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03
00602 죽도록 싸운 자는 살고, 죽도록 도망친 자는…. =========================================================================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짝, 짝!
주의를 환기시킬 겸 박수를 두어 번 치자 삽시간에 이목이 집중됐다. 나는 약하게 헛기침을 한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모두가 모인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대다수의 클랜원이 갸웃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일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구덩이 공략에 참가한 이들이다.
상대성 이론이라고 했던가? 거기서 겪어야 했던 일들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을 테니, 체감한 시간의 흐름도 상대적으로 느렸을 것이다.
…아무튼.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잠깐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리자, 한쪽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3명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안현, 신재룡, 헬레나. 그중에서도 신재룡은 꽤나 멋쩍어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저를 쳐다보는 겁니까? 사용자 신재룡?”
“에….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직접 지목해 말을 꺼내자 신재룡이 기다렸다는 듯이 회답했다. 왜 저러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조금은 짓궂은 기분이 들어 일부러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으음? 괜찮다니요?”
“환영 인사요. 이미 오늘 아침부터 수십 번은 받은 것 같아서…. 더 받으려니 쑥스럽네요.”
“하하하.”
“그,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신재룡을 보고 있으니,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아까 아침 클랜원들과 조우했을 때 환호성에 파묻혔던 것이 꽤나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어쨌든 안현 또한 큰 불만은 없어 보이고 헬레나는 애초 무덤덤하게 일관하고 있어, 나는 결국 신재룡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섭섭한데. …아무튼, 세 분 모두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사실 ‘큰 일을 해내셨습니다.’와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지만, 두 개 모두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중간 즈음으로 생각되는 적절한 말을 골랐다.
짝짝짝짝….
이어서 생환 및 회복을 축하하는 가벼운 박수가 이어지고, 박수가 끝나자마자 천막에는 조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침내 잠잠해진 클랜원들을 보며 나는 열 손가락을 엇갈려 맞췄다. 이제는 본론에 들어가야 할 때였다.
“아마 여러분들도 어느 정도 이야기는 들으셨을 겁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에게 들은 바로는, 현재 요새를 건설할 지역이 확정됐으며 곧 그 장소로 이동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리면, 재판은 내일 오후입니다. 그리고 원고의 자격으로 참석하는 이들은 안현, 신재룡, 헬레나. 이 3명이고요.”
“저기요, 클랜 로드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질문이 있는데요.”
그때였다.
잠시 말을 끊은 찰나, 한쪽에서 한껏 궁금하다는 상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 여인이 인어처럼 앉은 자세로 손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표혜미, 아니 정확히는 표혜미의 모습을 한 제갈 해솔이었다.
“재판이라는 게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 건가요? 이 세상에서요.”
그런 제갈 해솔의 눈은 약간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정말 오랜만에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 아이처럼.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제갈 해솔은 공략 기간 동안 조용히 지내겠다는 조건으로 강철 산맥 공략에 합류했고, 이제껏 정말로 쥐 죽은 듯이 지내왔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 부분은 무척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성질이 어디로 가겠는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갈 해솔은 ‘나 심심해요.’라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으며, 어쩔 때는 ‘AC. 괜히 따라왔어.’ 라는 투덜거림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 터지니(물론 제갈 해솔의 입장에서.) 저렇게 흥미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조금은 관대해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계시는지요.”
“네, 대충은요. 저 세 분이 열심히 전투하는 와중에 한 분이 도망갔다. 그래서 그 도망자에 대한 처벌을 논의해야 한다. 아닌가요?”
그건 또 너무 심하게 요약했는데. 뭐,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니.
“그렇죠. 사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 자체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이미 벌어진 상황 하나만을 두고 당사자들이 결정을 내리며, 그 과정에서 나오는 의견들을 수렴해 최종 결정권자가 판결을 내립니다. 여기서 최종 결정권자란 총 사령관, 즉 이스탄텔 로우 로드를 의미합니다.”
“에…. 그러니까 그 질투 날 정도로 예쁘게 생기신 분이 판사다?”
질문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찰나, 갑자기 고연주가 도끼눈을 뜨며 나를 주시했다.
질투 날 정도로 예쁘게 생기신 분…. 설마 고연주가 한소영을 질투하는 건가? 그런데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예.”
“그럼 검사, 변호사, 증인, 배심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요?”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상황이 중요합니다. 이미 모든 상황이 확정된 이상, 증인이나 배심원은 필요치 않으니까요.”
“그럼 판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글쎄요. 굳이 따져보면 저 3명이 원고 겸 검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도망자의 처리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선에서 그치는 정도겠죠. 피고인 그 도망자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주변 지인들이 변호사 역할로 나설 수 있겠지만, 아마 저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군요.”
“왜요? 왜 변호해주지 않는 건데요?”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슬슬 다른 클랜원들 중에서도 불편한 심기를 비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분이 상했다기 보다는, 혼자서 자꾸 이야기를 끊어먹으니 ‘쟤 뭐야?’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그머니 신호를 보내 그들을 진정시켰다. 신재룡, 헬레나는 이미 알고 있다거나 별로 관심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안현은 무척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혜미씨. 그건 제가 말씀 드릴게요.”
그때,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나 대신 제갈 해솔의 질문에 회답했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현숙함이 한껏 무르익은 여인의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정하연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클랜 로드.”
허락을 구하려는 듯 나를 쳐다보는 정하연을 보며 나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문득, 저번 용이 잠든 산맥 사건 이후 정하연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유는 간단해요. 이 홀 플레인에서는 도망이라는 개념을 상식으로 두지 않아요. 오히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종의 불문율로 치부되죠.”
“……?”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혜미씨가 탐험 대장을 맡게 됐고, 마침 사제 자리가 비었다고 가정해봐요.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중에서 1명을 골라야 하는데, B라는 사람은 예전 어느 탐험에서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친 전력이 있죠. 그럼 혜미씨는 이 B라는 사람을 탐험대에 포함시키겠나요? 언제, 어디서든지 동료를 버리고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을?”
“아니요. 당연히 A를 선택…. 아?!”
“네. 바로 그거에요. 그리고 한 가지 추가로 덧붙여드리면, 애당초 북 대륙은 지금껏 도망자를 용서한 사례가 없어요. 99%가 처형. 그리고 설령 공식으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용자로서는 완전하게 매장당하죠.”
“헤~. 매장이라. 재미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섭네요.”
“그럴 수밖에요. 소문이라는 건 그만한 파급력이 있으니까요. 생각해보세요. 모든 상황은 탐험 기록에 꼬박꼬박 남겨지며, 북 대륙의 인구는 많아 봤자 5만. 거기서 전투 사용자를 추리면 더욱 적어지겠죠? 즉 선례가 생김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보편화를 방지하고, 소문이라는 화살을 도망자에게 돌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들을 이번 상황에 대입해보시겠어요?”
“아아, 네! 이제 완전히 이해했어요. 충실한 설명 감사 드려요!”
제갈 해솔은 이제야 만족했다는 얼굴로 배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마치 맛있는걸 잔뜩 먹어 기분 좋아 보이는 어린 아이처럼 말이다.
일부 클랜원들은, 약간 멍해 보이는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분명 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무지에서 비롯된 망연함이리라.
그렇게 호기심을 충족한 제갈 해솔은 곧바로 얌전해졌고, 나는 정하연에게 남몰래 눈인사를 건넸다. 정하연은 어질게 미소 지으며 화답해주었다. 언제나처럼.
“자.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으니 슬슬 마무리를 짓도록 하죠.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내일 공개 재판을 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해왔으며, 우리 3명의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말씀하셨죠.”
사실 공개 재판을 열겠다는 것부터가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것과 진배없으나, 그래도 한소영은 재판을 벌일 여지는 두었다. 그건 바로 1차적으로 3명의 의사를 수렴하겠다는 것.
“말인즉, 그 도망자에 대한 처분은 살아나온 당사자 3명의 의견이 가장 많이 반영된다는 소립니다.”
그때, 무료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헬레나가 은근슬쩍 손을 들었다.
“클랜 로드. 혹시 그 재판이라는 거, 그냥 참석하지 않으면 아니 되옵니까?”
별로 관심 없다는 말투이기는 했지만, 목소리에는 알듯 말듯한 피로함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불참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 나는 곧바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나저나 헬레나라면 흥미를 보일 줄 알았는데, 나름 의외로군.
“참석은 무조건 해야죠. 그러나 의견 개진이 힘들 경우에는, 그 장소에서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다는 기권을 행사하면 됩니다.”
“기권이라…. 알겠사옵니다.”
“예. 그러면 남은 두 명은….”
“저는 참석하겠습니다. 남은 하루라는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옆의 두 명으로 시선을 돌리자, 신재룡이 딱딱히 굳은 얼굴로 바로 회답해왔다. 이미 각오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아마 부상자 관리소에 있으며 어느 정도 생각해둔 게 있는 모양.
그러나 안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말 한 마디에 한 명의 생명이 달렸다는 사실이 자못 어색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이 상황을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하루라는 시간이 남아있으니, 내일 오전까지는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말 그대로, 이번 선택은 오롯한 안현의 몫. 내가 끼어들 수도, 또 그럴 생각도 없다. 금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클랜원들의 선택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뿐이다.
“그럼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회의가 파함을 알렸다.
*
다음날 오후.
“…그러므로 지금부터 하는 질문은 형식적인 것들에 불과하며, 사용자 이희원이 회답은 네, 아니오 로만 하시면 됩니다.”
거의 모든 남부 원정대 사용자들이 모인 가운데, 한소영의 목소리가 꾸짖듯이 들려왔다. 나는 야외에 마련된 재판장을 훑다가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의자에는, 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물론 저 여인이 바로 도망친 사용자였으며, 이번에 처벌을 받을 피고이기도 했다.
“소속 클랜은 적심. 6년 차 사용자. 클래스는 궁수. 이름은 이희원. 맞나요?”
고저는 없지만 날카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간신히 회답한다.
이윽고 노려봄 반, 호기심 반이라는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소영의 추궁이 이어졌다.
“사용자 이희원은 구덩이 공략 조에 참가했지요. 맞나요?”
“네.”
“그리고 전투 도중, 광장에서 도망친 괴물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았고요. 맞나요?”
“네, 거기까지는 맞아요. 하지만.”
“조용히 하세요. 이후 중간에 조가 나뉘었고, 사용자 신재룡이 조장으로 있는 조에 포함됐지요. 맞나요?”
“…네. 그러나….”
“그 조는 괴물과 조우했으며, 차후 이어진 전투에서 사용자 이희원은 홀로 도망쳤습니다. 맞나요?”
“자, 잠시만요. 그건!”
“사용자 이희원. 한 번만 더 제가 지정한 답변의 범위를 벗어날 시,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제 권한으로 즉결 처분하겠어요.”
“…….”
“마지막 기회에요. 아까 질문에 대해, 다시 답변하세요.”
“…네.”
한소영은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 이희원을 매섭게 몰아붙였고, 결국에는 도망친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 순간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용자들 사이로 미약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어수선한 소란으로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곧 일부 사용자들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이희원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나름 명성이 있는 사용자가 저런 짓을 했다니,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좋아요. 추궁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요. 그럼….”
그때였다.
“초, 총 사령관! 잠시만 기다려 주시요!”
붉은빛으로 일색 된 복장을 걸친 사내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적심 로드였다. 들어보니 어떻게든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무진 애를 썼다고는 하는데…. 아쉽게도 한소영이 그렇게 만만한 여인은 아닌지라.
“무슨 일이지요? 적심 로드.”
“바, 발언권을 요청하겠소!”
적심 로드는 나름 절차를 준수하려는 듯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지만, 한소영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한소영의 좌우로 착석한 안현, 신재룡, 헬레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기각하겠어요. 이제 막 이 3분의 의견을 들을 예정이라.”
“우, 우리 쪽 말도 들어줄 수는 있는 거잖소!”
“이미 충분히 들었으니까요. 어쨌든, 결국에는 사용자 이희원의 살 길을 열어달라는 말씀이 아니었나요?”
“그거야!”
“네. 어제 그냥 좋게, 이대로 넘어가달라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이번 선례로 인해 발생될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실 수 있겠냐고 여쭈니, 어떤 회답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큭!”
적심 로드가 할 말을 잃었다는 얼굴로 입을 짓씹었다.
“저는 이 일을 별로 오래 끌고 싶지 않네요. 이대로 지속하겠어요. 그럼….”
“기권.”
이윽고 한소영이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헬레나가 손을 번쩍 들며 입장을 발표했다. 와, 참 빨라서 좋구나.
잠시 후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한소영이 입을 열었다.
“사용자 헬레나는, 기권이라고요?”
“네. 저는 어떻게 처리되든 별 상관이 없는지라.”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인 헬레나가 길게 하품을 한다.
의자에 앉아있던 이희원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하는 기색이 얼굴에 서린다. 하기야 꼼짝없이 죽겠다 싶었는데, 처음부터 기권 표가 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 다른 분은….”
“저는 처벌을 원합니다.”
한소영이 오른쪽 끝을 쳐다보며 물은 순간, 신재룡의 회답은 이희원을 단번에 핼쑥하게 만들었다.
신재룡의 얼굴은 의외로 굉장히 단호해 보였다. 한두 번 깊이 심호흡을 하더니 이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든 전투가 끝나고 도망치는 도중에, 저는 동료라고 생각한 한 사내를 잃었습니다. 비록, 서로 소속한 클랜은 달랐지만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돌연 그제 신재룡이 물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저를 구하실 때 다른 사용자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복수심은 접고서라도, 그때 그 사내의 마지막은 정말로 사내, 아니 무사다웠습니다. 그런 만큼, 그 사내와 대비되는 도망자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대해질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러므로 저는 처벌을 선택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알겠어요. 의견, 감사해요.”
신재룡이 말을 끝냈고, 한소영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로써 처벌 1표, 기권 1표.
이제 남은 건 안현의 의견뿐. 그렇다면 안현의 의견으로써 이희원이 처벌, 아니 생사가 결정된다고 봐도 옳을 상황이었다.
한소영의 고개가 안현에게로 돌아갔다.
“사용자 안현?”
“…예, 예?”
안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회답했다. 뭐랄까,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얼굴?
한소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현의 의견을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문제는 안현이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 지금도 나를 흘끗흘끗 바라보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듦으로써 안현의 요청을 거절했다. 사실상 선택에 도움을 주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는 발전이 없을 테니까. 이제 막 내면의 성숙해지려는 흐름을 타기 시작했는데 그걸 가로막을 수는 없잖은가.
그렇게 나와 계속 눈을 맞추려고 노력하던 안현은, 결국 머리를 푹 숙이며 지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안현은 계속해서 땅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래. 네 성격에 복잡하겠지. 그것도 무척이나.
잠시, 시간이 흘렀다.
“…사용자 안현.”
곧 얼른 결정을 내려달라는 서릿발 같은 촉구가 이어졌을 때.
“저, 저는….”
비로소 안현의 입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청력을 높였다.
“처, 처벌을 하되….”
“아, 아니 그러니까…. 물론 처벌은 받아야 할 일이지만…. 그래도 목숨은….”
띄엄띄엄 이어지는 목소리. 그러니까 처벌은 원하지만, 그래도 목숨까지 빼앗는 건 싫다는 말인가?
“어떤 처벌을 할지는 제가 정해요. 아무튼 처벌에는 동의한다는 말씀이시죠?”
한소영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고요히 반문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아니요!”
갑자기 안현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거의 노려보는 수준으로 한소영을 정면에서 응시하더니, 전보다 확연히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한 번!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선언했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게 네 선택인가.
안현의 의견이 끝난 순간 주변에 몇몇 사용자들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안현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정작 이희원과 적심 로드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지만. 활로가 열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확실히 드러난 것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찬성 1표, 반대 1표, 기권 1표. 이렇게 결과가 나왔으니 당사자들의 의견만으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별다른 걱정은 들지 않는다. 이렇게 조율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1표가 추가적으로 생성되며, 그 권한은 당연히 판사에게 돌아간다.
즉 이제 모든 결정이 한소영에게 달린 것이다.
“말씀해주신 의견은 받아들이죠.”
그런 안현을 잠시 빤히 쳐다보던 한소영이 말했다. 그런 한소영의 얼굴은 시종일관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안현이 한결 진정된 기색으로 한숨을 흘리는 찰나.
“그러나. 안타까우시겠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사용자 안현.”
싸늘한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사용자 안현과의 생각과 다르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한소영은 처벌을 원한다는 소리였다. 뭐, 애당초 공개 재판을 진행하겠다 한 이상, 한소영은 이미 결론을 내린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으니.
웅성웅성.
주변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밝아졌던 이희원과 적심 로드의 얼굴은 도로 검붉은 빛을 띠었으며, 안현은 망연해 보이는 얼굴로 한소영을 응시했다.
“왜냐고 물어보시는 얼굴이네요. 간단해요. 저는 남부 원정대는 전투 중 도망쳐도 괜찮아, 라는 소리가 들려오는걸 원하지 않아요.”
솔직하다면 솔직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반박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저 말은 반박하려면, 이후 도망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책임지겠다는 전제가 들어가야 하니까. 그건 나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제 의견은, 무조건 처벌을 해야 한다 이며….”
한소영의 말이 이어진 순간, 벌떡, 연혜림이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 있던 사용자들이 흠칫하며 걸음을 물렸다.
처형의 공주가 일어났다는 소리는….
“처벌 내용은 처형. 으로 정하겠어요. 이상입니다.”
그렇게 한소영의 처형 선고가 떨어지는 동시에.
쿵!
무언가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리 꽂혔다.
자세히 보자, 처형의 공주 전용 무기인 처형자의 대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거 오랜만에 보네.
“에…. 그러니까, 지금?”
이윽고 앞으로 걸어나간 연혜림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한소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소영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순간, 이희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작품 후기 ============================
왜, 왜, 왜, 왜….
왜 또 페이스가 이렇게 됐을까 생각했는데, 용량을 보고 이해했습니다.
24K!
음하하하.
…OTL. 죄송해요. 구덩이 파트의 실질적 종결이라는 생각에, 욕심껏 이것저것 집어넣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에, 가설라무네.
음. 그런데 글을 적다보니 문득 여러분들의 의견이 궁금해져서요.
독자 분들은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 입각했을 때,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부 원정대의 기조 유지를 위해 처형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너무 심하다. 한 번 정도 기회를 줬어야만 했다고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