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48
00647 위험한 소개팅(?). =========================================================================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기운이 흐르는 와중에 조성호가 등장했다. 자연스럽게 장내의 공기가 경직되고 사용자들은 얼굴을 굳혔다. 오직 조성호만이 미소 지은 얼굴로 걸어오고 있을 뿐.
‘건수 하나 잡았군.’
지금껏 서로 없는 사람처럼 취급해왔으면서,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이유야 뻔하다. 조성호도 귀가 있으니 이미 탈영 사실은 듣고도 남았을 터.
무슨 말을 꺼낼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은 사실 조성호가 명분상 무조건 이기고 들어가는 싸움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간에 소속 사용자를 관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조성호가 오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옳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형이 밀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 머셔너리 로드.”
진로를 가로막자 조성호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아는 체를 했다.
“동부 요새에서 만난 이후….”
“예, 오랜만입니다.”
의도적으로 말을 끊자 조성호가 눈을 살짝 치뜸과 동시에 수행 인원들의 낯빛이 일변했다. 그러나 조성호가 재빠르게 눈짓을 보내자 대놓고 나서지는 않았다. 그저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볼 뿐.
그 시선들을 받아넘기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음? 마치 제가 못 올 곳을 왔다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급한 일이 아니라면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군요. 보시다시피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 설마 탈영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조성호가 느닷없이 목소리를 높여 탈영 사건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실은 이렇게 찾아온 이유도 그 사건과 관련해서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건 없습니다. 지금 상황을 정리하는 중이니 아직은 고려 로드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거야 제가 판단할 일이지요. 조언은 감사합니다만, 어쨌든 머셔너리 로드와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마침 여기 두 분이 모여 계시니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더 할 말 있냐는 듯 조성호는 빙긋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럼.” 이라고 말하며 그대로 지나치려는 찰나, 나는 똑같이 걸음을 움직여 또다시 진로를 가로막았다. 조성호가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는 듯이 도로 나를 응시한다.
“이런…. 머셔너리 로드?”
화난 듯 아닌 듯 오묘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예리하게 들어오는 시선을 맞받아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는 찰나였다.
“머셔너리 로드가 총 사령관이었나요?”
돌연히 조성호가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아니면….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남부의 총 사령관이 교체된 겁니까?”
그리고 이어진 말에 갑작스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조성호의 말은 총 사령관이 아닌 이상 나서지 말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버티면 그건 한소영을 무시하는 태도가 된다. 외통수였다.
‘이 빌어먹을 놈이….’
그때였다.
“머셔너리 로드는 남부의 총 사령관이 아니에요. 정확히는 선봉 부대장이죠.”
문득 왼쪽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눈동자를 굴리자 팔짱을 낀 채 도도히 걸어오는 한소영이 보였다. 조성호가 나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린다.
“아하, 그렇군요. 저는 또 제가 착각한 줄 알았습니다. 저를 막는 머셔너리 로드의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요. 하하하.”
“네, 그럼요. 머셔너리 로드인데요.”
조성호는 일부러 그런다는 게 보일 정도로 크게 웃어 젖혔다. 그러나 한소영이 바로 반응해오자 곧 웃음을 그쳤다. 조성호를 바라보는 한소영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자리잡는다.
“이번 공략에서 정말 엄청난 공을 세우셨잖아요? 그런 만큼 당연히 당당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
“여기,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활약하셨는데.”
“…….”
한소영은 특히 ‘그 누구와도’ 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번에는 조성호가 단박에 입을 다물었다. 잠깐이지만 얼굴이 굳은 빛이 스친 것도 확인했다. 한소영의 말은 언뜻 들으면 나를 칭찬하는 것처럼 들렸으나, 실상은 조성호의 행동을 세차게 꼬집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이윽고 한소영의 오연한 눈길에 조성호가 히죽 웃었다.
“물론 그렇죠. 머셔너리 로드의 활약은 익히 들었고,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그머니 한 발 물러나더니 한결 부드러운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리고 제가 지금 찾아온 건, 우선 수색을 중지하고 최대한 빠르게 출발했으면 하는 마음에 온 겁니다. 이렇게 진전이 없는 이상, 의미 없는 수색이 길어질수록 우리한테 좋을 게 없으니까요. 그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정필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먼저 도시를 찾기 전에 우리가 찾아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또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한소영도 공감하는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을 즈음, 여전히 한소영을 바라보는 조성호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현재 원정대의 배치 변경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오늘부터는 동부가 선봉으로 올라가고 싶습니다만.”
“그러세요. 그럼 우리 남부가 중앙으로 옮기도록 하죠.”
조성호의 미소가 진해졌다.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나는 멍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조성호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한소영이 1초 만에 허락해버린 것이다. 마치 네가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한순간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받아 치고 싶었으나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한소영이 모종의 신호를 보내 나를 말리고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사실 사용자들이 너무 시끄러운 터라 꽤나 곤란했는데, 동부는 제가 책임지고 진정시키도록 하죠.”
나는 이제야 조성호의 진짜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말인즉, 거래였다. 일단 도시를 찾기 전까지는 이걸 공론화하지 않을 테니 선봉 자리를 달라는 소리였다. 차후 동부가 앞장서서 도시를 찾았다는 명분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그럼 조만간 진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동부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으니 아무쪼록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조곤조곤 말한 조성호는 주변을 한 번 천천히 훑고는 더는 말 않고 등을 돌렸다. 그렇게 조성호가 떠난 이후로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상하리만치 꺼림칙한 기분이 느껴졌지만 결국 나 또한 준비하러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문득 누군가 무척이나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안솔이 있었다면….’
*
그렇게 북 대륙 사용자들이 진군을 시작하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다른 차원인 등활 지옥에서는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악마의 군세와 지옥의 군단이 맞붙은 공간은, 말 그대로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방에서 괴성이 메아리치고 피가 솟구친다. 이미 전장의 광기에 휩쓸린 괴물들은 이성 따위는 저편으로 날린 채 서로를 물어뜯고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는 존재는, 당연히 지옥 대공이었다.
지옥 대공은 딱히 처음처럼 화려한 능력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한 손에 든 불의 채찍만을 사용해서 벌떼처럼 밀려오는 마족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단연코 최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한 번 채찍이 요동칠 때마다 마족들을 장난감처럼 쓸어버린다. 악마 14군주 바로 아래 급으로 평가되는 최상급 마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옥의 겁화가 옮겨 붙는 족족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한다.
그런 지옥 대공을 바라보는 아스타로트는 시시각각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감을 느꼈다. 차원 이동진을 준비하는 벨제부브를 제외하고, 자신과 아스모데우스, 그리고 목숨 하나를 희생하고 되살아난 바알도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옥 대공과의 전투는 피하고 있었다. 대 악마들은 벨제부브가 진을 완성할 수 있도록 움직이고 있었고, 악마 14군주들은 견제를, 그리고 마족들이 지옥 대공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담당하고 있었다.
애당초 마족들이 지옥 대공을 상대할 수 있다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무조건 진의 완성이 최우선이니만큼, 어떻게든 시간이라도 벌어볼 속셈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마족들의 수가 눈에 띄게 확연히 줄어들어 있다. 물론 대 악마들도 그만큼 지옥 마수들을 박살 내기는 했지만, 지금도 불살라지는 수하들을 보며 아스타로트는 섬찟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지옥 대공은….
너희가 먼저 진을 완성할까?
아니면 내가 먼저 이놈들을 박살낼까?
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치 일종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기에. 그것도 대 악마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그렇게 지옥 대공이 무표정한 낯으로 전장을 종횡무진 휘젓고 있을 때.
“차, 차원 이동진을 발동한다!”
비로소, 약간 마지못한 기색이 담긴 목소리가 등활 지옥을 울렸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그러자 등활 지옥 곳곳에서 웅혼한 울림이 공간을 메워오며 흐르던 마력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의 정체는 벨제부브였다. 혼란한 와중에도 어찌어찌 차원 이동진을 완성한 것이다. 이내 흔들리던 마력이 지면으로 깊숙하게 스며들며 차원 이동진이 서서히 발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진을 완성한 벨제부브의 낯빛은 그리 좋지 못했다. 스스로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애초 이런 혼잡한 전장에서 진을 완성시키는 게 어불성설이거니와, 설령 완성했다손 치더라도 차원 이동진 같은 거대한 진법은 발동에 단계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말인즉 즉시 발동이 아닌, 처음 진을 돌리고 마지막 좌표를 지정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끄그그긍, 끄그그긍!
드디어 차원 이동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며들었던 마력이 한꺼번에 요동치기 시작한 순간, 벨제부브는 몸 내부로 커다란 충격이 들어오는걸 느꼈다. 자동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냥 압박이 아닌 직접적인 충격이 전해진다는 것은, 차원 이동진이 발동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황급하게 구축하다 보니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진은 발동된 상태였고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다. 벨제부브는 마치 세포가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2번째 절차로 돌입한 순간, 제물로 이용할 마족들에게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마족들이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대 악마들이 확보해준 공간으로 속속히 들어가 진의 구성 요소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이동을 끝마친 마족들은, 어느새 벨제부브를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포진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렇게 2번째 절차를 끝내고서 벨제부브는 곧바로 3번째 절차인 ‘차원문의 개방’ 에 들어갔다. 이 3번째 절차만 끝나면 마지막 절차인 ‘좌표 지정’ 만 남는다.
그렇기에 벨제부브는 몸 내부가 진탕이 되는걸 느끼면서도 주문을 외우는데 박차를 가했다. 그럴수록 등활 지옥을 메우는 웅혼한 울림도 점점 더 강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러자, 지옥 대공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걸까?
한창 마족들을 압살하던 지옥 대공은 돌연 풍겨오는 심상찮은 기운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곳곳에 서 있는 마족들을 확인한 찰나, 이어지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퍼석, 퍼석, 퍼석, 퍼석!
사방에 포진해있던 마족들의 몸이 갑자기 퍽퍽 터지더니 하나의 핏물로 화한다. 액체로 변한 살점 섞인 핏물들은 그대로 진을 따라 흘렀고, 불그스름한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호오…!”
그걸 보는 지옥 대공의 입에서 처음으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계속해서 무료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흥미로운 빛이 떠오른다. 물론, 벨제부브 입장에서는 전혀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
왜냐하면, 흥미를 느낀 지옥 대공이 온몸에서 폭발적인 염화를 뿜어냈으니까. 그리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려 벨제부브를 목표로 날아가기 시작했으니까.
“쿨럭, 쿨럭쿨럭!”
마침 3번째 절차를 완료한 벨제부브의 입에서 시꺼먼 핏물이 토해졌다.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지옥 대공을 향해 욕을 한 사발로 퍼부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차원 이동진이, 지옥 대공이 난리를 치기 시작하자 아예 균형이 깨져버렸다. 그러한 결과, 진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벨제부브에 한층 부담이 가중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벨제부브는 지옥 대공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꼭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윽고 지척까지 날아온 지옥 대공의 존재를 느낀 순간, 이어서 막으러 들어온 3명의 대 악마들이 모조리 튕겨나가는걸 확인했을 때.
“……!”
벨제부브는 그냥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차원 이동진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다른데 신경 쓸 여유도 없었거니와, 이제 자신이 살 길이 1초라도 빠른 진의 발동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무시무시한 지옥 대공을 마주했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는 죽음은 물론, 지금까지의 모든 희생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우는 벨제부브를 보며 지옥 대공은 희열에 찬 표정으로 손을 쭉 내뻗었다. 바알에게 했던 것처럼 그대로 목을 꿰뚫고 비틀어버리려는 듯이.
“이제 좀 재미있구나! 어디 한 번 해보거라!”
지옥 대공의 외침이 벨제부브의 귓전을 왕왕 울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앗!
지면에서 터진 단 한 번의 빛의 폭발에, 구간 전부를 메울 정도의 찬연한 빛무리가 등활 지옥을 물들였다.
끄그그그그그그긍!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한 소음이, 공간이 와짝 일그러지고 비틀어지는 광경이 곳곳에서 연출된다.
그리고.
“켈!”
벨제부브가 눈을 번쩍 뜬 것과.
푹!
목에 지옥 대공의 손이 틀어박힌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내 온몸이 불타오르는 벨제부브가 쓰러지고, 빛무리는 지옥 대공을 칭칭 감싸 안는다.
차원 이동진이 요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각.
마계.
“차원 이동진의 발동을 확인했습니다!”
“…그래, 좋아.”
벨리알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자, 사탄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오른쪽에 사슬에 감긴 마족을 돌아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도 안배를 실행한다.”
*
아틀란타(Atlanta).
김수현의 예상대로 도시는 정말로 목전에 있었다. 북 대륙 원정대는 진군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초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지역인, 초원보다 풀이 한참 적은 피처럼 붉은빛을 띤 황무지에 들어간 이후,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홀로 우뚝 솟은 거대한 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성호가 탑을 자세히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고어 해석 능력을 지닌 사용자들은 모조리 달려 나와 해석을 시도했다. 그 결과,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발견한 탑이 도시까지의 거리 및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임을 밝혀내었다.
아마 평소라면 사용자들은 또 한 번 환호하며 기뻐했을 것이다. 정말로 도시가 있음을 확인하고, 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까.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아니, 걱정스럽다는 표현이 옳을까? 오늘 새벽 이정필이 탈영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만한 사용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도시의 실존을 확인했다는 기쁨보다는, 혹시 그 궁수가 먼저 발견하고 도착하지 않았을까 싶은 걱정이 든 것이다.
사용자들의 걱정을 읽은 조성호는 곧바로 강행군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반론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아예 최선두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이렇게 마음이 급한 상황에서 사용자들 또한 하등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저…. 클랜 로드.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강행군이 시작된 이후, 조성호를 따라 선두까지 온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조성호가 흘끗 눈을 굴렸다.
“뭐가 괜찮아?”
“강행군말입니다. 후방 원정대에게도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게 옳지 않을지….”
그러자 조성호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가 선봉 부대인 이상 큰 상관은 없지 않나? 알아서 따라오지 않을까 싶은데.”
조성호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나름의 생각도 있었다. 어차피 진군 속도는 선봉에 선 원정대가 정하는 것이며, 설령 갑작스러운 강행군으로 항의를 해오더라도 탈영 사건을 들먹이면 그만이다. ‘이정표를 발견한 순간 1초라도 빠르게 발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아마 꿀 먹은 벙어리가 되리라.
사실, 조성호는 이번 탈영 사건을 일으킨 이정필이라는 사용자를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알게 모르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동부가 한순간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나아가 ‘동부가 처음으로 도시를 발견했다.’ 는 명분도 쥘 수 있게 해주었다. 아틀란타 입성 이후 충분히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었는데,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감사의 키스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킥.”
조성호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머리를 숙인 채, 여전히 걱정스런 낯빛을 하고 있는 사내를 보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말라고. 서북부에서 해놓은 짓이 있으니 딱히 항의하지는 못할 거다.”
“…….”
“교체하자마자 이정표를 발견하다니, 운이 좋았지.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얼른 도시만 발견하면 돼. 처음으로 입성하고 천연덕스럽게 축하하면 그만이야.”
“…저, 클랜 로드.”
그때였다. 계속해서 머리를 숙이며 걷던 사내가 갑자기 심각한 목소리로 조성호를 불렀다. 이어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뚝 걸음을 멈추기까지. 덩달아 심각해진 조성호가 걸음을 멈추자, 자연스럽게 강행군도 정지했다.
“응? 갑자기 왜 그래?”
조성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내는 서너 번 눈을 끔뻑이더니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
“어이, 왜 그러냐니까?”
“피 냄새…. 나지 않습니까?”
“…뭐?”
비로소 사내의 입이 열리자 조성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내 사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내리자, 처음 붉은 핏빛을 띤 황무지가 눈에 들어왔다.
조성호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손을 내려 천천히 지면을 쓸어보았다.
처음에는 잘 몰랐다. 얼른 도시를 발견하겠다는 급한 마음도 있었고, 또 황무지도 핏빛을 띠고 있어 딱히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확실히 뭔가 이상한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내의 말대로 미약하게 풍겨오는 피 냄새도 그렇지만….
“이건….”
무엇보다 지면의 흙이 이상하다. 손에 쥔 흙은 적토가 분명했다. 그러나 흙을 쥐고 몇 번 손을 비벼보자 뭔가 끈적끈적한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살짝 굳어 응고한 피를 만지는 것처럼. 어느덧 손에는 흙을 비빈 것치고는 진한 붉은 자국이 묻어 있었다.
주변 일대는 온통 핏빛 황무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이상함을 느낄 수 없었는데, 유독 이 장소에서만 미약하게나마 피 냄새가 흐르고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찰나, 조성호의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그러니까, 무언가 이상하다라고.
그렇게 생각한 조성호는 일단 물러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성호는 알고 있을까?
이미 주변 대지에는 사탄이 안배한 이정필이 모종의 행동을 마쳤다는 사실을.
그리고,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번쩍!
그렇게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땅에서 붉은빛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
그와 동시에, 강렬한 현기증이 조성호의 뇌리를 습격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성호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절반쯤 펴졌던 무릎이 도로 하릴없이 꺾이고, 몸은 크게 휘청인다.
조성호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귀가 멍해지며 이상한 소음이 들려온다.
시야는 갑자기 좌우로 나뉘어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붉어졌다. 흡사 눈알에 피를 적신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온 세상이 핏빛으로 채색돼 천천히 흘러간다.
그 어떤 징조도, 전조도 없었다. 조성호가 확인한 거라고는, 땅에 묻은 피와 잠깐의 붉은 번쩍임뿐. 하다못해, 그전까지는 마력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문득, 조성호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걸 느꼈다.
번쩍임을 확인하고, 1분이나 흘렀을까? 무언가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붉디붉던 시야는, 어느새 형체가 흐릿하게 들어올 정도로 가물가물해지고 어둡게 변한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로를 가득 채우던 마력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쭉쭉 빠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이제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잠시 눈을 스치고 지나간, 흙 바닥에 쓰러진 누군가의 모습을 확인해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다. 전신을 엄습해오는 노곤함은 모든 걸 잊게 만들었다.
결국에는 머릿속에 내려앉은 ‘쉬고 싶다.’ 는 생각에 몸을 맡기고, 조성호는 눈을 감았다. 지금,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이윽고 서서히 무너지는 조성호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어둠이 들어찬 시야를 환하게 밝혀올 정도의 불빛을 내뿜는, 불그스름한 황금색을 띠는 형상이었다.
============================ 작품 후기 ============================
드리고 싶은 말은 많은데….
일단 잘게요. 자야 할 것 같아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