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13
00612 아스타로트, 직접 움직이다. =========================================================================
– 끼루루루루루루룩!
갑자기 찢어지는 포효가 강철 산맥 일대를 떠르르 울렸다. 이번에는 고막마저 진동시킬 정도라 사용자들도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어, 어?”
“하, 하늘! 하늘이다!”
여인이 어떻게 된 거냐는 듯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치며 하늘을 가리켰다. 가까이 있던 사용자들을 반사적으로 머리를 젖히고 시선을 올렸다.
펄럭, 펄럭!
그리고 들려오는 엄청난 날갯짓 소리.
그것은…. 도대체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괴조(怪鳥).
그래. 괴조였다. 흡사 비룡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새가 막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4미터는 가볍게 넘어 보이는 길이와 거대한 덩치, 그리고 좌우에서 펄럭이는 거대한 날개까지.
– 끼르르륵!
괴조는 척 봐도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였다. 살기 어린 눈으로 아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주둥이를 쩍 벌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다. 그리고는 삽시간에 자세를 바꿔 지면으로 하강을 시도한다.
다시 한 번, 절규처럼 들려오는 괴성이 허공을 왕왕 울렸다.
그 괴성에,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던 김유현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전원…. 전투 준비!”
지시를 받은 사용자들은 사방으로 달려나가며 동료들을 깨우고 상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계속해서 괴성과 진동이 들려오는 가운데, 북부 원정대의 사용자들이 재빠르게 진형을 갖췄다. 애초 소리를 듣고 있었거니와, 원정 첫날이라 긴장을 놓지 않고 있어 신속하게 모일 수 있었다.
– 발생 장소를 향해 최대한 은밀하게 접근하며, 에워싸도록 하겠습니다.
증폭된 음성이 사용들의 귓전을 울렸다. 방향은 서쪽. 하지만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쪼롱아. 부탁한다.”
– 쪼로로롱, 쪼로로롱!
김유현이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어깨에 앉아있던 새가 아름다운 황금빛을 흘리며 하늘 높이 날았다.
이윽고 사용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시작으로, 돌연 김유현의 눈동자가 황금빛을 발했다.
‘동화’라는 능력이 있다.
사용자나 때에 따라서 여러 의미로 쓰이기는 하지만, 김유현 같은 경우에는 ‘감각 공유’라는 능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내 하늘 높이 날아오른 쪼롱이가 아래를 쳐다보자, 김유현의 시야에도 강철 산맥 일대가 한 눈에 잡힐 듯이 보이기 시작했다.
쿵!
별안간 흙먼지가 풀썩 일어나는 장소로 김유현의 시선이 집중된다. 안력을 돋우면 돋울수록 더욱 자세한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는 아까 본 괴조와 한 인간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니, 인간이 아니었다.
아까 본 괴조와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는, 오히려 더욱 커다란 덩치를 지닌 일종의 거대한 인간형 괴수라고 볼 수 있을까?
– 캬아아악!
치열한 전투이기는 했지만, 우선 보이는 상황은 괴조에게 유리해 보였다. 몸 곳곳에 심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괴수와는 달리, 괴조의 상태는 양호해 보였으니까.
그러나 속단할 수는 없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괴조가 오직 위협하는 모습만 보이며 방어적으로 나오는 것에 반해, 괴수는 완전히 공격적인 모습만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 크아아아아앙!
괴수가 범상치 않은 포효를 지르며 괴조를 향해 짓쳐 들었다. 갑작스럽게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삽시간에 괴조의 목을 잡아챈다. 거대한 덩치를 무색하게 만드는 비호와 같은 몸놀림!
그러나 괴조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목이 잡힌 순간, 곧바로 주둥이로 깨물며 앞발로 괴수의 노출된 상체를 세차게 훑어버렸다. 가슴을 깊숙이 파고 틀어박힌 발톱은, 그대로 살을 찢으며 기다란 두 줄기 상처 자국을 남겼다. 괴수가 고통에 젖은 비명을 지른다.
부웅!
이윽고 아무렇게나 휘두른, 그러나 분노를 담은 괴수의 주먹이.
퍼억!
괴조의 복부를 정통으로 후려갈긴다.
뜻하지 않은 일격. 막 괴수의 목을 씹으려던 괴조의 주둥이가 끼루룩, 울음을 토하며 하늘로 젖혀졌다.
한 방.
고작 한 방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한 방을 허용한 괴조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내부의 무언가가 터졌는지 주둥이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안면에는 괴로워하는 기색이 가득하다.
괴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온몸을 힘껏 웅크렸다가 폭발하듯이 뛰쳐나갔다. 그리고 흔들리는 괴조를 그대로 밀쳐 쓰러트리고는 거칠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쿠당탕탕, 쿠당탕!
단 한 방에 기세가 괴수에게 기울었다.
괴수는 재빠르게 자세를 추슬렀다. 그리고 괴조의 배를 깔고 올라타더니 붉은빛을 번들거리는 눈으로 괴로워하는 괴조를 내려다본다.
잠시 후, 괴수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허연 이가 드러났다.
무시무시하다. 온몸에 피를 비오 듯 흘리며 웃는 인간형 괴수의 모습은, 흡사 고대의 야만 전사를 떠올릴 정도로 끔찍한 형상이었다.
괴조는 어떻게든 반항하려는 듯 목을 길게 빼고 반항했으나, 괴수의 주먹이 가슴 깊숙이 틀어박히자 별 도리가 없었다.
쿵! 쿵! 쿵! 쿵!
연거푸 주먹이 틀어박힐 때마다 가슴이 박살 나며 피가 비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괴수는 괴조의 앞다리를 하나씩 부여잡고는 통째로 잡아 뜯어버리기까지 했다. 뿌지직! 살이 강제로 뜯겨짐에 따라 허연 뼈가 드러나고 붉은 액체가 흘러 적신다. 미친 듯이 몸부림치던 괴조의 반항이 서서히 약해졌다.
그러더니 축 늘어진 괴조의 목을 단단히 부여잡고서 그대로 세게 내팽개쳤다.
꽝!
그렇게 하릴없이 허공을 날아간 괴조는 나무에 부딪치고 나서야 지면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모습은 보이지 못했다. 간신히 눈을 뜨기는 했지만, 전신에서 심상치 않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괴조의 시선은 터벅터벅 걸어오는 괴수를 향하지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걱정하는 눈길로 지면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 크아아악…!
그러나 괴수가 다가와 승리를 알리는 듯한 나직한 포효를 터뜨린 순간, 괴조의 눈이 흐릿하게 풀렸다. 툭, 고개가 떨구어졌다.
비로소 두 괴물의 전투가 종결을 알린 것이다.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남은 건, 느닷없이 찾아온 고요한 정적과 진득한 피 내음, 그리고 승자의 나직한 울부짖음뿐.
– 끼요오….
그러나 그때,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울음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포효가 그쳤다. 바로 입을 다문 괴수는 소리가 흘러나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끼융…. 끼유웅….
그곳에는, 놀랍게도 또 하나의 괴조가 있었다. 전신이 박살 난 또 하나의 괴물 시체 옆에서 구슬프게 울어 젖히고 있다. 크기는 괴수의 손바닥 정도 되는 걸로 보아, 아기 괴조임이 분명하다.
그럼 이게 어찌된 일일까? 왜 아기 괴조가 다른 괴물의 시체 옆에서 울고 있는 것일까?
물론 전후 사정은 오직 한 놈만이 알고 있겠지마는, 어느새 다가온 괴수는 아기 괴조를 살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여전히 눈동자는 붉은빛을 번뜩이고 있었고, 빽빽 울기만 하는 아기 괴조를 무심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내려다본다.
이윽고 그대로 짓밟으려는 듯, 상처 입은 괴수가 비틀거리면서도 서서히 발을 들어올린 순간이었다.
– 크륵?!
돌연 거대한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괴수의 머리가 사방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선이 한곳에 고정돼 빤히 응시하기 시작한다.
“……!”
김유현은 소스라치게 놀라고야 말았다. 괴수의 눈이 자신이 있는 방향을 정확히 바라봄을 인지한 탓이다.
북부 원정대는 이미 방금 전투가 일어난 장소를 빽빽이 둘러싼 상태였다. 사용자들이 도착했을 때는 거의 전투가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넋을 잃고 괴조와 괴수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사실 영역 다툼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괴물간의 싸움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 보는 괴물들의 피 튀기는 혈투는 사용자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바로 두려움으로.
괴조를 잔인하게 박살낸 전투나 4미터를 넘기는 거대한 덩치의 위용, 그리고 온몸에서 핏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야만성 짙은 모습은, 사용자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형상이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괴수는 자신이 에워싸였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저 씩씩 숨을 몰아 내쉴 뿐, 가만히 서 있기만 했으니까. 사용자들은 모두 무기를 장전한 채 총 사령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현은 입을 질끈 깨물었다. 얼른 공격 지시를 내려야 한다는, 저 괴수가 체력을 회복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다. 그냥 말 한 마디만 하거나 손만 한 번 저으면 해결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알듯 말듯한 묘한 감이 정수리를 간질인다. 김수현이 건네준 정보와 지금도 자신을 쳐다보는 저 괴수의 붉디붉은 눈동자가 어우러져, 무언가 잡힐 듯 말듯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젠장.’
결국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김유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신호를 인지한 사용자들이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김유현이 지체 않고 손을 내리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 크륵…!
순간, 괴수의 입에서 진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와 동시에 눈동자를 물들이던 시뻘건 빛이 삽시간에 옅어졌다.
한순간 정상으로 되돌아온 눈이 여느 인간과 같은 흰자위에 검은 눈동자를 보인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작스럽게, 거대한 괴수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진다.
쿠웅!
지면과 부딪친 몸은 육중한 소리를 내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김유현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
때는 약 2달 전.
북 대륙에서 강철 산맥을 향한 화계 공략 계획이 시행되고 있을 무렵.
한 곳에 모여 앉아있는 악마들의 낯은 그리 좋은 빛을 띠고 있지는 못했다.
아니.
– 화륵, 화르륵!
– 와아아아…! 와아아아…!
오히려 영상에서 보이는 불길이 타오를수록, 흘러나오는 함성이 커질수록 더욱 안 좋아져만 갔다. 어느 악마는 눈을 감은 채 깊은 시름에 잠겨 있고, 또 어느 악마는 얼굴을 대놓고 와짝 찌푸리고 있다.
천사들의 본거지를 천계라고 부른다면, 악마들의 본거지는 대계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그 대계에서 홀 플레인에서 활동하는 악마들의 패배를 예언했다.
물론 아직 변화가 가능한 1차 예언에 불과하나, 지금껏 대계의 예언이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음을 감안하면 확실히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상황이 좋지 않음은 악마들도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이제 막 체감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탄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설마 북 대륙이 저런 계획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에 따라 애써 준비한 안배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들이 강철 산맥을 공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그러면?
강철 산맥이 공략돼버리면 아틀란타로의 길이 뚫리고, 아틀란타 다음에는 바로 테라가 나온다. 그리고 그 테라에는 악마나 그렇게나 염원하는 제로 코드가 잠들어 있다.
아무튼 상황을 정리해보면, 악마들은 정말 눈만 뜬 채 아무것도 못하고 제로 코드를 빼앗길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탄을 탓할 생각은 못했다. 비록 사탄의 안배가 수포로 돌아갔다고는 하나, 다른 악마들도 딱히 할 말이 있는 입장은 아니었으니까.
침묵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북 대륙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 이제라도 다른 대륙으로 눈을 돌려봄은 어떻습니까?”
루시퍼의 의견이나.
“그러지 말고. 차라리 우리 쪽으로 꼬셔보는 건 어때? 그 있잖아. 저번에 마몬을 살해한 인간.”
리리스의 의견이나.
“그냥. 파괴. 죽여.”
바알의 의견 등등.
이렇게 간간이 의견이 나오고는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다른 악마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물론 아주 나쁜 계획은 아니었으나, 작금의 상황은 빠른 진행을 필요로 한다.
헌데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준비 과정이 필요한 계획들만 나오니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저 처음 유리하다고 해서 여유를 부린 것을 후회할 뿐.
“후.”
문득 사탄이 짧은 한숨을 흘리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도저히 답이 안 보인다는 무언의 제스처.
그걸 본 다른 악마들은 새삼 발등에 불이 떨어진걸 느꼈다. 저런 사탄의 모습은 정말로, 정말로 드물게 보이는 모습이기에.
그때였다.
“이이제이.”
지금껏 가만히 앉아있던 아스타로트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그것도 뜻 모를 말을.
“이이제이.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인간들이 자주 쓰는 말입니다만.”
“맞아. 비슷한 말로는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는 말이 있지.”
루시퍼가 아는 체하며 말을 받자 아스타로트는 그렇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 쉽게 생각해보자고.”
“…….”
“우선 상황 정리부터 해보면…. 북 대륙 인간 놈들이 강철 산맥을 공략한다. 하지만 우리는 최대한 그 시간을 지연시켰으면 좋겠다. 지금 대충 이런 상황이 아닌가?”
“…….”
악마들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두 말하면 잔소리였다.
“좋아. 그러면….”
모두의 반응을 확인한 아스타로트는 곧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단순히 그 역할을 해낼 녀석이 필요하다면…. 뭐, 꼭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그러자 바알의 얼굴이 멍하니 변하며 품고 있던 곰 인형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비단 바알만 그런 건 아니었으나, 앳된 소녀의 모습을 한 바알이 그러니 볼을 살포시 꼬집고 싶을 정도의 귀여움이 물씬 묻어났다.
아무튼,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다? 대 악마나, 악마 14군주나, 피조물인 마족들이 나설 필요가 없다?
“그럼. 누가?”
바알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악마들의 시선이 아스타로트에게 쏠렸다.
그리고.
“그게 누구냐면….”
검지 하나를 핀 아스타로트는.
“이 아래 있는 놈들.”
아래, 즉 땅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옥이었다.
============================ 작품 후기 ============================
원래 악마들에 관한 내용은 지금 나오면 안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조금 더 일찍 나왔어야 했죠. 아마 구덩이 공략이 끝났을 때가 적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제 실수로 그때 넣지 못했고, 지금 넣어버렸네요. 사실 제 3공략과는 아주 영향이 없는 건 아니나, 내용 전체를 아우를 정도의 커다란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도 더 늦기보다는 지금 넣는 게 좋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아마 다음 회 초반 부분에 상세한 설명이 이어지고, 이후 제 3공략이 끝날 때까지는 다시 악마들이 등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