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37
00636 하챠르의 물건. =========================================================================
서북 원정대가 거인들의 터전에 도착했다.
어제 김수현한테 말했던 대로, 김유현은 목표한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행동을 개시했다. 공식적으로 제 3지역 공략의 종료를 알리고, 곧바로 요새 건설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김유현은 우선 거인들의 터전을 정리하는데 사용자들의 손을 빌렸다. 요새를 최대한 빠르게 건설하고 싶다는 명분으로.
그러나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사용자들은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동료를 잃는 아픔을 맛봤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리는 그다지 위안거리가 되지 못한다. 단 하나 상처를 달랠 수 있는 게 있다면, 단연코 보상이 특효약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터전을 정리하면서 얻는 보상은 분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손대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그러나 수천 명 모두가 그 원칙을 지킬 것이라 기대하는 건, 사실 상당히 요원하거니와 가능성 낮은 일이다.
예를 들어 묠니르 같은 커다란 성과는 어쩔 수 없다손 쳐도, 새알만한 보석은 서너 알 몰래 챙겨도 별다른 티가 나지 않는다. 탁 까놓고 말해서,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현재 터전을 정리하는 사용자들은 크게 3가지 성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과 발견 시 착실히 신고하는 사용자.
성과 발견 시 우선 주변부터 둘러보는 사용자.
성과 은닉을 노리고 처음부터 개인 행동을 하는 사용자.
특히 세 번째의 경우는 궁수나 암살자 클래스가 많은 편이다. 직업 특성상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 드러난 성과뿐이 아닌 숨겨진 성과들도 곧잘 발견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홀로 터전의 외진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내처럼.
기실 거인들의 제왕이 사용하던 장소처럼, 좋은 성과는 통상적으로 중앙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내가 외진 곳으로 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중앙은 애당초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몰리니만큼 은닉하려는 행동에 상당한 제한을 받는다.
그러느니 좋은 성과를 포기하고서라도, 비교적 노출될 걱정이 적은 외진 곳으로 향하는 게 더 낫다.
그렇게 신속하게 발을 놀리던 사내의 걸음이 멈춘 곳은, 터전 중앙과는 꽤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 캠프처럼 보이는 장소를 발견했을 때였다. 물론 실상은 한 거인이 거주하던 천막에 불과했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2~4인용 캠프라 봐도 좋을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사내는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대충 찢어 걸쳐놓은 게 분명한 가죽을 열어젖혔다.
이윽고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간 순간, 코를 푹 찌르고 들어오는 익은 가죽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늙은 놈이 쓰던 방인가? 냄새 한 번 고약하네.”
캠프 내부는 지름이 30미터 정도로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천장은 때가 낀 가죽으로 덮여있고, 벽 또한 줄에 걸린 가죽으로 가려져 있다. 지면에는 거무스름한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마치 원시 시대의 움막을 보는 듯했다.
언뜻 보면 딱히 별다른 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내가 줄에 걸린 가죽을 둘러본 순간, 찡그리고 있던 눈매가 활짝 호선을 그렸다. 가죽을 뚫고 튀어나온 뼈 걸이에, 윤기가 찰찰 흐르는 목걸이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오, 비싸 보이는 거 발견.”
사내가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목걸이를 잡아챘다. 뼈로 이루어진 싸구려 장식이 눈에 밟혔지만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알알이 박힌 알 굵은 보석들이 시뻘건 빛을 번쩍번쩍 뿜어내며 자신을 뽐내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못해도 금화 3천 개는 되겠는데. 시작이 좋네.”
이내 목걸이를 품속에 고이 넣은 사내는 천천히 캠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5분이 지나도록 사내는 별다른 성과를 발견하지 못했다. 괴물의 고기나 괴조의 것으로 보이는 눈알 등이 간간이 보였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하등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염병할.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더니.”
사내는 5분을 더 추가로 둘러본 후 시큰둥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뭔가 엄청난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실용적인 장비 하나 건지지 못했다는 사실에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작 목걸이 하나로는 사내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한참이나 부족했다.
결국 더 찾기를 포기한 사내는 이만 나가기로 마음먹고 몸을 돌렸다.
“에이, 씨발.”
마침 아까 훑었던 낙엽 더미가 눈에 들어와 사내는 씨근거리며 발길질을 했다. 이어서 발끝이 낙엽 더미를 강타했을 때였다.
팍!
무언가 툭, 걸리는 느낌이 발끝에서 전해졌다.
“응?”
사내 또한 이상한 감각을 느꼈는지 두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윽고 사내의 시선이 살짝 걷힌 낙엽 속 둥글게 솟아오른 흙더미를 발견했다. 일견 무덤의 모양을 보이는 흙더미는 보통 접시만한 크기를 보이고 있었다.
“이건…?”
멍하니 중얼거리던 사내의 두 눈에 별안간 이채가 스쳤다.
잠시 후, 황급히 엎드린 사내가 두 손으로 낙엽을 치우고 흙을 조심스럽게 쓸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외부에서 인기척이 하나 둘 잡혀오기 시작하자, 사내는 급한 마음에 흙 무덤 중앙으로 손을 푹 꽂아 넣었다. 그 상태서 이리저리 더듬어보자 돌연 손끝으로 무언가가 잡혔다.
씨앗만한 크기에 딱딱한 감촉. 그러나 무엇인지 명확히 감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볼 시간조차도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까.
“어, 여기 벌써 온 사람이 있나 봐?”
문득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지는 사내의 행동은 굉장히 신속했다. 손에 잡힌걸 아까 목걸이를 넣어둔 품에 집어넣으며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고, 발로 낙엽을 쓸어 흙을 덮는다.
약 3초가 지난 후에, 누군가가 살짝 가죽을 젖히며 캠프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 있어…? 아, 너였냐?”
아는 사람의 목소리일까? 사내는 잠깐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담담한 얼굴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우웅!
돌연히, 사내의 가슴에서 시뻘건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러나 그 광채가 무엇인지 채 알 틈도 없었다.
“크, 크윽?!”
갑자기 심장 부근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한편, 같은 시각.
“됐군.”
어두운 공간, 화려한 의자에 느긋하게 앉은 한 인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색 자체는 굉장히 낮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만족해하는 기색이 깔린 음성이었다.
“씨앗이 뿌려진 겁니까?”
그때, 갑작스레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의자 앞 부복하고 있는 인영에게서 나온 음성이었다.
“아아. 일단 강제 이식에는 성공했어. 이제 최소 2주 동안은 지켜봐야지. 자리를 잡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 물음에 의자에 앉은 인영이 대답했다. 그리고 서서히 눈을 뜨자 시뻘건 안광이 어둠 속에서 타올랐다. 붉은 안광은 곧 의자 아래를 응시했다.
“벨리알.”
벨리알. 악마 14군주 중의 하나이며 대 악마 사탄의 최 측근.
그랬다. 지금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인영은 바로 ‘모든 악마의 왕’ 사탄과 ‘마귀’ 벨리알이었다.
사탄은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오른손에 쥔 와인 잔을 천천히 들이키고는 연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치익, 치이익.
“현재 진행 상황이 어떻지?”
비로소 목소리가 이어졌다.
“준비는 모두 끝난 걸로 압니다. 이제 등활 지옥으로 가는 포탈만 열 수 있다면….”
“호, 벌써? 아스타로트 치고는 꽤 성실한데.”
“아스타로트 님만 진행하신 게 아니니까요. 벨제부브 님, 아스모데우스 님, 바알 님….”
“그렇지. 벨제부브나 아스모데우스는 그렇다고 쳐도, 바알은 꽤 의외였어. 아마 잔혹한 파괴자로서 호승심을 느낀 모양이던데.”
사탄은 그렇게 말하고는 킬킬 웃었다.
“…그리고 사탄 님까지, 입니다.”
그러나 벨리알이 한 박자 늦게 말을 잇자 사탄은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와인 잔을 들어올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였다.
“내가 끼어든다는 게 마음에 안 드나? 사실대로 대답해라.”
“…예.”
“흐흐, 그런가.”
“죄송합니다.”
벨리알은 곧바로 머리를 조아렸으나 사탄이 상관없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상관없기는 한데. 그냥 좋게 생각하라고. 실제로 건너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씨앗 하나만 뿌렸을 뿐이야. 그것도 무용지물이 될 뻔한 씨앗을 말이야.”
“허나….”
거기까지 말한 벨리알은 잠깐 숨을 삼켰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자 무언의 허락이라고 생각하고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도 대계의 예언이 마음에 걸립니다.”
“…….”
“사탄 님도 아시다시피, 대계의 예언은 지금껏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이 계획이 그 예언의 일부를 실행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결과는 똑같겠지.”
사탄은 벨리알의 말을 전부 듣지 않고 중간에 끊어버렸다. 벨리알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사탄은 여전히 부드러운 태도로 와인 잔을 들어올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번 계획을 꽤 높게 평가하고 있어. 지옥 대공을 끌어들인다는 것도 그렇고, 그 계획에 4명, 아니 5명의 대 악마가 참가하는 것도 그렇고. …항상 개별적으로 움직이던 대 악마들이 처음으로 힘을 합쳤다는 말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계획은 확실히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데.”
이어진 발언은 평소 사탄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건설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벨리알의 낯에 미미한 걱정이 그늘지었다. 그 누구보다 ‘독립된 존재.’임을 강조하던 사탄이 저런다는 건, 사탄 또한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말인즉, 악마들이 얼마나 몰려있는지에 대한 방증이었다.
“사실, 나도 알고는 있어. 이번 계획이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것 정도는.”
그때였다. 벨리알의 얼굴이 잔뜩 굳음과 동시에 사탄의 눈매가 가로로 쭉 찢어졌다. 한순간 두 눈동자에 진득한 빛이 스쳤다.
“지옥 대공이 그 정도로 강한 존재라면…. 거기다 지옥은 그년의 홈 그라운드잖아.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한다고 해도, 무조건 변수는 생길 거다.”
벨리알이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그러면….”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이 무조건 실패를 의미하는 건 아니잖아? 변수는 잡으면 된다. 그래서 내가 몰래 끼어드는 거고.”
“주, 주군.”
“뭐, 실패해도 어쩔 수 없지만.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북 대륙을 포기해야겠지.”
“…….”
“아, 그나저나. 벨리알. 너도 이번 계획에 참가해보는 건 어때?”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벨리알이 허겁지겁 머리를 들었다.
사탄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스타로트한테 들어보니 지옥 대공은 정말 굉장한 절색이라고 하던데. 신은 물론, 어지간한 천사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가서 구경이나 한 번 해보지 그래.”
“…예?”
그러자 이번에는 벨리알이 어안이 벙벙하다는 기색을 비췄다. 그 표정 변화가 재미있는 걸까?
“하하. 농담이다. 지금 재밌는 계획을 앞두고서 지금 한창 기분이 좋으니까, 이해하라고.”
사탄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 벨리알.”
벨리알은 대답할 수 없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탄의 진정한 의중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탄의 휘하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모든 악마들의 왕.’을 의심했는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오늘 사탄의 말투나 태도는 예전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모든 것은 사탄의 뜻대로.”
그러나 결국 벨리알이 대답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이윽고 한 번 더 와인 잔을 들이켠 사탄은 태연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경과는 계속 보고하도록.”
태우던 연초를 잔 안에 넣고는 공간을 나섰다.
이내 사탄의 발소리가 멀어져 갈 무렵, 공간에는 고요한 정적이 찾아 들었다. 미묘하게 곤두서 있던 기류도 가라앉았다. 그렇게 벨리알은 공간에 홀로 남게 됐지만, 여전히 의자를 향해 부복한 채로 있었다.
“저는….”
문득, 벨리알의 입이 열렸다. 마치 여전히 사탄에게 말하는 것처럼.
“…계획이 실패에서 그치지 않았을 때가 두려운 겁니다.”
그리고 막연한 불안감이 담긴 목소리가 나직하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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