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68
00667 2. 지옥 왕. =========================================================================
꿈.
꿈이다.
꿈을 꾼다.
그래. 나는 꿈을 꾸고 있다.
말인즉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상황. 그러니까 이걸 루시드 드림이라고 하던가?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약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시야와 의식이 이상하다는 것.
– 미, 미안해! 내, 내가 잘못했어!
– 요, 용서해줘! 부탁할게!
바닥에는 왠 여인이 쓰러져 애처롭게 애원하고 있었는데, 한 사내가 조금도 아랑곳 않은 채 무참한 폭행을 가하고 있다. 여인의 턱을 걷어차고 복부를 연거푸 강타하는 사내는 다름 아닌 ‘나’ 김수현이었다. 헌데 그렇게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또 하나의 내가 있었다. 물론 이것 또한 또 하나의 나.
즉 시야가 매우 미묘하다. 유체 이탈을 한 것도 아닌데, 내가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러는 동시에 폭행을 가하는 또 하나의 나와 시야를 공유하고 있으니, 생각해보라. 이상하지 않은가. 이러나저러나 꿈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 사, 살려! 아니 살려주세요! 목숨만 살려주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 지, 짖을게요! 짖을게요! 멍멍, 멍멍! 멍멍멍멍!
지금 눈에 보이는 김수현은 내 통제를 벗어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의지대로 조종이 불가능한 상태라고나 할까? 그것뿐만이 아니라 나와 저 여인을 제외하면 주변의 모든 형체가 희미하게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게 가장 확실한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 아니야! 나는 벨페고르한테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 그건 벨페고르가 멋대로…!
– 하, 한소영은….
지금 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내가 1회 차 때 겪었던 경험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 악마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리리스를 포로로 붙잡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 제발…. 제발….
– 미, 미안해. 한소영은…. 내가 정말 잘못했어. 응?
그때였다. 문득 들려오는 앙칼진 외침에 나는 생각을 중단하고 현상에 집중했다.
리리스는 바닥에 엎드린 채 간신히 고개만 들고 있었다. 창백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상반신은 힘없이 바닥에 닿아 있고, 하반신은 무릎을 꿇은 채로 엉덩이만 한껏 치켜들었다. 목은 물론, 사지가 사슬이 묶인 채 개처럼 엎드려 있는 모습은 굉장히 비참해 보였다. 흡사 엎드린 암캐를 보는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의복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은 이제 막 샤워라도 하고 나온 듯, 등에서 허여멀건 한 정액과 싯누런 오줌이 흐르고 있었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고, 등에 달린 검은 날개는 무참하게 찢겨진 상태였다.
– 차라리 죽여! 이 개 자식아!
– 하, 하지마! 제발 하지마! 미, 미안하다고 했잖아아아아아악!
리리스가 퉁퉁 부은 눈으로 두려움에 떨며 애원한다. 그러나 나는 들은 체 만 체 무시하고는 되레 미친 듯이 웃으며 리리스를 능욕한다.
– 크하하하! 이거 정말 장관이잖아? 설마 대 악마인 리리스가 인간한테 목숨을 구걸할 줄은 몰랐는데? 부하들이 보면 아주 좋아하겠어? 아니, 벨페고르한테 보여주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일 정도야!
– 아, 아니라고 했잖아! 네 형을 죽인 건 벨페고르가 멋대로…!
그것은 전신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살의(殺意).
– 입 닥쳐!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너는 한소영을…!
– 꺄아아아아아악!
쿵! 쿵! 쿵! 쿵!
어느덧 나는 리리스의 머리를 휘어잡은 채 허리를 미친놈처럼 흔들어 젖히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한 번 왕복 운동을 할 때마다 리리스의 이마를 사정없이 바닥에 내려찍는다. 그럴수록 리리스의 비명은 커져만 갔지만 나는 오히려 더 크게 웃으며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흐음. 돌이켜보건대, 아마 이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또 제 3자의 입장으로 보는 만큼 담담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때 어떤 감정으로, 어떤 일념으로 행동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찌 이때를 잊을 수 있을까. 내 1회 차 인생 중 몇 안 되는 통쾌한 기억인데. 이때 리리스는 정말 죽여줬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대 악마들 중에서도 특히 리리스 및 그 권속들과 악연을 맺었던 것 같다.
리리스가 창조한 벨페고르는 박다연을 비롯한 수많은 지인은 물론, 결과적으로 형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리리스는 한소영의 미모를 질투해 권속들을 시켜 간살, 아니 그 이상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한 장본인이었다. 아마 내가 아는 한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은 사용자들 꼽으라면, 단연코 한소영을 첫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보지 마. 수현아…. 부탁해…. 제발…. 제발 나를 보지 마!’
…이런 씨발. 그때를 생각하니까 또 열이 받는군.
속으로 억지로 분을 삭히는 사이, 어느새 나와 리리스 사이로는 또 다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가 검을 꺼내 들어 역수로 돌려 잡고 나서, 칼자루를 리리스의 항문으로 억지로 쑤셔 넣는 광경이었다.
– 아아아아아아아악!
리리스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지만, 곧 항문에 칼자루가 꼽힌 채 필사적으로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엉덩이를 흔드는 방향에 따라 이동하는 검을 피하며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풀 스윙으로 드럼을 치듯이 리리스의 엉덩이를 교대로 후려갈긴다.
아, 저 광경 기억난다. 아마 나를 죽일 기회를 주겠다며 저랬던 것 같은데. 물론 실상은 조롱하려는 의도였고, 리리스가 힘이 빠져 검이 늘어질 때마다 엉덩이를 때리면서 응원했을 것이다.
그렇게 리리스를 다양한 방법으로 능욕하는 또 하나의 나를 보고 있자니, 절로 싱거운 웃음이 나온다.
여하튼 어느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 꿈을 보여주는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설령 기우일지라도, 이 꿈으로 나를 흔들려는 목적이었다면 완전한 오산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죽하면 이 꿈이 조금 더 길게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리리스.
안 그래도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 거의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사실 리리스와 관련된 일을 떠올리기 싫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꿈을 꿈으로써 다시 명확하게 되새김질할 수 있지 않았는가. 그 결과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악마에 대한 적의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 현재 테라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기는 하지만, 그냥 얌전히 돌아가면 무언가 굉장히 억울할 것 같은 기분이다. 최소한 대 악마들에게 내가 받아야만 했던 느껴야만 했던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리리스를 암캐처럼 다루는 나를 보며 씩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때의 기분을 조금 더 확실하게 느끼려는 일환으로 차분히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치지지지지직!
꿈의 의식에 동화되려는 순간, 느닷없이 눈앞에 커다란 노이즈 현상이 일었다. TV 신호에 잡음이 섞여 든 것처럼 무언가가 심하게 비틀리고, 이어서 흐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 꿈의 현상에서 벗어나려는지,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듯 상황이 가속해서 돌아간다.
잠시 후.
불현듯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까처럼 격한 시야의 흔들림도 나나 리리스의 말소리도 사라졌다. 결국 이상한 기분을 느껴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뜬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뭐지?’
홀연히 무언가가 변했다. 무엇이 변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저 희미해진 시야로 흐릿하기 그지없는 형체만이 보일 뿐. 꿈에서 깬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고 보니 벌컥 몽롱함이 밀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머릿속에 혼란이 가득히 차오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야가 서서히 확보됨에 따라 시선을 내린 순간, 나는 내가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약간이기는 하지만 환경이 변화했다는 사실도.
그뿐만이 아니다. 내 앞에는 여전히 알몸으로 엎드린 여인이 있었는데, 리리스가 아니었다. 명확히 보이지는 않으나 허여멀건 한 등에 흐트러진 용암과도 같은 머리카락은, 여인이 지옥 대공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의아함과 허탈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왜 리리스가 사라졌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지옥 대공이 출현했는지는 모른다. 허나 그동안 무뎌진 칼날을 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겼는데, 막 의식을 동화하려는 순간 상황이 변했다.
그러나.
‘…오.’
점차 시야의 초점이 잡힘에 따라 지옥 대공의 눈부신 속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아쉬운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바로 앞까지 불쑥 치솟은 토실토실한 엉덩이와, 달덩이 같은 둔부를 받치는 반듯하고 미끈한 허벅지. 그리고 둔부 깊숙한 곳에 알맞게 돋은 도톰한 계곡과, 찰싹 달라붙은 살갗의 금에 방울 진 투명한 이슬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이어서 항문에 칼자루부터 틀어박힌 검을 확인한 순간에는, 반대로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왜 검이 저기에…?
‘아, 꿈인가?’
그 순간 지금 이 상황이 아까 리리스 이후 꿈의 연장선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드 드림을 꾸다 보면 가끔씩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 그래. 나는 확신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내가 아는 지옥 대공이라면 이렇게 비참한 상황까지 오도록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도 똑같은 알몸인 상태였는데, 그냥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니까.
꿈이라고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여유를 되찾고서 태연히 지옥 대공의 엎드린 자세를 감상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솟구친 심한 갈등에 몸부림쳤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떨어지는 매끈한 등도, 탄탄한 허벅지도, 탄력적인 엉덩이도. 진정으로 모든 게 완벽했다.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어느 곳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잠깐만. 어차피 꿈이잖아?’
그때 어지러운 마음속으로 어두운 욕망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말 그대로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면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돌연 여러 기억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겁화의 태양 속에서 느껴야 했던 고통과 나를 갖고 놀던 지옥 대공의 모습까지. 하나하나 음미해보니 주구장창 당한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분한 마음이 솟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가 우선 불쑥 내밀어진 엉덩이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살살 문지르듯이 쓰다듬자 당장에라도 녹아 내릴 것만 같은 뜨거운 감촉이 전해졌다. 아, 부드러워.
“어이, 지옥 대공.”
엉덩이를 희롱하면서 말을 걸었으나 지옥 대공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했던 마지막 확인 절차도 끝났다. 나는 만족한 기분으로 머리를 끄덕인 후, 엉덩이를 주무르던 오른손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그동안 눌러 담은 울분을 터뜨리며 힘차게 손을 내려찍었다.
짝!
차진 소리에 지옥 대공의 엉덩이가 크게 들썩였다. 둔부가 살이 좀 있는지 미약한 파문이 출렁이며 물결을 이룬다. 이내 손바닥에 전해지는 살결의 감촉은, 무언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을 가져다 주었다. 아주 손에 착착 감겨오는 게 감동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니, 아니야.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싸움을 잘하면 잘했지, 뭐가 그렇게 건방진데?”
찰싹!
“그래! 나 오해했다! 그런데 애초 네가 잘못한 것도 있는 거잖아?”
철썩!
“그리고 말이야. 뭐, 한 번 대주면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게 네가 할 말이야? 내가 무슨 정액 창고냐고! 그러고 보니 눈빛이나 말투도 건방져서는 말이야! 부끄러워하면서, 마지못한 척 공손하게 부탁해도 모자를 판에!”
찰싸닥!
“와. 이거 봐 이거 봐. 엉덩이 몇 번 쳤다고 거기서 물 뚝뚝 흘리는 꼬락서니 하고는. 솔직히 말해봐. 왕은 그냥 핑계지? 그냥 한 번 하고 싶었던 거지? 지금껏 몇 명이랑 한 거야? 이 음란녀!”
철써덕!
리리스의 꿈을 먼저 겪어서 그런가? 사실 개소리에 불과한 말들이었으나 지금 따라 술술 나온다.
나는 그야말로 지옥 대공의 엉덩이를 단죄하는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냥 나오는 대로 지껄이며 온 힘을 다해 있는 힘껏 엉덩이를 후려친다. 강하게 칠수록 이리저리 흔들리는 살결이나 뜨거운 감각에 중독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보송보송하던 새하얀 엉덩이가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라 씩씩 화를 내고 있었다. 이따금 간헐적으로 움츠러드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서 잘했다고 씩씩거려? 움찔거리지 마!”
그러자 거짓말처럼 엉덩이가 움찔거리는 동작을 멈췄다.
문득 아직도 항문에 꽂힌 은은한 빛을 흘리는 빅토리아의 영광이 눈에 밟혔다. 무언가 거슬린다는 생각에 칼날을 조심스럽게 잡은 후, 그대로 빼려는…. 아니, 잠깐만.
‘빅토리아의 영광?’
퍼뜩 시선을 들었다. 정말로 빅토리아의 영광이다.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빅토리아의 영광이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쪽 귓불을 만졌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만져지던 귀걸이가….
‘없어?’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 순간이었다.
“핑계는…. 아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서글픈 음성이 조용히 귓가로 흘러들었다. 거의 동시에 삽시간에 정신이 멍해지며 몸이 잔뜩 굳는 느낌이 엄습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그래도….”
한순간 나는 아무런 생각도 못했다. 그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옮길 뿐.
그곳에는.
“나도…. 처음이라는 말이다….”
무에 그리 슬픈지.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간신히 고개만 돌려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이는 지옥 대공이 있었다.
‘…….’
…어?