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45
00644 게헨나(Gehenna). =========================================================================
아스타로트의 계획은 간단했다.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으로 한 세력을 이용해 다른 세력을 제어한다는 뜻이다.
말인즉 북 대륙 사용자들이 아틀란타로 도착하기 직전, 지옥 대공을 강제로 인간 세상(정확히는 아틀란타.)으로 보내버려 서로 싸우게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악마들의 입장에서는 성공만 하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는 계획이다.
물론, 설령 지옥 대공이더라도 이 세상에 작용하는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 세상에 소환되는 즉시 힘의 상당 부분을 제한 받게 된다. 그러나 지옥 대공 전력(全力)을 생각해보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아무리 제한된 힘이라 할지라도, 나약한 사용자들을 상대로 학살을 벌이기에는 차고 넘칠 정도였으니까.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지옥 대공을 데려오느냐?’ 는 것이다.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전제돼야만 한다.
하나는 지옥 대공을 보내버릴 ‘차원 이동진’을 준비하는 것. 다른 하나는 진을 완성하고 발동한 후, 온전한 상태의 지옥 대공을 끌어들이는 것.
처음 조건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차원 이동진을 준비하는 게 굉장히 번거로운 작업임은 부인할 수 없으나, 까짓거 한 번 구성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지옥 대공을 온전한 상태로 진의 발동 지점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마(魔)의 정점에 군림하는 대 악마라 할지라도 100% 자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계획의 성공을 위해 아스타로트는 자신이 미끼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저번 지옥 침략 때 메피스토펠레스(악마 14군주 중 하나로, ‘미친 불꽃’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다.)의 희생으로 얻을 수 있었던, ‘지옥 대공은 불에 이상할 정도로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다.’ 는 정보를 활용한 것이다.
물론 이것 또한 지옥 대공이 생각대로 움직여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 열심히 지옥 구간을 넘고 있는 아스타로트는 나름 자신 있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아스타로트도 아주 조금은 이상한 기분은 느끼고 있었다. 예전 초열 지옥까지 내려갔을 때는 구간마다 막아서는 마수들로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가로막기는커녕 마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실상은 이미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지옥 대공이 기다리라는 명을 전했기 때문이나, 그걸 알 턱이 없는 아스타로트로서는 당연히 가질 법한 의문이었다.
어쨌든 일은 벌려놨고 계획은 시작됐다. 악마들은 이미 등활 지옥을 점령한 상태였다. 지금쯤 주법에 일가견이 있는 벨제부브가 한창 차원 이동진을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바알과 아스모데우스까지 따라왔으니, 아스타로트가 자신 있어 하는 것도 나름 이해가 갈만한 일이었다. 이 정도의 전력이라면 지옥 대공을 이기지는 못해도, 나름 버틸 수는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달리던 아스타로트는 멀리서 어탑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현재 아스타로트가 가로지른 구간은 ‘대규환 지옥’ 으로 8열 지옥 중 5번째에 해당하는 구간이다. 이 다음 구간이 바로 6번째인 ‘초열 지옥’ 으로, 예전 아스타로트가 지옥 대공에게 패배해 도망친 구간이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미간을 찡그린 아스타로트는, 이내 어탑까지 20미터를 남겨두고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걸음도 정지했다. 전방을 바라보는 아스타로트의 시선은 어느새 황당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우뚝 솟은 어탑 아래에는, 전신에서 은은한 붉은빛을 흘리고 있는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미끈한 두 다리는 꼭 붙인 채 비스듬하게 기울였고, 양손은 가지런히 모아 왼쪽 무릎에 얌전히 얹었다. 약간 멍해 보이는 눈동자는 먼산을 향하고 있다. 마치 하염없이 애인을 기다리는 여인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여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스타로트는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살결도 그렇지만, 교교하게 가라앉은 두 눈동자는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그윽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아스타로트는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맛봤지만.
“네놈은 여전히 행동이 굼뜨구나.”
이내 지옥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굼뜨다…. 고?”
“그래. 며칠을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으니, 결국에는 이 몸이 직접 올라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 느릿하기 짝이 없는 것.”
아스타로트가 더듬거리자, 지옥 대공이 어탑에서 우아한 자태로 일어나며 말했다.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말은 상대를 조롱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품고 있었다. 아스타로트의 입을 비틀렸다.
“이야, 이거 기분 좋은데. 너 정도나 되는 존재가 이렇게 친히 올라오시다니 말이야. …그렇게나 나의 힘이 탐나는 건가?”
“헛소리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구나.”
아스타로트가 천연덕스레 말을 꺼냈지만, 코웃음 친 지옥 대공은 헛소리로 일축해버렸다.
“확실히 저번에 일말의 관심을 두기는 했지. 허나 패배한 수캐의 힘에는 더 이상 관심 없다.”
그러더니 더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너와는 이 이상 말을 섞기 싫다. 되었으니 안내나 하거라. 홀로 불쑥 찾아가는 것보다는 네놈이랑 가는 게 낫겠다.”
“…하?”
아스타로트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그러자 지옥 대공이 한껏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무얼 그리 의아해하느냐. 그럼 설마 이 내가, 네놈들의 하찮은 계획도 모를 거라 생각했느냐? 그것도 이곳에서?”
“그, 그럼.”
“하지만 걱정 말거라. 마침 심심하기도 하니 어느 정도 어울려줄 의향은 있으니까. 적어도 네 역할은 완수하게 해줄 터이니.”
“…너.”
비로소 지옥 대공의 진의를 깨달은 아스타로트는 끓는 듯한 침음을 흘렸다.
이미 모든 계획을 알고 있단다. 그런데도 어울려주겠으니 얌전히 안내나 하란다. 고작 심심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악마와 마족의 정점에 군림하는 대 악마가 이런 취급을 받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해일처럼 밀려오는 치욕에 아스타로트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하지만 무어라 입을 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니면, 그냥 여기서 죽겠느냐?”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존재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태고(太古)의 불이라 불리는 화정과 동급이며, 순수 파괴력에서는 화정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종미(終尾)의 불, ‘지옥의 겁화’ 를 지닌 존재였으니까.
고심해온 계획이 파쇄됐다. 지금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결국에는 하나뿐이었다. 아스타로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굴욕감을 씹어 삼키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옳지. 보기보다는 착한 놈이로구나.”
여전히 들려오는 조롱 어린 목소리에 아스타로트는 바드득 이를 갈았다.
‘개 같은 년. 도착하고 두고 보자…!’
*
등활(等活) 지옥.
8열 지옥 중 최상층을 담당하는 첫 번째 구간으로, 지금은 악마들에게 점령당한 구간이기도 했다.
등활 지옥을 점령한 이들은 대 악마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래 거느린 악마 14군주들도 데려왔으며 마족들도 최하급부터 최상급까지 다양하게 데려왔다. 모두 합치면 거의 하나의 군단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원 이동진의 구성을 맡은 벨제부브의 지시 아래 차곡차곡 준비해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던 등활 지옥에 갑작스레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돌연 어탑 주변 하늘에서 시꺼멓고 둥그런 구멍이 생기더니 그곳에서 두 인영이 툭 떨어진 것이다. 하나는 정수리에 뿔이 돋은 잘생긴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온몸에서 불그스름한 빛을 흘리는 절색의 여인이었다.
등활 지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하나같이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여인을 응시했다.
그러나 여인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김샜다는 얼굴로 가는 숨을 흘렸다.
“후유…. 다들 별볼일 없는 놈들만…. 그나저나 준비는 아직인가?”
적어도 앞에 말은 듣지 못했을지 몰라도, 뒷말은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여인 아니 지옥 대공이 진의 중앙에 서 있는 벨제부브를 정확히 주시하며 말했으니까.
“켈…?”
그리고 벨제부브는 아주 잠깐 직면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잖은가. 차라리 살기를 풀풀 날리며 들어왔으면 이해라도 하지. 동네 마실 나온 것처럼 태연하게 들어오더니 보자마자 준비가 덜됐냐고 묻고 있다. 거기다 같이 들어온 아스타로트는 아무런 말도 않은 채, 그저 시뻘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기까지.
“…쯧.”
지옥 대공은 주변의 반응에 살짝 혀를 차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박자박 걸어가 어탑에 앉고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지그시 악마들을 응시한다.
“그럼, 끝나면 아뢰도록 하라. 허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마치 아랫것들을 대하는 말투. 악마들은 그제야 하나하나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어이가 없는걸 넘어서 분노를 느낄 지경이었다.
아스타로트는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알고는 지옥 대공 앞에서 자존심을 접었다. 그것은 계획을 생각해서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예전 지옥 대공의 진면목을 일부나마 겪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말로만 들은 입장이라면, 자존심 강한 악마의 특성상 아스타로트처럼 참아 넘기지 못한다. 특히 ‘파괴’ 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대 악마라면 더더욱.
잠시 후.
“방해. 비켜.”
한 손에 곰 인형을 든 작달막한 체구의 여아가 어탑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간다. 단발로 짧게 친 백금 색 머리칼에 무척 사랑스러운 인상의 여아였으나, 푸른색 눈동자만큼은 표독스럽기 짝이 없는 빛을 띠고 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상대방을 갈가리 찢어발길 것처럼.
‘동쪽의 왕.’, ‘잔혹한 파괴자.’
바알이 나선 것이다.
무미건조하던 지옥 대공의 낯은 바알이 걸어오는걸 확인하고는 흥미롭다는 빛을 띠었다.
이윽고 바알이 어탑과 어느 정도 거리를 남기고 걸음을 멈춘 찰나, 지옥 대공이 입술이 열렸다.
“흐응, 귀여운 아이구나.”
그 순간이었다.
지옥 대공이 한 마디를 한 순간.
“고마.”
짧게 대답한 바알의 두 눈이 갑작스레 찢어질 듯 커지며 새빨간 빛을 뿜었다.
그러자 창졸간에 소용돌이 친 막대한 마기의 소용돌이가, 곧바로 지옥 대공이 앉아 있는 어탑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콰콰콰콰콰쾅!
단 한 방에, 어탑이 와르르 박살 나며 연기를 피운다.
“내, 내 진이…. 켈….”
벨제부브가 힘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바알은 여전히 뻘겋게 빛나는 눈으로 전방을 담담히 응시했다.
확실히 바알도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가기는 했다. 그러나 상대를 적이라고 결론지은 이상, 바알은 가차없이 행동한다.
물론 계획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옥 대공이 이 정도 공격도 막아내지 못한다면, 계획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해 다짜고짜 공격을 가한 것이다.
말인즉, 바알식 인사랄까?
그때였다.
“흠, 나와 같은 파괴의 힘이라…. 그래. 이 정도면 심심하지는 않겠다.”
흩날리는 연기 속에서, 별안간 고요한 미성이 흘러나왔다.
바알이 역시나 라고 생각하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을 때였다.
“아, 칭찬이다.”
콰르르르!
이윽고 자욱한 연기를 헤치며…. 아니 폭발적으로 태우며 뚫고 나오는 붉게 물든 손을 확인한 순간, 바알의 눈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또 한 번 커졌다.
전보다 확연히 붉은 빛을 흘리는 손 하나가 시시각각 다가온다. 상당히 빠르기는 하나 그래도 눈에 잡히는 속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알은 완전히 반응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그런지는 바알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들어오는 손을 관찰만 하고 있을 뿐, 몸이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정확히는 저 공격에 대응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바알은 그냥 묘하게, 상대의 의지가 자신이 대응하려는 의지를 불태우는 느낌을 받았달까?
마침내, 뻗어 나온 손이 가만히 서 있는 바알의 목을 차분히 감싸 잡는다. 작달막한 몸이 하릴없이 허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뽀드닥!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동시에, 바알의 작은 머리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 작품 후기 ============================
지옥 대공의 힘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전에 우리엘이 김수현에 관해 경고를 하는 내용을 기억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우리엘은 이렇게 말했지요.
체력 90은 화정의 1차 각성, 100은 2차 각성, 101은 3차 각성이다. 그리고 102가 되는 순간 천사가 부여한 설정을 벗어나 본래의 힘을 되찾는다. 그것은 세상을 편집할 정도의 힘.
말인즉, 천사가 위험을 경고할 정도의 힘이지요.
적어도 지옥 내에서의 지옥 대공은, 김수현이 화정의 1, 2, 3차 각성을 모두 이루고 체력 102를 찍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이상의 수준으로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