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67
00666 2. 지옥 왕. =========================================================================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대여. 자꾸 어디를 가는 것이냐? 왜 계속 걸음을 물리는 것이지?”
성큼성큼 나를 쫓아오는 지옥 대공과.
“잠깐만. 있잖아, 있잖아 지옥 대공아. 일단 진정하고,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않을래?”
애써 부드러운 말로 달래면서 연신 물러나는 나.
아니. 그렇잖은가. 아까는 조금 안쓰럽다는 마음에 위로 차 한두 마디 던졌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 말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제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다가오고 있다. 거기다 화정은 눈 한 번 딱 감고 몸을 대주라 종용하기까지. 이게 도대체 말이야 방구야?
“흠? 이 몸은 충분히 진정하고 있다만? 아니, 기쁨으로 인해 조금 흥분된 상태인가?”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지옥 대공이 마냥 막무가내는 아니라는 것.
여하튼 걸음을 멈춰준 지옥 대공을 보며 나는 가슴을 추슬렀다. 그래. 지옥 대공도 높은 지성을 갖춘 존재인 만큼, 지금 이 사태를 충분히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진정했어?”
“음.”
“흥분도 가라앉혔고?”
“음.”
“좋아. 그럼 우선….”
“음.”
그러나 내가 채 말을 잇기도 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지옥 대공이 또다시 사뿐사뿐 다가오기 시작했다. 잇따라 가볍게 발을 내디뎌오는 행태를 보고 있자니 이제는 기가 막히다 못해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 아 진짜 갑갑해! 그냥 쟤랑 떡 한 번 쳐! 그럼 된다니까?
…이제 아주 막 나가는구나.
‘부탁이니까, 제발 좀 닥쳐주라.’
화정은 진정 갑갑하다는 듯이 외쳤으나 나는 제발 닥쳐달라고 사정했다. 안 그래도 어지러워 죽겠는데….
그러나 화정은 전혀 내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 나보고 닥치라고? 너 말 다했어? 이게 예쁘다 예쁘다 오냐 오냐 해줬더니 아주 맞먹으려 드네? 너와 내 관계를 잊은 거야?
이쯤 되자 무언가 뜻 모를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건 배신이다.
– 정말 어이가 없네. 무에 그리 억울하고, 또 배신인데?
그 순간 갑자기 욱하는 감정이 솟구쳤다.
‘화정. 설마 네가 이럴 줄은 몰랐다.’
– 뭘 그럴 줄은 몰라. 그러니까 제대로 말을 해봐.
‘아니, 말을 해도 쫌. 대주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너 내 부인 맞아?’
–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러나 화정은 내 항변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돌아가실 지경이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란다.’
– 시끄러워. …아 갑자기 열 받네. 고자나 동정이면, 그래 이해라도 해. 그런데 지금껏 실컷 여러 암컷들과 물고 빨고 지지고 볶고 난리 블루스를 추던 주제에, 이제 와서 어째? 야, 너 지금 장난해? 그럼 내가 질투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거야?
‘…….’
마, 말을 듣고 있으니까 열 받는다. 그런데 할 말이 없으니까 더 열 받는다.
– 그래~. 원한다면 해줄게~. 수현앙~. 있잖앙~. 나는 네가 쟤랑 자지 않았으면 좋겠엉~. 물론 그러면 네가 돌아갈 수 있을지 어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쟤랑은 자지 않았으면 좋겠엉~. …됐냐? 이제 만족해?
화정은 일부러 코맹맹이 음성을 내더니 한껏 비꼬는 투로 종알거렸다.
– 정신 차려! 이…!
그 후에도 화정의 잔소리가 이어졌으나, 미처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이제야 잡았군.”
돌연히 만족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양 어깨를 붙드는 나긋한 감촉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시야가 천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내 하늘이 보이고 붉은 머리칼이 보이는 순간, 나는 마침내 붙잡히고 말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풀썩!
딱딱한 대지가 등에 닿는 동시에 지옥 대공의 엉덩이가 내 사타구니를 깔고 앉는다. 이어서 두 손으로 내 가슴을 지그시 누르기까지.
“시, 싫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진짜로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로다.”
그러자 완벽한 기승위(騎乘位) 자세로 나를 구속한 지옥 대공이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다.
“혹시, 두려운 게냐? 정녕 두려워서 거부하는 것이더냐?”
“무, 무슨….”
“혹여 두려운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는 씨를 뿌려주기만 하면 된다. 씨앗을 자궁에 수정하고 합일의 과정을 감당하는 건 오롯한 내 몫 이니까….”
“그게 아니라!”
지옥 대공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조곤조곤 말했다. 그러나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더욱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아.”
그러다 어느 순간, 의아함이 역력하던 지옥 대공의 낯에 아차 한 빛이 스쳤다. 그리고 약간은 조심스러워진 태도로 말을 잇는다.
“그럼…. 혹시 성기능에 문제가 있다던가…?”
이게 정말.
계속 이어지는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을 나는 결국 참지 못했다. 가슴을 누르는 두 손을 거칠게 치운 후, 있는 힘껏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렇게 지옥 대공의 얼굴과 삽시간에 가까워지려는 순간이었다.
“적당히 좀 하랍…!”
“왜 화를 냅…?”
나와 지옥 대공의 목소리가 겹치는 동시에.
쪽.
서로의 입술도 겹쳤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알듯 말듯 입을 자극해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너무 저돌적으로 일어난 탓에 나도 모르게 힘을 조절하지 못한 것이다.
“어, 어버버버.”
“…흠.”
그럼에도 지옥 대공은 그저 입을 한 번 쓱 훑었을 뿐, 정작 담담하기 짝이 없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숨결도 닿을 거리에서 깜빡깜빡 움직이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어헉.”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키며 머리를 크게 젖히려는 찰나였다.
“무얼 그리 놀라느냐.”
지옥 대공의 목소리와 들려옴과 동시에 무언가에 걸리기라도 한 듯 머리가 덜커덕 정지했다. 그제야 목 부근을 감싼 보드라운 손바닥의 감촉이 느껴졌다.
“인간 세상에서는 두 번이나 멋대로 안아놓고서는. 그때의 패기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약간 한심하다는 듯이 말한 지옥 대공은 곧 살짝 벌어졌던 거리를 도로 줄여오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든 얼굴을 빼려 안간힘을 써봤으나, 그럴수록 목에서 느껴지는 압박만 심해질 뿐이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서로의 코가 맞닿았을 즈음.
“어쨌든 딱히 다른 문제는 없다는 말이렷다?”
지옥 대공이 무언가 확인하겠다는 느낌으로 물었다.
나는 시야의 절반을 채울 정도로 가까워진 붉은 눈동자를 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무슨 짓? 뻔하지 않느냐.”
내가 절절하게 말한 것에 반해, 지옥 대공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사실 어지간하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만….”
“…….”
“방법을 찾은 이상, 이 몸이 더 이상 기다릴 인내심은 없어서 말이다.”
“……?”
이어지는 말에서 나는 묘한 불안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무튼 따로 염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대의 성기능도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그리고 그저 그대가 이유 없이 싫을 뿐이라면….”
잠시 말끝을 흐린 지옥 대공이 빙긋 미소 짓는다.
“이 몸으로서는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 말을 들은 순간 뜻 모를 불안감이 심해졌다. 갑자기 머릿속의 경종이 따르르르 울리기 시작한다.
“나는…!”
그리하여 재빠르게 말을 하려는 찰나, 지옥 대공의 손바닥이 내 입을 빈틈없이 틀어막았다. 어떻게 목소리를 내려고 해보았으나 지옥 대공의 악력은 내 저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이제 더는 기다리기 지쳤다는 듯이.
“되었다. 그대와 더 실랑이하기도 싫으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
그 순간이었다.
“그냥, 좋은 꿈을 꾼다고 생각하면 된다.”
화아아악!
불현듯, 바로 앞에 있던 지옥 대공의 두 눈동자가 갑자기 요사스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현상은 무척이나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거니와, 애당초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던 터라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이, 이건…?’
결국 불빛이 불가항력으로 시야를 가득하게 물들여오는 것에 이어, 나는 갑작스레 정신이 멍해지는걸 느꼈다.
“괜찮으니까….”
이제는 지옥 대공의 음성이 더 이상 또렷하게 들려오지 않는다. 마치 가수면 상태에서 듣는 것처럼 한없이 아련하게 귓가로 흘러 든다.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숨 푹 자고 일어나 있으면….”
나는 물에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까.”
세상이 점차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
암시(暗示).
암시란 일반적으로 사람의 심리를 파고들어, 감각이나 판단이 이성을 거치지 않고 타인이 전하는 자극을 통하여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암시에 걸린 사람은 대체로 최면 혹은 가수면 때와 비슷한 상태를 보이는데, 이때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 외부에서 가해지는 자극을 거의 감각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내면의 심리나 태도가 변화한다.
그러나 암시에 의한 효과가 항상 일정한 건 아니다. 강도가 세면 세질수록 외부 자극으로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난다.
암시가 약할 때는 각성 상태를 유지한 채 약간의 감정 변화만을 유도하는 정도이나, 제대로 걸었을 때는 대상자 내면의 깊숙한 곳에 잠든 기억을 일깨우는 건 물론, 암시에 정통한 자가 정말 작정했을 경우 대상자의 기억 조작마저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후후.”
지옥 대공이 머리를 푹 숙인 채 미동도 않는 김수현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이 발동한 암시가 제대로 먹혔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 상태로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크흐….”
별안간 머리를 숙이고 있던 김수현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서서히 깨어날 때가 됐다는 일종의 신호. 그러자 김수현을 바라보는 지옥 대공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대가 과연 어떤 꿈을 꾸면서 일어날지 기대되는군.”
사실상 지옥 대공이 암시를 사용한 이유는 간단했다. 뚜렷한 이유 없이 자꾸만 빼는 행동을 보이는 김수현이 너무 갑갑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화정도 이번에는 군말 않고 지옥 대공의 암시를 용인한 것이고.
그러한 결과, 김수현은 현재 상당히 강력한 암시에 걸린 상태였다. 물론 기억이 조작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아까 어탑에서 만났을 때 스리슬쩍 걸었던 암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강도였다. 그 정신력 강한 김수현이 단번에 가수면 상태에 빠졌을 정도였으니까.
그럼으로써 지옥 대공이 노린 효과는 하나. 김수현의 ‘성’ 과 관련된 경험 중, 가장 강렬한 욕망으로 점철된 기억을 끄집어내 태도와 심리의 동시 변화를 꾀하는 것. 어떻게 보면 김수현이 마인드 트레이닝을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잠시 후, 김수현이 완전히 머리를 들어올렸을 때.
“…응?”
지옥 대공은 거의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인 지옥 대공은 김수현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눈앞의 사내는 김수현이었다.
그래. 분명히 김수현이다.
그런데 김수현 같아 보이지가 않는다.
김수현에 한해서만 시간이 빠르게 흐른 걸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20대에 불과하던 청년이 갑자기 나이를 먹었는지 얼굴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나타났다. 피로에 한껏 찌든 낯은 30대를 넘어 거의 40대에 가까운 인상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다 차분해 보이던 눈동자는 흐릿하게 풀려 흡사 죽은 이의 눈을 연상케 했다. 지금 자살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하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음울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김수현은, 문득 지옥 대공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리리스?”
가래가 끓는 듯한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리리스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지옥 대공이 아미를 찌푸렸다.
“그대…? 지금 도대체 무슨 꿈을…?”
바로 그 순간.
“리리스…!”
숨이 끊어질 듯이 외친 김수현이 지옥 대공을 향해 우악스럽게 달려들었다. 아차 한 순간, 그대로 덮쳐진 지옥 대공은 하릴없이 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아까와는 상황이 반대로 됐다. 애초 김수현을 해할 입장도 아니었으나, 잠깐 딴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김수현의 접근을 허용한 것이다.
이윽고 지옥 대공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지면에 엎드린 채 김수현에 깔려진 상태였다.
“이, 이게 무슨…?”
겨우 고개를 돌려 김수현을 바라본 지옥 대공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까 흐릿하게 풀려 있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다. 어느새 벌겋게 충혈된 흉신악살과도 같은 눈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지옥 대공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듯한 흉흉한 증오가 폭발하고 있다. 그 증오는 지옥 대공마저도 잠시나마 공포를 느끼게 할 정도로 맹렬한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 지옥 대공은 암시를 사용했고 화정은 용인했다.
그 과정에서 두 존재가 실수 혹은 간과한 게 있다면, 딱 하나였다.
바로 김수현이 어떤 삶을 헤쳐왔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서, 현재의 모습만 보고 지레짐작해 암시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아, 오늘 많이 늦었네요. 중간에 구상을 한 번 변경하고 새로 적느라 많이 늦어졌습니다.
원래는 지옥 대공과 화정이 김수현을 도발하고, 그 도발에 넘어간 김수현이 SM 플레이로 넘어가는 내용으로 적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김수현이 열이 받는 과정이 상당히 어색해서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삭제했습니다.
그래도 전부 삭제하는 건 아까워서, 내용을 조금 남겨두기는 했어요. 아래 내용은 그냥 가볍게 읽어주세요. _(__)_
*
“그때랑 지금이랑은 다르잖아.”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문득 정말로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어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잠깐만 시간 좀 주면 안될까?”
지옥 대공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한숨을 흘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그래도 곧 기승위 자세를 풀고 얌전히 옆으로 내려앉는걸 보니 무언의 허락인 모양이다.
겨우 몸의 자유를 되찾긴 했지만, 하도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다 보니 이제는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갑자기 연초가 간절하게 생각나 품에 손을 넣자 다행히 연초가 잡혔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는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 야! 나 담뱃불로 사용하지 말랬지!
화정이 빽 소리를 질렀으나 한 귀로 흘리며 연기를 푹 내뱉었다.
그렇게 애꿎은 연초만 뻑뻑 태우고 있자 지옥 대공이 살금살금 옆으로 다가와 인어 자세를 잡는다.
“속으로 삭히지만 말고 말을 해보거라. 왜 나를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이냐?”
왜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역시나. 지옥 대공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인가. 하기야 나와 지옥 대공이 살아온 시간이나 환경이 다르니 서로의 입장과 관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는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말이었다.
사실 화정이 왜 아까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고 있다. 아마 화정의 뜻도 나와 같은 목적에 초점을 두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나 갑갑해하는 것이고.
아무튼 그 마음은 알겠으나 그래도, 그래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지옥 대공은 아직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가 연초를 두어 번 툭툭 턴 후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내 애를 낳고 싶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되겠다는 소리고.”
“…응?”
시선을 돌리자 눈을 휘둥그래 뜬 지옥 대공이 보인다. 왜 저러는 거지?
“아니야?”
“그, 그렇지. 그대 말이 맞다.”
“맞잖아. 아무튼 그러면 똑같이,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뜻이겠지?”
“…그, 그런데?”
“그런데 라니. 말인즉 너나 나나 부모로서의 자격이 생긴다는 거지.”
“…….”
그랬다. 화정의 말마따나, 아까부터 떡 한 번만 치라는걸 망설였던 이유는 바로 ‘잉태’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옥 대공이 단순히 나와 한 번 자는걸 원했다면 아마 기꺼이 응했을지도 모른다. 몇몇 여인들한테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명분은 충분하니까. 어쩌면 지옥 대공이라는 존재와 잠자리를 한다는 사실에 한껏 흥분했을 가능성도 있고.
하지만 ‘아이’ 가, 아니 ‘내 아이’, ‘내 자식’ 이 연관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약 3년 전, 나는 형, 한소영과 같이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제로 코드를 사용했다. 그리고 2회 차를 시작한 이후, 지금껏 그 목적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며 생활하고 또 활동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미련이나 후회를 남길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차후 돌아갈 때 스스로 발목을 잡을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아이가 태어나는 건 100%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하는 이상, 자식을 만드는 일은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 중 하나였다. 만에 하나 내 아이가 태어난 상황에서 2회 차의 끝을 봤을 시, 지구로 돌아가는 길이 썩 깔끔하지만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다른 세상에 내 피를 이은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보면, 어떤 식으로든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최악에는 지구로 돌아가서도 아이가 생각나 홀 플레인을 그리워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기껏 지구로 돌아갔는데, 홀 플레인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내가 절대로 바라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제껏 어지간하면 거주민과 관계를 가지지 않은 건데…. 그 누가 알았으랴. 설마 이런 상황을 맞이할 줄을.
“…킥.”
그때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 고민하던 찰나, 돌연 누군가 소리 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시선을 들자 아까와는 달리 아예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 지옥 대공이 보였다. 지옥 대공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이따금 가볍게 어깨를 떠는 게 꼭 웃음을 참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까부터 연신 잔소리를 하던 화정도 어느 순간 침묵하고 있다.
갑자기 이러니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옥 대공?”
“……!”
그 순간, 지옥 대공의 온몸이 크게 움찔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덜덜 떨면서 나를 돌아본다. 이내 완전히 나를 돌아본 지옥 대공의 양 볼은 매우 빵빵하게 부풀려진 상태였다. …갑자기 왜 저래?
그래서 한 번 더 입을 열려는 찰나.
“끅…!”
– 푸…!
“아, 아하하하하하하하!”
– 푸하하하하하하하!
두 여인의 신명 난 웃음 소리가 귓전과 머릿속을 동시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