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98
00597 죽도록 싸운 자는 살고, 죽도록 도망친 자는…. =========================================================================
하늘 높이 솟구친 김수현. 그러자 일부 사용자들이 허공을 바라보고는 “어, 어.” 소리를 내며 주춤거렸다. 여전히 땅은 푹푹 꺼지고 있는데, 워낙 무너지는 지면이 거대하다 보니 그대로 수직 하강하면 어쩌나 걱정이든 탓이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김수현은 도약 최고점에 다다른 찰나 공중에 가볍게 발길질을 했고, 그대로 재차 떠오르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걱정했던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지면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하늘에 뜬 상태로 공중제비를 도는 건 지금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능력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연속해서 공중제비를 돈 김수현은, 정확히 8번 만에 지면이 무너지는 영향권을 벗어나, 사용자들이 모인 그림자 언덕 지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풀썩!
“후.”
언덕에 사뿐히 착지한 김수현이, 둘러업은 신재룡을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모든 사용자들의 시선이 김수현에게로 쏠렸다.
한소영은 애초 김수현을 기다리고 있었고, 보고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전혀 추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한소영만큼은 지금 김수현이 왜 저 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그렇기에 행색은 비루하나 오히려 환하게 빛나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오셨네요.”
한소영이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며 말했다.
“조금 늦었습니다.”
김수현은 별것 아니라는 양 바로 회답했다.
그때였다.
쿠르르르르르르릉!
구덩이는 마치 김수현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지금껏 겨우겨우 버텨오던 부분마저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빠르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무너지든 말든, 크게 상관이 없다.
대다수의 사용자들이 이미 무사히 빠져 나왔거니와, 김수현도 자력으로 구덩이를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으니까.
이로써 모두 끝났다.
…아니, 아직 완전하게 끝난 건 아니었다.
문득 한소영은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일부 사용자들이, 정확히는 구덩이 공략에 참가한 사용자들이 묘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눈빛. 심지어 방금 탈출한 김수현도, 당장에라도 달려 나오려는 자신의 클랜원들을 진정시키며 가만히 한소영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 아직 하나가 남았지.
한소영은 그제야 사용자들이 원하는걸 깨달았고, 바로 입술을 떼었다.
“우리는, 작전명 싱크 홀 공략을 완료했습니다.”
야무지게 주먹 쥔 손을 천천히, 그러나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이로써 지금 이 시간 부로, 남부 원정대의 제 2전력 강철 산맥 공략 또한 종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공략 선언이 떨어진 순간,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만세! 끝났다! 드디어 끝났다고!”
총 사령관의 공식 선포를 기점으로, 남부 원정대가 마침내 강철 산맥 제 2지역의 공략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젠장, 잘됐어! 정말 잘됐다고!”
“클랜 로드! 클랜 로드! 왜 우리 클랜 로드는 안 보이는 거야?”
“흐엉…. 흐어어엉….”
“오빠아아!”
환호성은 이내 각 사용자들의 입장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바뀌었다. 어느 사용자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기도, 안 보이는 누군가를 찾기도, 주저앉아 울기도, 혹은 누군가를 향해 나는 듯 달려가기도 했다.
그냥 구덩이를 공략했다고 해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처음 괴물이 출현했을 때 느꼈던 공포감부터 시작해서 구덩이가 무너지기까지의 불안감까지. 그 모든 게 지금 이 순간 해냈다는 성취감과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변했고, 사용자들에게 짜릿한 희열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총 사령관.”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한소영은 주변에서 쏟아지는 축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계속해서 김수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한소영도 지금 이 기쁜 상황을, 축하를 나누고는 싶었다. 정말로 기다리고 싶었는데, 끝까지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축하를 나누고 싶은 사용자는, 이미 자신의 클랜원들에게 겹겹으로 둘러싸인 상태였다.
이유정은 한껏 째진 목소리로 무어라 모를 괴성을 지르며 김수현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다른 머셔너리 클랜원들도 모조리 김수현에게 몰려가 호들갑을 떨며 공략 완료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김수현은, 한껏 귀찮다는 얼굴로 머리를 흔들며 신재룡을 가리키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한소영은 간신히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렇게 남부 원정대의 강철 산맥 공략은 끝났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은 남았다.
그러나….
오늘 하루라도 이 기쁨을 조금 더 만끽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
구덩이 공략이 끝난 다음날.
한소영은 아침이 되자마자 정비를 명목으로 하루 더 휴식할 것을 지시했다. 물론 모두를 대상으로 한 휴식은 아닌, 구덩이 공략에 참가한 사용자들만 대상으로 내린 지시였다.
참가하지 않은 사용자들은 경계를 서거나, 부상자를 돌보거나, 아니면 주변에 적절한 장소를 탐색하라는 등의 지시가 내려졌고, 거주민들에게도 이제 슬슬 요새 건설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미 참가한 사용자들은, 그런 한소영의 지시에 조금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애당초 ‘생각보다’ 보이지 않는 사용자들이 있는 탓에 미약한 의구심을 품었고, 밤사이 공략 이야기를 들으며 나름 놀란 탓이었다. 하기야 그 누가 구덩이 안에 그런 어마어마한 괴물이 숨어있을 거라 예상했겠느냐 만은.
어쨌든 이미 끝난 일이니만큼 사용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해가 저물고 노을 빛 황혼이 내려앉았다.
안현이 정신을 차린 건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을 때였다. 안현은 눈을 뜨자마자 극심한 허기짐을 느꼈다. 지칠 대로 지친 안현의 몸은 원정에 상황이 일단락된 이후 곧바로 수면을 요구했고, 시간으로 따지면 꼬박 하루를 넘게 잠에 빠졌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했으니 공복감이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천막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더듬은 안현은 자신의 흑 창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다른 데로 옮겨놓은 걸까? 약간은 허전한 기분이 느껴졌다.
때마침 밖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터라, 어수선한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와 안현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며 천막을 나서려는 찰나, 공교로이 천막을 지나치는 여인을 보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긴 생머리를 단정히 늘어트린 날씬한 여인은, 다름 아닌 검후, 남다은이었다.
남다은 또한 안현이 나오는걸 봤는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반듯하기 그지없는 아미가 살짝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곧 꼭 다문 도톰한 입술이 자그맣게 열린다.
“이제, 일어나셨네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안현은 잠시나마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남다은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특정한 인원을 제외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상대가 사내라면 더더욱.(물론 한 명만큼은 제외한다.)
그렇다고 아주 모른 체하며 지내는 건 아니었으나, 보이는 태도를 보면 아무래도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기 어려운 여인이었다. 조금 거리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지그시 응시하자, 안현은 아차 하며 빠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예. 그, 그렇지요. 늦게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너무 피곤해서….”
“…응? 어차피 오늘도 휴식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으니 별로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요.”
“그, 그런가요?”
“네. 하기야 종일 주무셨으니 듣지 못하셨을 거예요.”
힐난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있는 그대로 말을 하는 걸까?
꼬르륵!
남다은의 종잡을 수 없는 말투에 머리를 갸웃할 즈음, 돌연 뱃속에서 끓는 소리가 울렸다. 안현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지만, 남다은은 잠깐 눈을 흘긴걸 제외하고는 어떠한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식사하시는 게 좋겠네요. 마침 저녁을 준비 중이니까.”
“예. 그…. 래야죠.”
“그럼, 몸조리하시길.”
“아. 거, 검후 님은요?”
남다은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잠시 안현을 빤히 바라보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제 식사는 제가 알아서 챙길게요.”
그렇게 말하고 바로 몸을 돌리고는 찬바람을 남기며 한쪽으로 사라져갔다.
혹시 말실수 한 게 있나, 고민하던 안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서서히 불타오르려는 낌새를 보이는 공복감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커다란 모닥불이 타오르는 곳에 도착한 안현은, 한창 식사를 진행 중인 머셔너리 클랜원들을 볼 수 있었다. 중앙에는 임한나가 능숙하게 재료를 다듬고 고기를 꼬챙이에 꿰며 현란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어. 현이 왔네?”
이내 안현이 쭈뼛쭈뼛 다가가자 임한나가 힐끗 고개를 돌리더니 상냥한 목소리로 아는 체를 해왔다. 안현은 조심스럽게 머리를 끄덕였다.
“네. 누나. 방금 일어났어요. 그런데 시간이….”
“응응.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깨우지 않았어.”
“아. 들었어요. 오늘 하루 추가로 휴식 지시가 떨어졌다고….”
“아, 그래? 들었으면 됐고. 아무튼 어서 와. 배 많이 고프지?”
임한나는 마치 친 누나처럼 안현을 자상하게 챙겨주었다. 이내 나긋나긋한 손길에 끌려 천천히 자리에 앉았을 때, 안현이 앉기만을 기다렸던 클랜원들이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어이, 안현. 오자마자 미안한데….”
“방금 깨어났다잖아요. 그리고 식사 중이에요.”
우정민이 막 입을 열은 찰나 임한나가 예의 상냥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칼에 끊어버렸다.
“…아니. 그냥 어서 오라고.”
그러자 우정민은 임한나를 흘끗 살피더니, 떨떠름한 말투로 어서 오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식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안현은 뭔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앉자마자 질문이 쏟아질 것을 예상했는데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나름대로 배려라는 건 알겠지만…. 안현은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굳이 표현해보면 무언가 충분하지 않다는 기분이랄까?
탁!
“자.”
그때, 임한나가 안현의 앞으로 접시를 내려놓았다. 육즙이 듬뿍 배인 고기 한 덩이와 스튜, 그리고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술 한 잔까지. 무척 시장하기는 했지만, 안현은 바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
“저, 한나 누나. 혹시….”
“걱정 마. 재룡이 아저씨랑 헬레나 양 모두 무사하니까.”
마치 그 질문을 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임한나는 바로 회답했다.
“아, 그래요?”
“그렇지. 아직 두 분 모두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솔이가 밤을 새면서까지 달라붙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 듣기도 했고.”
임한나가 정말 걱정 말라는 듯 안현의 어깨를 부드러이 토닥여주었다.
“…다행이네요.”
안현은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겁지겁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모닥불에서 불이 크게 일어나고,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 너머로 어느새 깊어진 밤하늘이 아름다운 별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후우우우…. 미치겠네.”
식사를 마친 후, 자리에서 나온 안현은 홀로 걸음을 옮겨 한적한 곳에 드러누웠다. 탁 트인 밤하늘을 보고 있음에도 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식사 때부터, 아니 사실상 처음 일어났을 때부터 느껴졌던 미묘한 기분이 계속해서 전신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좋게 끝났는데.
구덩이 공략도 성공했고, 동료들도 목숨을 구했는데.
그런데 왜 자꾸 뜻 모를 기분이 느껴지는 걸까.
왜 자꾸만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쇠사슬에 온몸이 꽁꽁 사로잡힌 듯하다.
별안간 가슴이 터질 듯이 갑갑해져 와 안현은 차분히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구덩이를 들어갔을 때부터 광산 열차를 타고 구덩이를 나올 때까지. 통로를 지나치고, 괴물들과 전투를 하고, 거대한 괴물과 조우하고, 다른 괴물을 추격하고, 또다시 전투하고, 겨우겨우 이기고….
그때였다.
“…아.”
주현호와 전투했던 기억을 떠올린 순간, 안현은 저도 모르게 양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허전한 기분이 더욱 강해졌다.
“뭐하냐. 여기서 혼자.”
그러한 찰나, 어디선가 익숙한 저음이 들려왔다. 번쩍 눈을 뜬 안현은,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용자를 보고는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언제 왔는지 김수현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혀, 형?!”
안현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곧바로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괜찮아. 누워있어.”
김수현이 괜찮다는 듯 손을 젓더니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하…. 피곤해 죽겠네. 너도 연초 하나…. 아. 너는 안 피지.”
안현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갑자기 치익, 작게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수현이 연초를 꺼내 불을 붙이고 있었다. 안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아까 식사 시간 때는 안보이시던데.”
“못 먹었어. 바빠서. 부상자들한테도 가봐야 했고, 또 요새를 건설할 적당한 장소도 찾아야 했으니까.”
“예? 그걸 왜 형이…. 휴식 지시가 떨어졌잖아요.”
“…쉴 필요가 없으니까.”
조용히 중얼거린 김수현은 돌연 스리슬쩍 눈매를 올리며 안현을 흘겼다. 안현은 본능적으로 침을 삼켰다.
“안현.”
“예.”
“변한 건 없어. 우리는 여전히 강철 산맥의 한 가운데에 있고, 앞으로 얼마 동안은 쭉 이대로 있어야 해.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서 탐험 하나 끝냈다고 축제하는 게 아니라.”
“……?”
“너한테 하는 소리야. 구덩이 하나 공략했다고 끝이 아니라고. 즉 이게 바로 공식 원정과 탐험의 차이지.”
“그렇죠.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안현은 당연하다는 말투로 회답했다. 그러자 후욱, 연기를 내뱉은 김수현이 시답잖은 웃음을 흘렸다.
“흐. 그럼 왜 그러고 청승은 떨고 있냐? …꼭 꿈꾸는 사람처럼.”
“제, 제가요?”
안현은 아니라는 듯 반문하면서도 가슴이 뜨끔해지는걸 느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그랬던가?
확실히 안현의 몸 상태는 김수현의 말대로였으나, 이번 원정의 기초 목적은 잊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도 형이 말한 건 알고 있는데…. 그냥 꿈만 같아요. 구덩이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흠, 그래? 왜. 무슨 충격적인 일이라도 겪었어?”
“그런가? …모르겠어요. 뭔가가 잡힐 듯 말듯 하고…. 무언가 충분하지 않은 기분도 들고…. 허전해요. 정말 왜 이러는 걸까요?”
“…….”
안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서일까.
그러고 보니 안현의 행동은 아까부터 꽤나 이상해 보였다. 입은 힘없이 벌어져 있고, 손은 자꾸만 의미 없이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으며, 몸은 느슨하게 풀려 있다.
하지만 두 눈은 일견 흐리멍덩해 보이면서도,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 뜻 모를 빛을 언뜻 발하고 있다.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뭔가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는지, 김수현이 약간은 가라앉은 심원해 보이는 눈동자로 안현을 응시했다.
그 상태로,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김수현이 헛웃음을 흘리며 차분히 옆을 더듬었다.
“허 참. 설마 그런 건가?”
“그런 거라니요?”
“…아니. 너 혹시….”
“예?”
그때, 느닷없이 안현에게 뭔가가 휙 날아와 복부에 떨어졌다. 미미한 충격. 안현이 어리둥절해하면서 복부를 더듬자 순간 장대 같은 게 잡히며 손아귀가 꽉 찬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안현은 숨을 꿀꺽 삼키며 눈을 살짝 떴다. 약간이지만 허전한 기분이 가셨다.
“지금, 싸우고 싶은 거냐?”
“!”
그리고 김수현의 말이 이어진 순간, 안현은 삼켰던 숨을 크게 토해냈다.
싸우고 싶다.
그때처럼,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끌어낸 채로 싸워보고 싶다.
안현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찬물을 맞은 듯한, 정신이 번쩍 깨는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아. 예정 시각보다 1시간이나 늦어버렸습니다. 집필 자체는 1시가 약간 넘어서 끝났는데, 퇴고가 예상 이상으로 많이 걸리더군요. -_-a 그래도 페이스는 점차 회복되는 느낌입니다. 일단은 펑크를 내지 않는데 주력하고는 있지만, 조만간 자정 연재 복귀도 염두에 둘 수 있을 것 같아요. 🙂
이번 파트는 총 4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2회는 가벼운 휴식 파트고 나머지 2회는 상황 정리 파트입니다. 앞선 2회가 인물들의 내면을 정리하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후반 2회는 드러난 상황들을 정리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아마 이전 내용 중 주현호와의 전투를 눈여겨보신 분이 있다면, 이번 소제목이 의미하는 바도 아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