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49
00648 위험한 소개팅(?). =========================================================================
그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갑작스럽게 벌어졌다. 미처 대응할 겨를도 없이.
야영지를 떠날 때는 조성호를 어떻게 족칠까 고민하고 있었다.
핏빛 황무지에 진입하고 탑의 이정표를 발견했을 때는 이제 정말 끝났다고 생각했다.
잠깐 진군이 멈췄을 때는 약간 긴장이 풀어졌다.
진군 정지가 길어지고 전방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와도 별일이야 있겠냐 싶었다.
그러나.
우웅!
돌연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고.
우우우웅!
삽시간에 강도를 키우더니.
우우우우우우우웅!
온 세상을 구성하던 형형색색의 빛이 모조리 붉은 빛으로 반전한다.
‘저건…?’
이내 둥근 접시를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붉은 장막을 확인한 순간,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몸은 차오르는 의문을 이기지 못해 자동적으로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 가지마!
그러나 막 한 걸음 뗀 찰나, 화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 젠장, 가지마! 절대로 가지마! 아니, 도망쳐! 빨리 도망치라는 말이야!
‘화, 화정?’
어떠한 상황 설명 없이 무조건 도망치라고만 하니, 나 또한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화정의 목소리는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절박한 음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차원 이동 간섭(陣).』
(설명 : 차원 이동진에 대응하는 차원 이동 간섭진입니다. 차원 이동진이 발동 시 대응해 연결시키면, 차원 이동 간섭진의 시전자에게 말 그대로 ‘간섭’ 할 여지가 생깁니다.)
(상세 설명 : 현재 사용자 김수현이 확인한 진은 정식이 아닌 약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구성 요소에서 마족의 선혈을 확인했습니다. 간섭 효과는,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생물체들을 액체화시켜 소환되는 대상의 원천으로 삼습니다.)
‘…뭐?’
갑자기 출력된 말도 안 되는 설명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반문했다.
– 아, 안 돼! 늦었어…!
그리고 화정이 절망하는 목소리가 이어진 순간이었다.
끄그그긍, 끄그그긍!
돌연히, 어디선가 녹슨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거슬리는 소음이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촉이 온몸을 스멀스멀 잠식해 들어오기까지. 마치 이 세상을 이루는 공간이 억지로 비틀리고 일그러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아니, 잠깐만.’
눈앞의 상황을 하나하나 인지해나가는 순간,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벌어지는 현상이 언제 어디선가 겪어본 적 있다는 상황이라는 것을.
즉 이 감각은 아틀란타를 탈환할 때 느꼈던, 그러니까 지옥 대공이 등장할 때와 비슷한….
‘…아?’
그 순간, 불현듯 예전의 기억이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설마 설마 하면서도,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처음 눈에 보인 건, 시뻘건 빛을 띤 불길한 기운이 흐르는 하늘이었다. 이어서 둥근 장막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아지랑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백 가닥의 아지랑이들이 중구난방으로 피어 오르니 마치 하늘에 붉은 강이 흐르는 듯했다.
그리고 공중으로 느릿하게 떠오르는 불그스름한 형체 하나. 붉은 아지랑이들 또한 똑같이 허공을 오르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형체에 흡수라도 되듯이 빛에 닿는 족족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확인한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도망치라는 화정의 경고.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설명.
1회 차의 기억.
그리고 이미 늦었다는 말.
머릿속 복잡하게 쌓인 기억들과 생각들이 갑자기 하나로 합쳐졌다. 거의 동시에,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 이제 알겠다. 이제야 왜 화정이 도망치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가장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틀란타를 앞두고 재현된다.
이윽고 하늘로 떠오른 형체의 빛이 조금씩 걷히고, 그 안으로 소환된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가히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고운 이목구비. 무심한 듯 보이는 진홍색 눈동자. 벌건 황금을 녹여 뽑아낸 듯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풍성한 머리칼. 그리고 온몸에 연한 불빛이 흐르는 여인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호흡을 정지하고 말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직 하나.
‘지옥…. 대공….’
‘전방의 사용자들은 어떻게 됐는지.’, ‘어떻게 지옥 대공이 소환됐는지.’ 라는 생각은, 곧 사라졌다.
그저 갑작스럽게 의식이 얼어붙었다. 절로 이빨이 딱딱 부딪치기 시작한다.
지옥 대공을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자꾸만 의식이 멍해지고 다리가 느슨해지려고만 한다. 그런데 가슴은 지금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이 쿵쾅쿵쾅 요동치고, 숨은 턱턱 막혀오고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떠봤지만, 그럴 때마다 저 하늘에 떠 있는 존재가 지옥 대공이 분명하다는 사실만을 되새길 뿐.
…나는, 그제야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랬다. 나는 지금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느닷없이 소환된 지옥 대공을 확인한 순간, 그 존재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기운에 질려버린 것이다. 쿠샨 토르 앞에 섰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추스르려 노력해봤으나, 심안으로도 다스려지지 않을 정도의 압박감.
결국 해일처럼 밀려들어오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간신히 좌우로 시선을 돌리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사용자들이 보인다. 모두 이 갑작스런 사태에 놀랐는지 하나같이 넋을 잃은 얼굴로 지옥 대공을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사지를 구속당한 기분을 느낀 채, 나는 겨우 머리를 젖혀 도로 시선을 올렸다.
황혼 빛 하늘 아래, 지옥 대공은 한 눈에 봐도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무에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차분히 허공을 둘러보는 거만스러운 낯빛은 사나운 노기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오연히 시선을 떨어트리더니 땅에서 바라보는 사용자들을 쓱 훑어본다.
그 순간, 나는 지옥 대공이 어쩌면 그냥 넘어가주지 않을까라는, 혹시나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진홍색 눈동자는 명백한 혐오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마치 한낱 미물, 아니 벌레를 보는 눈초리였다.
그렇게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던 지옥 대공이 마침 내가 있는 부근을 훑은 순간.
지금껏 내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옥 대공의 낯에 돌연 흥미로운 빛이 나타났다. 사나운 시선을 거두고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빛낸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있는 지점을 향해.
그래, 지옥 대공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공중에서 이내 느릿하게 내려오는 지옥 대공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아차 한 사이 뜨거운 불 냄새가 코를 푹 찌르고 들어왔다.
천천히 내려온 지옥 대공은 지상에서 약 2미터 높이를 남겨두고서 강하를 멈췄다. 그리고 허공에서 의자에 앉는 자세로 다리를 꼬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어 나를 가만히 응시한다. 이제 지옥 대공과 나와의 거리는 채 1미터도 되지 않는다.
사방에 내려앉은 침묵.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자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아주 예전에는 화정만 있으면, 설령 지옥 대공이 출현해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느끼건대,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다. 서로 비슷한 힘을 이루고 있다고는 하나, 그 힘을 바탕으로 이룬 경지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감히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이 이상은 차마 마주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왜 갑자기 나를 보고 내려온 걸까?
‘혹시 화정 때문에?’
확실히 가능성은 높다. 파괴력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는 종미의 불을 지닌 존재라면, 태고의 불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지 않을까?
“호. 웬 미물들만 가득하나 싶었는데, 제법 흥미를 돋우는 놈도 있구나.”
그때, 문득 지옥 대공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미성에 한순간 그대로 홀릴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나는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 귀를 기울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모로 보나 한낱 인간이 분명한데….”
“…….”
“이만큼이나 격의 차이가 벌어져 있다면, 응당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야 정상이거늘. 지금 다른 미물들처럼 말이다.”
“…….”
“헌데, 오직 네놈만이 나를 느끼고 있다? 이 몸의 존재를 인식하고 파악한다?”
“…….”
계속해서 이어지는 지옥 대공의 말소리. 나한테 뭔가를 묻는 것 같은데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지옥 대공이 나를 목표로 내려온 이유가 화정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화정의 반응이 느껴지지 않고 있다. 힘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딱히 따로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아까 화정의 반응으로 미루어보면 자신의 기운을 일부러 꺼트렸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유를 짐작한다면, 아마 지옥 대공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구나. 그러니 한 번 아뢰어 보거라.”
지옥 대공이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적당히 둘러댈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거짓말이 통할 상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서 말해보래도. 대답이 마음에 들면 살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화정의 행동이 마음에 걸린다. 화정도 괜히 이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침묵을 지킬 수만도 없고.
그럼 나는, 여기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참, 어지간히도 말을 듣지 않는군.”
지옥 대공도 인내심이 그렇게 깊지는 않은 모양이다.
잠시 후, 계속 땅만 바라보는 시야로 검지만 핀 지옥 대공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이어서 검지 끝을 내 턱에 조심스레 갖다 대더니 입 아래서 살짝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머리를 들라는 소리 같다.
차마 거부할 수 없어 이끌리듯이 머리를 들자, 여전히 허공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나를 바라보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이윽고 지옥 대공은 한 번 말해보라는 듯이 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마지막 기회다. 너는 무엇을 숨기고 있지?”
바로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