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62
00661 1. 김칫국과 설레발의 차이점. =========================================================================
내 표정을 읽은 걸까.
“응? 또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느냐?”
지옥 대공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이모저모 살피는가 싶더니 자신이 소환된 경위에 관해서 천천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
지옥 대공이 모든 설명을 마쳤을 때 나는 할 말을 잃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옥 대공 소환에 엮인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악마의 개입과 놈들의 손에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아니. 그 모든 것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헬레나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사실 용이 잠든 산맥에서 만난 이후 헬레나한테 큰 의미를 두고 있던 건 아니었다. 스스로 2, 3년 동안 살 수 없는 몸이라 밝혔으며 그전까지 인간 세상을 돌아보고 싶다는, 일종의 계약을 맺고 데려온 관계였을 뿐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고 실제로도 그래왔다. 그냥 가끔 필요할 때마다 적재적소의 마법을 사용해주는, 도라에몽의 4차원 주머니 정도로만 생각해왔다.
그래. 그랬는데….
‘이럴 때는…. 안녕이라고 해야 합니까?’
까드드득!
헬레나의 마지막 인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움키고 말았다. 슬픈 것 보다는 분한 감정이 앞섰다. 지옥 대공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초반 대응이 얼마나 거지 같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막을 수 있는, 아니 달라질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정황상 지옥 대공의 출현은 정말로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고, 또 충분히 위협적이기도 했다. 실제로 지옥 대공은 청소를 하겠다고 말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런 만큼 누가 봐도 내 반응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타인의 시선에 불과하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어지간히도 설레발을 쳐버린 셈이다.
거기서 내가 조금만 침착할 수 있었다면, 지옥 대공이 하는 말을 흘려 듣지 않았다면, 아니,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지레짐작하지만 않았다면…!
사실 이것 또한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 그래도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대응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를, 다른 미래를 이끌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득 예전에 형이 했던 말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거인들과 동료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아틀란타? 그럼 지성을 가진 종족들과의 관계는 어땠는데?’
그때는 갑자기 왠 약한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이제야 그 당시 형이 느꼈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만 같다. 형은 거인에 한정해서 말한 게 아닌,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말을 새겨 들었어야 했는데….’
늦은 후회가 찾아 들어, 나는 결국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헬레나의 죽음이 미화되지 않는다. 정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개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굉장히 괴로워 보이는구나.”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는지 바로 앞에서 지옥 대공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다만…. 너무 자책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그대가 목숨까지 걸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건 사실이고, 그건 나도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
아까와는 다른 조심스러운 말투가 마치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실소가 흘러나왔다. 적이라고 생각했던 존재에 위로를 받는다. 이 무슨 코미디 같은 상황이라는 말인가.
“뭐 하나만 물어보자.”
시선을 들고 말하자 지옥 대공은 허락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너는 처음에 우리와 대화할 생각이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우리가 아닌 그대와 이야기할 의향이 있었지.”
“그럼 만일 내가 그때 없었다면?”
“흠….”
물어보면서도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지옥 대공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안타깝지만 그때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서. 아마 조금이라도 거슬렸다면 깡그리 청소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래. 그런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지옥 대공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원하는 말을 들음으로 위안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최악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지독한 자기 합리화였으나, 지금은 이렇게까지 하면서라도 가슴을 식히고 싶었다.
‘…젠장.’
하지만 곧 밀려오는 자기 혐오라는 감정에 나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몇 가지 의문은 해결했으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진 기분이다.
그러자 지옥 대공이 자그맣게 한숨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그대에게는 현 상황과 내면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
그 말을 들은 순간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하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왔다면 필시 김한별도 같이 왔을 터. 그러면 김한별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혹시….”
그러나 입을 열며 옆을 돌아본 찰나 나는 절로 말을 멈추고 말았다. 또 언제 사라졌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지옥 대공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나 싶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자 곧 정면 방향으로 멀찍이 걸어가는 지옥 대공의 뒤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
따라가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을 때, 돌연 걸음을 멈춘 지옥 대공이 가볍게 손을 들어올렸다.
“곧 올 테니 가만히 기다리고 있거라.”
그 순간 나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지옥 대공의 목소리가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또렷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내 재차 걸음을 옮기는 지옥 대공을 보며 나는 결국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어디로 가는 거지?’
*
지옥 대공이 떠나고 나서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곧 돌아온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옥 대공은 채 5분도 걸리지 않고 내가 있는 장소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는 혼자가 아닌 누군가를 대동한 채였다.
“오, 오빠.”
지옥 대공의 옆에서 살짝 젖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 누군가는 바로 김한별이었다.
나는 지그시 김한별을 응시했다. 잠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애초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지옥 대공이 스스로 생명을 나누면서까지 나를 살린 만큼 김한별도 생존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깨, 깨어나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정말로….”
무언가 굉장히 북받쳐 오르는지 김한별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떨었다. 김한별의 쌀쌀맞은 성격을 생각해보면 조금 놀라운 반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등이라도 토닥거려주고는 싶었지만 나는 우선 옆에서 미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지옥 대공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를 보는 지옥 대공의 눈은 투명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적의는 한 줌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눈동자였으나 계속 마주하자 되레 속이 불편해지는걸 느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어 나는 가볍게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그러자 고혹적인 미소로 화답한 지옥 대공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이 몸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도록 하지. 그대는 생각이 정리되면 나를 찾아오도록.”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옥 대공은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찾아가야 하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오빠!”
지옥 대공이 자리를 떠난 순간 김한별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내 나를 와락 껴안는 김한별의 등을,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김한별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오빠….”
“그래 그래. 한별아.”
“정말 오빠 깨어나신 거 맞죠? 몸 괜찮으신 거 맞죠?”
“으응. 괜찮아. 이제 정말로 아무 이상 없어.”
그렇게 계속해서 등을 다독여주던 와중 문득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내 상태에 대해서 묻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김한별은 나를 굉장히 오랜만에 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기는 하나 반응도 약간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고.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한별아.”
그러자 내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흐느끼던 김한별이 서서히 얼굴을 보였다. 무에 그리 서러운지 뺨에 자국 진 눈물 자욱이 상당히 애처로워 보인다. 나는 아직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혹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절해있었는지 알고 있니?”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지옥인 이상,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1회 차 때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는 만큼 방법도 알고 있으니까. 물론 과연 지옥 대공이 순순히 보내줄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지옥을 인간 세상과는 다른 하나의 차원으로 정의한다면, 각 차원마다 존재하는 고유한 ‘법칙’ 이라는 게 있다. 당연히 이 법칙은 각 차원마다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1회 차 시절 우여곡절 끝에 원래 세상으로 되돌아간 나는, 인간과 지옥 차원 사이 존재하는 법칙 간 괴리감으로 인해 크게 고생한 전력이 있었다.
어쨌든 이대로 지옥에 눌러앉을 생각이 없는 이상, 차후 돌아갈 때를 대비해 이 괴리감을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한 빠르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얼마 동안 기절해있었는지 가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고.
“모르겠어요.”
그러나 김한별은 아주 간단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무리 지옥에서 시간 개념이 없다고는 하나, 저렇게 모르겠다고 말하는 건….
“아까 그분이 가끔 저를 데려와 오빠를 보여주셨는데, 오늘이 열네 번 째에요. 그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내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긴 시간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週)로 계산해서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기절해있었는지도 모른다.
“음…. 그래. 알겠다.”
결국 지금 당장 확실한 건 없다. 나는 한두 번 머리를 끄덕인 후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머리가 한층 무거워진 기분이다. 그때 김한별이 살그머니 몸을 떼 자세를 바로 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빠.”
“응?”
“…정말 방금 일어나신 거 맞아요?”
“응. 맞는데. 왜?”
나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손등으로 눈을 훔치던 김한별이 별안간 의아하게 눈을 빛내며 나를 응시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
“방금 일어나신 것 치고는…. 너무 침착하신 것 같아서….”
한순간 아차 한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곧바로 진정할 수 있었다. 하기야 사정을 모르는 김한별의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당연히 나도 처음에는 놀랐지.”
억지로 웃으며 말하자 김한별이 “그래요?” 라고 되묻는다.
“저는 처음에 엄청 놀라서…. 거의 공황 장애 상태까지 갔었거든요.”
“나도 비슷해. 그런데 네가 오기 전에 지…. 흐흠, 그 여인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거든.”
나도 모르게 지옥 대공이라 말할뻔한걸 간신히 여인으로 바꿀 수 있었다. 문득 극도로 말을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안 그래도 눈치 빠른 아이니까….’
아무튼 다행히도 김한별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며 이해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런 김한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않을래?”
============================ 작품 후기 ============================
몸으로 말이야.
는 농담입니다. 하하하.
아. 독자 님들. 제가 어제 코멘트를 보다가 빵 터진 게 하나 있습니다. ㅋㅋㅋㅋ.
『걍 바로 미약 처먹었다 치고 바로 좀 엉? 바로 씬 가라고요 현기증 나잖아! 빨리 연참 어서어서.』
ㅋㅋㅋㅋ 아 진짜 ㅋㅋㅋㅋ. 아 이러는 게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일어나자마자, 그것도 미약은 또 어디서 구해요 ㅋㅋㅋㅋ.
코멘트 보면서 계속 낄낄 웃었네요. 뭐랄까, 사실 같은 사내끼리 표현이 조금 그렇지만, 이 코멘트가 귀엽다고 느껴버렸어요. 저 이런 코멘트 완전히 좋아하거든요. 그냥 뜬금없이 웃기는? 갑자기 빵 터지게 하는? 그런 코멘트요. 아마 옛날에 현오 님이 달아주신 안솔 관련 코멘트 다음으로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
네, 아무튼요. 제가 베드 신을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서, 쓰겠다는 것 자체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다만 김수현이 애초 이성만 보면 흥분하는 발정 난 캐릭터도 아니거니와, 차후 연재 내용을 오직 베드 신으로만 도배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 부분은 독자 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라 믿습니다.
이번 지옥 대공 같은 경우도 최소한 왜 지옥 대공이 김수현을 원하는지, 왜 불을 탐하고 다녔는지, 왜 전투 도중 자꾸만 김수현을 원하는 소리를 꺼냈는지 등등. 이러한 부분에 관한 충분한 설명이 들어간 후에, 모든 독자 분들이 납득할 수 있는 베드 신을 적고 싶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욕심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그러니 독자 분들께서는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신다면, 제가 진정으로 감사할 것 같습니다. 🙂
오늘은 후기가 약간 길었네요.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