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05
00604 되돌아온 천하무쌍(天下無雙), 그리고 뇌신(雷神). =========================================================================
변하는 게 싫다?
차소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동생. 변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홀 플레인에서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죠.”
사용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야 하는 통과 의례. 차소림은 그 점을 꼬집어 말한 것이었으나, 안현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렇죠. 사용자라면 응당 그래야겠죠. 하지만 누나. 있잖아요, 저는 이 세상이 정말로 싫어요.”
“네?”
“말 그대로 에요. 저는 지금껏 활동하면서 단 한순간도 지구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억지로 끌려와야 한 제가, 왜 이 세상에 100% 맞추고 적응해야 하는 거죠?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어쩔 때는 웃으면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어리군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힐난하는 어조로 말한 차소림이 살짝 눈을 흘겼다. 기실 소환된 이상 누구나 동등한 입장이거니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즉 방금 안현의 말은 어리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알고는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정도는…. 하지만.”
안현이 조금은 풀이 꺾인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슴이 갑갑한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차가운 한숨을 흘린다.
“후. 누나. 혹시 그거 알아요?”
“그거?”
“우리 형이 처음 클랜을 창설할 때요. 이 머셔너리라는 클랜의 궁극적인 목적을 언급하셨거든요.”
“클랜 로드님이…? 궁극적인 목적…?”
차소림이 의아한 낯으로 되물었다.
“별거는 없어요.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 그 한 마디만 하셨죠.”
“집으로 돌아간다고요?”
“예. 집이요.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벗어나,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으응.”
그때를 회상하는지 차분히 눈을 감은 안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차소림은 침묵을 지켰다. 사실상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바람은 사용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봄직한 생각이었다. 차소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생은…. 정말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럼요. 지금은 무릴지라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천사도 이 세상의 끝을 보면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으니까요. 그러니 언젠가는 분명히 그 방법도 밝혀지지 않을까요?”
“글쎄요….”
“저는 그날이 오게 되면…. 아니, 그렇게 돌아가는 날이 오기까지 최소한의 마지노선은 지키고 싶어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수 있는, 돌아간 후 그냥 홀 플레인에 있을걸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지금의 안현이요.”
장황한 말을 마친 안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얼굴로 차소림을 돌아보았다.
차소림은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다가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리석네요.”
그리고 사뿐히 몸을 일으키고는 시선을 낮추어 안현을 응시했다.
“하지만 순수해요. 동생은 꼭 회색 인간을 보는 것 같아요.”
“회색 인간이요?”
“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적당히 타협은 했지만, 흰색이나 검은색이 되기를 거부하는. 그런 회색 인간이요.”
“…….”
“개인적으로 동생의 생각은 존중할게요. 하지만 그 생각이 그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 또한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예. 그래서 힘을 키우려는 겁니다. 이번에도 제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안현이 얼른 말을 꺼냈다. 하지만 차소림은 좌우로 느릿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말하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에요. 선택의 비 일관성…. 즉 선택이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소리죠. …이해 못하시겠으면,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조곤조곤 말을 잇던 차소림은 도중에 안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추가로 말을 덧붙였다. 안현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이번 작전 중에 사용자 신재룡이 사망했다면….”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차소림이 곧 재차 말을 이었다.
“아니면 비슷한 상황에서 사용자 안솔이 사망했다면. 그때도 동생은 똑같은 선택을 내리실 건가요?”
의미심장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안현은, 차소림의 말을 들은 순간 할 말을 잃은 듯한 기색을 보였다.
차소림이 정확히 정곡을 찌른 것이다.
안현이 가진 신념의 맹점을.
그렇게 서로간에 잠시간의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였다.
– 남부 원정대 전체에 알립니다.
갑자기 증폭된 음성이 요새 전체를 고요하게 울렸다.
– 10분 전 북부 원정대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제 곧 도착할 예정이오니….
문득 들려오는 알림에, 안현과 차소림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
마침내 북부 원정대가 도착했다.
점심 즈음 도착한 북부 원정대 사용자들은, 요새에 도착하자 절도 있는 행동을 보이며 마련된 천막으로 들어가 여독을 풀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군기가 잘 잡혀 보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새로운 원정대가 도착하게 되면, 우선 해당 원정대의 지휘관들을 초청해 그간의 자료를 넘겨주고 과정을 설명하는 게 정석이다. 설령 앞서 모든 자료를 보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즉 공식적인 인수인계의 절차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한 자리에서 얼굴을 맞대야만 한다.
그러나.
한소영의 요청으로 인수인계 자리에 참석하고, 이후 한 명 한 명 들어오는 북부 원정대 지휘관들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나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공찬호를 따라 들어온 또 한 명의 사내를 확인한 순간, 내 눈을 의심하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탁자 건너편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내 형이었으니까.
김유현.
해밀 로드.
서부 도시 헤일로를 통치하며, 이번에 편성된 제 4전력 원정대를 이끄는 총 사령관.
그런데 공찬호와 같이 왔다는 건….
이건 나도 예상치 못했고, 또한 모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모르고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사실상 서부 원정대는 공식 공략 원정대가 아닌 지원 격으로 편성된 원정대였고, 그렇게 생각하면(물론 백 번 양보해서.) 이런 상황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껏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아니 북부 원정대만 온다고 하다가 느닷없이 서부 원정대가 같이 왔다?
아무리 각 원정대가 서로 독립된 성격을 갖고 있다고는 해도, 이건 남부 원정대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일이잖은가. 통신용 수정구가 뻘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이유를 들어도 될까요? 서로 다른 원정대를 이끌고 계신 두 분이, 왜 북부 원정대라는 이름 하에 같이 계신 건지요.”
그때 한소영의 목소리가 귓전을 자그맣게 울렸다. 나는 바로 잡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래, 우선은 들어보자. 들어보면 알겠지.
“…….”
그러나 회답이 나오지 않는다. 총 사령관인 한소영이 물었다면, 응당 같은 총 사령관인 공찬호가 회답해야 정상이다.
그러할진대 공찬호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나만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바로 정면에서.
잠깐 시선을 돌려 눈을 마주하자 씩 이를 드러내며 웃기까지 한다.
“흐, 드디어 나를 봐주는군. 머셔너리 로드.”
그렇게 생각할 무렵, 비로소 공찬호가 입을 열었다. 꽤나 거친, 흡사 쇳소리가 연상될 정도의 목소리였다.
“흐흐. 아주 오랜만이야…. 나는 무척 반갑거든. 그런데, 머셔너리 로드는 심기가 꽤나 불편해 보여.”
“…….”
“설마 해밀 로드 때문인가? 네가 사랑하는 형이 나와 같이 있어서? 흐흐흐…!”
“…뭐?”
나는 순간 어이없는 기분에 반문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눈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한소영이 물었음에도 무시하고 내게 말을 걸었다는 건, 상당히 커다란 실례였다. 다행히 표정 관리가 뛰어난 한소영은 겉으로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이미 같이 들어온 남부 원정대 지휘관 중 몇 명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나 또한 그랬고.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좀 덜 맞았나 보군. 아직도 헛소리를 찍찍 뱉는걸 보니까 말이야.”
그러자 돌연히, 꼭 짐승이 우는 것만 같던 낮은 웃음 소리가 뚝 그쳤다.
“하기야, 네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야. 이래봬도 나는 상당히 상대방의 외관을 따지거든.”
하지만 여기서 그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화정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갑자기 공찬호 특유의 수라마창의 기운이 서서히 강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뭐?”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너는 내 취향이 아니올시다, 라는 뜻이야.”
“흐?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어라, 기억 안 나는 거야? 나는 확실히 기억하는데. 예전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나한테 걷어차이고 나서, 가지마, 김수현 제발 가지마! 애절하게 나를 원하던, 네 구걸 어린 애원이….”
그때, 갑작스럽게 보이지 않는 불길한 기운이 나를 향해 짓쳐 들어왔다. 딱히 확인하지 않아도 수라마창의 기운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속으로 코웃음이 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기세 싸움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화륵, 화르륵!
어차피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던 터라, 나는 곧바로 화정의 기운을 끌어 올려 맞대응 했다. 물론 공찬호 개인에게 집중해서.
“큭!”
쿠당탕탕!
그 결과, 공찬호가 격한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머셔너리 로드!”
“수현아!”
한소영과 형이, 거의 동시에 나를 불렀다.
“머,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은 흡사 팔짱을 끼듯 내 팔을 살며시 감싸 안으며 간곡해 보이는 눈초리를 보내왔다. 괜찮으니까, 이러지 말라는 의미. 하지만 아까 얼굴을 굳혔던 남부 원정대 지휘관들은 나를 보며 속 시원하다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형은 얼굴을 살짝 붉힌 채, 무언가 굉장히 곤란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아니, 형은 또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방금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말라고. 오해하잖아.
“크흐…. 짜릿한데?”
그때였다.
“여전하군…. 역시 대단해. 그래, 바로 이거지. 아주 좋아…!”
주변 사용자들이 놀란 가운데,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공찬호가 컬컬 웃어 젖혔다. 정말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태도였다.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예전처럼 한 방 먹었다고 산불 난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게 아니라, 웃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될걸 알면서도 덤볐다는 소린가? 왜?
“사용자 공찬호. 지금 굉장히 무례해 보이니, 진정하시길.”
잠시 후, 형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도로 앉는 공찬호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공찬호가 흘긋 형을 흘겨본다.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건가?”
“그렇다면?”
공찬호가 위협하는 어조로 으르렁거렸으나, 형 또한 지지 않았다. 삽시간에 낯을 굳히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그래, 저 모습이야. 나 볼 때도 저렇게 좀 봤으면 좋겠고만.
그렇게 한동안 기 싸움이 이어졌지만, 결국 먼저 물러난 건 공찬호였다. 문득 픽 입꼬리를 올리더니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들먹인 것이다. 그리고 도로 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또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병신인가?
이윽고 잠깐 한숨을 내쉰 형이 입을 열었다.
“우선 앞서 일어난 소동은 제가 대신해서 사과 드리겠습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괜찮아요. 저희 쪽도 아주 살짝 과잉 대응했다는 건 인정하니까요. 하지만, 사과는 하지 않겠어요.”
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한소영이 고개를 까닥이며 회답했다. 이대로 넘어가겠다는 소리였다. …마치 얼음과 얼음이 맞부딪치는 것 같은데.
아무튼, 이제야 뭔가 좀 이야기가 나오는 건가?
“예, 당연하죠. 그럼 사용자 공찬호를 대신해 제가 대신 말씀을 드려도 괜찮으실는지요?”
“…저야 상관은 없는데. 오히려 그쪽 분들이야말로 괜찮나요?”
한소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공찬호로 고개를 돌렸다. 왜냐하면 총 사령관이 공찬호였으니까.
“…….”
그러나 공찬호는 계속해서, 아직도 나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
참…. 겉으로 표현은 못하겠지만, 정말 미친 듯이 부담스럽다. 갑자기 왜 저러는지도 모르겠고.
결국 아예 신경을 끊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다시금 형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괜찮습니다. 애당초 이런 부분, 아니 실제 공략에 관한 모든 권한은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네?”
이윽고 한소영의 반문한 찰나.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리면…. 우리 서부와 북부는, 이번 제 3공략에 들어가기 앞서….”
형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강철 산맥 공략 한정, 서북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습니다.”
…뭐라고?
============================ 작품 후기 ============================
다음 회부터 본격적인 제 3지역 공략에 들어갑니다. 사실상 ‘강철 산맥’ 내에서는 마지막 지역 공략으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조금 신기한 게 있다면, 이런 상황을 예견한 독자 분이 한 분 계셨다는 겁니다. 제가 ‘동서남부는 독립된 원정대를 운영한다.’는 연막을 쳐놨음에도, ‘상황상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무엇보다 ‘전쟁 후, 각 북 대륙 내 상황’과 ‘분열’에 초점을 맞추셨을 때는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마치 제 머릿속을 열어보신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요? 하하하. 잘 생각해보시면 지금 상당히 얌체 짓을 하고 있는 원정대가 하나 있다는 걸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
독자 분들이 궁금해하시는 것들은 알고 있습니다. 다음 회에 차근차근 풀어드릴 예정이니,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