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92
00591 웃으며 안녕. =========================================================================
전투는 끝났다.
백형식은 헬레나의 마법으로 고은솔과 사망했고, 주현호는 재생으로도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물론 사용자들도 만만찮은 희생을 치르기는 했으나, 어쨌든 승리를 거머쥐었다.
툭, 툭.
문득, 천장에서 떨어진 흙 가루들이 눈물 자국 맺힌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현재 안현의 신경은 온통 주현호에게로 집중돼있었다.
여전히 창을 꽂은 채 지그시 응시하다가, 안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해라. 폭발 장치라는 게 무슨 소리냐?”
“콜록, 콜록!”
힘껏 창을 비틀어 빼내자 주현호가 거센 기침을 토했다.
툭툭, 툭툭.
흙 가루들은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흘러내린 가루 중 하나가 우연히 주현호의 눈동자를 때렸다. 주현호는 반사적으로 눈가를 찌푸렸다가, 느닷없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괴상한 소리였다.
“흐흐…. 콜록, 폭발 장치? 흐흐흐흐….”
안현이 눈이 가늘어졌다. 곧바로 발을 들어 거칠게 가슴을 짓밟는다.
뚝!
“끅! 웨에에엑…!”
늑골이 부러졌다. 주현호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입에서 다량의 핏물이 울걱울걱 솟아오른다.
“말해. 어디 있는지.”
“크륵! 말하면…. 살려줄 건가…?”
주현호의 목숨 구걸. 그러나 안현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그래도 말해주면, 적어도 고통 없이 보내주도록 하마.”
“히…. 어쨌든 죽는다는 거네? 그럼 말할 것 같으냐?”
일견 태연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현이 코웃음 쳤다. 그리고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창을 높이 들어올렸다. 약식이기는 하지만, 김수현은 한때 이런 경우를 대비한 교육도 어느 정도 실시한 상태였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시간 끌리지 마라.’
그때 받았던 가르침에 따라, 안현은 지금 정말로 주현호의 머리를 박살낼 생각이었다.
“잠깐. 생각이 바뀌었다.”
안현의 눈동자에 깃든 진심을 읽은 걸까? 주현호가 잠깐을 외쳤다.
“어차피 죽는다면 말해주도록 하지. 천장을 봐라.”
막 움직이려던 창이 멈칫했다. 주현호는 히죽히죽 웃는 채로 힘겹게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안현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흘긋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어느새 쩍쩍 금이 가 있는 천장을 확인한 찰나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우지직!
그 순간, 딱딱하게 굳은 커다란 흙덩이 하나가 갑작스럽게 떨어졌다. 퍽, 떨어진 흙덩이는 정확히 주현호의 얼굴에 내리 꽂혔다. 안현이 재빠르게 흙 조각을 치우자, 핏물로 범벅 된 이가 드러나며 킬킬 웃는 소리를 내었다. 실핏줄이 터진 듯 한없이 붉어진 눈이 안현을 응시한다.
“좋아. 이로써 확실해졌구나….”
처음으로 주현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조금이지만 회한이 섞여 있는 음색이었다.
안현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벌써 장치를 발동한 건가?”
“아~니? 너희가 이겼다는 소리야. 축하해.”
“말장난은 그만두지 그래.”
“말장난은 개뿔. 파더가 죽었다는 소리다. 이 멍청한 자식아. 그래서 지금 이 구덩이가 무너지려고 하는 거고.”
파더?
안현이 머리를 갸웃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아까 광장에 출현했던 거대한 괴물임을 알 수 있었다.
안현이 차분히 팔을 움직이자 창 끝에서 뿜어진 섬뜩한 빛이 주현호의 인중에 스며들었다.
“그럼, 지금 이 현상이 폭발 장치 때문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 파더라는 놈이 죽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 이 등신아. 오면서 천장에 돋은 울룩불룩한 자국 정도는 봤겠지? 그게 뭔지 알아?”
“…….”
“줄기 자국이다, 줄기 자국. 즉, 파더는 원래 나무였다. 그런데 구덩이를 떠받치던 줄기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것도 모자라, 죽어서 힘을 잃었어. 그럼 과연 이 구덩이가 무너질까요~? 안 무너질까요~?”
“…나무? …줄기?”
“어쩌냐? 나도 이제 곧 죽겠지만, 너희도 죽을 텐데. 그것도 모조리 압사당해서 말이야! 히히히히!”
안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김수현이 예전에 말했듯이 안현은 멍청하지 않다. 오히려 영리한 편에 속한다.
“아.”
약 3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안현은 비로소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재룡이 형!”
“그래. 들었다. 한 시가 급하니 얼른 처리하고 나가자꾸나.”
어차피 이대로 두어도 주현호는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의 창과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입과 양손을 짓이기고 나서야 등을 돌렸다.
그때.
“어이, 아직 듣지 못한 말이 있을 텐데?”
발음이 심하게 새기는 했지만, 안현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안현은 아차 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폭발 장치….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해주자면…. 나는 폭발 장치 없다고 말한 적은 없다?”
심상찮은 목소리였다.
무언가를 느낀 걸까? 안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리고 거기도 범위 내에 속한다? 히히히히히히히히!”
이어서 미친놈이 웃어 젖히는 듯한 광소(狂笑)가 귓전을 울렸다. 거기서 안현이 선택한 건, 주현호를 돌아보지 않고 반사적으로 앞으로 몸을 날린 것이었다.
꽝!
그것은,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현호 몸에 각인된 문신이 뻘겋게 달아오름과 동시에, 온몸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돌연 안현의 주변으로 엄청난 폭음이 돌풍처럼 덮쳐 들어와 호신강기를 두드렸다. 어마어마한 충격파는 물론, 살점 섞인 붉은 흙바람이 왕의 굴을 휩쓸었다. 그 힘에 밀려난 안현은 한쪽으로 쭉 날아가는 것도 모자라 지면을 나뒹굴고 말았다.
*
처음 눈에 보인 건, 아까처럼 가만히 서 있는 파더의 모습이었다.
웅웅웅웅!
이어서 몸체에 깊숙이 박힌 무검, 아니 절멸자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웅혼한 검음이 귓전을 왕왕 울렸다.
– 다 끝났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화정의 말대로 딱히 무슨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파더에게서 더 이상의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거니와, 변화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힘을 잃었는지, 용케 빠져 나온 몇 안 되는 촉수들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와 지면에 흐드러졌다.
그와 동시에 파더의 몸체가 사정없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마치 초 강력 청소기를 붙여 논듯, 검이 박힌 곳을 기점으로 이리저리 우그러지며 집중적으로 빨려 들어온다.
웅웅웅웅웅웅웅웅!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까 메시지에서 읽은 혼돈으로 빨려 들어가는 현상이라는걸.
파더가 혼돈에 흡수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몸체부터 시작해서 가지나 뿌리 촉수까지.
절멸자의 검은 삽시간에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이내 공간이 도로 원래대로 돌아옴과 동시에, 잠시 모습을 보였던 검신도 차차 희미해졌다.
일련의 현상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파더가 죽은 상태였다고는 하나, 가히 무시무시한 힘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아무튼.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
파더를 무너뜨림으로써, 구덩이 공략도 끝이 난 건가.
참 길었던 전투였다.
이윽고 천천히 몸을 돌아보자 하나같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이겼다! 이겼다고!”
“와아아아! 드디어 끝났다!”
어느 사용자는 두 팔을 번쩍 들며 환호하고, 어느 사용자는 털썩 주저앉는다. 모두가 기뻐하고 있다. 심지어 한소영마저 약간은 풀린 얼굴로 가벼운 숨을 흘려낼 정도였다.
그러나.
“…….”
언뜻 사용자들 사이로 보이는 안솔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갑작스럽게 전신이 착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솔은, 왜 홀로 저러고 있는 거지? 왜 저렇게 불안한,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그 순간이었다.
우지직!
쿵!
갑작스럽게 무언가 세차게 떨어짐과 동시에.
“헉…. 헉…. 어라? 끝났습니까?”
광장 옆쪽으로 이어지는 문에서 한 무리의 사용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추 세어도 스무 명 남짓한 사용자들은, 무척 급하게 달려왔는지 하나같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환호는 잠시. 광장에는 다시금 조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갑자기 나타난 사용자들.
나는 머리를 갸웃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광장에 사용자가 적다 싶었는데…. 어디 탐험이라도 다녀온 건가? 내가 파더와의 싸움에 집중하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그때, 유지태가 다급히 달려오며 정적을 깨트렸다.
“구덩이가, 구덩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외침에, 나는 망치로 머리가 강타당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나는 재빠르게 1회 차의 기억을 더듬었다.
1회 차 때도 구덩이가 무너지기는 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용자들이 추론하기로는, 당시 파더와의 전투에서 천장을 무너뜨린 전략과, 사방으로 난사한 마법이 주된 원인이 아닐까 하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나 또한 그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는 있었다. 라이트 로드가 주장한 지면 구조가 비틀렸다는 설과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도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았는가. 들어온 사용자들도 굉장히 적은 편이었고, 지면에 부담을 줄만한 마법도 최대한 자제했다.
그런데, 어째서? 구덩이가 무너질 전조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는데?
“모두 조용히!”
그 순간, 한소영의 날카로운 외침이 귓전을 울렸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겠어요. 사용자 유지태. 구덩이가 무너지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유지태는 회답 대신 지면을 가리켰다. 지면에는 아까 소음의 원인인 큼지막한 흙덩이가, 산산이 부서진 상태로 놓여있었다. 나는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경험상 구덩이가 단번에 붕괴할 리는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전력으로 탈출에 집중하면 충분히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혹시나 무너지는 경우를 대비해 해결책도 갖고, 아니 데려오지 않았는가.
나는 전전긍긍하는 백한결을 잠시 보았다가, 여전히 떨고 있는 안솔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잠시만요. 보이지 않는 사용자들이 몇 명 있는 것 같은데요?”
“그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 통신이 되지 않아….”
“네? 모르겠다니 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예. 처음에 총 28명이 출발했고, 중간중간에 7명씩 4조로 나뉘었거든요. 그래서….”
“그럼 그냥 오시는 게 아니라 탐색을 하셨어야죠. 빠른 탈출에는 헬레나가 필요하다는 건 모르셨다는 건가요?”
“탈출은 밖에 있는 사용자들과 연계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용자 신재룡 조와의 연락 두절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요. 길도 상당히 복잡하거니와, 방금 우리가 탐색한…. 젠장! 총 사령관! 지금 상황이 급합니다! 그러니까 외곽 부분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붕괴 현상이 상당히 심하게 일어나고 있단 말이오! 그러할진대, 저희보고 모두 죽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사용자들을 지나치는 도중 한소영과 유지태과 빠르게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간간이 고성도 들렸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쳤다. 지금은 붕괴 현상을 막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안솔. 안솔?”
이윽고 지척에 다다른 순간, 나는 곧바로 안솔을 불렀다.
“으…. 으….”
그러나 안솔은 회답하지 않고, 오히려 시선을 살며시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저런 모습을 보니 갑갑함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차 올랐지만, 나는 참을 인자를 그리며 속으로 눌렀다. 그리고 지체 않고 귓가에 속삭였다.
“안솔. 기적…. 있지?”
“…….”
“왜 갑자기 말을 안 해? 있어?”
“…….”
“…안솔!”
“어, 없어요.”
…뭐?
안솔의 회답을 들은 순간, 나는 멍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 대기 시간이….”
기적이….
없다?
나도 모르게, 안솔의 어깨를 부여잡고 말았다.
“아윽!”
너무 세게 잡았는지 안솔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얼굴을 돌리며 내 시선을 피하고 있다.
“시, 싫어요! 안 돼요! 여기서, 여기서…!”
거기다 반항까지.
애원하는 어조로 싫다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주체가 기적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안솔을 보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솔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말인즉, 기적을 사용할 수 있는데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나는 차분히 호흡하며 속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용이 잠든 산맥 때나, 마르를 구할 때나. 평소 꽤나 맹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정작 중요할 때는 항상 한 건 해주던 안솔이었다.
또한 102포인트라는 안솔의 행운 능력치를 만든 장본인은 바로 나였다.
그런 만큼 나는 안솔을 믿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안솔의 고개를 강제로 돌려 고정시켰다. 무에 그리 서러운지, 어쩔 수 없이 나를 보게 된 안솔의 눈에서 서글픈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린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그 순간이었다.
『사용자 안솔의 특수 능력, 성녀 예언(Rank : F Minus)의 발동을 감지합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안솔의 두 눈에 옥빛 광채가 스쳤다.
============================ 작품 후기 ============================
6월 초에 한 번. 6월 중순에 한 번.
6월 달에 들어서 벌써 2번이나 휴재를 해버렸네요.
우선, 정말 죄송합니다. _(__)_
안 하겠다 안 하겠다 항상 마음먹고 말씀은 드리는데, 이게 정작 지켜지지 않는 것 같아요.
몸이 아프다는 것 또한 변명이겠지요. 자기 관리를 잘못한 방증이니까요.
그래도 앞으로 휴재는 물론, 업데이트 시간에도 조금 더 성실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너무 서운하다 생각지는 마시고, 어여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제가 최근 후기 때 너무 날뛴 것 같습니다.
어느 독자님들은 너그러이 받아주셨을지도 모르나, 분명히 눈살을 찌푸린 분도 계실 거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코멘트에 작품 관련 내용이 거의 없다는 게 제게 깊은 깨달음을 주더군요.
그래서 차후에는 다른 작가 님들처럼 얌전한 후기를 적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거칠고 야성적인 로유진이 아닌, 현숙하고 얌전한 요조청년이 되도록 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