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04
00603 되돌아온 천하무쌍(天下無雙), 그리고 뇌신(雷神). =========================================================================
늦은 밤.
후드득, 후드득!
아침만해도 어둑한 먹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은 저녁을 넘어서야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낮에는 공기 중 수증기가 가득 낀 탓에 습도가 최고조를 찍었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한껏 높아졌던 불쾌 지수도 서서히 가라앉는 중이었다.
비는 처음에 땅을 점점이 찍는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빗발치듯이 쏟아지며 온 세상을 적셔가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숲을 앞에 두고 있는 북 대륙 전초 기지 중앙에는, 주변의 다른 것들과는 달리 유난히 커다란 규모를 보이는 상앗빛 천막이 하나 있었다.
문득 떨어진 빗방울이 삼각형 모양의 지붕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천막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탓에 아주 짧은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물방울 표면에 천막 내부의 광경이 언뜻 비쳤다. 새하얀 빛…. 탁자 하나…. 두 인영….
탁!
그러다 어느 순간, 탁자에 놓인 수정구가 발하던 새하얀 빛이 미약한 노이즈 소리를 내며 한순간 꺼져버렸다.
“통신이 끊어졌네요.”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며 수정구를 품으로 챙기는 여인은 바로 이효을이었다.
“아무튼 얘기는 같이 들으셨을 거예요. 생각보다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남부 원정대가 제 2차 공략을 마치고 요새 건설을 시작했다고 하네요.”
후욱, 후욱….
말을 하는 와중 이효을의 이마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거칠고 불쾌한 숨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천막에 들어온 이후, 아니 눈앞의 사내가 이 전초 기지에 도착한 이후 보여온 태도가 내내 거슬린 탓이다.
딱히 무례하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지간해서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앞서 거쳐 지나간 조성호나 한소영과 심도 깊은 토의를 나눴던 이효을로서는, 어느 정도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후욱, 후욱….
하지만 이효을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선천적으로 간덩이가 작은 여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건드릴 상대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상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맞은편에서 지긋이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거구의 사내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될 사용자였다.
“…….”
밖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듯 치렁치렁하게 엉킨 머리카락과, 톡 건드리면 그대로 터질 것 같은 울퉁불퉁한 근육들. 질끈 감은 눈을 보고 있으면 흡사 기회를 노리고 웅크리고 있는 맹수를 보는 듯했다.
무엇보다 등에 맨 새까만 창에서 알듯 말듯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운은, 서로간의 미묘한 긴장감을 형성케 하는데 가장 큰 주범이었다.
김수현이 건드리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사용자라면, 이 사내는 건드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럼 이제 북 대륙 원정대도 제 3차 공략을 시작해야 하는데…. 언제쯤 진군하실 계획인가요? 총 사령관, 아니 사용자 공찬호?”
그렇게 생각한 이효을이 얼른 이 자리를 파하고자 말한 찰나였다.
후욱!
느닷없이 사내, 아니 공찬호가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번쩍 눈을 떴다. 별생각 없이 마주한 순간 이효을은 온몸이 경직되는걸 느꼈다. 흡사 야생의 맹수와 같은 그 흉포한 눈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공찬호의 입이 살짝 열리며 짐승이 낮게 우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
“…네?”
“바로, 가도록 하지.”
“사, 사용자….”
그러나 이효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찬호가 몸을 일으켰다. 거의 2미터에 다다르는 거한이 몸을 일으키자, 멍하니 고개를 젖히는 이효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공찬호는 번뜩이는 눈으로 이효을을 지그시 낮추어 보았다. 그게 전부였다.
잠시 후, 미련 없이 등을 돌린 공찬호가 성큼성큼 천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이효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자, 잠시만요! 사용자 공찬호! 지금 날도 늦었고 밖에 비도 오는데! 무슨…!”
그러나 뒤늦게 몸을 일으켜 허겁지겁 공찬호를 따라나간 이효을은, 천막 밖으로 나간 순간 도로 망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날카롭기 짝이 없는 기세에,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 온 걸까.
중앙 천막 밖으로는, 어느덧 물경 5천명은 넘어 보이는 사용자들이 가지런히 정렬한 상태였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자못 엄숙함을 넘어서 뜻 모를 웅장함 까지도 보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번에 북 대륙 전체 원정대 인원은 전투 사용자만 추산해서 약 15000명. 그러므로 각 원정대의 평균 전투 인원은 3000명 ~ 4000명 사이여야 정상이다.
그러할진대 지금 공찬호가 걸어 들어가는 북부 원정대는 전투 사용자만 5000명을 넘기는 상태. 과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윽고 공찬호가 중앙을 가로지르자, 사용자들이 자동으로 좌우로 갈라지며 하나하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효을은 그런 사용자들을 말리지 못한 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동부 원정대 1차 공략에 걸린 시일 10일.
남부 원정대 2차 공략에 걸린 시일 14일.
마침내 첫 공략을 개시하고 24일이 지난 후, 북부 원정대가 3차 공략을 시작하는 신호탄을 알렸다.
*
후웅!
거대한 대검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다.
촤악!
검 끝이 이희원의 목을 깔끔하게 훑는다. 이내 터져 나온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분리된 얼굴이 공중을 날았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것만 같은 얼굴. 허공을 바라보는 안현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처형, 끝났습니다.”
직접 처형을 실행한 연혜림이 살그머니 하품을 하며 보고한다.
“이것으로 재판을 종료하겠어요.”
그리고 한소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시작으로 신재룡과 헬레나도, 다른 구경하던 사용자들도 하나하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안현이 있는 쪽으로.
“왜, 왜…?”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데 안현이 의아함을 느낀 찰나였다.
짝!
“안현.”
익숙한 박수에 이어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너, 왜 그런 선택을 내렸지?”
이윽고 옆을 돌아본 안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느새 다가온 김수현이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비단 김수현만이 아닌, 모든 사용자가 안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안현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사용자들은 안현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 세상은 네가 살다 온 현대가 아니야. 홀 플레인이잖아. 그런데 왜 그래?”
“너 도대체 몇 년 차니? 이제 갓 들어온 병아리야? 3년 차면서 똥 오줌도 못 가려? 분위기 파악 못해?”
“혼자서만 착한 척하고 자빠졌네. 호구 같은 놈.”
“뭐?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자고? 나 참, 정작 배신당한 당사자가 저런 말을 해? 이런 배알도 없는 자식!”
마치 이 재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하나 둘 비난을 쉴 새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안현은 속으로 절절하게 외쳤지만, 왜인지 모르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한껏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비난하는 사용자들만 번갈아 볼뿐.
결국 참다 못해 도로 김수현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안현은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
어느덧 얼굴을 바짝 붙여온 김수현이 자신을 정면에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 가슴을 추스르기도 전.
“또, 구덩이 들어가고 싶어?”
김수현의 목소리가 속닥거리듯이 안현의 귓전을 울렸다.
그 순간이었다.
“허억!”
눈을 번쩍 뜬 안현이 격한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천막의 천장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눈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꿈이구나.”
안현이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꿈이기는 했다. 그러나 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했거니와, 재판이 종료됐을 때부터 이어진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기에 안현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꼭 자신이 품고 있던 내면의 불안이 그대로 형상화된 것 같았으니까.
사실 재판 자체는 이미 2주 전에 끝난 일이기는 했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은 아직도 안현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 상태였다.
그 궁수 여인은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다.
재판은 종료됐다.
그래. 그것으로 모두 끝난 거다.
간신히 생각을 정리한 안현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상태서 한참 동안 뒤척이다가, 결국에는 복잡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천막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자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안현이 흘린 식은땀을 식혀주었다. 이제 해가 뜨기 시작했는지 아직은 어스름한 새벽이었지만, 이제 곧 아침이 찾아올 것이다.
한동안 새벽 바람을 맞으며 아직 한창 건설 중인 요새를 돌아보니, 안현은 어느 순간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진걸 느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경계를 제외하면 돌아다니는 사용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안현은 적당한 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가지고 나온 창을 높이 들어올리고 자세를 잡았다. 아직 남아 있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려는 일환으로 수련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창을 움직이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안현이 무아지경에 빠져 수련하는 동안,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서서히 올라온 아침 해는 이제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는 요새에 따뜻한 햇살을 늘어트렸고, 그러는 사이 한 명 두 명 일어난 이들이 천막 밖으로 나와 활동을 시작했다.
사용자는 식사를 준비하거나 안현과 같은 아침 수련을 했으며, 거주민은 삼삼오오 모여 오늘은 어떻게 요새를 건축할지 의논했다.
그렇게 고소한 냄새가 요새 전체를 물들일 무렵.
“하아, 하아!”
수련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쉬지 않던 안현이 비로소 창을 거두고 동작을 멈췄다. 마침내 아침 수련이 끝난 것이다.
숨을 거칠게도 헐떡였지만, 한결 개운해 보이는 얼굴을 한 안현은 적당한 그늘로 걸어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실컷 흘린 땀도 닦을 겸 손을 들어 이마를 닦으려는 찰나였다.
“수련, 잘 봤어요. 비약적으로 성장하셨네요.”
얌전한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안현은 목 언저리에 차가운 감촉이 닿는걸 느껴야만 했다. 한순간 펄쩍 뛴 안현이었지만, 이내 뒤를 돌아본 순간 “어.” 자신도 모르게 얼떨떨한 탄성을 뱉고 말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환한 미소를 보이는 차소림이 살짝 무릎을 굽힌 채 물방울이 잔뜩 맺힌 물병을 내밀고 있었다.
“소, 소림이 누나?”
“마셔요. 목마를 텐데.”
안현은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차분히 물병을 받아 들었다. 안에 얼음이 차 있었는지, 손에서 느껴지는 냉한 감촉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침 굉장히 목이 말랐던 터라 안현은 허겁지겁 물을 마셨고, 차소림은 차분히 바닥을 고른 후 조신하게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단번에 병을 반 이상 비운 안현이 캬, 탄성을 지르며 이제야 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 좋구나.”
“수련을 마친 후에는 기분이 정말 상쾌하죠.”
“맞아요, 맞아요. …그런데, 소림 누나는 언제부터 보고 계셨던 거예요?”
“중간 때부터요. 저도 수련이나 할까 하고 조금 일찍 나왔는데, 동생의 수련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지요.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창과 하나가 되었나요?”
창과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신창합일을 이뤘냐는 말을 완곡히 돌려 표현한 것으로써, 창병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이었다.
어차피 차소림에게 지도를 받은 적도 많거니와, 같은 클랜원인 만큼 안현은 주저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차소림이 기특하다는 듯한 기색을 비췄다.
“그렇군요. 왠지 요즘 들어 굉장히 수련 빈도가 잦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처음 그 능력을 익히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자꾸 창을 잡고 움직이고 싶을 거예요. 물론, 좋은 현상이죠. 축하해요.”
“에이, 뭘요.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 움직인 것 뿐이에요. 헤헤….”
안현이 헤프게 웃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젓는다. 차소림은 모은 무릎에 고개를 살짝 기대며 입을 열었다.
“머리가 복잡하다…. 설마 2주 전의, 그 일 때문인가요?”
안현의 웃음이 멈췄다.
“에…. 뭐….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그래도 딱히 상관은 없어요. 이미 지나간 일인데요. 끝난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약간 곤란해하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다.
차소림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동생은 후회하고 있는 건가요? 그때의 결정을?”
“음? 아니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처벌에 수긍했다면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겠죠?”
후회하냐는 물음에 안현은 딱 잘라 회답했다. 차소림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사실…. 그때 고민을 많이 하기는 했어요. 그냥 돌아가는 상황에 맞게 머리 한 번만 끄덕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렇죠. 또한 그게 사리에 맞는 일이기도 했고요. 아,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바로 그게 싫었어요.”
“…네?”
이번에는 차소림이 반문했다.
그리고 안현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차소림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왜냐하면, 저는 변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 작품 후기 ============================
안현의 진실된 속마음!
절치부심 공찬호!
엉큼한 뇌신!
새침데기 김수현!
이 모든 게 다음 회에…!(퍽퍽!)
어흠, 어흐흠.
어제 코멘트가 폭발을 했네요.(우선 어제 안현 때문에 화가 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셨다는 분께는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꾸벅!) 그럼 잠시 아줌마에 빙의 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안현은 제 아들로요.
로유진 : 아니! 우리 현이가 좀 안 죽인다고 할 수도 있지!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요?
Reader : 죽어라!
Reader : 매우 쳐라!
로유진 : GG.
는 농담이고요.
사실 이희원의 경우에는 처형이 맞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하고 도망쳤으니까요. 홀 플레인에서는 굉장히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문제죠.
하지만 그럼에도, 거의 모두가 Yes를 원하는 상황에서도 안현 홀로 No를 외친 이유는, 안현도 스스로 간직하고, 지키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최후의 마지노선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회 초반 부분에’만’ 언급될 예정입니다.
북부 원정대는 다음 회에 바로 도착합니다. 제대로 된 페이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파트당 2회씩 톡톡 끊어서 빠르게 나갈 생각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