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19
00618 Night Of Theater. =========================================================================
와드득, 와드득!
(야, 그릇까지 먹으면 어떡해.)
(네? 아, 죄, 죄송해요. 하도 맛있어서….)
‘만족이라는걸 모르는 건가.’
속으로 쓰게 웃은 김유현은 슬슬 화제를 돌리기로 결정했다. 친분은 이제 어느 정도 확립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대놓고, 갑작스럽게 화제를 돌릴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서서히 구슬려야 한다.
딱!
휘리릭!
가볍게 손을 튕기자 어디선가 밧줄이 날아와 거인의 오른팔을 칭칭 휘감는다. 식사가 끝난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거인은 그저 신기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오른팔에 차곡차곡 감기는 밧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반응을 살피던 김유현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너 참 착하구나.)
(네? 제가요?)
(응. 네 말을 들어보니까 내가 그동안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 사실 어제 만났던 날개 큰놈들은 너를, 아니 너희 종족을 엄청 나쁘게 말했거든.)
(뭐, 뭐라고 말했는데요?)
(…전투에 미친 종족이라고.)
(으으으음.)
거인은 미묘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뭐…. 트,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말이 심한 건 있네요.)
(그래?)
(네. 그렇게 따지면 그놈들도 만만치는 않거든요. 우리가 먼저 싸움을 건 적도 있지만, 그놈들이 먼저 건 적도 많아요.)
(그동안 많이 싸웠나 봐?)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쭉 싸워왔다고 하니까요. 뭐, 사실 그놈들도 제법 강한 종족이기는 해요.)
(확실히. 그 파란 빛을 놈은 엄청 강해 보이던데.)
김유현이 상대 종족을 인정하는 말을 꺼내자 거인의 낯에 발끈하는 기색이 서렸다.
하지만 곧 콧방귀를 뀌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름 강하기는 하죠. 하지만 그뿐이에요. 지금껏 그놈들의 도전은 무수하게 받아왔지만, 우리는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요.)
(이런, 자신감이 넘치는 발언인데?)
(하지만 사실인걸요. 우리 아버지가 다스리던 시절에는, 그놈들은 날개도 못 펼치고 다녔거든요.)
(오호.)
아버지. 드디어 원하던 단어가 나왔다. 그러나 ‘다스리던’이라는 추가 정보까지. 그렇다면 이 거인의 아버지는 한때 거인들의 제왕이었다는 소리였다.
‘쿠샨 로드. 수현이가 거인들의 제왕 자리는 직계 전승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도리어 놀랍다는 얼굴을 보였다. 그 표정을 읽었는지 거인이 우쭐해 하며 자랑스러워하는 티를 낸다.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나 봐?)
(좋아하고, 존경하죠. 아버지는 형제들과는 달리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계셨거든요.)
(다른 생각? 어떤 생각인데?)
(네. 뭐냐 하면…. 아, 이건 좀 자세히 말하기가 그렇네요. 딱히 좋은 내용도 아니라서.)
신나게 말하던 거인이 돌연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아마 거신 전쟁의 흑 역사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유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슬쩍 말을 흘렸다.
(하지만, 지금은 이 산맥에 없다고 했지? 무리와 다투고 떠났다고 했던가?)
(뭐, 그렇죠. 다퉜다기 보다는, 그냥 서로 다른 생각으로 충돌했을 뿐이에요.)
(아무튼, 그럼 너도 조금 그렇겠네.)
(응? 뭐가 그래요?)
김유현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거인은 머리를 갸우뚱 기울이며 되물었다. 김유현의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좋아하고 존경하던 아버지인데, 네 말을 들어보면 쫓겨난 거나 다름없잖아. 동족, 아니 형제들이 밉지 않아?)
(에엥? 그분들은 왜 미워해요? 그분들이 저를 얼마나 예뻐해 주시는데요.)
그러나 거인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머리를 휘휘 저었다.
(아버지가 나가신 건, 그저 서로의 신념이 달랐을 뿐이에요. 충돌의 과정도 정당했고요. 그러니까 쫓겨나신 게 아니라, 스스로 왕의 자리를 내려놓고 나가신 거죠. 그만큼 생각이 확고하셨으니까요.)
간단하고도 명료한 말.
김유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제 불화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하나의 계획을 세웠는데, 이래서야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다. 인간과 거인의 관점에 큰 차이가 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온 실수였다.
‘젠장, 막혔네.’
김유현은 몰래 입맛을 다신 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곧 안됐다는 얼굴로, 가엾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겨우 꺼낸 계획이 시작부터 수포로 돌아갔으니 얼른 수습해야만 했다.
(그렇구나. 아무래도 내가 오해하고 있었나 보네.)
(그럼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아아. 그냥…. 네 말에서 아버지를 무척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는 감정이 느껴졌거든. 그리고 우리 인간 세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굉장히 많이 일어나기도 하고.)
(아하. 그건 맞아요. 물론 아버지가 보고 싶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아, 아차.)
그때였다.
헤헤 웃으며 말하던 거인이 느닷없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김유현의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더욱 당혹한 기색을 비추며 입을 열었다.
(이, 인간 세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고요? 헤헤헤. 우, 우리는 그럴 걱정은 없어요. 우리는 제왕의 자리를 무조건 쿠샨 일족이 잇게 돼 있거든요. 그, 그리고 아직 제가 자격이 부족하거니와, 지, 지금 맡고 계신 분도 임시로 맡고 있을 뿐이고, 때, 때가 되면 저에게 넘겨주실 거예요. 그, 그렇죠.)
갑자기 말을 더듬고, 횡설수설하며, 속도도 빨라졌다. 누가 봐도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그러한 찰나, 김유현의 두 눈에 강렬한 빛이 스쳤다.
‘쿠샨’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잠깐 막혔던 머릿속에 새로운 길이 트였다.
(쿠샨 일족?)
적어도 거인에 관해서는 김유현도 김수현 정도로 알고 있다. 김수현은 1회 차의 기록만이 아니라, 2회 차에서 겪었던 경험까지 모조리 말해주었으니까. 거기다 전쟁도 같이 경험하지 않았는가.
(네, 네. 쿠샨, 쿠샨. 좋은 이름이죠?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지 않나요?)
(쿠샨….)
거인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으나 김유현은 돌연 깊이 생각에 잠긴 체 하며 쿠샨을 되뇌었다. 거인은 그런 김유현을 초조해하는 얼굴로 응시한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김유현이 아차 한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쿠샨…. 아, 맞아! 쿠샨, 쿠샨 토르. 나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이번에는 거인의, 아니 쿠샨의 두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에? 토, 토르라면…. 제왕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인데?)
(어어, 맞아 맞아. 확실히 쿠샨 토르였어.)
(아니, 잠시만요. 그 이름은 어떻게 알고 계세요? 저는 말한 적이 없는데요?)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소문으로 들어봤거든. 다른 대륙에서, 쿠샨 토르라는 거인이 인간이랑 함께 다닌다고. 그래, 확실해.)
(어, 언제요?)
(글쎄. 한 3, 4년 됐나?)
김유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말하자, 쿠샨의 얼굴에 더욱 큰 놀라움이 번진다.
(우, 우리 아버지가 나간 게 4년 전이에요!)
(그럼….)
김유현은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왜냐하면 나머지는 저 쿠샨이라는 일족의 거인이 해줄 테니까.
(그, 그분이 제 아버지일 거예요!)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 혹시 이전에 다른 거인이 나간 적은 없고?)
(없어요. 한 분도 없어요.)
(그럼 거의 확실하네. 이야, 신기하다. 이래서 세상이 좁다고 하는구나.)
김유현은 일부러 과장해서 말하며 손뼉을 쳤다.
(저, 저….)
(응?)
문득 쿠샨이 매우 애타는 목소리로 김유현을 불렀다. 굳이 듣지 않아도 뻔하다. 그렇게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데, 당연히 소식을 듣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흐음. 알고 싶나 봐?)
(다른 소식도 있어요?)
(최근에는 아니지만, 예전에 몇 개 들은 건 있어.)
(알려주세요!)
쿠샨이 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김유현은 팔짱을 끼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보였다.
(하하. 그런 모습을 보니까 맨입으로 알려주기가 싫어지는데?)
(에,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저 진짜 궁금하다는 말이에요.)
그러자 쿠샨의 얼굴에 눈에 띄게 실망한 빛이 그늘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쿠샨의 속이 달아오르기를 기다린 김유현은, 곧 전전긍긍해 하는 빛이 절정에 오름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혹시 협상이라고 알아?)
(협…? 상…?)
거인이 간신히 발음을 따라 한다. 아무래도 협상의 개념을 모르는 모양이다.
참 별것에서 발목이 잡힌다고 생각한 김유현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래. 서로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에 부합되는 결정을 하기 위해 상호 거래를 하는 거지.)
(……?)
(그러니까…. 예를 들어볼게. 너희가 그 날개 큰놈들이랑 싸워야 하는데, 어떤 사정이 생겨서 못 싸운다고 가정해보자고. 그럼 우리가 대신 싸워주는 대신, 너희는 우리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거야. 이 과정을 바로 협상이라고 하지.)
(아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해는 확실히 되네요.)
전투에 연관 지어 설명해주자 곧바로 이해하는 쿠샨이었다.
김유현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내 말은, 내가 알고 있는 소식을 너한테 알려주면, 너는 내 가벼운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 거야.)
(부탁이요?)
(물론 이 부탁은 어디까지나 네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칠 거고. 무리라고 생각되면 거절해도 좋아.)
(에, 제가 할 수 있는 선이라면…. 네, 좋아요!)
쿠샨은 생각할 것도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김유현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좋아.)
바로 이 순간.
(그럼 내 부탁은….)
마침내, 시작되었다.
앞으로 5일 후, 제 3지역의 공략이 끝날 때까지.
거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극의 밤이(Night Of Theater).
그 김수현조차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는 김유현의 능력이, 서서히 그 태동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
“오빠.”
“응?”
“오빠의 오빠는 어떤 사용자야?”
“…형?”
‘형이라.’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의아한 기분에 시선을 돌리자, 입가에 스튜 자국을 잔뜩 묻힌 채 나를 바라보는 이유정이 보였다. 거기다 바닥에 잔뜩 쌓여 있는 그릇까지 시야에 들어오자, 절로 한숨이 나온다.
‘에휴.’
지금은 식사 시간이 아니다. 야영 중 가장 중요한 불침번을 서는 중이니만큼, 적당히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곤히 자는 동료들을 지키려고 불침번을 서는 것인데, 저렇게 배부르게 먹으면 자연스럽게 졸릴게 아닌가.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먹는 것 자체는 뭐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새벽 불침번은 배고플 수도 있고, 적당한 섭취는 피로 회복에도 도움이 되니까.
‘그래도 좀 얌전하게 먹으면 안되나?’
건너편의 차소림은 정말 얌전하게 숟가락을 놀리는데, 이유정은 정말….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유정은 얼른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 큰 처녀가, 이렇게 묻히고 먹으면 어떡해.”
“응? 으읍, 으으읍!”
손을 내밀어 윗입술을 닦아주자, 이유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비틀다가 곧 얌전하게 변했다. 문득 어디선가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 됐다. 아무튼….”
이윽고 대충 닦아주고 손을 떼려는 찰나, 이유정이 갑작스레 또다시 아랫입술에 스튜를 묻혔다. 거기다 또 닦아달라는 듯 입술을 쭉 내밀기까지 한다. 나는 멍하니 이유정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긴. 위쪽을 닦아줬으니까, 아래쪽도 닦아달라 이거지. 봐봐. 아랫입술이 막 질투하는 중이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입술이 어떻게 질투를 하냐.”
“이렇게 하지~.”
그렇게 말한 이유정은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요리~조리 움직였다. 그리고 그 상태서 “나도 닦아주세요! 닦아달란 말이에요!”라고 우물우물 말하기까지. 그 모습이 자못 웃겨, 나는 결국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나 참, 녀석도. 알았다, 알았어.”
“히히.”
그렇게 아랫입술까지 마저 닦아주자, 이유정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떨어졌다. 그러자, 아까 느꼈던 시선이 더더욱 강해진다. 누구지? 차소림인가?
아무튼.
“그런데, 우리 형은 왜?”
“그냥. 궁금해서?”
그냥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유정은 심심해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뭐가 궁금한데?”
“음~. 어떤 사용자인지?”
어떤 사용자인지…. 이건 상당히 광범위한 질문인데.
나는 타닥타닥 불똥을 터뜨리는 모닥불을 잠시 바라봤다가, 머리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내 시커멓게 칠해진 밤하늘에, 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 형은….’
“대단하지. 아주 대단해.”
“헤, 오빠보다 대단해? 그 오빠가 오빠보다 더 세?”
“물론 무력은 내가 더 셀 거야. 하지만….”
“하지만~.”
이유정이 발을 들었다 놨다 하며 내 말을 따라 했다. 보아하니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은 것 같다.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것인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공략 자체는 나보다 더 잘할걸?”
“에? 말도 안 돼. 그 오빠가, 오빠보다 공략을 더 잘한다고?”
비로소 이유정의 입에서 의아해하는 탄성이 흘러나온다.
사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유정이 생각하는 형이 2회 차의 사용자라면, 내가 말한 형은 1회 차의 형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2회 차의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과, 압도적인 사용자 정보로 밀고 나갈 뿐이지, 순수 공략 실력을 비교해보면 형이 나보다 앞설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1회 차의 한소영보다도.
서로의 전성기를 비교해보면 그렇게 생각이 든다.
한소영과 형은 닮은 점도 있지만, 공략 방식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한소영이 과감한 결정과 상황에 따른 대처 능력, 그리고 신속한 진행이 특징이라면, 형은 정반대였다.
공략 자체는 조금 느린 감은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그려놓은 그림대로 판을 만들어놓고 시작한다. 마치 먹이를 잡아먹기 전 거미가 하는 행동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형의 공략하는 방식은 상당히 기상천외하다. 아니, 누구도 생각지 못하는 방법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아마 악마도 형을 가장 큰 걸림돌이라 여겨, 나를 이용해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형의 방법은…. 무섭지.’
탁 까놓고 말해서, 나는 형이 적이 아니라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형은, 그냥 힘으로 몰아붙여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진정으로 적이었다면, 아마 무척이나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그때였다.
“킥킥….”
한창 형의 생각을 하던 와중, 돌연 숨죽여 웃는 소리에 이어 나를 콕콕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건너편을 가리키는 이유정이 보였다.
‘얘는 또 왜 이러니….’
참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유정은 정말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건너편은 차소림이 앉아 있는 자리이며, 아까 묘한 시선이 느껴지던 방향이기도 했다. 이러면 또 상황이 궁금해지지 않는가.
나는 별생각 없이 맞은편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뭐, 별일이야 있겠느냐 마는.
그러나.
‘헐.’
이윽고 차소림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나는 크게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지, 지금 뭘 그렇게 열심히 바르고 있는 거야?’
“사, 사용자 차소림?”
너무나도 놀라웠던 터라,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응아?”
그러자 한창 무언가에 열중하던 차소림이 흠칫 몸을 떨더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그맣고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1초, 2초, 3초.
정확히 3초가 되는 순간, 차소림의 고개가 흡사 기계라도 된 듯 삐걱삐걱 움직이며 나를 돌아본다.
파르르, 애처롭게도 떨리는 입술. 거기다 입 주변에 덕지덕지 묻은 스튜 자국.
아니, 비단 입 주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입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마와 코까지 스튜가 묻어 있다. 그것도 먹다 묻은 자국이 아닌, 굉장히 정성스럽게 바른 듯한 자국이.
시선이 마주쳤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나는 일부러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러나 회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탁!
그저, 차소림의 손에 들려 있던 수저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을 뿐.
“아, 아….”
한순간, 멍해 보이는 차소림의 얼굴에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스쳤다. 그중에서는 ‘나 지금 어떡하면 좋아요?’라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기색도 섞여 있어,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냐고.
“아, 아닙니다!”
이윽고 허둥지둥 수저를 주운 차소림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두 눈동자에는 여전히 당황이 물결처럼 번져가고 있었지만.
“그, 그러니까…. 이, 이건….”
당황하지마. 그러니까 더 이상해 보이잖아.
그 순간이었다.
잠시 후, 돌연 차소림의 두 눈에 안광이 번쩍였다. 뭔가 변명, 아니 방법을 찾은 모양이다.
나는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며(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저냥 적당한 수준이면 장단을 맞춰주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그러는 게 서로 더 좋을 것 같으니까.
…아무튼. 자, 그럼 이제 말을 들어볼….
“예, 예! 그러니까, 지금 저는 화, 화장 중이었습니다!”
“푸!”
그 순간, 이유정은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최대한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
“끅…. 끅…. 흑….”
억지로 참고 있다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몸도 움찔움찔 떨고 있다. 이러지 말라고, 너는 지금 차소림을 두 번 죽이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탓할 수는 없다. 나조차도 순간적으로 터질뻔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차소림이, 이제는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의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크, 클랜 로드. 제, 제가 화장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에, 에?”
화장을 잘못한 게 아니라, 말을 잘못한 거겠지. 지금 무척이나 당황스러운지, 차소림은 평소 하지 않던 말실수까지 하는 중이었다. 문득 고개 숙인 유정에게서 “힉! 날 죽여…! 히힉! 차라리 날 죽이란 말이야…!”라는 말이 들려온다. 정말 어지간히도 참기 힘든 모양이다.
“아니, 아니! 그, 그러니까! 화장이 아닙니다!”
“흐…. 흑…. 힉…. 흐힉….”
“화장이 아니라, 위장 중이었습니다!”
“흐힝힝힝?!”
결국, 여기까지였다.
“깔깔깔깔깔깔깔깔!”
더 이상 참지 못한 이유정이, 미친 듯이 바닥을 구르며 지금껏 참아온 웃음을 한꺼번에 터뜨린 것이다. 아주 웃겨 죽겠는지, 눈물까지 쭉쭉 흘려낸다.
그리고 차소림은, 입술을 꾹 깨묾과 동시에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왜 그렇게 쳐다봐.
내, 내가 뭘 어쨌다고.
============================ 작품 후기 ============================
오늘 연참을 한 이유는…. 그냥 글 쓰는 게 재밌어서, 쓰다 보니 연참이 가능한 용량이 됐습니다. 부디 늦은 것에 대해서는 용서를. _(__)_
요즘 느끼는데, 제가 진짜 변태는 맞는가 봐요. 이번 소제목이 연극의 밤이잖아요? 다음 회부터 작중 캐릭터로 상대를 속이고, 기만을 할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의욕이 솟구치네요. 이히히히.
…그나저나 오늘 최소한 박동걸, 이신우, 이보림. 이 3명은 비주얼 노벨의 캐릭터 설정 작업을 해야 하는데, 언제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