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17
00616 Night Of Beginning. =========================================================================
거인(Giant).
거인이란 무엇인가.
거인이란 과연 어떤 종족인가.
아마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라면, 그래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용이 잠든 산맥, 최후의 전쟁’에 얽힌 아득하기 짝이 없는 신화를.
예를 들면 용과 우리 인간이 공존하던 시절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세상의 주도권을 놓고 기나긴 전쟁을 통해 용을 몰아냈다는 것 등등.
사실 어지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객관적인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며, 어쩌면 인간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데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일부러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래서 신화라고 부르는 것이고.
각설하고.
‘용이 잠든 산맥, 최후의 전쟁’보다 더욱 전에 기록된 신화가 하나 있다면, 거신 전쟁(Colossus War)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거신 전쟁.
거신 전쟁은 거인과 신이 천상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 기록이다.(그러니까, 똑같다. 거신 전쟁은 이 세상 최초의 주도권 쟁탈전이라 볼 수 있으며, 그러므로 최후의 전쟁은 2차 전쟁이라 볼 수 있겠다.)
안타깝게도 거신 전쟁 중 거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다.
그저 거인을 보고 묘사하기를.
“모든 이능의 힘을 허용하지 않고.”
“몸이 무척 크고, 근력은 산을 들어올릴 정도였으며.”
“묠니르로 땅을 한 번 내려찍으면 지진이 일고, 목소리는 천둥과도 같다.”
“천성은 순박하고 정이 많으나, 한편으로는 전투를 즐기는 호전적인 지배 종족이다.”
“특히 ‘쿠샨’의 성을 지닌 거인이 한 번 크게 울어 젖히면, 주변의 모든 괴물들이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거인들의 제왕이라 불리는 ‘쿠샨 토르’는 지상에서 모든 괴물들의 제왕이 될 자질을 지녔다.”
이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 추가적으로 덧붙이자면, 거인들의 제왕이라 불렸던 ‘쿠샨 로드’는 거의 반신에 오를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고 한 줄 언급돼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거신 전쟁의 승리는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거인들은 패배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전쟁 직후 신과 거인이 나눈 이야기에서 거신 전쟁의 발발 원인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 대화록.
거신 전쟁 중 신들을 이끌었던 슬픔의 여신 ‘아리안로드’가 묻기를.
“이미 지상을 지배하는 부러울 것 없는 종족이, 어찌하여 천상을 넘보는가.”
“우리와 굳이 싸울 이유가 있던가.”
그러자 거인들의 제왕 ‘쿠샨 토르’가 말하기를.
“지상에서는 더 이룰 것이 없기에 천상으로 눈을 돌린 것뿐.”
“굳이 싸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싸운다.”
“우리는 싸움을 위하여 살아가는 종족이다. 그래서 싸우는 것이다.”
그 당시 ‘쿠샨 토르’의 말은 실로 호쾌하며 거인답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거신 전쟁이라 명명될 거대한 전쟁을 일으킬 명분까지라 보기는 어렵다.
글을 적는 이도 이렇게 느끼는데, 그 당시 말을 들은 신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안 그래도 무수한 동족의 죽음에 깊은 비탄에 빠져 있던 ‘아리안로드’는, ‘쿠샨 로드’의 말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힘에 인성이 먹힌 것인가. 타고난 기량만 믿고 살아가는 놈들이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오냐. 그럼 어디 한 번 너희가 원하는 대로 실컷 싸워보라. 그러나, 너희는 다시는 지상을 지배하지는 못하리라. 이제는 지배자가 아닌 당해야 하는 고통도 느껴보라. 그래야 반성을 할 것 같다.”
아리안로드의 저주는 말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직접 돌아다니며 살아남은 신들을 찾아가 거인들을 저주할 궁리를 했고, 신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방도를 하나 찾을 수 있었다.
그 방도라는 것은 바로.
“용맹함은 남겨두나, 전략을 앗아갈 것이며.”
아테나도.
“사랑은 남겨두나, 평화는 없을 것이며.”
헤스티타도.
“지성은 남겨두나, 진화할 지혜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가네샤도.
“천성은 남겨두나, 기이한 신력을 빼앗아갈 것이며.”
인드라도.
“살아갈 터전은 남겨두나, 괴물들의 경외를 거두어갈 것이며.”
판도.
“주체할 수 없는 광기를 부여할 것이며.”
칼리도.
“너희가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파르바티까지.
7명의 신이 아리안로드에게 거인을 향한 저주를 건네주었다.
이 7신의 저주를 모은 아리안로드는.
“나는 너희에게서 슬픔을 빼앗아갈 것이다.”
‘거인은 더 이상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조건으로 거인에게 일종의 봉인을 걸었다.
그렇게 신은 거인들을 향해 총 7개의 저주로 힘을 제한했고(아리안로드의 조건까지 포함하면 8개다.), 지상의 어느 산맥에 떨어트리게 되었다.
이후 거인들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고대 무녀와 거인.’에 기록된 내용을 제외하면 딱히 남아 있는 건 없다. 아니면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하다. 저주에 관한 내용을 보면 신들은 거인들의 멸족을 원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더 큰 복수를 그렸다고나 할까?
‘너희는 다시는 지상을 지배하지는 못하리라. 이제는 지배자가 아닌 당해야 하는 고통을 느껴보라.’
즉 아리안로드의 저주에서 미루어보건대, 차후 이어진 거인의 삶은 굉장히 암울했을 것이다. 더 이상 지상을 지배할만한 원천을 제한당한 것은 물론, 미래마저도 제한당했다.
한때 천상의 신들과 주도권 전쟁을 벌이던 최고의 종족이, 이제는 다른 괴물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 저자 불명,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에서 발췌.
*
드디어 거인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거인이 있는 장소는 한산한 편이었다. 기둥에 묶여 있는 거인과 그런 거인을 경계하는 열댓 명의 사용자들. 그들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
문제는, 바로 거인의 태도에 있었다.
만일 괴물이 포로로 잡힌 상태라면 응당 난동을 부려야 정상이다.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하기야 기둥에 꽁꽁 묶인 터라 불가능하기는 하다만, 하다못해 아기 괴조처럼 적대적인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 저 거인은, 아니다.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순박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머리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거기다 주변 경계를 서는 사용자는 물론, 이따금 지나가는 사용자들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기까지. 흡사 구경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정말로 천성이 우직하고 순박한 걸까? 아니면….’
“뇌제, 어서…. 지속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잠시 거인을 분석하고 있을 즈음, 양기덕이 약간 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인 김유현은 거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경계를 서던 사용자들이 놀라 제지하려고 했으나 양기덕이 눈치를 주자 슬슬 물러난다.
이윽고 약 1미터 남짓까지 거리를 줄이자 거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김유현을 향했다. 지금까지 아무리 말을 걸어도 회답은커녕(물론 알아듣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던 인간들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인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기둥에 묶인 상태라 하반신은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거인은 인간을 아래로 내려다본다.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넘긴 김유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들리나?”
(내 말이 들리나?)
(Vos Legere?)
그러자 거인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진다. 김유현은 본능적으로 성공을 직감했다.
“Quod, Quod?”
(아, 아?)
(Quod, Quod?)
진짜로 성공했다. 양기덕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가, 눈을 휘둥그래 뜬 사용자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저 수정구가 모든 말을 강제로 번역하는 이상, 미약한 소리도 허용할 수 없다. 이야기에 방해되니까.
(드, 들려요. 그럼 거기도 Hoc 말이 들리는 건가요?)
(들린다. 아무래도 성공한 것 같군. 이제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데.)
김유현은 Hoc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나, 문맥상 인칭 대명사 역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거칭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두 개의 수정구가 동시에 음성을 말하고는 있었으나, 필요한 것만 골라 들으면 되는 일.
하지만 그전에, 이상하게도 대화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와, 신기하다. 그 Crystal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거 맞죠?)
그러나 거인의 말이 이어진 순간 김유현은 어색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말투였다.
사용자들이 거인에 대한 첫인상은 공포이다. 일전의 전투에서 거인은 야만 전사의 기운을 풍기며 괴조를 잔인하게 죽여버리지 않았는가.
그럼 뭔가 좀 있어 보이는(?) 말투가 나와야 인상과 매치가 되는데, 지금 말하는걸 들어보면 말투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다. 몸집은 산 만하고 상체는 근육질인데, 말투는 마치 어린 아이가 말하는 듯한 느낌. 온몸에 문신을 한 무서운 인상의 어깨 형님이 갑자기 ‘어머.’하고 어깨를 움츠리면 이런 기분을 느낄까?
구경하던 사용자들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냥 생각하는걸 포기하기로 했다. 차라리 번역 마법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게 속 편하니까.
하지만 김유현은 도리어 한층 깊어진 눈으로 거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동그란 눈과 동글동글한 코, 얼굴 곳곳에 나 있는 솜털. 덥수룩한 수염은 보이지도 않는다. 전투에서 받았던 인상을 최대한 배제하고 살펴보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히려 하나하나 뜯어보니 애 티가 어린, 생각보다 앳돼 보이는 인상이 곳곳에 보인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김수현은 거인들의 키가 최소 5미터는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눈앞의 거인은 5미터까지는 안되고, 4미터를 넘는 정도였다.
‘혹시 어린 놈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한 김유현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맞아. 이 수정구를 이용했지. 그래서 너와 말을 나눌 수 있는 거고.)
(헤에. 신기하네요. 인간들은 선천적인 힘이 부족하나 Apocrypha를 사용해 보완한다고 들었는데, 역시 아버지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인간? 아버지?’
(인간을 알고 있나?)
(네! 아버지한테 자주 들었거든요!)
거인은 힘차게 말하며 헤헤 웃었다. 그러자 더 이상 어색함을 이길 수 없겠는지, 두어 명의 사용자가 탄식을 흘리며 몸을 돌린다.
(뭐, 저도 보는 건 처음이지만요. 그래서 되게 신기해요!)
그러나 전혀 아랑곳 않은 거인은 여전히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라면….)
마침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와, 김유현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냥 다짜고짜 ‘우리는 이 숲을 공략하러 왔다!’나 ‘네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있나?’라고 직설적으로 묻기보다는, 지금 이 분위기를 이어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 지금 여기 계시지는 않아요.)
거인은 곧바로 회답해와 김유현은 약간 당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상당히 민감할 수도 있는 비화인데, 어째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안 계신다고?)
(네. 몇 년 전에 Litura 내에서 커다란 다툼이 있었거든요. 그 다툼에서 밀려나셔서 어쩔 수 없이 무리를 떠나셔야 했어요.)
그 찰나의 순간, 한껏 가늘어진 김유현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거 참 안된 일이로군.)
(괜찮아요. 모두가 틀렸다고 말하지만, 저는 아직도 아버지가 옳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뜻 모를 말들이 들려온다. 그러나 김유현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머릿속에 기억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가.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데.)
(헤헤.)
칭찬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거인이 해맑게 웃는다.
그때였다.
꼬르르르르르르륵!
느닷없이 배가 끓는 소리가 꽤나 우렁차게 주변을 울렸다. 거인은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뜨더니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거인은 잡힌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우리….)
이윽고.
(뭐라도 좀 먹으면서 이야기 좀 더 해볼까?)
갑작스럽게, 김유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
다음날, 나는 아침이 밝자마자 행군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기억상 오늘은 산맥을 하나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제 하루 푹 쉬었던 만큼 클랜원들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하지만 오후쯤 되면 다시 지칠게 예상되니, 해가 저물기 전에 부지런히 산맥을 넘을 필요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제 3지역에 들어선 것과 진배없거니와, 괴물들 입장에서도 우리가 산맥을 오르내릴 때가 가장 기습하기 좋은 기회일 테니까.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부지런히 걸은 결과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산맥을 넘을 수 있었는데, 그동안 단 한 번의 습격도 받지 않은 것이다. 물론 나쁜 현상은 아니지만, 산맥을 오르기 전 클랜원들을 향해 단단히 경고한 게 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빠르게 산맥을 넘은 우리는, 해가 중천에 걸릴 즈음에는 어느 정도 고저 없는 지역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잠깐 휴식을 취한 후 행군을 재개하자, 중간중간 혼잣말처럼 들려오는 콧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해이해졌다기 보다는, 아마 예전 2지역에서 산맥을 오를 때 습격을 받았던걸 떠올리고, 이번에는 무사히 넘었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콧노래일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 평지를 가로지르자, 어느 순간부터 눈앞으로 넓은 공터가 펼쳐졌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야영을 했군.’
계곡이 없다는 게 흠이기는 해도 진군 첫날이니만큼 식수는 충분할 것. 5천명을 지휘해야 하는 형의 입장으로서는 이보다 적합한 야영지도 없으리라. 무엇보다 야영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게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잠시 정지합니다.”
아까 한 번 쉬기는 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정지 명령을 내렸다. 물론 휴식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아마…. 여기서 첫 번째 야영을 한 모양인데요.”
눈치 빠른 고연주가 바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지면에 남은 흔적을 살펴보려는 듯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는 땅을 쓸어 모았다. 나는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추적 능력 자체는 고연주가 나보다 더 나으니까.
“일단 떠난 건 오늘 이른 아침…. 응?”
이내, 고연주의 입에서 미약한 의문이 터져 나왔다.
“왜 그럽니까?”
“이상한데요? 분명 야영을 하기는 했는데….”
“했는데?”
“어제의 흔적이랑, 그저께의 흔적이 섞여 있어요.”
그럼 거리를 최소 반나절로 줄였다는…. 아니, 잠깐만.
‘벌써?’
반사적으로, 눈이 가늘어졌다. 고연주의 말인즉, 북부 원정대가 여기서 이틀간 머물렀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공략 포인트를 앞두고 있다면 모를까, 진군 첫날에 이틀이나 있었다는 건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한 번 조사할 필요는 있을 것 같군요.”
이내 가볍게 손을 내젓자, 클랜원들이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나를 부르는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고연주였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다가가자, 쪼그리고 앉은 채 약간 멍해 보이는 얼굴을 한 고연주가 보였다.
“벌써 발견한 겁니까?”
“아니…. 발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고연주는 말끝을 흐리며 땅을 가리켰다.
이윽고 시선을 내린 순간.
“……!”
지면에 남겨진, 굉장히 커다란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두 개의 발자국.
사람이든 괴물이든, 기본적으로 누구나 지면에 흔적은 남는다. 또한 사람은 사람만의 괴물은 괴물만의 흔적이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금 보이는 발자국은 사람의 발과 흡사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거의 똑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문제는 흔적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그냥 2배 정도만 되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겠는데, 크기나 너비나 보통 인간의 발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건 분명….’
“한 가지 확실한 건.”
문득 고연주가 몸을 일으켰다.
“이 흔적은 절대로 사람이 아니며, 괴물이라는 것.”
그러더니 슬쩍 발을 들어 한 지점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 기둥을 세운 흔적이 있어요. 아마도 묶어 놨겠죠.”
“흠….”
‘그러면 형은 벌써 거인과 조우했다는 소린가?’
묶어 놨다는 건, 샘플을 확보할 목적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테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자, 곧 사방으로 흩어졌던 클랜원들이 서서히 모여들어온다.
이미 흔적의 정체를 알고 있는 터라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고연주가 나름 정확한 추리도 해줬는데, 그냥 여기서 확 밝혀버릴까? 그러는 게 더 편할 것 같기는 한데.’
“그럼…. 혹시, 거인이 아닐까요?”
그때였다. 고연주를 따라 주변을 살펴보던 임한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인? 이 세상에 거인이 있습니까?”
차소림이 고개 돌려 묻자, 임한나는 상냥히 눈웃음치며 입을 열었다.
“네, 있어요. 예전에 연합군과의 전쟁 때, 클랜 로드님이 거인으로 추정되는 괴물과 싸운 적이 있거든요?”
그제야 떠올렸는지 곳곳에서 “아.”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확실히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와 붙었던 거인의 이름이 쿠샨 토르였나?
아마 진짜 이름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거인이라는 부족에도 당연히 우두머리가 있으며, 신화에서는 거인들의 제왕을 ‘토르’라고 기록했다. 말인즉, 제왕으로 불렸던 거인들은 모두 쿠샨 토르라고 불렸다.
그 외라면 제왕의 자리는 혈족간의 직계 전승으로 이어지며, 오래 전부터 ‘쿠샨’이라는 성을 가진 거인들이 차지해왔다고 하는데…. 뭐, 사실 거기까지는 내 알 바 아니고.
“연합군과 전쟁이라면…. 그러면 그놈들과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으응. 글쎄요. 그건 잘…?”
그것까지는 모르는 듯, 임한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밝힐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임한나 덕분에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아마….”
그렇게 속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며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야, 솔아. 우리도 거인이랑 싸워본 적 있지 않아?”
돌연히 옆에서 이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랜원들의 시선이 모두 왼쪽으로 쏠린다. 나 또한 눈을 돌리자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이는 안솔을 볼 수 있었다.
“너희가? 어디서?”
재빠르게 묻자 안솔이 고개를 갸웃한다.
“우웅? 오라버니 기억 못하시는 거예요? 그때 거기서 같이 싸웠잖아요.”
“그러니까 어디서.”
“거기서요.”
“…….”
앵무새처럼 회답하는 안솔을 보고 있자 절로 주먹을 움켜쥐고 말았다. 안솔이 화들짝 정수리를 가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 그러니까요…. 그때…. 오라버니랑, 저랑, 우리 오빠랑, 하연이 언니랑, 뺭뺭 언니랑….”
“내가 왜 뺭뺭이야!”
그러자 하나하나 손으로 세던 안솔이 갑자기 펄쩍 뛰어올랐다.
“까, 깜짝이야! 제가 언제요!”
“방금 그랬잖아!”
“비, 비비앙 언니라고 했거든요?!”
“웃기시네! 말이나 더듬고 말이야!”
“이익!”
“그리고 그걸 왜 기억 못해?! 1층에서 한 놈, 3층에서 한 놈씩 각각 만났잖아!”
비비앙이 빽 소리를 지르자 안솔이 할 말 없다는 얼굴로 주춤 물러났다.
그나저나 1층에서 한 놈, 3층에서 한 놈이라. 여하튼 비비앙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이거지?
“비비앙. 어디였어? 어디서 우리가 거인과 싸웠었지?”
그러자 팩 고개를 돌린 비비앙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흥,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뭐?”
잠시 후.
주변에서 살짝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내 기분도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얘들이 오늘 왜 이러지?’
안 그래도 마음이 급한데, 그냥 폐허의 연구소 1층이랑 3층에서 봤다고 말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자꾸 신경을 긁는 거지?
“폐, 폐허의 연구소.”
내 표정을 읽었는지 얼른 입을 집어넣으며 말을 더듬었다.
폐허의 연구소 1층이랑 3층이라….
그래. 그러고 보니 거기서도 거인이 있었다. 2회 차 극 초반이라 가물가물했는데, 이제 기억났다.
“수, 수현. 우선은….”
문득, 하연이 살그머니 팔을 감아오는 게 느껴졌으나 나는 곧바로 빼고 둘을 가리켰다.
“너희 둘.”
안솔과 비비앙이 흠칫 몸을 떨었다.
“따라와준 건 고마운데….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지?”
“…….”
“이딴 식으로 개판칠 거면 그냥 돌아가지 그래.”
“…….”
이윽고 안솔은 “죄송해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비비앙은, 무언가 대단히 서럽다는 듯한 기색을 비췄다.
아마 나와 오랫동안 함께해온 만큼 다들 알고는 있을 것이다. 밖으로 나왔을 때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 무언지.
헌데, 한때 이유정이 자주하던 짓거리를 지금 저 둘이 하고 있다.
약간은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한동안 둘을 노려보다가 경고는 한 번 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갑시다.”
============================ 작품 후기 ============================
거인은 지금껏 총 3번 등장했습니다. 폐허의 연구소에서 2번(89회 – 5미터 거인, 96회 – 거인(상체) + 바실리스크(하체) = 기가스(신화 속 동물)), 서 대륙 전쟁(365회 ~ 366회 – 거인들의 전대 제왕 ‘쿠샨 토르’). 이렇게 해서 총 3번입니다. 이번 3지역 공략 파트는 그때 뿌려놨던 떡밥을 회수하는 파트라고 보시면 됩니다.
김유현한테 실망하실 수도 있다는 말은, 뇌제가 갑자기 호구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말인즉,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생인 김수현한테는 아낌없는 나무가 될 수 있는 김유현이며, 이제껏 그런 모습을 자주 보여왔습니다. 허나 다른 사람, 특히 적에게는 가차없는 캐릭터이기도 하지요.
김수현은 1회 차 때 2년 차까지 빌빌대다가, 형을 만나고 나서 많은 성장을 이뤘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독자 분들이 보아온 김수현이 과연 누구한테서 가장 영향을 받았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시면, 이번에 김유현이 보이는 행동을 추측이 가능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코멘트는 어제 잘 읽어보았습니다.
오늘 글을 적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구상에 변화를 주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지역 파트가 길어지면서 저도 지쳤는데, 제가 이러니 독자 분들도 당연히 지치시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구나 김유현이 지금 주가 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겠지요.
물론 지금 와서 김유현을 김수현으로 바꾸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한 번 최대한 압축하고 또 쳐내보겠습니다.(김유현의 과거 부분 삭제, 비비앙 달래주고 화해하는 부분 삭제, 회상 및 기록 내용은 총 6번 등장에서 4번으로 압축 등등.) 그리고 어지간하면 각 회당 분량도 늘리고요. 체감하시는 전개 속도가 빨라진다는 장담은 드릴 수 없으나, 이번 3지역이든 차후 파트이든 전개에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면 집어넣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PS. 고연주, 남다은, 김한별, 이유정 등등. 씬은 나중에 아틀란타로 들어가게 되면 질리도록 써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