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14
00613 우리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
아스타로트가 땅을 가리켰다.
잠시간에 불과했지만 악마들은 멍멍해 보이는 기색을 비쳤다. 그러나 곧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하나같이 얼굴을 구겼다. 마치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분노의 악마, 미쳤습니까? 저번에 그렇게나 당해놓고도….”
루시퍼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듣는 이의 입장에서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아스타로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진짜….”
“그만. 다들 조용히 하지.”
그때였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사탄이 재빠르게 나서 소란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아직도 재생되는 영상을 꺼트린 후, 지그시 아스타로트를 응시했다.
“우선…. 얘기라도 들어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사탄은 알고 있다. 아스타로트가 어떤 악마인지를.
자존심이 강하고 성질이 급하기는 하나, 그래도 아스타로트는 7대 악마의 1좌를 차지한 대 악마였다. 그런 만큼 ‘분노의 악마’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무의미한 행동을 보인 적이 없다.
물론 저번에 처참하게 실패한 ‘홀 플레인 내 지옥 정벌’ 계획처럼 최악의 결과를 맞이한 사태도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예상외의 일.
아스타로트는 한때 다른 차원의 지옥을 호령하는 제후였고, 불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막강한 흑염(黑炎)을 소유한 악마다. 그런 악마가 불이 천지인 지옥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아무튼.
“말해봐라. 아스타로트.”
양손을 깍지 낀 사탄이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잡자, 다른 악마들도 덩달아 태도를 고쳤다. 다른 악마도 아닌, 무려 사탄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아스타로트도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흐흠. 그럼 시작해볼까.”
이윽고 한두 번 헛기침을 한 아스타로트가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는 있을 거야. 이 홀 플레인의 지옥을 다스리는, 지옥 대공이라는 자식을.”
들어는 봤다. 그러나 자세히는 모른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죽고 아스타로트는 꽁지 빠지게 도망쳐왔으니, 그냥 매우 강하다는 것 정도?
“저번 정복 계획으로 들어가본 결과, 이 홀 플레인의 지옥에 관한 구조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지.”
아스타로트의 설명이 이어졌다.
“간단히 말해보면 총 8개의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거든? 쫄따구들이 돌아다니는 등활(等活) 지옥부터 시작해서 흑승(黑繩), 중합(衆合), 규환(叫喚), 대규환(大叫喚), 초열(焦熱), 대초열(大焦熱)…. 그리고 무간(無間) 지옥까지.”
“아스타로트, 잠시만. 저번에는 어디까지 들어갔었지?”
“초열 지옥.”
“초열…. 6구간까지인가. 그럼 자기 마음대로 구간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말이로군.”
사탄의 물음에 아스타로트가 머리를 끄덕였다. 확신은 못하지만 정황상 그럴 것이라 추측한 것이다.
“우선 내 계획의 첫 번째는, 제 1구간인 등활 지옥을 점령하는 것부터 시작….”
“설명, 짜증. 결론, 빨리.”
그렇게 차분히 말을 이어가던 와중, 바알이 아스타로트를 무심히 흘기며 볼을 부풀렸다. 그러자 혀를 찬 아스타로트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루시퍼라면 몰라도 ‘잔혹한 파괴자’이자 ‘동쪽의 왕’이라 불리는 바알은, 사탄 다음으로 쳐주는 2인자나 다름없는 악마였다.
“좋아.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하마. 내 말은 무간 구간에 있는 지옥 대공을 어떻게든 등활 구간까지 끌어내서, 지옥에서 없애버리자는 거야.”
비로소 계획의 요지가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열심히 듣고 있던 악마들은 각양각색의 기색을 비쳤다.
“지옥에서, 지옥 대공을 없애자고…? 그럼 아예 죽이자는 소리야?”
리리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하자 아스타로트는 대놓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또 무슨 헛소리야? 그 자식을 어떻게 죽여?”
“아니 네가…!”
“지금 한창 구간 얘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받아들이냐.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지옥 대공은 못 죽여. 특히 그 자식 홈 그라운드에서는 더더욱.”
“뭐, 뭐?”
“아니 아니, 취소. 못 죽일 정도는 아니지…. 음~. 아마 나랑 사탄, 루시퍼, 바알이 한꺼번에 붙으면 어느 정도 해볼 만은 할 거야. 지옥은 중간계와는 달리 힘의 제한을 받지 않으니까.”
“…….”
아스타로트가 한껏 무시하는 어조로 말했으나 리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화낼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4명의 대 악마가 달려들어야 해볼 만하다? 그것도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서?
아스타로트가 평가한 지옥 대공은, 그 정도로 악마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해주었다. ‘설마….’라고 말하기에는, 악마들 또한 어지간해서는 굽히지 않는 아스타로트의 자존심을 알고 있다.
“조용히.”
그때 이번에도 낮은 목소리가 주변을 가라앉혔다. 사탄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지금 중요한 건 계획의 성사 여부. 사탄은 그 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없앤다는 뜻은, 하나의 계(界) 차원에서의 의미인가?”
“맞아.”
“그럼 아까 말한 등활 지옥을 점령한다는 말은, 바로 그 준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군.”
“바로 그거야! 역시, 너라면 알아줄 줄 알았지.”
짝짝, 아스타로트가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걸까? 사탄은 상당히 탐탁잖은 얼굴을 보였다.
“으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리고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다.
“물론 현 상황에서 어느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야겠지. …하지만 그걸 참작하고서라도, 네 계획에는 커다란 허점이 있다. 아스타로트.”
지옥으로의 진출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차원을 뚫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같은 세상 내, 그리고 예전에도 한 번 뚫은 전력이 있는 만큼, 우선 여기까지는 가능한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였다.
“과연 지옥 대공이…. 네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까?”
대 악마 4명이 붙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지옥 대공. 그 정도의 존재가, 다른 차원도 아닌 관할 차원 내에서 벌이는 일을 눈치 못 챌 것 같으냐는 의미였다.
“무간에서 등활 까지는 총 7구간을 거쳐야 하지. 그런데 그 지옥 대공이, 우리가 준비한 지역까지 순순히 오리라는 보장이 있느냐는 말이다.”
“흐흐흐. 그렇지.”
그 순간 사탄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계획의 맹점을 짚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스타로트의 눈동자는 여전히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사탄은 조금 더 들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스타로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봐. 놈은 우리를 먹이로 생각하고 있거든?”
“그건 네 생각….”
“아니 아니. 이건 내가 예전에 지옥 정벌 때 알아낸 사실인데 말이야…. 지옥 대공은, 불이라는 것에 상당한 집착증을 가지고 있다고. 즉 탐욕이라고나 할까?”
“불에?”
“그래. 너희 메피스토펠레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나?”
“…….”
당연히 모른다.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지옥 대공과 직접 대면하고, 부하의 최후를 목격한 악마가 있다.
“먹혔다.”
“…먹혔다고?”
“그래. 지옥 대공은, 말 그대로 메피스토펠레스를 잡아먹었어. 단지, 자신과 같은 불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메피스토펠레스를 잡아먹고 나서, 그 자식이 이렇게 말했거든. …흐응. 제법 기대했건만, 썩 괜찮은 불은 아니로구나.”
“…….”
“또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하더군. 너는, 내 기대에 부응해줄 수 있겠느냐? …그리고서 정말 죽어라 쫓아오더라고.”
“…하.”
누군가 탄식을 터뜨렸다. 딱히 슬픈 건 아니었으나, 같은 존재가 한낱 먹이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썩 기분 좋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정적이 흘렀다.
잠시 말을 멈춘 아스타로트가 주섬주섬 연초 하나를 꺼내는 동안, 사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니까…. 네 말은 미끼를 걸겠다는 소린가.”
막 연초를 입에 문 아스타로트가, 그렇다는 듯이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인다.
아스타로트가 동의하자 다른 악마들이 서로를 번갈아 보며 웅성거렸다.
미끼로 꾀어내겠다는 말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지금은 좋은 영양분이 된 메피스토펠레스의 이명은 ‘미친 불꽃’. 악마 14군주 중에서도 첫손으로 꼽을 수 있는, 강력하기 그지없는 악마였다. 말인즉, 지옥 대공의 관심을 끌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되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누가?
과연 누가 그 미끼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나, 나는 불을 다룰 수 없는데….”
리리스가 스리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사탄을 바라본 순간, 두 눈이 돌연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사탄은 어느새 무서운 눈빛으로 맞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탄이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후욱, 그럼. 이게 농담처럼 보이나?”
칼날 같은 물음에, 연기를 내뿜고는 낄낄거리며 회답한다. 리리스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건너편을 향했다.
그리고, 리리스는.
“여기….”
아까 땅을 가리키던 아스타로트의 검지가.
“최고의 미끼가 있잖아?”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다음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아니, 조용하다는 말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조용하기는 했으나, 북부 원정대에는 야영지 전체를 아우를 정도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아직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은 사방에서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다.
그 경계의 중앙에는, 온몸이 꽁꽁 묶인 거대한 인간형 괴수가 기둥에 칭칭 감긴 채 앉아 있었다.
“저 괴물, 죽이지 않을 건가?”
문득 김유현 옆에 서 있던 공찬호가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오늘은 진군하지 않을 셈인가?”
“생각 중이다.”
“생각 중? 이봐, 뇌제. 설마 진군을 하게 되면, 저놈을 나보고 들고 가라는 소리는 안 하겠지?”
“…….”
“아니. 다들 궁금해하고 있다고. 잡아온 것까지는 좋아. 그런데 내 말은, 왜 계속 가만히만 있냐 이거야.”
“…후유. 어제 말하지 않았나?”
공찬호가 계속 불만이 가득한 투로 말하자, 김유현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두 괴물간의 격렬한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괴수는 그대로 쓰러져 기절해버렸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저 온몸에 입은 심한 상처가 원인이라 추측할 뿐.
어쨌든 북부 원정대는 손대지 않고 코 푼 셈이었고, 김유현은 전투가 벌어진 장소를 수습할 것을 지시했다.
거기서 확보한 괴물은 총 4마리. 공룡 시체 하나, 괴조 시체 하나, 아기 괴조 하나, 그리고 기절한 괴수 하나.
사실 북부 원정대 모두가 공찬호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체를 가져온 김유현의 결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탐험이나 원정이나, 공략의 첫걸음은 출현하는 괴물의 샘플을 확보하는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아직 조사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궁금해하고 있었지만.
잠시 후.
괴수와 괴조를, 그리고 공룡 시체를 한 번씩 가리킨 김유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생각해봐. 저 괴물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차이? 글쎄. 생긴 거?”
“…….”
“…왜 그렇게 나를 쳐다보나?”
공찬호가 멀뚱멀뚱한 얼굴로 말했다.
‘참자, 참자, 참자. 우리 수현이는 최고.’
동생을 떠올리며 간신히 속을 가라앉힌 김유현은, 곧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겉모습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선공, 그리고 비 선공으로 나눌 수 있지.”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데?”
“있지. 아주 큰 차이가 있지. 어제 상황을 떠올려…. 아니. 간단히 말하면 괜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 이거야.”
“엉?”
공찬호가 반문했다. 김유현은 돌연 오소소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만일 북부가 서부와 동맹을 맺지 않고 그저 공찬호만을 내세운 채 들어갔다면, 과연 어떤 결과를 맞이했을지 가히 짐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장담컨대, 사흘 안으로 전멸했을 것이다.
김유현은 또다시 동생을 떠올렸다.
‘제 3지역은 괴물들의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런 만큼 영역 다툼이 굉장히 심하게 일어나.’
‘보이는 수가 적다고 얼씨구나 달려들지 마. 기본적으로 태반이 무리 지어 생활하는 놈들이니까.’
‘그뿐만이 아니라고. 지성을 갖고 있는 놈들이, 거인만 있는 게 아니야.’
‘명심해. 형이 해야 할 건 정복이 아닌, 그냥 길만 트는 거. 즉 그 거인 놈들만 상대하면 된다는 거야. 괜히 다른데 들쑤셨다가….’
이 정보를 어떻게 말해줄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김유현이 거인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저놈하고는 대화를 해볼 생각이다.”
“엥? 대화?”
“응.”
“하!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일단 보이는 모습이 우리랑 비슷하니까. …왜. 시도해보는 것도 안되나?”
“시도라. 좋지.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저놈이 지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고. …어이.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공찬호가 느물거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차마 ‘응. 우리 수현이가 말할 수 있다고 하던데?’ 라고 할 수는 없어, 김유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호. 고어를 익힌 사용자와 번역 마법이 있다는 사실이 이리도 놀라운 일이었나?”
“…….”
공찬호는 단박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번에는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끼앵…. 끼애앵….
전신이 박살 난 괴조의 시체와, 쉰 목소리로 빽빽 울고 있는 아기 괴조가 보인다. 간밤에 잠을 설친 게 기억났는지 공찬호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그러면, 저놈하고도 대화를 할 생각인가?”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지. 하지만 저놈들이라고 지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잖아?”
“으음.”
“봐봐. 저 새끼 괴조가 왜 저렇게 울고 있겠어? 그것도 시체 바로 옆에서?”
“죽은 놈이 지 부모라서 그렇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지. 그럼 바꾸어 생각해보자고. 만일 누가 네 동료를 죽이고 시체를 맘대로 훼손시켰다면, 기분이 어떻겠어?”
“당연히 죽여버리고…. 아.”
“그래. 이제 알겠나? 새끼라는 존재를 확인했는데, 이 지역에 저런 종류의 괴물이 두 놈만 있을 리가 없잖아.”
아무 생각 없이 말하던 공찬호는 순간 약한 탄성을 질렀다. 이제야 김유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은 것이다.
“하, 하지만 동족 놈들이 그 사실을 알아줄까?”
“모르지. 그래서 저 괴조 새끼랑 저 거인이 필요한 거고. 두 종간의 사이가 안 좋다면, 그리고 각자 의사 소통할 수 있는 체계가 있다면. 그렇다면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볼 만한 여지는 있겠지.”
“그럼 그냥 차라리 놔두고 오는 게….”
“안 돼. 아예 모르고 지나쳤다면 모를까, 주변 장소에 흔적을 남긴 이상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이러는 게 최선이야.”
이번에는 공찬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김유현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자, 비로소 북부 원정대가 어떤 상황에 직면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외심이 드는걸 느꼈다.
공찬호 자신은 그냥 무조건 죽이고 싸우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유현은 북부 원정대만이 아닌 외부 상황마저 염두에 두고 대응하고 있다. 아직 지휘 경험이 일천한 공찬호로서는 정말 굉장하다고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대단하군.”
“그럼, 총 사령관 권한을 괜히 이양 받은 줄 알았나?”
“어련하시겠어.”라고 중얼거린 공찬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머리를 떨군 거인과 빽빽 울고 있는 괴조를 한 번씩 보더니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김유현이 공찬호의 등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늦어도 점심 전까지는 결정을 내릴 거니까,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예이, 예이.”
이내 저 멀리 사라지는 공찬호를 보다가, 김유현은 도로 앞쪽을 바라보며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 끼액!
그러다 문득, 아기 괴조의 찢어지는 괴성이 귓전을 울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양손에 음식과 물을 든 채 천천히 다가가는 여인과, 갑자기 날개를 활짝 펼치며 경계하는 아기 괴조가 보였다.
“진하야? 뭐해?”
“아. 음식이랑 물 좀 먹이려고요.”
천천히 다가가던 여인, 아니 백진하가 김유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새벽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며?”
“그래도요. 불쌍하잖아요. 이제 목소리도 잔뜩 쉬었는데….”
워낙 동물을 좋아하는 백진하로서는 주구장창 울어 젖히는 아기 괴조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뭐, 해보던가.”
김유현이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깨를 들먹이자, 백진하는 차분히 무릎을 꿇어앉고는 음식 그릇과 물그릇을 밀어주었다. 당연하게도, 아기 괴조는 주춤주춤 물러나며 더욱 크게 으르렁거렸다.
“이상한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먹으렴. 이거 봐라? 언니도 먹는다? 냠냠.”
– 끼액!
“…정말, 어쩌려고 이러니? 먹고 또 힘내서 울면 되잖아?”
– 끼액!
마치 개소리 말라는 듯이 아기 괴조가 소리쳤다.
이내 두어 번 혀를 찬 백진하가 자그마한 빵 조각 하나를 집은 채 서서히 다가갔다. 아기 괴조는 아기자기한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했지만, 오히려 백진하의 움직임을 더욱 재촉할 뿐이었다.
“아이, 우리 아가. 입도 잘 벌리네.”
그렇게 약간의 거리를 남겨둔 백진하는 주둥이를 휘휘 내젓는 아기 괴조를 향해 손을 놀렸다. 그러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빵 조각은, 정확히 주둥이 안으로 쏙 들어갔다. 백진하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 퉤!
아기 괴조는 굉장히 불쾌하다는 얼굴로 빵 조각을 뱉었다. 백진하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이 녀석! 누가 뱉으랬어!”
그리고는 새로 빵 조각을 집어 들어, 다시금 입안으로 던져 넣는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 퉤에!
“뱉지 말고 빨리 삼켜!”
– 퉤에에!
“…너.”
백진하는 던지고 아기 괴조는 뱉는다.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는 광경을 보며 김유현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동생인 김수현을 생각했다.
기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저게 당연한 일이다. 야생에서 자라난 괴물은 본능적으로 인간을 경계한다.
그러나 어디나 예외는 있으니, 바로 김수현이 그 예외의 절정이었다.
‘만약 수현이가 있었다면….’
아마 저 아기 괴조도 좋다고 달려들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이 살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린 찰나였다.
“총 사령관님!”
돌연히,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한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와 김유현 앞에 멈춰 섰다.
“서, 서쪽을 돌던 경계조에서 대규모 움직임을 감지했다고 합니다!”
김유현은 곧바로 얼굴을 굳히고 사내가 달려온 방향을 응시했다.
“서쪽, 그리고 대규모라고요?”
“예, 예! 어떻게 할까요?”
“경계조는 모두 물러나라고 하세요. 사용자들은 제가 서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신속하게 진형을 갖춥니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김유현의 망설임 없는 지시가 믿음직스러운 걸까? 사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달려온 방향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진하야. 이제 그만 괴롭혀라.”
“아이, 클랜 로드는. 제가 무슨…. …네.”
김유현의 얼굴을 확인한 백진하는 군소리 않고 물러나 어딘가로 뛰어갔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야영지 안이 부산스럽게 변했다. 조금 느슨하게 풀려가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김유현 또한 서서히 기분이 가라앉는걸 느끼며 서쪽을 응시했다.
‘과연 어느 놈들일지 궁금하군.’
어제 전멸 시킨 공룡 괴물들의 복수일까? 아니면 거인이나 괴조의 동족일까?
그것도 아니면, 새로운 괴물의 출현?
해답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 끼루루루루루루룩!
갑작스럽게 익숙한 괴성이 들려오며, 서쪽 숲이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바람이 일었다.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그와 동시에, 커다란 무언가가 느닷없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 무언가는 하나가 아니었다.
마치 어둠이 하늘을 뒤덮듯이 수십, 아니 수백 개의 검은 그림자가 날갯짓하며 떠올라 하늘을 빽빽이 가렸다.
“괴, 괴조 떼다! 괴조 떼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한층 소란이 심해지는 가운데, 오직 김유현만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휴. 간신히 1시에 세이프했군요.
이번에 3지역에 출현하는 여러 괴물들에게는, 각각 재미있는 설정을 짜서 넣어봤습니다. 독자 분들도 재미있게 느껴주셨으면 좋겠네요. 🙂
그럼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편안한 밤 보내세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