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23
00622 Night Of Battle. =========================================================================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진동인줄 알았다.
쿵! 쿵! 쿵! 쿵!
그러나 지면에 심상찮은 진동이 추가로 전해져 왔을 때, 그제야 사용자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걸 느꼈을 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상태였다.
변화는 야영지 측면으로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빽빽한 수림 속에서부터 일어났다. 깜빡깜빡, 등불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점멸 현상이 일어나더니 갑자기 수림 사이로 몇 개의 밝은 빛이 드러난 것이다.
아니, 그저 밝은 빛이 아니었다. 이따금 깜빡깜빡 움직이며 진한 붉은 빛을 흘리는 그것은, 틀림없이 누군가의 눈동자였다. 붉은 안광을 번들거리는 눈동자들이 수림을 헤치고 점차 야영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붉은빛이 드러난 건 고작해야 서너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거리가 줄어들수록 붉은 안광이 점차 우수수 모습을 드러내더니, 종래에는 수십 개의 불빛이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다.
쿵, 우지끈! 쿵, 우지끈!
한 번 소리가 울릴 때마다 거대한 나무가 부러져 하릴없이 무너져 버린다. 그렇게 무너지는 수림 속에서 이내 불빛을 이루는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이 소리는?”
한창 회의를 엿듣고 있던 쿠샨은 요란한 소리들이 들려오자 기겁하며 시선을 돌렸다.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애초 이 지역은 쿠샨의 홈 그라운드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며 저 굉음도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낼 수 있는 소리였으니까. 말인즉, 오직 동족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으, 으아아아아악!”
이윽고 굉음이 뚝 끊김과 동시에 바깥에서 비명이라고 생각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비명을 질렀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 안 돼!”
쿠샨이 이를 악물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의를 엿듣고 나니 우선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기둥에 꽁꽁 묶인 탓에 옴짝달싹 도 할 수 없었다.
“거인이다! 거인이다!”
시시각각 비명이 커지고 소란스러움도 강해진다. 그에 따라 쿠샨의 마음도 계속 급해져만 갔다. 마침 식사 시간이었던 터라 팔의 속박은 풀려 있었다. 쿠샨은 지체 않고 자신을 구속하는 밧줄을 부여잡았다.
“끙…!”
힘껏 힘을 주었지만 마력의 힘으로 묶인 밧줄이 어디 쉽게 풀리겠는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밧줄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으며 쿠샨의 신체를 단단하게 조여왔다.
“끄윽…!”
그러나 쿠샨은 침음을 흘리며 더욱 세게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럴수록 복부에 시큰시큰한 감각이 느껴졌지만 쿠샨은 조금도 아랑곳 않으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자신이 가진 힘을 모두 쏟아 부었다.
찌직, 찌지직!
결국에는 쿠샨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우악스러울 정도의 근력에 밧줄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시원스럽게 찢어진 것이다. 사정없이 뜯겨진 밧줄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마침내 해방된 쿠샨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쿠샨은 여전히 들려오는 비명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한편, 같은 시각.
“이게 무슨 소란이죠?”
김유현의 천막에 모여 있던 사용자들이 하나같이 당황한 얼굴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다들 김유현이 건네준 기록 하나씩 들고 차례대로 소리 내서 읽던 도중이었는데, 뜬금없이 굉음이 들려오고 야영지가 어수선해진 것이다.
그때였다.
“크, 큰일났습니다! 거인들이 습격입니다!”
한 사내가 헐레벌떡 천막을 젖히고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김유현은 물론, 다른 사용자들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거인들의 습격이라고?”
“예, 예! 갑자기 서쪽 수림에서 모습을 드러내서…!”
서쪽 수림이라면 북부 원정대가 진군 불가 지역으로 지정해놓은 장소였다. 워낙 수풀이 울창하거니와,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이 가로막은 터라 굳이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헌데, 그곳에서 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서!”
그러나 사내가 생각할 시간도 없다는 듯 황급한 목소리로 입을 연 찰나였다.
“────────────!”
갑작스레 바깥에서 무시무시한 고함이 멀리멀리 울려 퍼지며 사용자들의 고막을 떠르르 뒤흔들었다. 어찌나 커다란 목소리인지 사용자들이 흡사 천둥이 치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크, 큰일입니다!”
이윽고 또 한 명의 사내가 방금 들어온 사내와 비슷한 말을 외치며 천막으로 도망치듯이 달려왔다.
“거,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까는 습격이라며!”
“아, 아닙니다! 습격 당할 뻔했는데, 작은 거인이 갑자기 나와서 거인들을 저지했습니다!”
“뭐, 뭐?”
사내는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도 새로운 소식을 전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용자들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당최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작은 거인이라느니 저지라느니 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김유현 또한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니 예상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너무 갑작스럽다고나 할까.
“나갑시다. 일단 나갑시다.”
어차피 지금 여기 있어봤자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바로 몸을 일으킨 후 망설임 없이 천막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제야 멀뚱히 앉아 있던 사용자들도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김유현을 따라 천막을 나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순간, 천막에 있던 사용자들은 머리를 끝까지 젖히고서야 사내들의 보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맙소사….”
서쪽을 응시한 사용자들 중에서 누군가 미약한 탄식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한 마디가 모든 사용자들의 심정을 대변할지도 모른다. 서쪽에 나타난 존재는 그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저걸…. 도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그들은 크다. 커도 정말 무지하게 크다. 가장 선두에 서 있는 형상은 쿠샨보다 2배는 돼 보이는 엄청난 몸집을 갖고 있다. 어쩌면 10미터도 넘을지도 모르는 크기였다.
군데군데 나뭇잎 조각이 묻어 있기는 했지만, 훤히 노출된 상체는 인간과 비슷한 피부 빛깔을 띠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눈이나 입, 손, 발 등 모든 것이 인간과 비슷했으나 유사한 것은 형상뿐. 부처님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축 늘어진 귓불이나 두 눈동자 사이의 드넓은 미간 등등, 실제 크기 자체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래, 그들은 신화 속에서나 전해지던 거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거인들 기백 이상이 서쪽 수림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상황은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Quid Inferorum Loqueris! Dimitte Me, Ut Citius Homo!”
“Et Quid Infernum, Quid Tibi Non Hic Agitur. Haec Sunt Hostes.”
당장에라도 덮칠 것만 같던 거인들은 야영지 외곽에서 걸음을 멈춘 채 조용히 대기하고 있다. 어느 거인은 뽑아온 게 분명한 나무를 움켜쥔 채, 또 어느 거인은 팔짱을 끼고 인간들을 지그시 노려보는 게 마치 누군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거인들의 습격을 저지한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쿠샨이었다.
“Cura Tibi! Et Curabo Me Ne Faciam Hoc!”
양팔을 좌우로 벌린 채 홀로 거인들을 가로막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며 가장 선두에 서 있는 거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얼굴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으나 목소리만큼은 필사적이었다.
“Abi, Semel Huc Ante Tempus, Huh?”
“Tu Vero Hic Agitur, Num Mentem.”
가장 큰 거인과 쿠샨의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사용자들은 조심조심 물러나며 거인들을 살폈다. 분명 거인들의 수는 고작 일백 남짓한 정도.
그러나 한 명 한 명이 내뿜는 위용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선두의 거인이 내뿜는 기백은 지금껏 겪어온 그 어느 괴물보다 막강하기 그지없다. 각자 무기를 꺼내 들며 경계하고는 있었지만, 낯에는 질렸다는 기색이 완연히 드러난 상태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Ut Liberet Te Cura Guam Ego Possem Gerere Pro Me!”
“Sed Hoc Verum Est?”
‘아차. 수정구.’
번뜩 정신을 차린 김유현이 서둘러 수정구를 찾으려는 찰나.
“HeuHeuHeuHeuHeuHeuHeuHeuHeuHeuHeuHeu….”
문득, 낮디 낮은 웃음이 사용자들의 귓전으로 고요히 흘러들었다.
김유현은 그제야 거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쿠샨과는 사뭇 다른 음성이다. 중후하면서도 웅혼한 힘이 느껴지는 귓속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라고나 할까?
홀로 10미터를 넘는 거대한 키와 다부진 이목구비, 그리고 우묵해 보이는 눈동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김유현은 거의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맨 앞에서 웃고 있는 저 거인이 바로 현재 거인들의 제왕이라는 것을.
“KeuHaHaHaHaHaHaHaHaHaHaHa!”
이어서 갑자기 커진 웃음소리가 야영지를 한 차례 폭풍처럼 휩쓸었다. 고막이 짜르르 울릴 정도의 소음에 사용자들이 인상을 찌푸린 순간, 돌연 거인이 웃음을 뚝 그치고는 마치 돌을 던지듯이 팔을 놀렸다. 그러자 손에서 떨어져 나온 무언가가 허우적거리며 허공을 날았다. 아까 거인들이 들어올 때 재수없게 잡힌 사용자였다.
철푸덕!
“흐, 흐아아악!”
사용자는 아직 살아있었다. 공교롭게도 흙탕물이 고인 곳에 첨벙 떨어지더니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도망쳐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자못 웃겼는지 거인들 사이로 또다시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그러나 진정으로 웃겨서 웃는 게 아닌, 명백한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Melius Est. Kuschani Successor Noster.”
싱거운 웃음을 터뜨린 선두의 거인은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자신들이 뚫고 들어온 수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돌연 반쯤 머리를 돌리고는 아직도 서 있는 쿠샨을 보며 입을 열었다.
“Ut Recte Agere. Certum Exspectat.”
(…하도록. 기다리고 있으마.)
뒤늦게 킨 수정구가 거인의 목소리를 번역해 들려주었다.
“Nos Autem Fratres! Ha, Ha, Ha!”
(가자 형제들이여! 하, 하, 하!)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거인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고, 다른 거인들도 하나하나 몸을 돌려 제왕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든 거인이 서쪽 수림으로 사라졌다.
“…….”
“…….”
폭풍이 들이닥친 후 남은 건, 그저 고요하기 짝이 없는 정적뿐.
그렇게 인간과 거인의 첫 만남은, 거인들이 먼저 물러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
깊은 밤, 그러나 아직 새벽이라 말하기에는 이른 시간. 야영지에는 사물의 흐릿한 윤곽만이 보일 정도의 어둑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어느새 비는 그쳤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을씨년스러운 적막함이 지면을 맴돌고 있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조용한 바람은 어딘가 모르게 스산한 기운을 품은 것만 같다.
(쿠샨.)
문득, 어디선가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식은 스튜의 냄새가 흐르는 어두운 천막 안, 홀로 밝게 빛나는 수정구가 소리의 근원지였다.
(네가…. 막아준 거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사내의 건너편에는 한 거대한 인영이 기둥을 등지고 앉아 있다. 김유현과 쿠샨이었다.
오늘 거인들이 북부 원정대의 야영지를 습격했다. 아니 습격하려는 찰나, 쿠샨이 나서자 그냥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는 김유현도 모른다. 그냥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추측만 할뿐, 자세한 사정을 아는 이는 따로 있었다.
잠시 후, 쿠샨이 자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김유현은 뜻 모를 한숨을 흘렸다.
(후유…. 그렇구나….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정말 깜짝 놀랐거든.)
(…….)
(아직도 화난 거야?)
(아니요.)
김유현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쿠샨은 곧바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응?)
(계속…. 하실 거예요?)
(…….)
계속. 뒷말이 생략되기는 했지만, 김유현이나 쿠샨이나 어떤 말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모르겠다.)
잠깐 생각하던 김유현이 돌연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마 그만둬야겠지.)
(그럼 돌아가시는 건가요?)
이어지는 말에 쿠샨은 긴장한 기분으로 물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
결국에는 무언의 긍정이라 여긴 쿠샨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 공략이라는 거. 꼭 해야 하는 건가요?)
(…해야지. 필요하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들려온다.
(욕심 때문인가요, 꼭 필요하기 때문인가요?)
(흠. 그거는 좀 어려운 질문인데.)
김유현이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굳이 말해보면, 각 인간들의 사정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사정이요?)
무슨 말이냐는 듯한 반문에 김유현이 살짝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멍해 보이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더니 얼핏 쿠샨을 가볍게 흘겼다.
(누구는 생존일 수도, 또 누구는 욕심일 수도…. 각 인간마다 다를 수 있다는 소리야.)
쿠샨은 머리를 갸웃했다. 이해가 안 갔다기 보다는, 문득 김유현의 사정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화제를 도로 원점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돌아갈 거야. 내일.)
김유현은 자포자기한 음성으로 간단히 대답했고, 쿠샨은 입을 물었다. 내일 인간들이 돌아간다고 한다. 아까 회의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나오고 있었다. 그러면….
(쿠샨.)
그때였다.
갑작스레 김유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상체만 일으킨 게 아니라, 아예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는 쿠샨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 김유현의 두 눈은 아까와는 다르게 형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그 기세를 느꼈는지 쿠샨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쿠샨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김유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친구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쿠샨은 저도 모르게 멍한 빛을 띠고 말았다. 설마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네…?)
김유현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너와 지내면서, 정말 즐거웠거든. 정말로, 정말로 말이야.)
쿠샨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쿠샨도 즐겁기는 했다. 김유현과 함께 지내면서 새로운 세상을 체험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친구. 그 개념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제껏 살아오면서 쿠샨은 친구 하나 사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자못 기분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김유현은 여전히 두 눈을 빛내며 쿠샨을 응시하고 있다. 예의 장난이 아닌, 진심이 깃든 얼굴. 그런 얼굴을 보고 있으니 딱히 나쁜 기분은 들지 않는다.
김유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이어서 손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친구로서 조언하마. 도망쳐라. 지금, 당장!)
딱!
손가락을 부딪친 소리가 울리며, 쿠샨의 몸을 속박하던 밧줄들이 모조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한순간에 자유를 되찾은 쿠샨의 두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그러나 쿠샨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김유현의 양손이 쿠샨의 어깨를 붙들었다.
(쿠샨. 잘 들어. 거인들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계획은 무산됐어. 오늘 회의에서 인간은 완전히 되돌아가는 것으로 결정 났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야. 비록 지금은 물러난다고 해도, 인간들은 곧 이 산맥을 다시 공략하러 올 거야.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인원으로, 또 막강한 화력으로.)
김유현은 굉장히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쿠샨 입장에서는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아까 천막에서 흘러나온 얘기들을 모두 엿들었으니까.
(이것뿐만이 아니야. 너를 데려가자고 하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건 절대로 좋은 의미가 아니다. 가면 틀림없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우선은 도망쳐라. 응? 듣고 있어?)
그러나 쿠샨이 정작 놀라 하는 건, 김유현이 그 사실 모두를 자신에게 고스란히 밝히고 있다는 것. 심지어 데려가자는 이야기까지도. 김유현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쿠샨은 아까 들었던 친구라는 말이 조금 더 깊숙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쿠샨이 김유현을 지그시 응시했다.
도망치라는 말을 들었다. 아마 아까 회의를 듣지 못했다면 정말 김유현의 말대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이렇게 헤어져버린다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
아니다. 이후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쿠샨으로서는 그냥 팔자 좋게 도망칠 수만은 없었다. 동족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해.’
온몸의 자유를 되찾았지만 쿠샨은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기둥을 등지고 앉은 채 미동도 않고 있다.
(그러면, 인간은 이제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겠다는 건가요?)
목소리가 달라진걸 느낀 걸까?
한동안 쿠샨을 빤히 바라보던 김유현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흘린 후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동안 너와 지내오면서 약간의 희망을 가지기는 했어.)
(희망이요?)
(그래. 너희는 우리와 상당히 비슷하거든. 지성이라는걸 갖고 있지.
그래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들과는 싸우지 않고, 서로 다투지 않고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마,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쿠샨이 재빠르게 맞장구 쳤다. 김유현도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해. 굳이 너희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길을 뚫을 수만 있다면, 서로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서로 거기서 나아가 교류도 하는 등. 상호 도와줄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원했다.)
아주 살짝 이기는 했지만, 쿠샨은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조금 어려운 말들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익숙한 터라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조금 다르기는 해도 아버지가 항상 해오던 말이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에 공감했고, 그래서 나는 너를 데리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그런데,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다.)
그러나 틀렸다는 말을 들은 순간, 쿠샨은 기분이 확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김유현의 입장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버지가 해오던 말들이 전면으로 부정 당하는 것 같았으니까.
(…아무튼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나직이 중얼거린 김유현은 쿠샨의 어깨에 힘을 주었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일어나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쿠샨은 전혀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최소한 자신이라도 살리겠다는 김유현의 생각을 알고 있고, 그 마음은 고마웠지만 쿠샨은 아직 제대로 된 이야기도 못 꺼낸 상태였으니까.
쿠샨이 머리를 도리도리 저으며 벌컥 외쳤다.
(하지만! 처음에는 대화할 생각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아까 들어온 거인들을 보고 너희 종족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이 변했다. 거인은 강해. 강해도 너무 강하다. 우리는 너희가 무섭다.)
(인간은 겁쟁이인가요? 무섭다고, 아니 무서우면 다른 종족과 대화가 불가능한 건가요?)
(겁쟁이라고? 아니! 그건 강자의 여유에 불과하다. 너희는 우리 입장을 몰라. 이건 힘의 차이가 너무나도 현격해. 이건 대화를 해볼만한 수준이…!)
거기까지 말을 잇던 김유현은 돌연 입을 꾹 깨물었다. 별안간 쿠샨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이 하릴없이 떨궈지고, 머리도 숙여졌다.
(…미안하다.)
그리고 김유현은 무언가 꾹 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제야 쿠샨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지했다. 조금 전 자신의 말이 김유현의 자존심에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입혔는지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절박하기도 했다. 아무리 쿠샨이라도, 이렇게 인간들과 함께 지내는 날이 흔한 일이 아닌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두 번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기회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다. 쿠샨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인간들이 돌아가면 종족의 멸망은 기정 사실화된다.
결국에는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눈앞의 사내를 움직이는 것.
물론 자신의 생각대로 될 가능성은 적겠지만, 쿠샨은 예비 제왕 후보이다. 다른 거인들과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종족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왔고, 자신도 나중에 똑같은 걱정을 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가만히 기다리는 것 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노력이라도 해보고 싶은 게 쿠샨의 입장이었다.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그러자 순간적으로 김유현의 어깨가 움찔했다.
(말 그대로, 몇 개월 후 인간들이 더 많이 몰려온다면 우리도 힘들어지겠죠. 아니, 틀림없이 멸망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친구라고 하셨으면서, 지금 우리 종족의 멸망을 그냥 지켜보시겠다는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약간씩 힐난하는 어조가 이어지자 자연스럽게 김유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쩔 수가 없잖아. 모든 거인이 너 같다면 좋겠지만, 아니잖아.)
이 말에 쿠샨은 잠깐 말문이 막히는걸 느꼈다. 김유현의 말은 예전 아버지가 산맥을 떠난 사건을 꼬집어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그, 그래도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 매요. 그럼 한 번 시도해볼 수는 있는 일이잖아요.)
(불가능해.)
(아니, 왜 자꾸….)
(쿠샨. 너는 지금 협상이라는 개념은커녕, 이 상황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아니, 애초에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주지를 않잖아. 그게 바로 배타적이라는 거야.)
김유현의 단언에 쿠샨의 머릿속에 의문이 차 올랐다.
‘우리 입장? 인간들의 입장?’
(협상이 성사되려면 서로 원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우리한테 원하는 게 없어. 그저 자기 자신들로만 해결하려고 하지.)
(물론 우리가 배타적인 점은 인정해요. 하지만, 오늘 보셨잖아요? 제가 오늘처럼 도와드릴 수 있다면, 한 번 이야기해보는 것쯤은…. 혀, 협상! 그래요. 협상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김유현한테 배운 말을 떠올린 쿠샨이 곧바로 외쳤다.
(으음.)
미약한 침음을 흘린 김유현이 잠시 고민에 빠진 기색을 보였다. 쿠샨의 얼굴에 혹시나 하는 빛이 스쳤다.
(아니. 힘들어.)
그러나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거절이었다.
(설령 네가 도와준다고는 해도,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무서우니까. 막말로 협상이 어그러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후 우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한 번 생각해봐.)
쿠샨이 미처 생각도 하기 전, 김유현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의 협상은, 최소한 서로가 비슷한 힘은 갖추고 있어야 해. 만에 하나 협상이 어그러졌다고 해도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비슷한 힘이. 그래야 적어도 시도라도 해볼 자격이 생기는 거다. 그게 안 된다면 한쪽의 일방적인 죽음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김유현의 말은 간단했다. 어찌어찌 대화의 장이 마련된다고 쳐도, 그게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소리였다. 오히려 거인들을 보면 거절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면 협상이 어그러진 후 거인들이 인간들을 고이 보내 줄까? 안녕히 가라고 손이라도 흔들어 줄까?
아니.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오늘도 인간들을 습격했다가 쿠샨이 나섬으로써 간신히 돌려보내지 않았는가.
말인즉, 김유현의 걱정하는 건 바로 그 이후에 벌어질 상황이었다.
‘이게…. 인간들의 입장….’
강자가 아닌, 약자의 입장. 아까 김유현이 외친 강자로서의 여유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쿠샨이었다.
(너희는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우리는 너희와 협상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가 없다는 거다.)
그러므로 협상을 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은, 서로 엇비슷한 힘을 갖추었을 때야 가능하다.
그렇게 말한 김유현은.
(미안하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이고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막의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로 방법이 없는 걸까?’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멀어지는 김유현의 등을 보며 쿠샨의 머릿속이 삽시간에 복잡해졌다.
그러다 문득, 뇌리에 여러 가지 말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너는 지금 협상이라는 개념은커녕, 이 상황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아니, 애초에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주지를 않잖아. 그게 바로 배타적이라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의 협상은, 최소한 서로가 비슷한 힘은 갖추고 있어야 해. 그래야 적어도 시도라도 해볼 자격이 생기는 거다.’
김유현의 말이.
‘장담컨대, 10만 이상도 가능합니다. 이미 길도 터놨으니 다시 오기도 쉬울 테고, 거인을 상대할 다른 마법이나 도구도 만들어올 수 있겠지요.’
‘지금 여기서 잠깐만 물러나면, 몇 개월 후 우리는 확실하게 거인을 멸망시킬 수 있어요.’
인간들의 말이.
‘지금처럼 무조건 상대를 배척하고, 또 무조건 우리가 최고라는 인식은 잘못됐어.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언젠가 길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바로 멸망뿐일 게다.’
‘예전의 영광은 과거에 불과하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질 뿐이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더 나아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해. 그래서 나가야만 한다는 거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말이 뇌리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방법이 있어!’
쿠샨이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잠시만요!)
쿠샨이 큰 목소리로 외치며 김유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김유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천천히 다리를 움직이며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쿠샨이 한 번 더 외쳤다.
(방법이, 방법이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방법이!)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김유현의 몸이 우뚝 정지했다.
(…방법?)
(네! 서로의 힘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까요!)
쿠샨의 말이 이어졌다.
김유현은 여전히 입구 방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씨익.
김유현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드디어, 드디어 원하던 이야기가 나왔다.
============================ 작품 후기 ============================
아, 죄송합니다. 오늘 많이 늦었죠? 내용이 설마 이 정도로 많아질 줄은 몰랐습니다. _(__)_
원래는 다음에 김수현의 시점까지 적고 2편으로 나눠 올릴 계획이었는데, 더 이상 쓸 여력이 나지가 않더라고요. 하하하. 사실 지금도 정신이 약간 멍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한소영 일러스트 제안서를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 잘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_ㅠ
독자 분들 모두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편안한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