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30
00629 ShowDown. =========================================================================
고요하다.
아니, 고요하지 않다.
고함치는 소리, 쿵쿵거리는 소리, 무언가 쨍 하고 부딪치는 소리, 비명을 지르는 소리 등등. 주변은 분명 고요하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있는 상황이다.
그러할진대 조용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차분히 시선을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4미터를 넘는 키에 온몸을 이루는 근육.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와 오른손에 쥔 커다란 망치. 거기다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광포(狂暴)하면서도 신성한 기운과 마주하고 있으면, 그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저 거인이 그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반신(DemiGod)에 해당하는 힘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그래. 새로이 각성한 쿠샨 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의 제왕은 우리와 약 20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무조건 돌격만 할 줄 아는 괴물과, 상황을 관찰하고 탐색전을 할 줄 아는 괴물이 있다면, 당연히 후자가 더욱 까다로운 괴물이다. 왜냐하면 최소한의 이성은 살아있다는 말이었기에.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높이면서도 나는 묘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동족의 죽음 때문에 그런 걸까. 쿠샨 토르는 우리를 지그시 노려보면서도 끊임없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초리가 나를 향하고 있지는 않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 저렇게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꼭 1회 차 형을 잃은 후의 나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때였다.
“아무래도 곧 올 것 같다.”
공찬호가 수라마창을 한 번 크게 회전시키고는 양손으로 단단히 부여잡았다.
“탐색전은 생각도 하지 마. 처음부터 무조건 전력으로 가야 한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혹시나 싶어 말을 걸자, 공찬호가 창을 상단으로 끌어올리는 자세를 잡으며 대답한다.
그러자 쿠샨 토르 또한 묠니르를 서서히 들어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전신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운의 농도가 훨씬 짙어졌다. 마치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활화산 같은 기운에, 공기마저 팽팽해지는 게 느껴졌다. 무의식 중 마른침이 넘어간다.
“쿠샨….”
돌연 형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쿵….
그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쿠샨 토르가 느릿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쿠아아앙!”
별안간 쿠샨 토르가 지상을 미끄러지듯이 가르며 달려들었다. 20미터의 간격을 한순간에 무로 돌려버리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돌진!
공찬호의 눈이 크게 떠지는가 싶더니 황급히 수라마창을 정수리로 올린다.
카앙!
수라마창과 묠니르가 충돌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끓던 대기 중의 공기가, 마침내 폭발했다.
“끄윽…!”
지면에 굳건히 서 있던 공찬호의 발이 그대로 초원을 푹 파고든다. 단순히 내리쳐진 일격을 막았을 뿐인데, 지면이 푹푹 파이며 버티기 힘들다는 듯 격한 신음을 흘리고 있다.
첫 격돌에서는 쿠샨 토르가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그러한 찰나, 약간 숙였던 쿠샨 토르의 눈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묠니르가 그대로 하늘 높이 올라간다. 그제야 해방된 공찬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살짝 비틀거렸다.
그러나 해방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미처 자세를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쿠샨 토르가 거의 미쳐 발광한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묠니르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묠니르가 포효한다. 한 번 내리쳐질 때마다 충돌의 여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공기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이제 겨우 5합을 겨뤘을 뿐인데 주변 지면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들썩들썩 젖혀지고 있다.
쿠샨 토르는 마치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때려 넣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공찬호는 겨우겨우 하나씩 쳐내고는 있었지만, 말 그대로 간신히 막는 것에 불과했다. 패색은 확연하게 짙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쓰다듬었다.
본능은 도와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성은 아직이라고 말하고 있다. 쿠샨 토르의 왼팔이 그 증거였다. 첫 격돌 후 계속해서 걸음을 움직여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조금씩 몸을 틀거나 왼손을 흔들며 위치를 바꾸고 있다. 나를 인지하고 경계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크악!”
그 순간 공찬호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크게 튕겨 나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칼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이제는 기회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 몸을 날렸다. 그러자마자 역시나 쿠샨 토르가 나를 돌아본다. 하지만 어차피 예상하고 있던 일.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달리는 속도에 가속을 붙이자, 비로소 완전히 몸을 돌린 쿠샨 토르가 정면으로 묠니르를 내밀었다.
이윽고 사정거리에 진입한 순간, 옆으로 한껏 젖혀진 묠니르가 내가 들어오는 때에 맞춰 후려갈기듯이 짓쳐 들어온다. 공격에 동반된 바람에 머리칼에 세차게 나부낀다. 그 어떤 기교도 없는 눈에 훤히 보이는 공격.
하지만, 그렇기에 방심할 수 없다. 단순한 공격이지만 군더더기가 없으며, 깃들어 있는 파괴력은 내가 도저히 상대할만한 수준이 아니다.
아니, 상대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이형환위를 사용했다. 쿠샨 토르의 눈이 내 잔상에 팔린 사이, 옆쪽으로 돌아가 옆구리를 찌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돌아간 순간, 나는 잠깐이지만 망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치고 들어오는 주먹 쥔 손이 보였기 때문에.
후웅!
예상치 못한 공격이라서 그런 걸까? 주먹이 마치 슬로우 마법에라도 걸린 양 천천히 다가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반응 속도가 빠른 건지, 아니면 이형환위가 간파 당한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솥뚜껑만한 손이 내 정수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
그렇게 주먹이 내 머리를 때리기 직전이었다.
“안 돼!”
– 피해!
형과 화정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고.
번쩍!
폭발하듯 터져 나온 빛무리에 시야게 하얗게 물들었다. 안력을 돋우자 주먹이 시꺼멓게 그을린 채, 찡그린 얼굴로 주춤 물러나는 쿠샨 토르가 보였다.
‘기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순간적으로 발을 내질렀다.
– 그, 그냥 물러나!
퍽!
순간 화정의 뒤늦은 외침이 들려왔지만, 발은 여지없이 거인의 가슴을 강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쿠샨 토르는 별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여전히 번쩍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 피하라고 했잖아! 이 멍청한 자식아!
쐐애애액!
돌연 화정이 외침이 이어지는 동시에,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한껏 뒤로 젖히자 무언가가 내 콧등을 싹 베고 지나갔다. 그것이 묠니르임을 인지한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 피해, 피해, 피해, 피해! 제발 피해! 이놈이 어떤 놈 인지나 알아? 아니, 애당초 저놈은 너를 노리고 있었단 말이야!
‘뭐라고?’
나는 반문함과 동시에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쿠샨 토르는 내가 물러나는걸 봤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묠니르를 휘둘러온다.
“흡!”
일순 역으로 텀블링을 돌아 간신히 손을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마주해야 했던 건, 허공에 떠오른 나를 걷어차려는 발길질이었다.
– 이형환위!
화정의 외침과 동시에 나는 이형환위를 사용해 지면으로 착지를 시도했다.
간신히 지상에 발을 붙이자, 허공의 잔상을 후리고 지나가는…. 아니, 멈췄다?
허공으로 올라가던 쿠샨 토르의 발길질이 멈췄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채 반응할 틈도 없이 그대로 아래로 내리 꽂힌다. 나는 그대로 흙 바닥을 굴렀다.
꽈앙!
직격은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여파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발이 지상을 폭격한 순간, 지면이 쩍쩍 갈라지며 근원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충격파가 나를 덮쳐든 것이다. 말 그대로, 순수한 물리력으로 이룬 파괴 행사였다.
몸은 물론 시야도 미친 듯이 흔들리고, 백색 소음이 고막을 강하게 울리며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마치 지진 난 지역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기분.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윽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
차차 잡히는 시야에 들어온 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켜 올려진 묠니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저건, 피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묠니르가 꿈틀 움직였을 때였다.
땅, 따다당!
어디선가 빛살처럼 날아온 서너 발의 화살이 쿠샨 토르의 얼굴을 정확히 가격했다. 불의의 일격이라서 그런지, 쿠샨 토르가 낯을 크게 찌푸리며 반의 반 걸음 정도 물러났다.
비록 한 발도 파고들지는 못하고 튕겨 나가기는 했으나, 거인의 제왕을 살짝 물러나게 만들 정도의 위력이다. 바로 몸을 일으키며 흘끗 보자, 저쪽에서 무릎을 꿇은 채 석궁을 겨누고 있는 선유운이 보였다.
그 틈을 타서 뒤로 훌쩍 물러난 찰나, 어딜 가냐는 듯 쿠샨 토르가 나를 노려본다.
그 순간이었다.
휘리릭! 휘리릭!
갑작스레 쿠샨 토르의 주변으로 그림자 수십 개가 치솟더니 마치 원을 그리듯이 몸을 부드러이 휘감았다. 그리고 사방으로 잡아당기는 동시에, 쿠샨 토르의 목 뒤에서 앙칼진 눈을 한 고연주가 불쑥 솟아올랐다. 양다리로 목을 단단히 감고는 오른손에 든 단검을 재빠르게 찔러 넣는다.
그러나 쿠샨 토르는 가볍게 목을 젖혀 공격을 피하고는, 몸을 있는 힘껏 뒤틀어 그림자 구속을 모조리 끊어버렸다. 어마어마한 순발력.
그러자 고연주는 혀를 한 번 차더니 나를 보며 눈을 찡긋한 후,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쿠샨 토르는 방해 받은 데 무척이나 화가 났는지 구속이 풀리자마자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고연주는 물론, 나 또한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한 상태였다.
잠시 후, 거인의 얼굴에 약간 멍청해 보이는 기색이 스쳤다.
나는 콧등에 흐르는 피를 쓱 닦고 나서 아직도 나를 노려보는 쿠샨 토르를 응시했다. 거칠어진 숨을 추스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삽시간에 1회전이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3번이나 위기를 맞고 말았다. 물론 그때그때 적절히 이어진 원호에 어찌어찌 넘길 수는 있었지만….
‘진짜로 장난이 아니구나.’
반신이라고 마볼로와 동급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오산이었다. 확실히 가짜 반신과 진짜 반신은 그 궤를 달리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거의 모든 행사를 순수 근력으로 해버리니 내가 자랑하는 마법 저항도 이번만큼은 아무 소용도 없다.
거기다 근력, 내구, 체력, 민첩 등 신체 계열 능력은 물론, 순발력이나 상황 판단을 일컫는 순수 전투 능력조차도 나를 앞서고 있다. 2회 차에 들어서 처음으로 나보다 모든 것을 앞서는 근접 계열의 적을 만난 것이다.
아니. 1, 2회 차를 통틀어서도 이 정도의 적을 만난 기억은 드물다. 그나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지옥 대공 정도는 되야…. 아, 그년 정도라면 아마 저놈도 가볍게 찜 쪄 먹겠지?
…아무튼.
1회전에서는 정신 없이 밀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그동안 적어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충분한 치료를 받았는지, 때마침 공찬호도 건너편에서 성난 황소처럼 달려오는 게 보였다.
쿠샨 토르는, 아직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킨 후 왼손에 검을 하나 추가로 쥐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마력을 밀어 넣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마검 칼리고 아브락사스(Caligo Abraxas)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변화가 시작됩니다.』
키아아아아아아아!
마검이 울부짖는 소리가 2회전의 시작을 알렸다.
이내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가공할(可恐) 어둠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반격의 시작이다.
============================ 작품 후기 ============================
비비앙아 미안해. ㅜ.ㅠ 너의 마수 군단을 출현시키지 못했어.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