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46
00645 위험한 소개팅(?). =========================================================================
강철 산맥을 벗어난 지도 어느새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사흘째 진군이 끝나고, 전 원정대는 아직도 이어지는 초원에 야영지를 설치했다.
근래 이틀은 경계를 서지 않고 나름 편하게 보낼 수 있었으나, 어느덧 순번이 돌아온 탓에 오늘도 경계를 서게 됐다. 뭔가 경계를 자주하는 것 같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애초 직책을 막론하고 모두 경계를 서야 한다고 말한 사용자가 나인 터라, 군말 없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말번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자박자박, 자박자박.
타닥타닥, 타닥타닥!
깊은 밤을 보내는 동안 불씨가 줄어든 모닥불이 미약하게 타오른다. 앞선 불침번들이 땔감을 낭비했는지 남은 건 잔가지들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모닥불 속으로 잔가지를 하나 집어넣은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별아, 고마워.”
물론 혼잣말로 고맙다고 한 건 아니었다. 등 뒤로 누군가 조심조심 걸어오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경계는 최소한 두 명이 서야 하는 만큼, 이제 나와 같이 말번 시간을 보낼 사용자에게 건넨 말이었다.
“…….”
예상대로 후방에 느껴지던 기척이 잠깐 멈칫한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에 불과했고, 기척은 곧 자박자박 걸어와 내 옆으로 살며시 주저앉았다.
“죄송하지만, 두 번 당할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들려오는 쌀쌀맞은 목소리. 흘끗 옆을 돌아보자 못마땅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김한별이 보였다. 당연히, 오늘 김한별이 내 짝꿍이라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나는 시답잖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뜬금없는 말로 저를 당황시켜서 넘어지게 만들려는 속셈이셨잖아요. 저번에 당한 거 기억하고 있어요.”
이런, 들켰나? 역시나 얘한테는 한 번 통한 수법이 두 번 통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장난만 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간은 강철 산맥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잊고 있었으나, 한 번쯤은 김한별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 이렇게 좋은 기분으로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김한별의 조언 덕분이었으니까. 그때 조금이라도 더 미적거렸더라면, 각성한 쿠샨 토르에 형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김한별의 입술이 삐쭉 튀어나온 게 보여, 나는 속마음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말로 고맙기는 해.”
“또 장난치시는 거예요?”
“아니, 진심이라니까. 너야말로 왜 내가 고마워하는지, 정말로 모르는 거야?”
“…….”
그제야 내 말이 헛소리가 아님을 알았는지 김한별이 도로 입술을 집어넣는다.
“…그때 제가 말씀드린 일 때문이에요?”
그리고 우물거리며 말하기까지. 나는 빙긋 웃었다.
“그것도 고맙고, 저번에 가네샤 때도 고맙고.”
“그, 그거야…. 가, 가네샤 건은 이미 예전에 고맙다고 하셨는데요.”
쑥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김한별이 살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그 모습을 보니 살짝 장난기가 일어, 나는 일부러 화난 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또 고마워하면 안 되는 거야?”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러자 김한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볼을 긁었다.
“굳이 고맙다고 하실 필요까지는….”
“왜. 설마 나를 고마운 것도 모르는 파렴치한으로 본 거야? 와, 실망이다 너.”
“아, 오늘따라 왜 이러세요 진짜.”
“하하하.”
결국에는 궁지에 몰린(?) 김한별이 아미를 찌푸리며 투정을 부렸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두 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김한별도 의외로 놀리는 맛이 있다.
김한별은 무척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한동안 투덜대더니,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딱히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따지면 저는 수십 번이나 오빠한테 고마워해야 하니까요.”
“응? 수십 번이나? …에이, 과장이 심한데.”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서너 번이면 몰라도, 수십 번이라는 말은 동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한별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과장이 아니라…. 생각해보면 저도 오빠한테 고마운 게 참 많거든요.”
“…뭔데?”
조용히 되묻자, 김한별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싶더니 곧 말을 이었다.
“그냥…. 통과의례 때도 그렇고…. 시크릿 클래스도…. 아.”
돌연히 김한별이 아차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시크릿 클래스도….’ 라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김한별은 보석 마법사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얻어준 게 아니었으며,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수료식 전날에야 확인할 수 있었던 클래스였다.
김한별이 화제를 돌리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 그 클래스는 어떻게 얻은 거야?”
김한별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
우두둑, 우두둑!
푸확!
바알의 머리는 꺾이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옥 대공이 무시무시한 악력을 발휘, 움켜쥔 목을 그대로 우그러트린 것이다. 우묵하게 휘어진 목은 사정없이 비틀려 버렸고, 결국에는 몸과 분리돼 그대로 땅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아직 허공에 들린 몸 또한 힘없이 축 늘어진다.
툭!
데구루루….
이윽고 땅을 구르던 머리가 정지했다. 절반쯤 드러난 바알의 얼굴은 한껏 까뒤집힌 두 눈을 보이고 있었다. 지옥 대공을 주시하던 이들은 악마와 마족을 가리지 않고 하나같이 숨을 삼켰다.
비록 목숨이 두 개인 점을 감안해도, 이건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냥 마족도 아니고, 대 악마 중 하나가 이리도 허무하게 죽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잠시 후, 지옥 대공이 살며시 손을 놓자 바알의 자그마한 몸도 풀썩 떨어졌다.
“설마 이 정도 공격에 당할 줄은…. 나도 꽤나 얕보인 모양이구나.”
지옥 대공은 기품 있게 손을 털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이내 손에서 뿌려진 핏방울이 바알의 얼굴에 점점이 떨어졌을 때였다.
“…모두 조져!”
아스타로트의 절박한 노호(怒號)가 고요해진 등활 지옥을 왕왕 울렸다. 그리고 악마 14군주 들과 마족들은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마계는 상하 절대 복종이라는 명령 체계를 갖고 있다. 마족은 만들어진 피조물의 입장으로서, 조물주인 악마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낸다. 그러할진대 조물주인 대 악마 중 하나가 죽었으니 눈이 뒤집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바알 휘하의 마족들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우오오오오오오오!
살기가 충만한 함성을 지르고 사방에서 성난 파도처럼 덮쳐오는 마족 군단을 보며, 지옥 대공은 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나도 태연하고 여유만만한 태도.
그 태도에서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걸까? 명령을 내린 아스타로트가 급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목표는 지옥 대공이 아니었다. 아스타로트가 달려간 방향은 무너진 어탑 주변으로, 이제 막 전투에 참가하려 폼을 잡는 벨제부브가 있는 곳이었다.
“벨제부브!”
“케, 켈?”
“진!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진을 완성해라!”
“뭐, 뭐라고?”
벨제부브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러나 황급해 보이는 와중에도 차갑게 빛나는 아스타로트의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 벨제부브는 입을 다물었다. 문득 예전 사탄이 농담조로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일 언젠가 우리 악마를 위협할 정도의 놈이 나타난다면….’
‘아스타로트, 아마 그 녀석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놈일 거다.’
벨제부브는 차분히 아스타로트를 응시했다. 그러자 ‘분노의 악마’ 라고 불리는 대 악마가, 스스로 분노를 억누르며 주변 상황을 면밀히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진, 어떻게든 진만 완성시켜! 최대한 빠르게!”
아스타로트의 요청. 신경 쓰지 말고 어떻게든 진만 빠르게 완성시켜라.
직접 차원 이동진의 구성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그 뜻을 모를 벨제부브가 아니었다.
“…켈!”
결국 벨제부브가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동의를 얻어낸 아스타로트는 이제 아스모데우스를 찾을 요량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우웅!
“……?!”
갑작스레 아스타로트는 온몸이 터질 듯 한 진동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마족들의 공격이 집중되는 중앙으로 전신에서 폭발적인 염화를 솟구쳐 올리는 지옥 대공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등활 지옥 내, 지옥 대공을 제외한 모두는 느닷없이 시야가 붉은색으로 밝아지는걸 느꼈다.
그때, 별안간 지옥 대공이 가녀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찰나의 순간, 전신에서 피어 오르듯이 흘러나온 여덟 갈래 불 줄기가 찬연한 불빛을 번쩍이며 파열(破裂)하기 시작한다.
콰르르르르르르륵!
그러자 갈라지고 깨져나간 불의 파편들은, 이내 하나의 폭풍이 되어 주변을 소용돌이처럼 휩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달려들어오는 마족을 게걸스레 집어삼키고, 이후 또 한 번 폭발하며 마족의 몸을 사방으로 퍼트린다. 삽시간에 터져나간 마족 수백 명의 신체며 장기는 공중 곳곳에 뿌려졌다가, 곧 새빨갛게 그을려 부서지며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큭…!”
그 엄청나게 파괴적인 경관에, 대 악마들은 동시에 입을 벌린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 화려하기 짝이 없는 불꽃놀이에, 지옥 대공은 희열에 찬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더니.
“…이, 내가.”
갑작스레 뚝, 웃음을 그치며 지긋이 가라앉은 눈으로 아스타로트를 직시했다. 그리고 주먹 쥔 손을 들어올려 하늘을 향하게 만들었다.
“이런 잔챙이들이나 상대하려고, 예까지 올라온 줄 아느냐?”
그렇게 말한 지옥 대공이 힘껏 움켰던 섬섬옥수를 활짝 폈다. 그러자 아직도 휘몰아치는 불의 폭풍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번에는 하나의 기다란 불 줄기로 변한다. 지옥 대공이 마치 채찍을 치는 것처럼 힘차게 손을 꿈틀거렸다.
곧이어 불 줄기가 탄력적으로 흔들리는가 싶더니 마치 아우성을 치듯이 하늘 높이 부상한다. 어느새 시꺼먼 재로 덮은 허공을 시원하게 뚫고 지나간 그것은, 이내 하늘을 스치듯이 훑으며 붉은 잔상을 기다랗게 남겼다.
그 순간이었다.
쩌저저적!
그저 불의 채찍이 허공을 스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잔상이 그어진 부분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갈라지는, 섬찟한 소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뭔가 심상찮은 기분을 느낀 걸까?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본 마족들은, 문득 풍겨오는 진한 유황불 냄새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늘의 광경에 추가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쩌저저적, 쩌저저적!
그래.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갈라지는 하늘에서 틈이 생기고, 그 안에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광경이 모든 이의 눈에 들어온다. 시시각각 커져가는 틈은 아까 둥근 원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를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틈이 이제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찢어지고 벌어진 순간.
“열려라, 게헨나의 문.”
살짝 입술 뗀 지옥 대공이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하늘에서, 아니 불타오르는 지옥의 광경에서 모종의 존재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젠장.”
이내 서서히 다가오는 지옥 군단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아스타로트의 두 눈에 암담한 빛이 스쳤다.
한편, 같은 시각.
마계(魔界).
“…지금 막, 지옥 대공과의 격돌을 확인했습니다.”
벨리알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러자 느릿하게 와인 잔을 들어올리던 사탄은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더 얘기해보라는 듯한 무언의 압박에 벨리알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또한, 북 대륙 인간들이 이제 도시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비로소 사탄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까지는 아니지만. 기껏 해둔 안배가 무용지물이 될 뻔했어.”
“무용지물이요? 보내버리는 시기는 큰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나 나중이나….”
“아니, 지옥 대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악마의 씨앗을 말하는 거야.”
“아.”
사탄이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제야 뜻을 깨달았는지 벨리알이 작은 목소리로 탄성을 지르고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온몸에 사슬이 칭칭 감긴, 축 늘어진 마족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럼, 이제 곧 씨앗을 틔우시겠군요.”
한동안 마족을 바라보던 벨리알이 약간 아깝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사탄은 천천히 잔을 매만지다가 픽 웃었다.
“어쩔 수 없지. 강제로 이식한 이상, 오랫동안 공을 들인 씨앗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 …뭐, 어차피 이번 계획에 1회용으로 쓰고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하오면.”
벨리알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려는 순간, 돌연 사탄이 자리에서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상대가 지옥 대공인 이상 변수는 분명히 생길 것이다. 하지만 아스타로트라면, 어떻게든 진의 발동까지는 버텨낼 수 있을 거야. 설령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말이야.”
그리고는 돌연 손을 와짝 우그러트렸다. 애꿎은 와인 잔이 산산조각 나며 쨍그랑 떨어진다.
“그리고 발생한 변수는…. 내 안배로 조정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반격을 알리는 계획이 완성된다.”
아직 손바닥에 남은 조각들을 어루만지는 사탄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오른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이 재밌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런 사탄을, 벨리알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조금 후가 너무나도 기대되는군. 성공을 눈앞에 둔 인간 놈들이, 지옥 대공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 지가 궁금해.”
그렇게 말한 사탄의 입에서, 곧 낮디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잠시 후, 어두운 공간에서 섬뜩한 웃음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김수현 : 있잖아, 사탄아. 그거 해봐. 그거.
사탄 : 어~. 또…?
김수현 : 해봐~! 빨리~!
사탄 : 으, 응…. 알았어.
(잠시 후, 사탄. 정색하는 얼굴로.)
사탄 : 그리고 발생한 변수는…. 내 안배로 조정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반격을 알리는 계획이 완성된다….
김수현 : 아하하핳하하하하하하하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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