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57
00656 회광반조(回光返照). =========================================================================
“차원 이동진…! 그런데 약식?”
가벼운 탄성을 터뜨린 헬레나가 얼른 무릎을 굽혔다. 이어서 적토(赤土)가 쌓인 지면을 가볍게 쓸어 몇 번 손을 비볐다가 펴자, 손바닥에 묻은 진한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그 자국은 적토의 흔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선명한 선홍 빛을 띠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진득한 점성도 느껴졌다.
“이건…. 혈액….”
조용히 중얼거리던 헬레나는 돌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이내 황금색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정상으로 되돌아오고 눈매가 한껏 가늘어진다.
“역시…. 차원 이동진은 없는 게 아니었어. 이곳에 확실하게 존재한다.”
그랬다. 말 그대로 황무지에는 헬레나가 언급한 차원 이동진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누군가의 혈액으로 그려진 약식 소환 진이. 그러나 황무지에 혈액과 비슷한 빛깔을 가진 적토가 쌓인 터라 눈에 잘 띄지 않은 것이다.
헬레나는 여전히 실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건 누군가가 상당히 오랫동안 공을 들인 계획이군.’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 으로 정보를 획득한 이후, 헬레나의 사고 회로가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세한 계획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옥 대공을 소환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처럼 간섭 효과를 지닌 소환 진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사실상 헬레나의 생각은 거의 정답에 가까웠다. 사탄이 악마의 씨앗에 감염된 이정필을 이용해 그려낸 약식 차원 이동진이야 말로, 이번 안배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었다.
이것으로 사탄이 간섭한 효과는 두 가지.
첫 번째는 불안정하게 발동된 정식 차원 이동진의 좌표를 인간 세상으로 고정시켰다는 것.
두 번째는 인과율의 법칙에 따른 제한으로 지옥 대공이 크게 약화될 것을 대비해, 힘을 어느 정도 회복시킬 방안을 마련했다는 것. 범위 내 사용자들이 모두 녹아내려 지옥 대공에 흡수된 건, 바로 그러한 간섭 효과로 벌어진 일이었다.
즉 대 악마들이 정식 진을 발동해 지옥 대공을 보내버리는 것과, 사용자들이 약식 진에 진입한 틈을 정확히 예측하고 잡아낸, 그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이루어낸 안배인 것이다. 진소위(眞所謂) 사탄만이 가능한 계획 균분(均分)이었다.
그리하여 지옥 대공이 소환되고 한창 전투를 벌이는 지금, 계획은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고 봐도 무방하다.
허나 옥에도 티가 있다고, 이렇게 착착 맞물린 계획에서도 흠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딱 하나 결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북 대륙 원정대 중 차원 이동진을 알아보는 한 사용자, 아니 한 개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인간 세상에 차원 이동진에 관한 자료는 아예 남아 있지 않고, 설령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할 능력을 갖춘 사용자는 전무하다. 그런 만큼 사탄이 그 사실을 간과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북 대륙 원정대에 ‘사용자’ 가 아닌 존재가 있다면?
더 나아가서, 그 존재가 차원 이동진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고, 응용할 수 있는 지식까지 갖추고 있다면?
그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니, 달라질 수도 있다.
“…쯧.”
잠시 후, 조금이나마 전후 사정을 알게 된 헬레나는 무겁게 혀를 찼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결과 마침내 결론을 내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결론을 냈다고 해봤자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옥 대공이 어떻게 소환됐는지, 또 어떤 존재인지 한층 명확하게 되새겼을 뿐이다.
어쨌든 헬레나의 최종 결론은 현 상황에서는 지옥 대공을 죽일 수 있는 방도가 없다는 것. 김수현과 사용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저 정도의 존재를 물리적으로 죽이는 건 100%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만큼은 절대 불변(絶對 不變)의 법칙이라고 봐도 좋다.
…그래.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도마뱀?”
그렇게 막 속마음으로 결심을 한 찰나, 돌연 익숙한 목소리가 헬레나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몸을 돌린 헬레나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분명 따라오지 말라 말했을 터인데, 진의 외곽에 사샤가 홀로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보내는걸 보니 헬레나의 기행을 지켜본 모양이다.
헬레나는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살그머니 팔짱을 꼈다. 그 행동에 사샤가 황급히 입을 열은 순간이었다.
“너 지금…!”
“마침 잘 왔구나.”
‘무슨 짓을 하고 있냐.’ 라고 말하려던 사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까 따라오지 말라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잘 왔다고 말하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 순간 갑자기 말을 멈춘 헬레나가 하늘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나 싶어 똑같이 돌아본 사샤는 허공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며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창이던 전투는 어느새 멈춘 상태였다. 그리고 하늘에서 온몸에 불을 두른 인영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우주에서 낙하하는 혜성의 꼬리처럼. 굳이 달려가지 않아도 저 광경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설명할 시간도 없는 건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문 헬레나는 지체 않고 사샤를 불렀다.
“사샤 펠릭스! 얼른 가서 전해라. 적을 없앨 방도를 찾았다고.”
“뭐, 뭐라고?”
사샤가 기함했다. 그것은 헬레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까지만…! 저 존재를 어떻게든 이곳까지만 데리고 오라고.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
“너….”
“어서!”
“아, 아니.”
사샤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지금 상황이 굉장히 급박해 설명을 들을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헬레나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매우 심상찮았다. 무언가 커다란 결심을 한 듯 눈동자를 비장하게 빛내고 있었다. 마치 죽음을 각오하기라도 한 것처럼.
“…알겠다.”
결국 사샤는 무언의 압박에 짓눌려 그대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흘끔흘끔 뒤돌아보는 것도 잠시. 이내 왔던 길을 달려서 되돌아가는 사샤를 확인한 후, 헬레나는 주변 황무지를 되돌아보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진의 중앙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이미 헬레나의 내면은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지옥 대공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까 사샤한테 말했듯이 ‘없애버리는 건’ 가능하다.
이 세상에서.
이 진을 재사용해서.
이미 모든 정보는 이 장소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지옥 대공을 돌려보낸다.’ 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재 2가지 조건이 새롭게 필요하다.
첫 번째는 약식에 불과한 진을 재구성해 정식 차원 이동 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까다로운 작업임은 분명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미 진이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이기도 하거니와, 지금 진의 중앙으로 걸어가는 존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고대를 넘어선 아득한 신화 시절, 거인들 다음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던 용이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종말이라는 칭호를 부여 받은, 종족의 정점에서 군림하던 마그나카르타라는 존재가 헬레나의 실체였다.
두 번째는 진의 발동에 필요한 제물을 준비하는 것이다.
“후유.”
그때였다.
진의 중앙에 다다른 헬레나는 걸음을 멈추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딱히 후회는 없다만.”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헬레나의 눈동자에는 무수한 감정들이 스치고 있었다. 무언가 홀가분해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무척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눈동자에 흐르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멈춘 순간, 헬레나가 처연하게 웃음지었다.
“그래도 창관에는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
하늘에서 낙하한 인영이 지면에 부딪친다.
쿵!
그러자 핏빛 흙먼지가 풀썩 일어나며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이어서 누군가가 아직도 진동이 남은 대지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이렇게 맞아본 적도 오랜만이구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리는 지옥 대공을 확인한 순간, 인근에 있던 사용자들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아직 정비에 들어가기도 전에 하늘에서의 전투가 끝난 것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척 봐도 지옥 대공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아까의 오연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곳곳에 상처를 입은 어딘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서 있는 자는 지옥 대공이었다. 말인즉, 방금 땅에 부딪친 인영은 김수현이라는 소리였다.
“아무튼, 이제….”
지옥 대공이 기품 있게 핏물 섞인 침을 뱉어낸 후 조용히 입을 연 순간이었다.
문득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김수현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럽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심지어 지옥 대공조차도 말을 이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쪽 날개는 꺾이고 전신은 피 칠갑을 한, 온몸이 아예 너덜너덜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김수현은 몸을 일으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아직도!”
지옥 대공이 얼굴을 와짝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비호처럼 몸을 날려 손에 든 채찍으로 거칠게 김수현의 가슴을 후려쳤다.
쫙, 경쾌한 타격음과 동시에 김수현의 몸이 크게 비틀렸다. 그러면서도 김수현은 수라마창을 휘둘렀으나 아까처럼 강렬하지도 정교하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휘둘렀을 뿐이라, 지옥 대공은 수월하게 피해내었다. 김수현의 입과 가슴에서 선명한 핏물이 터져나오며 그대로 몸이 허물어진다.
아니, 허물어지려는 찰나였다.
“……!”
절반 이상으로 구부러지던 김수현의 다리가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도로 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이 대지에 굳건하게 박힘에 따라 하릴없이 무너지던 몸이 제자리를 찾는다.
그러니까, 김수현이 다시 일어섰다. 쓰러져도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처럼.
“무, 무슨?”
“수, 수현아!”
이윽고 김수현이 다시 자세를 잡자 지옥 대공과 김유현이 동시에 외쳤다.
그래도 형의 말에는 반응을 한 걸까?
별안간 김수현의 몸이 움찔했다. 이어서 느슨하게 풀린 팔이 올라오더니 느릿하게 허공을 젓는다.
그저 간신히 손목만 움직인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김유현은, 아니 그걸 지켜본 모든 사용자들은 느닷없이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저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김수현은 거의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도 지인들에게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대로 떨어진 김수현의 팔이 부르르 떨면서도 재차 지옥 대공을 겨냥한다. 그 흔들림 없는 오롯한 시선을 받은 지옥 대공은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적당히 상대한 것도 아니었다. 김수현이 각성한 이후, 지옥 대공도 목숨만 빼앗지 않을 뿐이지 나름대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방금 채찍질도 심혈을 기울인 일격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이미 흔적도 없이 파괴됐어야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데, 그런데….
‘진정으로…. 죽이는 길밖에는 없다는 말인가?’
혼란을 느낀 지옥 대공이 침을 삼켰다. 그리고 무겁게 침묵하며 김수현을 응시했다. 서서히 옅어져 가는 다홍색 불길은 염화(炎化) 능력의 유지 시간이 거의 끝나감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다. 간신히 거머쥐었던 흐름이 다시 떠나가고 있음에도, 승리를 원하는 갈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의식이 끊길락 말락 하는 상황에서도 힘을 모으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고 있다.
지옥 대공은 갑자기 뜻 모를 불안함이 온몸을 엄습하는걸 느꼈다. 분명 전황을 압도하고 있을 텐데, 오히려 지옥 대공이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차오르는 긴장감에 지옥 대공이 돌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콰르르르!
말아 쥔 주먹이 삽시간에 진홍색 염화로 휩싸인다. 그리고 오른손을 떨치듯이 휘두르자 둥글게 모인 지옥의 겁화가 그대로 김수현을 향해 비수처럼 쏘아졌다.
그 순간 덜컹,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는 과연 누구에게서 난 소리일까.
그렇게 주먹만한 불길이 김수현의 가슴에 닿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안젤루스여!”
갑작스레 앳된 목소리가 전장을 울려오는 동시에.
화아아악!
은은한 파란 빛이 흐르는 하얀 빛무리가 드넓게 퍼지며 김수현의 전신을 감싸 안는다.
그 다음 순간.
퉁!
지옥의 겁화로 이루어진 불길은, 그 빛무리를 뚫지 못하고 사선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다행스럽게도 약속했던 시간보다 50분 일찍 올릴 수 있었네요. 🙂
이번 파트에서 총 2가지 정도가 수정이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제갈 해솔의 능력치를 다시 점검해야 할 것 같고(어느 고마우신 분이 알려주셨네요.), 두 번째는 Blue Dahlia에 관해서입니다. Blue Dahlia는 기적의 진화 판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메시지를 보면 아예 새로운 고유 능력이 개화했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요. 수정이 완료되면 따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회는 리리플을 하도록 할게요. 왜 갑자기 리리플이냐고 물으신다면…. 오랜만에 해보고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음 회가 3부의 마지막이거든요. 물론 실질적으로는 2부고, 첫 구상 시 기획했던 3부의 마지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평소 궁금했던 부분이 있으시면 질문해주세요.
다만, 모두 저번처럼 모두 리리플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건 답변해도 괜찮겠다 싶은 것 딱 5개만 뽑아서 답변을 드릴 예정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