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54
00653 회광반조(回光返照). =========================================================================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눈이 절로 번쩍 떠졌다. 이건 고연주가 도시를 발견했다는 소리였다.
“큭…!”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갑자기 전신을 칼끝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나도 모르게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때마침 두 개의 메시지가 허공에 새로이 출력됐다.
『사용자의 체력이 30% 이하임을 확인했습니다. TOPG의 잠재 능력 ‘분노’ 가 활성화됩니다.』
『사용자의 능력치 중 근력, 체력, 내구, 민첩이 소폭 상향합니다.』
공교롭게도 ‘분노’ 가 활성화된 탓에 몸에 약간이나마 힘이 돌아왔다. 물론 그렇다고 고통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 미미한 활력에 힘입어 나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내 기척을 느낀 걸까?
서서히 가라앉는 초점에, 서로 대치하고 있던 두 여인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 게 잡혔다.
“흐응?”
“오, 오빠?”
다행히 김한별은 서 있는 상태였다. 아직 전투에 들어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여전히 머리는 어지럽고 몸을 가누는 게 힘들었으나,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와중, 주변 상황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옥 대공이 서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수많은 이들이 찢겨진 휴짓조각처럼 널브러져 있다. 개중에는 내가 아는 사용자들이 대다수였다.
배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린 채 대(大)자로 뻗은 공찬호.
전신이 시커멓게 그을려 쓰러진 형.
복부를 감싸 안고 누운 한소영.
핏물 고인 웅덩이에 처박힌 이유정.
안현….
연혜림….
신재룡….
헬레나….
그렇게 곳곳에 쓰러진 사용자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두고 있을 즈음.
“…어떻게 된 거지?”
조용히 묻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고개를 갸웃한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그리고 지옥 대공의 손에 머리칼이 붙잡힌, 축 늘어져 있는 제갈 해솔까지도.
“육신은 물론, 영혼마저 불사르는 고통을 맛봤을 터인데….”
그랬나. 왠지 호흡할 때마다 폐가 아프고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진다 싶었는데, 영혼까지 불살랐던 건가.
“보통 인간이라면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죽었다 깨어나도 목숨이 모자랄만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어섰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폭 한숨을 흘리는 지옥 대공.
“정말, 놀라움에 앞서 정신력 하나만큼은 찬사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구나.”
잠시 후, 지옥 대공은 오른손에 쥔 것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제갈 해솔을 옆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을 짓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너무 걱정은 말거라.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어지간하면 죽이지 않으려 애썼으니. …뭐, 잠깐의 유희로 괜찮은 놈들도 상당히 있었고.”
어지간하면 죽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건 조금 고마운데.”
나는 전투에 들어간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찾아온 홀가분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냥 아무 이유 없는, 까닭없는 웃음이었다. 지옥 대공이 두 눈을 살짝 치뜨며 나를 바라본다.
“오, 오빠….”
걱정스런 눈초리와 애틋한 목소리가 나를 막아 섰으나, 나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은 후 김한별을 지나쳤다. 그리고 지옥 대공과 약간의 거리를 남겨두고서 걸음을 정지했다.
“…그냥 누워 있지 그랬느냐.”
문득 지옥 대공의 딱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투지는 기특하다마는…. 너도 이제 알고 있지 않느냐.”
“…….”
“침묵은 긍정으로 생각하마. 지금까지의 투지는 칭찬해주마. 그러나 이 이상의, 괜한 오기는 이만 접어두거라.”
“…….”
순간적으로 머리를 끄덕일 뻔했다. 지옥 대공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아까 만전의 상태에서도 순식간에 격파 당했는데, 지금 이 상태로는 정말로 일초지적도 되지 못한다. 말 그대로 오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다.
나는 계속해서 호흡을 고르며 기절한 공찬호가 있는 방향으로 왼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회로를 따라 천천히 마력을 일으키자 옆에 처박힌 수라마창이 두어 번 들썩들썩 움직이더니, 곧 불쑥 뽑혀 나와 빙그르르 돌며 가볍게 손에 안착했다.
“수라를…?”
지옥 대공은 잠시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이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왠지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마 내가 수라마창의 힘을 이끌어낸다고 해도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겠지.
문득 아주 오래 전 형이 해준 말이 떠오른다.
‘수현아. 아무리 불리한 전투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역전의 찬스가 한 번은 온다.’
이 말은 예전에 내가 안현에게 해준 말이기도 했다.
스포츠 경기든 전투든 어느 일을 하든 간에, 일종의 ‘흐름.’ 이라는 게 있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시종일관 지옥 대공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흐름이란 것이 넘어올락 말락 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 가 활성화됐을 때부터 미묘하게 느껴지던 역 흐름이었다.
물론 상대가 지옥 대공인 만큼 여전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그래도 최소한 반격의 기회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흐름은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조금 전 화정이 그랬다. 살고 싶으냐, 아니면 살리고 싶으냐고. 거기서 나는 살리고 싶다는 길을 선택했다.
이제야 그 진정한 뜻을, 화정이 화내듯이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화정은 아마 지금 흐름을 반전시키고, 또 반전한 흐름을 증폭시킬 수 있는 무언가의 방도를 갖고 있을 것이다. 다만 양자택일로 말한 이유는….
아마 억지로 흐름을 증폭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것.
…그 대가란, 나의 죽음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돌연 몸이 덜덜 떨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애써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10년이 넘게 꿈꿔왔던, 그리고 간신히 눈앞으로 다가온 희망을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화정은 아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대답만이 아닌 나의 결정이 필요한 때였다.
나는 무검과 수라마창을 힘껏 부여잡았다.
그래….
‘이제는, 같이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좋다.’
온몸의 마력을 하나하나 끌어 모았다. 그리고 허공에 출력된 사용자 정보 창을 향해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했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원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한 번만.
‘단 한 번만, 흐름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제껏 끌어 모은 모든 마력과 염원을, 모조리 무검과 수라마창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무검이 사용자 김수현의 의지에 응답해 소환됩니다!』
『혼돈 왕의 상징, 절멸(絶滅)자의 검이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수라마창(壽拏魔槍)이 사용자 김수현을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합니다!』
『근력이 6포인트 상승합니다!』
가장 먼저 응답한 건 무검과 수라마창이었다.
웅웅웅웅웅웅웅웅!
키아아아아아아아!
둘 다 가공할만한 마력을 뿌리면서 미친 듯한 공명음을 토해낸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정도로는 지옥 대공에 턱도 없다는 걸.
그렇다면….
『잔여 능력 포인트인 1(Special, Latent) 포인트를 사용합니다. 해당 포인트는 단계 상승이 아닌, 랭크 상승 포인트로 판정됩니다!』
『축하합니다. 2슬롯 잠재 능력인 ‘쓰러질 수 없는(Rank : S Zero).’ 이 1 랭크 상승합니다!』
『‘쓰러질 수 없는(Rank : S Zero).’ 이 ‘쓰러질 수 없는(Rank : EX).’ 으로 진화합니다!』
『해당 능력은 더 이상 상승할 수 없습니다!』
『체력이 101 포인트로 상승합니다!』
『화정(火正) 각성의 3단계가 시작됩니다!』
‘쓰러질 수 없는’ 의 랭크 상승과 체력 능력치 101 포인트. 이로써 화정의 제 3차 각성이 시작됐다.
그래도,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다. 지옥 대공이 거머쥔 흐름을 가져오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다. 그런 만큼 지금 할 수 있는 건 모두 끌어내야 한다.
『‘용족화’ 를 발동합니다!』
『자세한 능력은 사용자 정보를 확인해주십시오.』
나는 곧바로 허공을 바라봤다.
1. 이름(Name) : 김수현(3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술 전문가(Secret, Sword Specialist,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마성(魔性 : 사람을 속이거나 현혹하는 악마와 같은 성질.) • 검의 주인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7)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
* 심장에 화정을 품은 상태입니다.(현재 3차 각성이 진행된 상태입니다.)
* 체내에 한 치의 노폐물도 찾을 수 없습니다.(마력의 흐름이 두 배로 상승합니다.)
* 심장에 고대 무녀의 각인이 새겨진 상태입니다.(마력 회로가 안정되고 효율이 증가하며, 흐름 또한 추가로 상승합니다.)
* 용족화를 사용한 상태입니다.(물리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이 크게 상승하며, 행운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에 추가 어드벤티지가 붙습니다. 용의 날개를 소환할 수 있고, 허공을 활보할 수 있습니다.)
1. 제 3의 눈(Rank : S Zero)
1. 신검합일(Rank : EX)
1. 백병전(Rank : EX)
2. 쓰러질 수 없는(Rank : EX)
3. 심안(정)(Rank : EX)
4. 전장의 가호(Rank : EX)
5. -.
(잔여 능력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1. 폴리모프(제한).
2. 용족화(제한).
3. –
4. –
5. –
무언가 변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느낀 감각은 시원함 이었다. 전신이 개운하고 상쾌하다. 더 이상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회로를 휘도는 마력이 전에 없이 저돌적이고, 몸을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가 깨어나 힘을 보내주는 기분이다. 마치 사그라지기 직전, 한 차례 크게 불꽃을 일으키는 촛불처럼.
지옥 대공은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여유로운 낯빛은 온데간데없고, 약간 짜증난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어리석은…. 그렇게 해서라도 현실을 부정하려고 드느냐.”
현실 부정이라.
“자신 있나 보군.”
나 또한 곧바로 맞받아쳤다.
“자신?”
그러자 지옥 대공은 가볍게 코웃음 치며 시답잖게 웃었다.
“그건 오히려 이 몸이 해야 할 말 아닌가?”
그 순간,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던 두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지옥 대공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대야말로, 고작 그 정도로 자신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콰르르르르르르르!
돌연 부릅떠진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폭사하듯이 뿜어져 나온다. 지옥의 겁화가 춤추듯 사방으로 타오르고, 당장에라도 집어삼키겠다는 것처럼 사정없이 일렁인다. 이제껏 유희를 즐기던 지옥 대공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옥 대공이 강림한 것이다. 그것은 지금껏 끌어낸 내 모든 것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의 기운이었다.
– 김수현.
그때, 비로소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정?’
– 시끄럽고, 예전에 기억해? 2차 각성 끝내고, 선물 하나 주겠다고 했던 거.
‘선물? 선물이라면….’
– 그래, 이게 내 선물이야.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화정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화정(火正)이 사용자 김수현에게 모종의 기운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간섭의 영향으로, 5슬롯 잠재 능력 ‘염화(炎化)’ 가 개화됩니다!』
느닷없이 추가로 떠오른 두 개의 메시지.
– 간다. 정신 똑바로 붙잡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화르르르르르르륵!
눈앞으로, 맑은 불꽃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어제 코멘트 보고 울 뻔…. 사실 요즘 왜 이렇게 휴재가 잦냐고 오만 욕을 먹을 줄 알았는데, 따뜻하게 걱정해주시는 거 보고 감동을…. 흠흠. 정말로 감사합니다. _(__)_
아무튼 오랜만에 정시 연재하니까 좋네요.(하이라이트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사실 이 파트가 끝날 때까지 하이라이트라고 보셔도 좋아요.)
선물의 의미는 예전 축제 당시 2차 각성이 끝나고 깔아둔 복선이었습니다. 염화는 지금 수현이 가진 잠재 능력 중에서 가장 굉장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페널티도 있지요. 자주 쓸 수 있는 능력은 아닙니다. 🙂
아, 그리고 그저께 한소영 일러스트 중간 보고 받았어요. 지금 엄청 예쁘게 제작 중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 분께서 밤을 새시고 매달리고 계시는 중이지요. 저도 기간은 조금 늦어져도 좋으니 최대한 퀄리티를 높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마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