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35
00634 낯 뜨거운 전조(?).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얼마나,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모르겠다. 오직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먹구름 낀 하늘과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뿐.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울음처럼 비가 내려온다. 마치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기라도 하듯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온몸으로 받으며 나는 꿈결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말 그대로 꿈을 꾸듯 어렴풋한 기분이 전신을 지배한다.
이상한 일이었다. 힘겨운 상대를 이겼으면 응당 기쁘거나 후련해야 정상인데, 왜 자꾸만 묘한 기분이 드는 걸까?
문득, 등에서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빗물이 모여 고인 웅덩이가 흘러온 모양. 이내 지면에 흐르는 피와 빗물이 섞여, 썩 유쾌하지 못한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
초원은 고요하다. 아니, 조금 전부터 고요해졌다.
정적이 흐르는 초원의 중앙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쿠샨 토르가 사망했다.
쿠샨 토르를 최대한 빠르게 처리한 건 확실히 정답이었다. 이후 전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인들의 제왕이니만큼 사기 저하 효과도 볼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득은 괴조들이 돌아섰다는 것.
추측하건대, 쿠샨 토르가 사망한 순간 강제 복종 효과도 같이 풀렸을 것이다. 정신을 차린 괴조들은 전장에서 이탈하는 길을 선택했다.
말인즉, 괴조 무리를 상대하던 마수 군단을 지상에 증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예상대로 비비앙은 곧바로 마수 군단을 투입시켰고, 사용자들과 힘을 합쳐 거인들을 공격했다.
아마 그 시점부터 전황이 반전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초원의 중앙에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전쟁에 직접 참여한 입장은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관망하기만 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클랜원들을 찾아 도와주고는 싶었으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쿠샨 토르와의 전투 직후, 갑자기 마력 탈진 현상이 찾아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만 했으니까.
공찬호에게 죽은 듯 기절한 형을 부탁한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래. 그저 그게 전부….
– 와아아아….
그때였다.
몽롱한 와중 상념에 잠겨있던 찰나, 돌연 어디선가 여러 사람이 외치는 함성이 들려왔다.
함성이라.
지금 함성이 들려오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이긴 건가? 아니, 끝난 건가?’
이겼으니 함성을 지르지, 설마 졌는데 환호할 리는 없잖은가.
띠링!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맑은 신호음이 귓전을 울렸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메시지 음이었다.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전설의 업적!』
『사용자 김수현 외 6명은 거인들의 제왕인 쿠샨 토르를 처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신화 시절, 거신 전쟁의 주역이었던 쿠샨 토르. 그 시절 거인들의 제왕은 지상 모든 존재의 경외를 받던 지상의 지배자였습니다. 비록 현재는 저주로 힘이 약화됐다고는 하나, 인간으로서 쿠샨 토르의 존재를 처치한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사용자 김수현 외 6명에게 60.000 Gold Point를 부여합니다!』
이윽고 허공에 주르륵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응? 전설의 업적? 이게 지금 여기 왜 나와?’
대단한, 엄청난, 전무후무한, 전설 등등 업적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 전설 급 업적은 총 8개로 나뉘는 등급 중 2번째에 해당하는 매우 높은 등급으로, 나도 1회 차 때 딱 3번밖에 쌓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아니, 아니지. 전설 이상 가는 업적이라고 해봤자 제로 코드를 얻었을 때밖에 없으니, 사실상 전설 등급이 가장 높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무튼 업적의 등급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보상이 무척이나 빵빵 하거니와, 이것저것 추가로 챙겨주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설의 업적 보상이 겨우 6만 포인트면 엄청 짠 건데….’
띠링!
그러자 마침 메시지가 추가로 출력되기 시작해, 나는 우선 읽어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보상 결과를 정정합니다. 쿠샨 토르가 ‘저주’ 상태가 아닌, ‘반신’으로 각성한 상태에서 처치했음을 확인합니다. 기존 Gold Point 보상의 100배를 곱한 만큼의 수치가 새로이 계산됩니다. 총 보상은 6.000.000 Gold Point입니다.』
『그러나 쿠샨 토르의 각성 원인을 제공한 사용자 김유현은 분배에서 제외됩니다. 그리하여 총 6등분으로, 각 사용자당 1.000.000 Gold Point를 분배 받습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각 사용자의 공헌도에 따라 추가 Gold Point를 지급합니다. 1위. 김수현(78%)…. 총 보상 Gold Point의 78%(4.680.000 Gold Point)를 추가로 지급합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막타’를 친 사용자 김수현에게 50.000 Gold Point를 추가로 지급합니다!』
‘헐.’
그리고 나머지 4개의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나는 넋을 잃고 허공을 응시했다.
다른 건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이번 보상으로 얻은 GP만 세 자릿수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전투로.
‘수당 한 번 후하네.’
이 정도라면…. 지금껏 벌어둔 GP도 적잖은 편이니, 언제라도 사용자 상점에서 즐거운 쇼핑을 할 수 있으리라.
뭐, 지금은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허공을 가득 채운 메시지를 하나하나 지우기 시작했다.
띠링!
그러나 마지막 메시지를 지운 순간, 돌연 또 하나의 메시지가 허공에 출력됐다.
『사용자 김수현이 ‘신살자.’ 칭호를 획득합니다. 해당 칭호에 관한 효과를 알고 싶으시면 인근 신전을 방문해주십시오.』
‘신살자? 그리고 진명이 아니고 칭호?’
칭호는 나도 처음 확인하는 시스템 이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사용자 정보를 띄우려는 찰나였다.
“오빠, 오빠! 어디 있어! 대답해 오빠!”
문득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정의 음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사방에서 들려오던 함성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그 대신 초원 곳곳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소리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기척들이 느껴지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전장 정리에 들어갔구나.’
전장 정리. 말인즉, 정말로 전쟁이 끝났다는 소리였다.
“오빠~. 오빠~?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응? 제발 대답 좀 해봐….”
그렇게나 걱정이 되는지, 애달프게도 나를 찾아 다니는 이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 나도 덩달아 걱정이 이는 걸 느꼈다.
아까 치료를 부탁했다고는 하나, 안솔이나 백한결, 형의 상태가 어떤지 한 번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슬슬 일어날 때였다.
그리하여 나는 천천히, 힘겹게나마 몸을 일으켰다.
*
안솔은 자고 있었다. 아니,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온몸에 깨끗한 천을 감고 있기는 했지만, 꼭 감은 두 눈과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본다면 누구나 푹 자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3자가 보기에.
‘수현…. 어떡하면 좋아요? 우리 솔이가….’
‘치료는 마쳤습니다. 우선은 경과를 지켜보는 수밖에요.’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안솔은 현재 자신의 상태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는 수현은요. 수현도 많이 다치지 않았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마력 탈진 현상만 일어났을 뿐이니, 푹 쉬면 그만입니다.’
분명히 정신도 깨어있고, 주변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도 어렴풋하게나마 들려온다.
‘아차. 아주버님은요? 들어보니 아주버님도 굉장히 심한 상처를….’
‘이미 다녀왔습니다. 상처가 심하기는 한데, 다행히 목숨에 지장은 없다고 하네요. 솜씨 좋은 사제들도 붙어있고, 또 강한 사람이기도 하니…. 조만간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지금처럼.
그런데 문제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눈을 뜨려고 해도 떠지지 않고, 팔이나 다리를 움직이려고 해도 꼼짝도 않는다. 꼭 몸의 통제권을 빼앗긴 기분이랄까?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하지만 솔이가…. 강한 타격으로 쇼크를 받아 혼수 상태에 빠진 거면, 방법이 없는 거 아니에요? 설정이 아니잖아요.’
‘…우선은 지켜보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좌우간, 그러면서도 의식은 깨어있으니 진정으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
안솔은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려 무진 애를 썼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간간이 들려오던 대화조차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낑낑대던 안솔은, 결국 제풀에 지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온몸에 잔뜩 주던 힘을 일시에 풀어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
정말 갑작스럽게, 안솔은 전신이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
편안한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편안하다는 기분을 느꼈다는 게 자못 생소하게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이윽고 사지를 움직여본 안솔이 살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사방에 들어찬 어둠을 확인한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여기는 또 어디일까.
말 그대로, 안솔이 서 있는 주변은 어두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대한 공간은 검은 장막이라도 두른 듯 온통 칠흑 색으로 칠해져 있다. 거기다 어떠한 기척도 들려오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기운마저 감돌고 있었다.
잠시 후,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던 안솔의 두 눈에 미약한 이채가 스쳤다.
‘여기는….’
안솔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 아차 한 얼굴로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았다.
그랬다.
안솔은 이 어둠 일색의 공간에 처음 온 게 아니었다. 두 번, 아니 이번이 세 번째.
이윽고 한참 동안 공간을 둘러보던 안솔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던 걸음이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췄다.
‘맞아. 여기서 어느 여인이 도와달라고 했었어.’
첫 번째 여인의 정체. 괴물에게 임신 당한 채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여인들.
‘여기서는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괴물을 만났고.’
두 번째 괴물의 정체. 구덩이를 지배하던 파더. 그러나 김수현이 간단히 물리쳤다.
‘여기는 크고, 신성한 기운을 흘리는 괴물이 있었지?’
세 번째 괴물의 정체. 거인들의 제왕 쿠샨 토르. 상당히 고전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김수현이 물리쳤다.
‘그리고 여기는….’
안솔의 걸음이 다시금 멈췄다.
이제는 안솔도 모르는 지역이다.
아니, 불안하다고 해야 할까?
두 번째, 세 번째는 모두 김수현이 구해줬지만 여기서부터는 아니었다.
안솔이 기억하는 꿈의 내용에 따르면, 여기서는 앞서 걸어가던 김수현이 느닷없이 사라졌다. 그때 안솔이 본 거라고는 블랙홀 같은 커다란 구멍뿐.
그리고, 그 구멍은 지금도 있었다.
안솔의 바로 눈앞에.
‘…으.’
볼까, 말까?
한참 동안 고민하던 안솔의 낯에 돌연 결연한 빛이 서렸다. 흰 목 울대가 꼴깍 움직였다.
잠시 후, 안솔이 비로소 고개를 빠끔 내밀어 블랙홀 안을 쳐다보았다. 이어서 완전히 안을 들여다본 찰나, 긴장감으로 가득 찼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화륵, 화르륵!
블랙홀 안에는 두 개의 불꽃이 서로 공존하고 있었다.
왼쪽은 무척이나 따뜻한, 안솔에게도 익숙한 기운을 품은 불꽃.
오른쪽은 감히 측정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기운을 발산하는 불꽃.
서로 상극의 기운을 가진 두 불꽃이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건, 두 상극의 불꽃이 서로 뒤엉켜 있다는 것.
그냥 서로 닿아있는 정도가 아니다. 마치 서로를 탐하기라도 하듯이 정신 없이 움직인다. 이따금 따뜻한 불꽃이 무언가를 찌르듯이 공격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파괴적인 불꽃은 어떤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첫날밤을 치르는 새색시처럼 수줍고 얌전하게 받아들일 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화륵, 화르륵!
한참을 물고 빨던 두 불꽃이 동시에 커다랗게 일어나더니.
– 응애…. 응애….
어디선가, 아기의 귀여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안솔의 정수리에 수십 개의 물음표가 나타났다. 얼굴은 더없이 얼빠진 빛을 띠고 있다. 블랙홀 안의 상황이 당최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차라리 두 불꽃이 역할이 바뀌었다면 느껴지는 기운상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화륵~. 화르륵~.
그렇게 두 불꽃이 알콩달콩 서로를 뜨겁게 달구는 동안.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안솔은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어두운 공간에서 홀로 비명을 질렀다.
물론 현재로서는 그 비명에 답할 길은 없다.
그저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을 뿐.
…어쩌면,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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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블랙홀을 구경하던 흑염(검은색 불꽃.) : (시무룩)힝…. 목숨까지 걸면서 준비했는데….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