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42
00641 강철 산맥을 벗어나다. =========================================================================
서북 요새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천막을 정리하는 사용자들과 인원을 점검하는 사용자들, 그리고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고 노가리를 까고 있는 사용자들 등등. 눈에 보이는 사용자들마다 하나같이 밝은 얼굴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원정대 전체가 모여서 그런지 오늘따라 수선스럽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우리가 가장 선두였던가?’
남은 진군은 남부 원정대가 선봉에 서는 것으로 결론이 모였다. 제 2지역 공략 때는 우리가 가장 선두에 섰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자리에 배치됐다. 즉 전 원정대를 선도하는 역할로, 나름 중요한 임무를 맡은 셈이다.
아마 지금쯤 클랜원 전원이 선두에 모여 있을 것이다. 늦장 부리는 꼴을 못 보는 정하연의 성격상, 억지로 끌고 나와서라도 기다리게 하고 있을 테니까.(사실 현숙한 이미지인 정하연이 누군가를 억지로 끌고 나온다는 상상은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안현을 비롯한 여러 클랜원들이 ‘형이 있을 때와 없을 때와 사람이 너무 달라요.’ 라 입을 모아 증언하니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닌 듯하다.)
아무튼 어서 가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사용자들의 틈을 헤치며 걸음을 옮길 즈음.
“아 싫다니까! 왜 자꾸 짐 덩이를 맡기려고 해?”
돌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돌리자, 요새 중앙 부근을 둥글게 둘러싼 한 무리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공찬호. 그러지 말고….”
“싫어, 싫다고! 왜 나한테만 시키는 건데?!”
둥근 원 안에는 형과 공찬호가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잠시 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공찬호가 묠니르를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 대충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아마 이번 진군 때 들어달라고 부탁한 것 같은데(묠니르는 거의 성인 남성만한 크기를 갖고 있으며 무게도 꽤 무거운 편이다.), 공찬호가 싫다고 앙탈을 부리는 모양이다.
“저 저번에도 내가 들었고, 저번에도 내가 들었는데! 이번에도 또? 허 참.”
“확인해보니까 근접 계열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제한이 붙어있어서 그래. 그리고 너만 시키는 게 아니라, 너를 줄 생각이니까 시키는 거지.”
“아 됐수다. 그냥 뇌제 님 가지십쇼, 예?! 나 이거 필요 없다니까?”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라. 봐봐, 주변 사람들도 다 네가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잖아.”
그러자 공찬호가 눈을 사납게 치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용자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돌리는 가운데, 문득 그 시선이 나를 발견했다. 공찬호는 갑자기 잘됐다는 얼굴을 하고는 나를 삿대질하며 입을 열었다.
“오, 마침 잘됐네. 저~기 머셔너리 로드….”
“안 돼.”
그러나 형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뭐, 뭐?”
“수현이는 안 된다고.”
“왜 안 되는데?”
“앞으로 수현이 손에는 물 한 방울 안 묻힐 거니까.”
형이 가슴을 쫙 피며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찬호는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고, 주변에서 소리 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낯 뜨거운 기분도 참 오랜만인데 말이지.
잠시 후, 머리를 설레설레 저은 공찬호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콧방귀를 꼈다.
“아무튼, 나는 이 짐 덩어리 떠맡을 생각은 추호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에이, 그냥 내가 들고 가겠어!”
그때였다. 공찬호가 ‘추호도….’ 까지 말한 찰나, 돌연 누군가가 똑 닮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공찬호는 한순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뭐, 너무 고마워하지는 말라고! 힘이 센 내가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말이야!”
“누, 누구야! 누가 지금 나를 흉내 내는 거야! 이…!”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하하!”
와, 엄청나다. 목소리가 똑같은 것도 놀랍지만 말을 잇는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히는데?
아무튼,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기회(?)를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겸사겸사 형도 도와주고 말이지.
“음, 공찬호. 스스로 발벗고 나서준다니…. 다시 봤다, 정말로.”
그러자 공찬호가 득달같이 나를 돌아보더니 한껏 눈을 부라렸다.
“뭐, 뭔 헛소리야? 방금 목소리는…!”
“자, 박수.”
그러나 나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박수를 보냈다. 사용자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똑같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내 공찬호의 얼굴이 대번에 붉으락푸르락 변한다.
“닥쳐! 어디서 지금 개수작…!”
짝짝짝짝….
“이, 이익!”
짝짝짝짝짝짝짝짝….
그렇게 박수가 이어지는 가운데, 공찬호는 한참 동안 버티는가 싶더니 결국 거친 욕설을 쏟아내며 묠니르를 잡고 말았다. 이래서 군중 심리가 무서운 거로군. 음음.
‘아주 좋은 받아주기였어요, 클랜 로드!’
그때, 갑작스레 머릿속으로 상큼한 음성이 울려왔다. 마력이 느껴진 지점으로 시선을 돌리자, 쓴웃음을 머금고 있는 신재룡과, 신재룡의 등 뒤로 얼굴만 쏙 내밀고 있는 표혜미…. 아니 제갈 해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비로소 아까 공찬호의 목소리를 흉내 낸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담담한 얼굴을 한 제갈 해솔은 애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성대모사 솜씨가 어떻느냐는 듯이. 나는 대답 대신 왼손 엄지를 슬쩍 치켜 올려주었다.
제갈 해솔은 그제야 활짝 웃어 보이더니 손가락으로 브이(V)를 그리며 화답했다.
‘참 재주 많은 여인이야.’
*
해가 완전히 떠오른 것을 기점으로, 3 원정대 중 선봉 역할을 맡은 한소영이 출발을 신호했다. 사실상 강철 산맥에서의 마지막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거의 1만이 넘는 사용자들이 행군함으로써 주변은 발소리로 가득….
“제기랄!”
…차야 정상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빌어먹을!”
유독 공찬호 주변만큼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묠니르를 짊어진 채 걸어가는 공찬호는 가끔 분에 찬 욕설을 뱉으며 살기등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해보라는 것처럼. 그 기세에 눌린 사용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발소리를 최대한으로 죽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공찬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금살금 곁으로 다가갔다. 사실 진군이 시작된 이상 배치된 자리로 가야 정상이나, 한소영한테 잠깐 양해를 구한 후 후방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왜냐하면 공찬호에게 확인해볼게 하나 있었으니까.
“어이, 공찬호.”
“앙? 누구…! …김수현?”
공찬호는 부르자마자 벌컥 화를 냈으나 나를 보고는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뭐냐, 이 치사한 자식!”
“치사하다니. 말이 심하잖아.”
“놀리려고 온 거면…!”
“아니. 궁금한 게 있어서.”
나는 얼른 말을 끊었다.
“…궁금한 게 있다고? 나한테?”
이건 의외였는지 공찬호는 성난 기색을 누그러뜨리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틈을 타 나는 빠르게 머리를 끄덕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 왜 묠니르를 거부했지?”
“응? 뭔 소리야 지금.”
“들어보니까 형이 묠니르를 너한테 주려고 한 것 같은데, 싫다고 한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런데?”
공찬호는 대수로운 게 있냐는 듯이 반문했다.
“왜 거부한 건데?”
“나는 창병이니까. 묠니르는 망치잖아. 그렇다고 설정된 정보가 수라보다 좋은 것도 아니고.”
공찬호치고는 명료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는다.
“하지만 묠니르도 상당히 쓸만하잖아? 네 근력 정도면 다루는데 큰 문제는 없을 테고, 그리고 상황상 묠니르가 더 알맞은 쓰임새를 보일 때도 있을 텐데.”
“…아아,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이제야 내 질문의 진의를 깨달았는지 공찬호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쩝 입맛을 다시며 빈손을 움직여 수라마창을 꺼내 들었다. 예의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칠흑의 창은 여전히 불길한 기운을 곳곳에 뿌리고 있었다.
공찬호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나는 이 창 말고는 다른 무기를 사용할 생각이 없어.”
“왜?”
“이유야 간단해.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이 무기를 얻은 이후 수라마창을 거의 연인으로 생각해왔거든. 그러니까 함부로 바꿀 생각을 못하는 거지.”
“연인으로 생각한다고? 무기가 어떻게 연인이 될 수 있지? 네 연인은 사용자 성하얀이잖아.”
나는 진지하게 반문했다. 애당초 무기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터라, 공찬호의 말이 하등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그런 뜻이 아니라! 동반자 개념으로 생각하라고!”
그러나 공찬호는 오히려 갑갑해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을 하더니 수라마창을 휙휙 흔들며 침을 튀겼다.
“입장을 바꾸고 생각해보라고! 네 검은 어떤지 모르지만, 수라는 자아가 확고한 창이라고. 어쨌든 자신을 사용할 수 있도록 나를 선택해줬어. 주인 의식을 치르는 과정이 괜히 있는 건 아니잖아?”
우웅~.
그때였다. 한창 공찬호의 말을 경청하는 와중 별안간 허리 부근서 짧은 검음이 흘러나왔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무검이 갑작스레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공찬호는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말을 잇고 있었다.
“즉 무기 입장에서는 주인한테 몸도 마음도 모두 갖다 바친 셈이라고. 그런데 주인이 사용해주기는커녕 홀랑 다른 무기로 갈아타봐. 네가 무기 입장이라면 어떨 것 같아?”
우웅우웅~.
“아 물론, 그냥 어느 대장간에나 걸려 있는 검이라면 상관없겠지. 하지만 수라 같은 경우는 달라. 너도 알잖아, 심상찮은 힘을 지닌 무기라는 거. 이런 무기들은 대체로 자아를 갖고 있고, 또 그만큼 자존심도 강해. 정말 어지간한 차이를 보이는 무기가 아니면 자기 자신이 주인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무기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야.”
우웅우웅우웅~.
“그러니까 결국 중요한 건 교감이야, 교감. 어느 상황이든 간에, 무기는 주인을 만났을 때부터 겪는 모든 걸 기억하고 간직하지. 그런 게 하나하나가 쌓이다 보면, 무기도 스스로 고민하고 변화를 꾀하기 시작하거든. 가령 예를 들면, 수라는 내가 자주 실수하는 나쁜 버릇을 알고 있어. 그리고 전투시 나도 모르게 그 버릇이 나왔을 때,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여서 정확한 공격을 하도록 도와주는 경우가 있지. 아니면 위기 때 내가 알지 못하는 능력을 발동해서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고.”
우웅우웅우웅우웅~.
공찬호의 말은 예상외로 장황했지만, 그만큼이나 영양가 있는 설명이기도 했다. 그 동안 계속 고민해왔던, 무검에 관한 비밀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니까.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면, 무검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 같은데? 혹시 못 들었어?”
이제야 겨우 들었는지 공찬호가 의구심 어린 눈빛을 빛냈으나 차마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공찬호가 말할 때마다 꼬박꼬박 반응하는 무검의 검음이, 꼭 ‘맞아 맞아, 네 말이 맞아!’ 라고 추임새를 넣는 것 같았으니까.
…우선은 화제를 돌리는 게 낫겠지?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대답해줘서 고맙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천연덕스레 말했다.
“…쯧. 생각 외로 말이 길어졌군.”
공찬호는 혀를 한 번 차더니 휙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웅!
그때, 느닷없이 무검이 크게 울어 젖혔다.
“어?”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는지 공찬호가 우뚝 걸음을 멈추는 게 보였다. 한순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나는 최대한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앞으로 가는 척을 하며 행렬을 이탈한 후, 무검을 들어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자 또 한 번 검음을 흘리는 무검. 오늘따라 이놈이 상당히 반항적이라고 느낀다면 내 착각일까?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야, 갑자기 왜 이래? 지금 저 말 들었다고 이러는 거야?”
우웅?
“알겠어, 알겠다고. 공찬호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조용히 좀 하자.”
우웅?
‘이놈이?’
오늘 날을 잡았다 이건가?
공찬호 말을 이해했다고는 했지만 받아들이겠다 말한 적은 없다.
나는 무검을 얼굴과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져온 후,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한 번만 더 멋대로 울면, 공찬호 똥구멍에 처박아버리겠어. 기필코 말이야.”
우…?!
무검은 곧 조용해졌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어제 하루 잘 쉬었네요. 잠을 충분히 자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착각까지 들더라고요. 하하하. 덕분에 오늘 자정 연재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제 약속으로는 오늘 1회를 더 올리기로 했었죠? 못 올린 회를 벌충하는 의미에서요.
네, 지금 열심히 작성하고 다듬고 있어요~. 바로는 올리기 힘들 것 같고, 늦어도 당일 정오(12시 00분)에는 업데이트하도록 하겠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시고, 잠시 휴식 겸 한 번 들러주시면 다음 회를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
이제 저는 열심히 남은 내용을 적으러 가겠습니다!(오늘 제가 조금 부드럽다고 느끼신다면, 잠을 잘 자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하하하.)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PS. 쪽지는 주말에 답신을 드리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