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16
00615 Night Of Beginning. =========================================================================
남부 요새를 떠날 때 중천에 걸려있던 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서쪽으로 넘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쨍쨍하던 햇살이 사그라지고, 이제는 짙은 황혼을 머금은 산맥의 수풀들이 각양각색으로 어우러져 절경을 펼쳐내고 있다.
이따금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마치 소풍이라도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으나, 사실 절대로 해서는 안될 생각이다. 오늘이 행군하기 좋은 날씨라는 건 부인할 수 없으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괴물들 입장에서도 활동하기 딱 좋은 날이니까.
긴장의 끈을 풀지 않은 채, 나는 요새를 나온 이후 남쪽 방향으로 천천히 직진하며 클랜원들을 이끌었다. 아니, 사실상 앞서 지나간 북부 원정대의 이동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마음 같아서는 지속적인 강행으로 얼른 따라잡고는 싶다. 그러나 이번 임무는 어디까지나 들키지 않는 것을 전제하며, 한편으로는 클랜원들의 상태도 고려해야만 했다.
탐험이나 원정이나, 공략이 끝나고 난 이후 찾아오는 피로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1달에 걸쳐 탐험을 다녀왔다고 가정해보면 넉넉잡아서 3달, 최소 2달이라는 재정비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할진대, 편안한 클랜 하우스도 아닌 긴장의 연속인 강철 산맥에 계속 있으니 피로가 어디 쉽게 사그라지겠는가. 나야 체력이 100포인트라 견딜만하다손 쳐도, 클랜원들은 아니었다. 체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이들도 여럿 있다. 비록 내색은 않고 있으나 아마 상당히 고단한 상태일 것이다.
어차피 북부 원정대가 대규모로 이동 중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근시일 내로 따라잡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클랜원들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행군 속도를 조절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게 하나 있다면, 출발 이후 해가 질 무렵까지 괴물들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는 것 정도?
울창한 수림을 벗어나 계곡 지대로 접어들자 어느 순간 너른 평야가 눈앞에 나타났다. 남쪽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구릉지가 쭉 뻗어 나가고, 그 옆으로 트인 길에는 아름다운 노을 빛을 반사하는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야영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생각해보니 슬슬 시간도 된 것 같아, 나는 잠깐 하늘을 쳐다보고는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오늘 행군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야영 준비를.”
그러자 “만세!”라는 환호성으로 화답한 클랜원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을 파고 나뭇가지를 가져와 모닥불을 지폈다. 낙엽을 수북이 쌓고는 침낭을 배치했다. 사방에 마력석을 박아 넣고 일종의 경계 진을 형성한다. 마치 야영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뚝딱뚝딱 야영지를 만들고 있는 가운데, 곧 한쪽에서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오기 시작했다. 고된 행군 후, 꿀맛 같은 식사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사실 중간에 남다은과 비비앙이 오늘 저녁을 책임지겠다는 거의 재앙이나 다름없는 의사를 밝혔으나, 다행스럽게도 선유운의 결사적인 반대로 저지할 수 있었다. 예전에 축제 때 두 여인의 음식을 맛본 전력이 있는 클랜원들은, 누구 다 죽일 일 있냐며 대들듯이 말하는 선유운의 태도를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들 식사하세요~.”
잠시 후, 귓가로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연주가 펄펄 끓는 큼지막한 냄비를 번쩍 들어올리며 국자를 빙글빙글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야영지 건설을 마치고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클랜원들은,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키고는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오늘 메뉴는 언제나처럼 고기 스튜. 질린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요리사가 고연주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림자 여왕의 음식 솜씨는 어지간한 미식가조차도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울만한 정도였으니까.
“누님! 빨리 주세요! 어서요!”
“얘는. 왜 이렇게 방정맞니?”
1등을 차지한 진수현이 발을 구르며 그릇을 한껏 들이밀자, 고연주가 국자로 냄비를 탁탁 두드리며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진수현은 전혀 아랑곳 않았다.
“아 빨리요! 지금 꼬르륵거리는 소리 안 들려요? 누님이 만든 음식 보니까 머리에 현기증이 일 정도라니까!”
“나 참. 누가 보면 며칠은 굶긴 줄 알겠다 얘.”
고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으나 입가에는 나긋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기야 요리를 만든 입장으로서 저런 태도가 썩 기분이 나쁠 리는 없다. 맛있게 먹고 싶어 죽겠다는데 어느 요리사가 마다하겠는가.
“아무튼, 그렇게 아양 떨어봤자 소용없어. 고기는 무조건 정량 배식이란다.”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고연주는 상당히 푸짐한 양을 그릇에 덜어주었다. 크게 환호한 진수현이 나는 듯 달려간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클랜원들은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 후, 고연주를 향해 쏟아지는 온갖 미사여구의 행진을 들으며 나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고연주가 까르르 웃으며 하나하나 응대해주었고, 거의 마지막 차례였던 허준영만이 오직 무뚝뚝하게 그릇을 내밀어 자존심을 지켰다.
그렇게 모든 클랜원들이 배식을 마치고서야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사실 처음에 받을 수도 있었지만, 나름의 배려라면 배려였다. 나는 천천히 접시를 들고 멍하니 냄비를 바라보는 고연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헌데, 갑자기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어.”
그러나 냄비를 바라본 순간, 나는 고연주가 왜 멍하니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스튜로 가득 차 있었던 냄비는 어느새 텅텅 비어있었다.
“미, 미안해요 수현. 신나서 퍼주다가, 저도 모르게 그만….”
고연주가 무척이나 미안해하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하기야 아까 미사여구에 너무 홀랑홀랑 넘어간다 싶었다.
…뭐, 어쩔 수 없나.
“괜찮습니다. 건더기라도 긁거나, 아니면 십시일반이라도 하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서 냄비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여기저기 건더기가 붙어있는 게 딱딱 긁으면 어느 정도 모일 것 같기도 하다.
“어휴, 정말.”
그러나 그 순간, 눈앞으로 그릇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수현 앞에서는 농담도 못하겠네요.”
그릇에는 뜨끈뜨끈한 김을 흘리는 고기 스튜가 한 가득 얹어져 있었다. 그 누구보다 압도적일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클랜원들이 그냥 고기 스튜만을 받았다면, 내 그릇에는 익숙한 초록색 약초가 보기 좋게 얹어져 있었다. 돌연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고기 스튜.』
(설명: 파그라가 첨가된 아주 맛있는 고기 스튜입니다. 사용자 고연주가 누군가와의 섹스를 원하는 염원이 깃든 음식입니다.
* 파그라(Pagra) : 약초의 일종으로, 특히 사내의 정력 증강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
– 오호, 그렇군. 야! 이게 바로 아내가 남편의 정액을 농축시키는 과정이야?
이건 너무 솔직한 정보…. 아니 화정은 또 무슨 헛소리야?
나는 머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고, 고연주. 이건….”
그러나.
“아무렴 제가 수현 걸 잊었겠나요. 혹시, 서운해한 거는 아니죠?”
사근사근하게 말하고는 있었으나, 고연주의 눈동자는 형형한 빛을 뿜고 있었다. 마치 ‘딴 년한테 썼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 아니 생각해봐. 주기적으로 빼서 농도를 옅게 만드는 것 보다는, 꽉꽉 눌러 담았다가, 한 번에 팍! 터뜨리는 게 좋지 않겠냐고.
아니, 얘는 무슨 말을 해도….
“자자~. 잔뜩 담았으니까, 어서 드세요. 스튜는 뜨거울 때 먹어야 더욱 맛있다고요?”
그러나 결국 등까지 떠밀리는 탓에, 나는 화정의 헛소리에 반박도 못한 채 떨떠름한 기분으로 식사 대열에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날은, 이상할 정도로 야릇하게 깊어져만 갔다.
*
산맥에는 어둑한 땅거미가 내려앉았으나 북부 원정대의 야영지는 환한 빛이 밝혀져 있었다. 경계를 서는 사용자들이 곳곳에 보였지만, 일부 사용자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거인이 깨어났기 때문이다. 거기다 정신을 차리고서는 사용자들을 보며 일말의 반응을 보였다. 지성을 갖춘 존재라는 게 드러난 것이다. 희소식이라면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하나 생겨버리고 말았다.
바로 거인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문제가.
깊은 밤.
야영지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한 사내가 천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뇌제. 방법을 찾았다고 합니다.”
곧바로 들려오는 보고에,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김유현이 번쩍 머리를 들었다.
“방법을, 찾았다고요?”
“예.”
회답한 사내는 돌연 시선을 돌려 천막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입구를 가린 장막이 살짝 걷히며 누군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턱에는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고 배가 약간 나온, 좋은 말로 풍채가 좋아 보이는 사내였다.
“당신은….”
“사용자 양기덕입니다.”
성큼성큼 걸어온 사내가 부드러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김유현은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사용자 김유현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거인과의 대화에 난항이 있다고 들어서요.”
난항이란 바로 거인의 피에 흐르는 마법 저항을 뜻하는 말이었다. 모든 마법에 ‘무조건’ 저항하는 피가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번역 마법은, 상호간에 아는 만큼 나온다고.
번역 마법은 일반 마법처럼 설정으로 끝나는 마법이 아닌, 사용자들의 연구로 개발된 ‘마력 회로 응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마법이다.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나, 상대에게 강제적으로 언어를 들리게 하는 만큼 시동자가 정의한 마력의 흐름을 무조건 유지해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김유현이 거인에게 번역 마법을 걸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강제로 건다손 쳐도, 마력 저항이 일정하게 흐르는 번역 마법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어지럽힐 시, 번역 마법은 완전히 어그러져 버린다.
물론 꼭 상대방에게 걸 필요는 없고,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거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번역 마법은 상호 아는 만큼 사용할 수 있다고. 고어에 관한 지식이 없는 김유현으로서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그놈의 마법 저항이 문제라…. 그나저나 방법을 찾았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사실 제가 고어도 익히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특별한 능력도 지니고 있거든요. 물론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말한 양기덕은 주섬주섬 품을 뒤적이고는 탁자에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말간 빛을 띠며 그것은, 다름 아닌 수정구였다.
“이건….”
김유현의 의아한 낯으로 묻자 양기덕은 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저도 확신은 못하는 만큼 우선은 실험부터 해보시죠. 대략적인 건 가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하루 진군을 포기했는데, 마다할 김유현이 아니었다. 망설임 없이 두 수정구를 쥐고 양기덕과 함께 천막을 나섰다. 두 사내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바로 거인이 묶여 있는 기둥이었다.
가는 도중, 양기덕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두 수정구에는 두 개의 음성이 녹음돼있습니다. 하나는 국어, 또 하나는 제가 아는 고어입니다.”
“고어라면….”
“거인이 깨어난 후 말하는 단어를 주의 깊게 들어봤습니다. 개인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Humanum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하더군요.”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고어 중에 비슷한 철자라고 생각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Homo, 사람이라는 뜻이죠. 우선 그 두 개의 수정구를 들어보시겠습니까?”
양기덕은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매우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얼른 해보라고 채근이라도 하듯이. 어차피 쥐고 있던 터라, 김유현은 부담 없이 양손을 들어올렸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마력을 흘려 넣되, 그냥 활성화시키는 게 아닌, 일반적인 번역 마법의 흐름대로 수정구 활성화해 보십시오.”
서서히, 저기 멀리서 기둥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유현은 순순히 마력을 일으켜 수정구들을 대상으로 번역 마법을 시동했다.
“그리고요?”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요?)
(Quid Ergo?)
갑작스럽게 두 수정구에서 각각 다른 언어가 흘러나왔다. 김유현의 두 눈이 크게 떠졌고, 양기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성공이군요.”
(성공이군요.)
(Pro Eo.)
이번에도, 똑같다.
양기덕의 생각은 간단했다. 각 수정구에 국어와 고어의 철자를 차례차례 육성으로 녹음하되, 그 목소리에 양기덕 개인의 고유 능력인 ‘마력 각인’을 사용해 마력을 담은 것이다.
그러면 마력이 각인된 목소리는 재생 시 새로 들어오는 마력에 반응할 수 있다. 음성 번역기에서 힌트를 얻은, 꽤나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물론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마력 각인은 영구적인 능력이 아니거니와, 똑같은 마법을 사용해 흐름을 해치지 않는다고 해도 애당초 입력자와 시동자의 마력 파장이 다르다. 그런 만큼 지속되는 시간이 상당히 짧을 수밖에 없는 1회용에 불과한 장비였다.
또한 들려오는 모든 말을 강제 번역하니 공공장소에서의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지며, 아직 확인해보지 않은 만큼 100% 완전한 번역도 자신할 수 없다. 거기다 ‘마력 회로 응용’을 익힌 마법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제한까지.
“뭐 양산은 가능하겠지만, 사실 문제가 많지요. 상용화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양기덕이 입을 쩝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으나 김유현은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냥 죽이고 진군할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거의 포기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끝에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김유현의 칭찬이 머쓱했는지 양기덕이 머쓱하게 웃어 젖힌다.
“하하. 아무튼, 얼른 가시죠. 거의 다 왔습니다.”
============================ 작품 후기 ============================
Night Of Beginning.
시작의 밤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이번 파트부터는…. 어떤 분들은, 김유현에게 조금 실망하실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