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39
00638 비비앙과 화해하다. =========================================================================
제 3지역 공략이 종료된 후, 시간은 화살처럼 흘렀다.
강철 산맥의 끝을 발견했다는 발표 이후, 동부는 예상외로 빠르게 내부 상황을 정리했다. 이틀 전 남부 요새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아마 지금쯤 남부와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동부의 신속한 진군 소식을 들은 형은 ‘수현아. 정말 사흘만 진군하면 강철 산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 맞지?’ 라고 걱정스레 물어와 나를 웃게 하였다.)
요새 건설도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물론 완성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이제 좀 뭔가 정리가 되어가는 기분이랄까? 한여름 밤의 꿈같았던 거인들과의 전투는 차차 기억 한구석으로 묻히고, 서서히 현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원정대가 안정되자 형도 무조건 바쁘게 움직이지만은 않았다. 오후에 갑자기 나를 비롯한 클랜 로드들을 호출하더니 거인들의 터전에서 얻은 고기를 각각 한 아름 안겨주었다. 그리고 ‘지금껏 정말 고생들 하셨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는 말을 건네며 오늘 딱 하루 음주를 허가해주겠다고 하기까지.
형의 의도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동료를 잃은 슬픔을 이제 막 극복해가는 시점에서, 축제의 힘을 빌어 초극(超克)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고기를 들고 돌아와 오늘 밤 우리끼리 간소하게 축제를 벌이자는 얘기를 꺼내자, 클랜원들은 두 팔 벌려 환영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실 너무 격하게 좋아해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이제껏 계속 달리기만 하면서 지치기만 했지, 그동안 어지간히 축하할 일이 없지 않았는가.
그렇게 강철 산맥의 공략에 성공했다는, 그리고 안솔의 회복을 기원하는 명분 아래 클랜원들은 축제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클랜원들은 식사 준비에 들어가고, 어느 클랜원들은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주류를 얻어왔다. 안현과 진수현은 식사를 준비하는 곳 앞에서 그릇을 두드리며 각설이 노래를 부르다가, 국자에 정수리를 한 대씩 얻어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아야야…. 아파라….”
머리를 부여잡은 채, 지면에 주저앉아 울상을 짓고 있는 진수현을 보며 나는 픽 웃고 말았다.
“그러게 진득하니 기다리지 그랬어.”
“혀, 형님. 그게 아니라요….”
“……?”
“그냥 좋으니까 그랬죠. …어?”
그 순간, 입을 삐쭉 내민 채 웅얼거리던 진수현이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내 울상 가득한 얼굴에 곧바로 화색이 돌더니 내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외쳤다.
“혀, 형님! 술이에요, 술!”
“술?”
“보세요! 저렇게나 많이 가져왔다고요!”
“흠?”
흘끗 시선을 돌리자, 진수현의 말대로 서너 명이 양손 가득 주류를 든 채 낑낑거리며 오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비비앙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야, 역시 비비앙이네! 오늘 술 걱정은 덜겠어요! 형님!”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남부 요새를 떠날 때 급하게 나오느라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챙겼는데, 저 정도면 오늘 주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나저나, 역시 비비앙이라니? 관심 있는 거 아니면 움직이기도 싫어하는 녀석인데?
“비비앙은 왜?”
“아, 모르셨어요 형님?”
궁금한 기분에 묻자 진수현이 나를 돌아보더니 해맑게 웃으며 비비앙을 가리켰다.
“비비앙, 요즘 엄청 인기 좋아요!”
“인기가 좋다고?”
“예. 그때 우리가 거인들한테 존나게 밀리고 있을 때요, 마수 군단으로 뒤치기 한 번 제대로 해줬잖아요?”
“그랬지. 그러니까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의미야?”
“그게 가장 크죠. 그런데 그 후로 사용자들이 좀 알아주니까, 이곳저곳 꽤 으스대고 다녔거든요.”
“…으스대고 다녔다고?”
“그런데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난리 치는 애들이 쫌 있나 봐요. 그래서 요즘 상당히 거만해요.”
“…….”
생각보다 상세히 이어지는 진수현의 설명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들 알아서 자제하는 줄 알았는데, 설마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비비앙이니까.’
어쨌든 사랑스럽게 봐줬다니 다행이기는 하나(사실 어디가 그런지 이해는 잘 안 가지만 서도.), 비비앙을 생각지 못한 게 큰 불찰이다.
“아, 맞다!”
그때였다. 싱글벙글 웃고 있던 진수현이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마치 무언가를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가만 보면 얘도 참 표정 변화가 풍부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우, 우리…. 오늘밤 경계 있지 않아요?!”
…어라?
‘이건 진짜 큰일인데.’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가벼이(?) 볼 수 없는 발언이었다. 형은 생각보다 완고한 면이 있어, 어느 상황에서도 절대로 경계를 느슨하게 하지 않는다. 아까도 경계만큼은 제대로 하라고 확실히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렇게 맛있고 즐거운 시간을 앞두고, 그 누가 경계를 서고 싶어 할까?
차라리 순번이 정해져 있으면 깔끔하다. 그러나 듣기로는 근래에는 따로 순서를 정하지 않고, 여유가 되는 이들이 돌아가면서 경계를 섰다고 한다.
아무튼 방금 진수현의 외침은 아마 모두가 들었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시끌시끌하던 주변에 삽시간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으니까.
“아~. 나, 나는 요리나 도와주러 가볼까나…?”
스리슬쩍 침묵을 깨트린 비비앙은 여기서 빠지겠다는 듯 살금살금 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개소리 마십시오.”라 말한 선유운이 쏘아 보낸 화살에 비명을 지르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그냥 솔이를 데려다 눕혀놓는 건 어때?”
이유정도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그러나 곧 무수히 쏟아지는 뜻 모를 눈초리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이후 조금 더 기다려보았으나, 역시나 누구 한 명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겠다는 이는 없다. 이해는 가지만 쓴웃음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하, 하하….’
…아마 그 사람이었다면 이럴 때 바로 나서주었겠지?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결국에는 내가 정할 수밖에 없다. 이내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여,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경계는 몇 명이 나가야 하는데?”
“두 명이요.”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나는 진수현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이렇게요?”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이 여기서 경계 나갈 사람을 정하는 거야.”
“에엑?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말인즉, 일종의 떠넘기기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구를 고르든 원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기는 싫다.
진수현은 절대로 싫다는 듯 세차게 손사래를 쳤으나 바꿀 생각은 없다.
“그 대신에.”
물론 그냥 떠넘기려는 생각도 없었다.
“이번 경계는 내가 설게. 끝날 때까지, 쭉.”
“…예?”
“두 명이 가야 한다며? 그러니까 한 자리는 내가 맡을 테니, 나머지 한 자리만 네가 뽑으면 되잖아.”
“아, 아니요. 굳이 형님이 가실 필요는….”
진수현은 약간 멍해 보이는 낯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갑자기 두 눈에 강렬한 이채를 띠었다.
이윽고 입꼬리를 씩 끌어올린 진수현이 꾸벅 머리를 숙였다.
“예, 형님. 알겠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제가 책임지고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부탁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몸을 돌려 경계 지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자자! 한 자리, 딱 한 자리가 남았어요! 오늘밤 내~내! 그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형님과 일대일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딱 한 자리!”
등 뒤로 진수현이 신나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리를 원하시는 분은 저한테 합당한 성과를 제시…! …어, 어? 왜 달려오는 거예요? 때, 때리지 마! 갑자기 왜 때리는 건데?!”
*
먼저 경계 지점에 도착한 후, 어느새 1시간이 흘렀다. 기다리는 동안 주변에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으나 딱히 지루한 감은 없다. 축제처럼 시끌벅적한 것도 나쁘지 않지만, 아무래도 조용히 있는 걸 더 선호하니까.
‘하지만 과연 누가 올지는 궁금한데.’
아까 진수현의 외침을 들어보니 상당히 경쟁이 치열한 것 같던데. 과연 누가 오게 될까? 이런 기분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마치 친구 소개로 첫 번째 소개팅을 할 때의 기분이랄까?
해답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별안간 공기 중에 고소한 음식 냄새가 섞여 듦과 동시에 저쪽에서 누군가 비틀비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양손에 그릇과 주류를 한 아름 들고 오는 사용자는(심지어 정수리에도 병을 얹은 상태였다.), 다름 아닌 비비앙이었다. 절로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하니 비비앙이 올 줄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야?”
“흥. 오해할 것 같아서 미리 말해두는데 말이야.”
그러나 비비앙은 조심스럽게 그릇과 주류를 내려놓고는 톡 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경계에 지원하면 음식을 가장 많이 준다고 해서 그런 거야. 절대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는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리고는 건너편에 털썩 주저앉는다. 뭔가 묘하게 납득 가는 말이라 생각하며 그릇에 손을 뻗은 찰나, 갑작스레 비비앙이 빠르게 접시를 치웠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으~응? 너야말로? 이건 내가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뭐?”
“내가 가져왔으니까 내 것이지. 주류도 내가 직접 얻어온 거고. 네 것은 없어.”
“야, 치사하다.”
“그래~. 나 치사해~. 아무튼 네건 네가 직접 받아와~. 아니면 먹는 거 구경이나 하던가~. 아! 경계 도중이니까 자리 이탈은 불가능 하려나~?”
그렇게 열심히 깐족거린 비비앙은 정말로 혼자서 먹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따금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음~. 맛있다~. 역시 고연주와 임한나의 음식 솜씨는 최고야~.”라고 말하기까지. 누가 봐도 나를 약 올리려는 태도일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머리채를 휘어잡아 그릇에 처박아버리고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비비앙이 음식을 먹는 와중 나를 자꾸만 힐끔힐끔 쳐다봤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으면 하는 것처럼.
‘나 참, 애도 아니고.’
속으로 헛웃음을 지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지 그래? 애처럼 굴지 말고.”
“뭐, 뭐?”
마침 나와 눈을 마주친 비비앙은 깜짝 놀라며 새된 소리를 냈다. 그러나 곧 표정을 관리하더니 한껏 비웃음을 띤 얼굴로 종알거렸다.
“하, 그게 무슨 말씀이실까? 너야말로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말해?”
“별로? 그냥 네가 나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정말 웃기지도 않아. 아니, 그전에 어쩐 일이야? 맨날 나를 무시하는 분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거실까~?”
“오호, 그렇게 나오시겠다?”
비비앙은 오늘 아예 날을 잡은 듯했다. 목소리도 악에 받쳐 있었다. 아주 작정하고 온 모양이다.
하기야 그동안 내가 좀 심하기는 했다. 고연주 앞에서 빨리 비키라는 심한 말도 했고, 경계 때 몇 시간 동안 내 주변을 서성이는걸 무시하기도 했고, 저번에 약간 강도 높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비비앙이잖아?’
그렇게 생각한 나는 품으로 손을 넣어 주섬주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비비앙이 저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이윽고 나는 완전히 꺼낸 기록 하나를 여 보라는 듯이 크게 펄럭였다. 계약서였다. 나는 차분히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약서의 이름으로 명하오니.”
“어, 어?”
한창 냠냠거리며 고기를 먹던 비비앙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어서 손에 들린 계약서를 봤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 잠깐만!”
하지만, 말은 행동보다 빠르다.
“지금 이 자리에 온 진실된 이유를 말하라.”
그러자 한순간 비비앙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삐걱삐걱 몸을 움직여 내 앞으로 오더니 돌연 몸을 굽히며 넙죽 엎드린다. 오, 이거 재미있는데?
“그래서, 오늘 경계에 지원한 진짜 이유는?”
“저, 저는…. 주인님인 김수현 님과 둘이서만 있고 싶어서 경계에 지원을 했습니다. 경쟁이 무척이나 심했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겨우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럼 왜 아까 그렇게 말했지?”
“최근에 주인님인 김수현 님에게 서운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야속하다는 생각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였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말하면 됐잖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주인님인 김수현 님이 먼저 저에게 말을 걸어주고 살살 달래주시면,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겠다는 맹랑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래 소원해진 관계를, 이번 기회에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음음. 역시 그랬어. 비비앙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 아주 말이 술술 나와.
아무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나는 계약서를 아래로 툭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릇 앞에 주저앉아 낄낄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비비앙?”
“…….”
“아무튼 네가 그렇게 원하니까 같이 먹어주도록 하지. 이리와. 같이 먹자.”
“…….”
그러나 뜻밖에도 비비앙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넙죽 엎드린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이제 어떻게 하나 보려는 마음에 홀로 잔을 비우며 구경했지만, 10분이 지나도 비비앙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몇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양손을 꽉 말아 쥐었다는 것과 조금 전 아담한 어깨가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점차 숨소리가 거칠어져 간다는 것.
‘설마….’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비비앙의 턱 끝에 손을 댔다.
“너…. 혹시 우냐?”
억지로 들어올리자 비로소 비비앙이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무에 그리 분한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숨은 씩씩 몰아 내쉬고 있다. 나를 노려보는 두 눈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괴어 글썽글썽해진 상태였다.
그러다 결국,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 너 진짜….”
아랫입술을 꾹 깨문 비비앙이 간신히 울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존심이 크게 상했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나를 죽일 듯이 째려본다.
“이 나쁜 자식…. 이제 너랑은…. 정말로, 정말로 끝이야.”
그러나 곧 목울대를 한 번 크게 움직이고는 표독스럽게 내뱉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쿵쿵거리며 걸어간다.
꽤나 강수를 두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시끄러워! 이 나쁜 새끼야!”
“뭐, 마음대로 해. 그런데 정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계약서….”
“……!”
그러자 비비앙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계약서의 이름으로 명하오니…. 돌아와서 나한테 안겨라.”
“이, 이익!”
이어지는 비비앙의 행동은 참으로 볼만했다.
“이이이익! 시, 싫어!”
싫다고 끝끝내 반항하는 비비앙. 흡사 오기 싫다는 듯, 격한 신음을 흘리고 안간힘을 쓰며 반항했지만, 결국에는 몸을 돌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로보트처럼 말이다.
결국에는 내 품에 얌전히 안긴 비비앙을 보며 나는 크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하하하, 하하하! 아, 미치겠네 진짜.”
“뭐가 웃겨! 네가 계약서를 이용해서 억지로 명령한 거잖아!”
웃음이 거슬린 걸까? 비비앙은 나를 꽉 안은 상태에서 여전히 노려보기를 멈추지 않으며 벌컥 화를 냈다. 마치 어쩔 수 없이 안겼다는 태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하지만 웃길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방금 계약서의 힘을 이용하지 않았다. 계약서는 아까 비비앙의 앞에 떨어트렸고(계약서는 내가 갖고 있어야만 효력이 발동한다.), 아직 줍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렇기는 한데…. 큭! …비, 비비앙. 사실은 말이야.”
“…뭐!”
“나, 나 있잖아. 실은, 이번에 계약서의 힘은 이용하지 않았어.”
“…어?”
그 말을 꺼낸 순간 비비앙의 눈이 휘둥그래 변했다. 나는 더 말하는 대신 아까 계약서를 떨어트린 자리를 가리켰다.
잠시 후, 얌전히 땅에 놓인 계약서를 확인했는지, 비비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며 기막히다는 빛이 스쳤다. 나는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 너도 솔직하지 못하다. 응?”
비비앙은 한동안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코를 훌쩍훌쩍 들이키며 수 차례 눈을 깜빡 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얼굴을 서글프게도 일그러뜨리며 입을 삐쭉삐쭉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으허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결국에는 참지 못했는지, 비비앙은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참고 참은 눈물이 서럽다는 듯이 넘쳐흐른다.
‘아, 울렸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킥킥 웃으며 비비앙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아까는 몰랐지만, 지금만큼은 비비앙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아, 진짜 엄청 오랜만에 일상 내용을 적으니까 재미있네요. 하하하.
오늘 내용으로 지금껏 쭉 이어진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해소됐기를 바래요. 🙂
그리고 어제 코멘트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제 성별 논란은 여전하더군요. 혼란스러워하는 독자 분들께 말씀 드리건대, 저는 남자에요. 남성이에요. 사내에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도 1로 시작해요. XY 염색체에요.
그리고 다른 독자 분들도 이상한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강도가 심해질 경우 2차 로리 전쟁이 발발될 수도 있습니다.
1차 로리 전쟁은 제가 하루 만에 항복하고 용서를 구하기는 했지만, 2차부터는 진짜 후기만 아니라 내용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발요. 네?
…후.
그나저나 오늘 어머니가 저에게 복분자를 갈아서 주스를 만들어주셨거든요. 꿀도 잔뜩 넣고 얼음도 동동 띄워주셨지요. 그런데 어제까지는 복분자는 아버지 드리는 거라고 형이나 저나 손도 못 대게 했다는 말이에요?
헌데 오늘 저한테 주셨습니다(형한테는 주지 않으셨고요.). 말씀으로는 피로 회복에 좋다고는 하시는데,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