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94
00593 웃으며 안녕. =========================================================================
구덩이 붕괴 현상이 시작되고 김수현이 광장을 벗어난 이후.
그제야 사용자들의 본격적인 탈주가 시작되었다.
『전장의 지휘자(Field Maestro)의 권능, 파괴 • 돌격을 발동합니다. 사용자들의 속도 및 파괴력, 돌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권능이 발동되자 사용자들이 달리는 속도가 가일층 빨라졌다.
되돌아가는 진형에서 한소영은 선두에 서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후방에서 사용자들을 쫓아가고 독려하며, 혹시 모를 이탈자를 방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게 탈주는 생각보다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한소영의 옆에서 달리던 연혜림은 이따금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앞만 보고 달려도 모자랄 판인데, 한소영이 중간중간 자꾸 고개를 뒤로 돌리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탈주에 집중하라고 한 마디 하려던 연혜림은, 이내 한소영의 얼굴에 그늘진 한 줄기 수심을 보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제 클랜원들이니까, 제가 구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문득, 아까 광장에서 들었던 말이 연혜림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유지태를 죽일 듯 노려보던 살기 가득한 눈동자를 떠올리자, 돌연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김수현의 눈초리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비켜라, 방해하지 마라.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간다.
‘머셔너리 로드가…. 그런 사내였나?’
연혜림이 쉬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면서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사용자들이 지나쳐온 길을 응시했다.
연혜림의 시야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한소영과 가장 후방에서 달리고 있던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뜻 모를 미련이 남는지 계속해서 고개를 돌리던 연혜림은, 별안간 빤한 시선을 느껴야만 했다.
“……?”
“…….”
어느새 한소영이 연혜림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본 두 여인은 거의 동시에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는 사용자들을 살피며, 부지런히 걸음을 놀렸다.
한편.
툭, 투둑!
우직, 우지직!
이곳저곳에서 벽면이 갈라지고 부서지는 소음이 들려온다. 아직까지 어느 정도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광장이 무너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남은 시간은 그리 많다고 보기는 어렵다.
퉁!
그때 천장에서 떨어진 암석만한 흙덩어리가 희뿌연 막에 부딪쳐 지면으로 흘러내렸다. 흙덩어리를 튕겨낸 허연 막 안에는, 새하얀 빛을 발하는 지팡이를 든 여인이 홀로 서 있다.
아니. 비단 막 안에서 뿐이 아니라, 아예 광장 자체에 남은 사용자가 안솔 혼자뿐이었다.
김수현은 이곳에 자신의 구조를 백업할 사용자를 남기겠다고 말했고, 직접적으로 안솔을 언급했다. 그에 따라 같은 클랜원들이, 다른 사용자들이 구덩이를 빠져나가는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면 상황상 아니면 성격상 응당 두려움을 느껴야 정상인데, 홀로 남은 안솔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그런 빛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두려움과는 확연히 다른, 죄책감과 갈등의 빛이 서려 있다.
마치 무언가를, 지금이라도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기…!”
그때였다.
안솔의 입에서 ‘기.’라는 말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안솔이 쥐고 있던 지팡이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화아아악!
그리고 그 순간, 지팡이가 눈부실 정도의 찬연한 빛에 휩싸이며 광장을 환하게 물들였다. 기적(Miracle)이 사용되기 직전의 전조 현상이었다.
그러나.
“ㅈ…. 저….”
거기까지였다.
기적이라는 완전한 단어가, 정확히는 두 글자 중 끝말인 ‘적.’이 추가로 들려오지 않는다. 안솔은 몇 번이나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달싹 움직였으나, 결국에는 마지막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 결과, 공간을 환하게 물들였던 빛이 점차 희미하게 사그라졌다.
안솔의 상태는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언뜻언뜻 옥빛이 깜빡이는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입술은 가련해 보일 정도로 파르르 떨리고 있다. 흡사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이랄까?
사실, 안솔도 알고는 있다. 아까 안현과 신재룡이 사라졌을 때부터 모종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김수현이 시킨 대로 기적을 사용한다면?
물론 생존에 대한 100%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숨통을 크게 틔워주는 역할은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솔이 기적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바로 성녀의 예언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성녀의 예언은 일전에 안솔이 꿨던 꿈과 이어졌으며, 꿈을 해석해주었다.
김수현이 나타났던 꿈.
무언가를 해치우고, 또 무언가를 해치우고, 종래에는 김수현이 블랙홀로 사라져버린 그 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예언의 메시지는….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그것을 확인한 순간, 하늘 높이 들어올렸던 지팡이가 힘없이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꽤나 애매모호한 메시지였지만 안솔의 직감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기적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사용해버리면….
차후, 김수현이 죽는다.
“흑!”
이 딜레마와 같은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결국 안솔의 두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어엉…! 어어어엉…!”
뜻 모를 미안함이 담긴 서글픈 울음이, 바작바작 부서져가는 광장을 자그맣게 울렸다.
안솔은, 여전히 홀로 서 있었다.
같은 시각.
김수현은 아주 살짝 비탈진 어두운 통로를 온 힘을 다해 오르고, 달리고 있었다.
거칠 것이 없는 움직임. 주변에 어마어마한 돌풍을 일으키는 김수현의 속도는 가히 신속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간중간 몇 번이나 통로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지만, 김수현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이따금 주변으로 떨어지는 흙 조각은 깡그리 무시한 채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린다. 마치 신재룡의 조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는 듯, 하나의 통로를 잡고 오롯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현재 김수현이 돌리는 방대한 범위의 마력 감지와 제 3의 눈의 활성화 덕분이었다.
탁탁탁탁탁탁탁탁!
그러다 어느 순간, 딱딱한 철도를 밟아 젖히는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김수현의 눈이 매섭게 주변을 탐색한다.
김수현의 사용자 정보와 한소영의 권능.
이 두 요소가 합쳐진 김수현의 전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잠시 후, 김수현의 모습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를 보이며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실제로는 많은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현이 체감하는 시간의 흐름은 상당히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시 바삐 이곳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비해, 몸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고 있었으니까.
지친 몸은 계속해서 충분한 산소를 요구하고, 부상당한 다리는 자꾸 엇나가려고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기껏 전투에서 이겼는데, 이제야 겨우 나아갈 길을 찾았는데, 그런데 여기서 죽는다면…. 이 구덩이에 들어와 이루어낸 모든 일들이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현이 믿고 희망을 가질 것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구조(構造).
다시 말해, 클랜 로드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클랜 로드가 이 상황을 인지하셨다면, 분명 구조의 여지를 남겨두셨을 게다.’
‘우리는 그걸 믿고 가는 거야.’
안현은 신재룡의 말을 생각했다.
그래. 형은 클랜원을 버릴 사람이 아니다.
용이 잠든 산맥에서 실종됐을 때도 형이 구해주셨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구해주러 오실 것이다.
그래서, 안현은 걸었다.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 걸었다.
우직, 우지직!
천장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했으나, 그래도 걸었다.
김수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반복적으로 멈추려는 발을 억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없이 걷고 걷던 도중, 잠시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는 헬레나를 고쳐 업으려 팔에 힘을 주었을 즈음.
쾅! 쾅! 쾅! 쾅!
돌연 안현의 눈앞으로 거대한 흙 암석 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안현의 발걸음이 더 이상 내디뎌지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멈추어졌다. 아까 굴을 나올 때부터 부단히도 쫓아오던 붕괴의 균열에 마침내 따라 잡힌 것이다. 또한 이렇게 따라 잡힌 이상, 앞질러지는 것은 삽시간일 터였다.
안현은 살그머니 입을 깨물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운이 좋아 피하기는 했지만, 만에 하나 정수리가 직격당했다면 정말 일 날뻔했다. 아마 그대로 고꾸라졌을 것이다.
아무튼 이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을 돌아서 갈 생각에, 안현이 살짝 몸을 튼 찰나였다.
“…형.”
그러나 잠깐 옆을 바라본 안현은, 저도 모르게 멍한 빛을 보이고 말았다.
신재룡과 고오환이, 쓰러져 있다.
“형! 형!”
쓰러진 주변으로는 조각난 흙 조각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안현은 곧바로 헬레나를 바닥에 내린 후 신재룡을 향해 달렸다.
“으으으음…!”
신재룡의 악 다문 입 사이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형! 재룡 형! 괜찮으세요?”
안현은 다급하게 부축해주며 걱정스레 묻자 신재룡은 간신히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례적인 회답일 뿐,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사실이 그랬다. 신재룡의 상태로 고오환을 부축한 채 여기까지 걸어온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상황은 이제 최악을 넘어 종착역을 향해 치달리는 중이었다.
헬레나는 아까부터 싸늘하게 식은 상태였다.
고오환은 간간이 신음을 토하며 반응을 보이고는 있으나, 여전히 일어날 생각은 않고 있다.
거기다 신재룡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태.
여기서 그나마, 그나마 괜찮은 사용자라고는 안현뿐이다.
잠시 후, 힘겹게 눈을 뜬 신재룡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아…. 미안하다….”
“뭐, 뭐가 미안해요 형.”
신재룡의 미안하다는 말.
안현은 문득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애써 부정하고는 있었지만, 신재룡이 왜 미안하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현의 예상이 맞는다는 듯이 신재룡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이렇게는 더 이상 힘들 것 같구나….”
“아, 안 되요 형!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고 하셨잖아요!”
“그게 아니라….”
“젠장, 싫어요! 저는 절대로, 절대로 형을 버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신재룡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안현이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발악적으로 외쳤다. 마치 신재룡이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 말을 듣기 싫다는 것처럼.
아예 신재룡의 입을 막아버린 안현은 남은 한 손을 겨드랑이 아래로 넣어 억지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신재룡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이 녀석아.”
“…예?”
그러자 씩씩거리면서 신재룡을 일으킨 안현이 돌연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주변에 계속해서 흙덩이가 떨어지는 와중에도 신재룡은 허허 웃으며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나는 저걸 사용하자는 말이었다.”
이윽고 신재룡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머리를 돌린 안현은, 벽면에 세워진 무언가를 보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광산 열차인 것 같습니다.’
‘예. 아마 이 철도에 쓰였던 것이라 생각되는데…. 크기는 서너 명이 들어갈 정도는 되는데….’
광산 열차.
생존의 희망이 사라져가던 이들의 눈앞에, 지푸라기 하나가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집필을~.
거친 슬럼프에도 굴하지 않게~.(굴하지 않게~.)
18시에 컴퓨터 의자 착석.
21시까지 지우고 썼다 반복.
21시 넘어서 비로소 첫 문장 완성.
그리고 03시 52분. 수십 번의 휴재 공지 유혹을 참아내고 악으로 깡으로 완성.
참 어지간히도 안 적히는 날이었지만…. 그래도 독자 님들.
저는, 이겼습니다.
저를 짓누르려는 슬럼프와 싸워서 이겼어요. 엉엉. ㅜ.ㅠ
부디 제가 내일도 싸워서 이길 수 있게 쓰담쓰담으로 힘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