 로드 말씀처럼 만에 하나 각개 전투를 해야 할 상황이 오면, 네가 최우선적으로 찾고 보호해야 할 사람이 누구지?”
“다, 당연히 형이죠. 그렇게 조가 짜여졌으니까요.”
“그래. 내가 너를 선택한 건, 너를 가장 믿고 있어서야. 그런데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기껏 너를 호명한 내 기분은 어떻겠니?”
“그, 그건….”
무언가 말을 하려고는 했으나 결국에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신재룡은 괜찮다는 듯 안현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아무튼, 청승은 적당히 떨고 이만 들어가서 자라. 푹 자면 한결 기분도 나아질 테니까.”
안현은 계속 떠름해하면서도, 반사적으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예, 예. 그럴게요. 형도 좋은 밤 보내세요.”
이윽고 천천히 등을 돌린 안현이 천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재룡은 걸어가는 안현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까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힘없어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그러다가, 안현이 약 서른 걸음 정도 걸었을 즈음.
“현아. 깜빡 잊고 못해준 말이 있다.”
신재룡이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안현을 불렀다.
“이거 하나만은 기억해라.”
잠시 멈칫한 안현이 의아한 얼굴을 한 채 몸을 돌렸다.
“빛나는 시절의 빛이라는 건 말이다.”
말을 잇던 신재룡이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법이란다.”
그리고 잔잔히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
안현이 몸을 날려 창을 휘둘렀다. 주현호의 주문이 완성되기 직전 정면으로 치고 들어간 것이다.
달려들어오는 안현을 보며 주현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젖혀 창 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는 차분히 손을 내뻗었다.
안현 역시 곧바로 허리를 접으며 회피 동작을 보였다.
이내 번쩍, 눈부신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어마어마한 폭음이 뒤따랐다. 어찌나 강력한 폭발인지 공기가 떨리고 흙 바닥이 깊숙이 파헤쳐질 정도였다.
잠시 후, 누군가 한 명이 허공으로 튕겨나갔다. 안현이었다.
안현은 허공에서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아 사뿐히 지면에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재차 주현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주현호는 나름대로 안현의 실력을 평가했는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안현은 아까와 똑같이 자세를 잡으며 그대로 창을 찔러 넣었다.
그때였다.
문득 한 줄기 바람이 주현호의 머리카락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올곧게 들어오던 창이 별안간 위아래로 흔들리며 궤도의 변화를 보였다.
“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갑작스레 주현호가 눈을 크게 뜨며 기함했다.
“하!”
그에 대응하듯이 안현은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그대로 주현호를 덮쳐 들었다.
차차창, 무언가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이번에는 주현호가 쭉 밀려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갑자기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채 생각을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안현은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좌로 우로 불규칙하게 이동하며 가열차게 창을 때려 넣는다.
그 어지럽기 짝이 없는 공격에, 혼비백산한 주현호의 정신도 차차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안현의 몸이 사선 방향으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주현호의 왼쪽으로 스치듯 비껴 지나가는가 싶더니, 비스듬히 잡은 흑 창을 아래서부터 강하게 쓸어 올린다.
갑작스러운 공격. 확인하고, 피할 시간도 없다.
주현호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한껏 치켜들며 있는 힘껏 몸을 비틀었다.
싹!
맹렬한 모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면 이런 느낌일까?
절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흘긋 시선을 내리자, 채 메마르지도 않은 눈물 자국과 무시무시한 눈빛을 뿜어내는 안현이 보였다.
주현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