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66
00665 2. 지옥 왕. =========================================================================
잿빛 세상이었다.
고즈넉한 하늘도 척박한 땅도. 어디를 둘러봐도 회색밖에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재색 일색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이었다.
“무간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하지.”
옆을 돌아보자 무릎을 살짝 굽히며 동시에 고개를 숙이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어여쁜 공주 인사였으나 이런 세상에서 받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달까.
“그래서, 어떻느냐.”
“음?”
“이 구간 말이다. 그대의 소감을 듣고 싶구나.”
“무간? 글쎄. 소감이라고 해봤자….”
나는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간 지옥. 사실 1회 차 때 한 번 경험한 것도 있지만 그걸 떠나서라도 정말 볼게 없는 세상이다. 생기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흔한 나무조차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느껴지는 거라고는 허무와 공허뿐인데 거기서 어떤 감흥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을씨년스럽기만 하지.
그러나 어서 말해보라는 듯 눈을 반짝이는 지옥 대공을 무시할 수는 없어,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꼭 죽은 세상 같아.”
“흠? 조금 더 자세히.”
“그러니까…. 마치 불에 타고 남은 재를 보는 느낌이랄까?”
“…….”
차마 빈말로도 ‘괜찮네.’ 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하기는 했다. 곁눈으로 슬쩍 흘겨보자 지옥 대공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냥 고풍스러운 기운이 감돈다고 할걸 그랬나?’
혹시나 해코지를 할까 봐 조금씩 긴장하고 있을 즈음.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라고 하시더냐.”
“응? 아니.”
그분이라는 말이 화정을 지칭함을 깨달은 순간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까 대화가 끝나고 구간을 넘어 무간에 도착한 이후, 화정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흐응.”
그러자 의외라는 듯 가볍게 콧숨을 흘린 지옥 대공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지옥 대공의 뒤태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글쎄.”
조심스레 물어보았으나 돌아온 대답은 애매함의 극치였다.
“그럼….”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이 구간을 재구성하려는 목적인 건가?”
“글쎄.”
이번에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지옥 대공. 나는 한없이 갑갑해지는 가슴을 억누르며 팔짱을 꼈다.
지옥 대공은 아까 화정과의 대화를 마친 이후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무간으로 가자고 억지로 끌고 오더니 또다시 저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고 연신 채근하고 싶었으나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러지 말아야 된다는 정도의 눈치는 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대는…. 이 무간 지옥의 진명을 알고 있는가?”
하염없이 걸으며 지루한 기분을 느끼는 찰나, 문득 지옥 대공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무간 지옥의 진명? 구간에도 진명이 존재하나?
그러자 지옥 대공의 말이 이어졌다.
“왕이 태어나고 잠드는 곳이라 부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퉁명스레 내뱉고 말았다. 무언가 사정을 알아야 쿵 짝이라도 적당히 맞추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자꾸만 질문을 던지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하기야. 그대에게 큰 상관은 없겠지.”
이윽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지옥 대공이 우뚝 걸음을 멈춘다. 나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자 지옥 대공이 나를 돌아보며 양팔을 활짝 벌린다.
“실은 말이다. 아까 그대의 표현은 상당히 정확했다.”
“……?”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은 세상…. 이 몸이 원하는 건, 바로 그 재에서 불씨를 만들고 크게 일으키는 것. 그래서 그 역할을 화정이 해주기를 원했느니라.”
“하지만 화정은 불가능하다고 했어. …그러니까 왕이 될 수 없다고 했었나?”
그러자 지옥 대공이 두 눈을 동그랗게 만들더니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듣는 귀는 있나 보구나.”
듣기만 아니라 직접 말해주기까지 했지.
“그러면….”
어쨌든 화정이 어느 정도 이야기를 진행해준 이상, 나는 슬슬 이 상황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사실 지금도 궁금한 건 무지하게 많다. 지옥에 어떻게 왕이 존재하는지, 어떤 존재인지, 왜 부활시키려고 하는지, 아까 진명은 또 무슨 의미인지 등등.
하지만 질문을 가려서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막말로 대공도 존재하는데 왕이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은가. 그리고 내가 아는 ‘왕’ 의 개념과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고. 또한 부활의 이유는 개인적인 사정일 가능성이 다분하니 질문한 것이 되지 못하며, 진명은…. 뭐, 괜히 말을 꺼내지는 않았겠지.
말인즉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지옥 대공의 목적을 이룰 방법을 찾고 도와주는 것. 그래야만이 내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까 끊었던 말을 도로 이었다.
“너는 왕을 부활시킬 생각이지?”
“음?”
“대충 들어보니까 너는 이 무간이라는 구간을 재구성할 생각을 갖고 있어. 그리고 그 일환으로 왕을 부활시키려고 하고 있고. …맞나?”
“표현이 적절치 못하구나. 왕의 부활이 아니라, 왕을 새로 세우는 것이다.”
지옥 대공이 미미하게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정정해주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정답이라고 볼 수 있겠군. 관건은 왕을 새로 세우는 것.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러면 새로운 왕이 나타나는 순간 이 무간 구간도 되살아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아까도 말했듯이 무간은 왕의 탄생과 최후를 함께하는 곳. 즉 일종의 무덤 역할을 하는 구간이라 볼 수 있지.”
“무덤이라.”
무언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왕이 태어난 이후의 무간 지옥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무튼.
나는 이제야 조금씩이나마 이해가 가는걸 느꼈다.
말 그대로 현재 관건은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이다. 지옥 대공은 그 기대를 나한테 걸고 있었는데 화정이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러면….
“조금은 예상하고 있기는 했으나…. 이거 참, 난감하구나.”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와중 돌연 지옥 대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옥 대공은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으나 애꿎은 땅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조금이지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새로운 왕이 필요한 거야? 그냥 형식적으로나마 네가 왕이 되면 되지 않나?”
“글쎄.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기왕이면 있는 편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있겠군. 그래야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다라.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잠시 후.
쓸쓸히 땅을 내려다보던 지옥 대공이 천천히 고개를 젖혀 오연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도 안 되고 그대도 안 된다…. 최고의 염화라 불리는 종미의 불과 태고의 불이 안 된다면….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 거지?”
홀연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사실 지옥 대공이 자신의 염원을 얼마나 간절히 바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 또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이 어떤지 경험해본 적이 있는 터라, 최소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 때문일까. 조금이지만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봐. 지옥 대공.”
“음?”
“왕은 무조건 한 명이어야만 되는 건가?”
“그렇다만?”
간단하게 대답한 지옥 대공이 왜 그러냐는 듯이 반문했다.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이건 어때? 두 힘을 합쳐보는 건.”
“두 힘을 합친다?”
“그래. 네가 그랬잖아. 무간 지옥은 왕의 탄생과 최후를 함께 하는 곳이라고.”
“그랬지.”
지옥 대공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생각해봐. 화정은 태고의 불이잖아. 태고는 아득한 먼 옛날, 즉 시작과 관련이 있는 단어지. 그리고 겁화는 종미의 불. 종미는 멸망, 즉 최후와 관련이 있는 단어고.”
“그런데?”
“그걸 무간 지옥의 특성에 대입해보자고. 만일 이 두 힘을 함께 지닌 존재가 있다면 무간 지옥의 특성에도…. 아차.”
“……!”
한창 말을 잇던 순간 갑자기 아차 싶었다. 나름 의견을 꺼낸다고 꺼냈는데, 처음 내가 물었던 질문과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옥 대공이 말하지 않았는가. 애초 서로의 속성이 상극이기 때문에 내 힘을 거두지 않았다고. 말인즉 시작부터 잘못된 전제를 깔고 들어간 이야기라는 소리였다.
‘…괜히 얘기했네.’
그렇게 미안하다고, 괜한 얘기를 꺼냈다고 사과하려고 할 즈음.
– 어?
“하?”
지금껏 가만히 있던 화정과 지옥 대공이 탄성이 겹쳤다.
“그대가….”
이어서 한껏 놀란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 뜨는 지옥 대공이 보이고.
– 나름 괜찮은 의견이기는 한데. 그런데 두 힘을 어떻게 합치게?
내가 했던 고민을 비슷하게 말하는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렇지. 맞아.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어. 아니 아니, 남은 방법도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
지옥 대공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무어라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치켜들더니 눈을 강렬히 빛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오죽하면 붉은 안광이 흘러나올 정도라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지옥 대공이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걸어오는 폼이 금방이라도 내 심장을 적출하고도 남을 기세였다.
“잠깐만!”
내 외침에 다행히 지옥 대공은 걸음을 멈춰주었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응? 그대야말로 갑자기 왜 그러지? 의견을 개진한자는 그대가 아닌가. 그저 일리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니. 아까는 안 된다며. 두 힘은 상극이라서 서로 겹칠 수가 없다며.”
“…아하.”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는지 지옥 대공은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이더니 돌연 뜻 모를 묘한 미소를 짓는다.
“확실히 함부로 행할 일은 아니라고 했지. 그러나 아예 방법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만?”
그, 그런가?
‘분명 나는 그 힘을 거둘 능력은 있으나, 그래 봤자 라는 말이다.’
‘지극히 자연적인 방법이라면 모를까, 억지가 가미된 방법으로 두 기운을 강제로 섞으면….’
…기억을 더듬어보니 확실히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간단히 말하면 두 기운은 서로 상이한 기운을 갖고 있기는 하나, 어쨌든 같은 염화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화정과 겁화는 물과 불처럼 애초 서로 섞이기가 불가능한 기운은 아니라는 소리지. …그대의 말을 들은 이후, 나는 여기서 가능성을 잡았다.”
“……?”
“들어보거라. 두 기운은 그저 서로의 고유한 성질이 너무나 극명해 반발력이 생길 뿐. 순리상 두 기운의 합일이 이치에서 벗어나는 현상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정리해보면, 두 기운이 납득할만한 지극히 자연적인 방법으로 합일을 이루면 된다는 소리다.”
“그럼 그 자연적인 방법이라는 게 뭔데?”
“그건….”
여전히 감이 잡히지가 않아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리고 지옥 대공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잉태.”
라고 말했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 지옥 대공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 오, 그러네. 생각해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네.
바로 화정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 야, 답 나왔다. 김수현 너 제법인데? 그런 방법을 생각하다니 말이야.
화정은 무척이나 기특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대를 데려오는 건 정답이었어.”
이윽고 환한 얼굴을 한 지옥 대공이 다시금 걸어오는 게 보여, 나는 주춤주춤 물러나며 속으로 외쳤다. 한순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돼버린 기분이다.
‘화정, 화정! 저게 무슨 소리하는 거야 지금?’
– 응?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네가 의견을 말해놓고 모른다고 하면 어떡해.
‘그게 아니라, 갑자기 뭔 놈의 잉태야?’
– 아 잉태? 응. 쟤 말 틀린 거 하나도 없어.
매우 온당하다는 듯이 지옥 대공의 의견에 태연하게 긍정하는 화정. 그러는 사이 어느새 지옥 대공과의 거리는 5미터 안으로 좁혀져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
– 왜 물러나? 왜 당황해? 들어봐. 새끼를 배는 현상은 어느 차원에서나 똑같이 적용되는, 말 그대로 세상이 허락한 이치요, 또 당연한 순리야. 거의 근간을 이룬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태초부터 이어져온 현상이지. 이것만큼 자연적인 방법이 없다니까?
‘…….’
– 아. 설명이 너무 어려웠나? 그러니까 인간의 관점에서는 후계자 개념으로 생각하면 돼. 생각해봐. 겁화의 기운을 지닌 지옥 대공의 자궁에, 내 기운을 품은 네 씨앗을 뿌리면….
틀렸다. 지옥 대공이나 화정이나 무언가 조곤조곤 설명은 해주고 있는데, 지금 내가 당황하는 포인트를 조금도 잡지 못하고 있다.
– 못 잡긴 뭘 못 잡아? 그냥 여기서 지옥 대공한테 몸 한 번 대주면 된다고. 이해 못하겠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화정이 핀잔조로 투덜거렸다.
나는 기어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 신 맞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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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다음 회는….
사실 그리 예쁜 내용은 아닙니다. 미리 말씀 드리자면, 김수현이 열 받은 상태로 나오거든요. 에 그러니까….
중 후반 부분에 SM이 살짝 섞여 있거든요. 거부감을 가지신 분들은 그냥 넘기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지옥 대공이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릴 정도의 내용이라서….
그럼 독자 분들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